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ACT! 53호 특집] 촛불이 밝혀진 틈으로 우리가 보아야 할 것들

이전호(78호 이전) 아카이브/특집

by acteditor 2016. 8. 10. 14:37

본문

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53호 / 2008년 7월 30일

 

 

촛불이 밝혀진 틈으로 우리가 보아야 할 것들 



ACT! 편집위원회
 
1.


사람들은 행동하고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청계천 광장에서는 십대들이 나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고 노래하며 춤을 추었다. 그들을 따라 사람들도 하나, 둘씩 광화문으로 촛불을 들고 모여들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그럼에도 여전히 침묵하는 정부에 반하여 사람들은 자연스레 거리로 나갔다. 유모차도 거리에 나왔으며 노인도, 어린아이도, 그리고 학생들도 그곳에 있었다. 그들이 딛고 있던 바닥에는 낙서가 가득하게 됐다. 전, 의경이 막아섰지만 그런 공권력을 우회하여 거리를 돌아다녔다. 누군가들은 견고하게 움직이지 않던 경찰버스와 명박산성에 스티커를 붙였다. 그리고 쏘아대던 물대포를 향하여 ‘세탁비'를 외쳤다. 또 다른 누군가들은 휴대폰과 카메라와 캠코더와 노트북을 들고 거리의 모습을 중계하고 송신하기도 하였다. 그러면 거리에 있지 못하는 사람들은 거리로부터의 신호를 수신하며 온라인에서 밤을 새운다. 사람들은 그 모든 순간, 그 모든 거리와 온라인에서, 촛불을 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유롭게.




2.


가장 먼저 십대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왔다. 좋은 학생이 되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그들이 거리의 시민으로 나오게 된 것은 간단한 이유에서 출발했다. 그들에게 미국산 쇠고기의 문제는 일상의 위협이었고 일련의 교육정책은 심화된 경쟁 체제로서 현재의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위협과 고통은 십대들만 느낀 건 아니었다. 십대가 시작이었으나 십대의 행동은 다양한 대중에게로 ‘감응의 전염'으로 나타났다. 미친 소와 미친 교육이라는 생활의 위협에 대한 저항은 대운하와 의료민영화와 물 민영화에 대한 저항으로도 이어졌고, 시간이 갈수록 그러한 저항에 함께 하는 촛불의 수는 늘어나기 시작했다.


잠시 다른 이야기. 마트로시카(Matryoshka)라고 부르는 목제 러시아 인형이 있다. 오뚝이 모양의 나무로 된 크고 작은 인형들이 하나의 인형 속에 포개져 있는 모습을 갖고 있다. 하나의 인형을 열면 또 하나가, 다시 그 인형을 열면 또 다른 하나가, 이렇게 연속적으로 같은 모습의 인형들이 하나의 인형 안에 들어있는 것이다. (참고로, 메드베대프 러시아 대통령 취임식 전야에 등장한 마트로시카는 메드베데프 대통령의 얼굴이 그려진 뚜껑을 열면 푸틴 전 대통령이자 총리의 얼굴이 나오는 인형이었다고 한다.)


캠프 데이비드에서 부시 미 대통령과 맺고 온 소고기 협상은 하나의 마트로시카 인형이었다. 0교시 부활, 우열반 편성 등의 공교육 축소와 대운하 등 일련의 MB노믹스 정책도 소고기 수입과 닮아 있는 크고 작은 마트로시카 인형들이었다. 소고기 수입이라는 거대한 마트로시카 하나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다. 이전부터 있었으며 자기 자신을 복제하듯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마트로시카 중 하나가 소고기 수입일 뿐이다. 다만 소고기 문제는 촛불을 시작하게 되는 어떠한 임계점에 일찍 도달하게 만든 것이다. 그 임계점에서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들었고 거리로 나가게 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의 기저에는 신자유주의적 가치와 그것으로 붕괴되는 생활에 대한 저항이 숨어있음을 아는 건 어렵지 않다. 미국산 소고기 수입이라는 마트로시카를 계속 열다 보면 결국 그 안쪽 깊숙한 곳에서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얼굴과도 마주하게 된다. 소고기 수입은 결국 신자유주의가 어떤 식으로 개인의 신체를 착취하고 지역생활권을 침해하는가, 하는 문제로 연결된다. 공교육 붕괴와 물 민영화, 의료 민영화 등 신자유주의의 또 다른 얼굴들도 우리의 건강과 생명과 일상을 위협한다는 점에서 비슷한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현재 촛불의 상황이 정부와 국가권력을 상대로 하고 있긴 하지만 실상은 그 배후에 있는 자본(주의적 질서)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드러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전까지의 시민불복종, 직접행동의 의제가 형식적 민주주의의 구축, 즉 민주주의의 제도화에 대한 요구 및 투쟁이었다면, 지금의 상황은 그런 민주주의 제도가 갖춰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하지 못하는 민주주의의 요구들에 대한 문제제기일 것이다. 시민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다양한 정치적 장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시민들의 뜻을 수렴하지 못했고, 반영하지도 않았다. 형식적으로만 열려 있을 뿐, 실제적으로는 닫혀 있는 사회의 의사결정구조는 여의도와 청와대의 무능과 무력을 드러냈을 뿐이다. 마트로시카 인형들이 튀어나오듯 비슷한 얼굴을 지닌 일련의 신자유주의적 흐름 속에서, 하지만 의사결정구조가 상실된 현실에서, 이전과는 달리 사람들은 이제 경제/계급적 의제를 전면적인 정치의제로 삼고 저항하기 시작했다.




3.
거리에 나온 사람들은 민주주의적 절차에 따라 선택된 대통령이 취임한지 100일이 채 되지 않았음에도 청와대를 향해 'OUT'을 외쳤다. 촛불집회 중간에는 대통령의 지지율이 10%대까지 떨어졌다. 사람들은 ‘대의(代議)' 민주주의라는 것에 더 이상 많은 신뢰를 갖지 않게 된 것이다. 대신 스스로의 권리를 찾기 위해 직접적인 반응을 보이기로 하였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컨테이너 앞에서,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리'하여 표현할 수 없는 자신들의 욕망을 직접 커뮤니케이션하기 시작한 것이다.


[아고라가 묻다, 뭥미?]에서 진보넷의 홍지가 지적한 것처럼, 여의도와 청와대를 통해 결코 ‘대리만족'할 수 없다고 반응하는 지금, 사람들은 미디어에 대해서도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사실(fact)을 각각의 프레임을 통해 ‘전달'하고 유통하는 주류미디어와 각각의 언론들은 의심 받고 있다. 거리의 사람들은 조선일보사와 동아일보 건물 앞에서 ‘조중동 OUT'을 외쳤고, 거리의 민심으로부터 주류미디어가 밀려난 그 자리에는 아고라가 들어섰다. 대의민주주의의 모순된 현실에 반(反)하여 거리의 직접행동을 하였듯, 사람들은 대의적 미디어의 한계를 벗어나 아고라와 개인미디어 생중계 등을 미디어 직접행동의 공간으로 삼은 것이다. 처음에는 MBC PD수첩이 동력이 되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PD의 눈으로 본 아고라, 촛불시위, 그리고 시사프로그램] 간담회 원고에서 PD들 스스로 고백하는 것처럼, 주류미디어를 비롯한 대부분의 대의적 미디어는 촛불의 모습을 쫓아가는 것에도 바빴다. 반대로 아고라와 1인 미디어 생중계가 활성화된 촛불의 모습은 그러한 대의적 미디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무언가를 보여주었다. 동시에 그것은 미디어 직접행동으로서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 직접민주주의가 어떤 모습으로 발현될 수 있는가에 대한 하나의 예를 남겼다.


다른 측면에서 아고라와 1인 미디어 생중계를 볼 수 있다. 말했듯, 이번 촛불의 모습에서는 적극적으로 미디어를 활용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예전의 직접행동은 거리의 현장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이제는 인터넷과 IT의 활용을 통해 거리의 직접행동과 미디어가 결합하면서 커다란 파급력을 갖게 되었다. 재밌는 것은 [다음]이라는 포털 상업 자본이 모순적으로 [아고라]라는 컨텐츠를 품을 수밖에 없었던 것과 비슷하게, 미디어를 활용한 직접행동에도 신자유주의의 자기모순이 숨어 있다는 점이다. 인터넷을 비롯한 통신자본들이 정부의 육성책에 힘입어 자신의 이윤추구를 위해 전국에 열심히 깔았던 초고속 인터넷망, 사진/동영상과 MMS 기능이 결합된 휴대폰의 보급, 와이브로 등 무선인터넷 서비스, 상업 사이트를 통한 인터넷 생중계와 미니홈피, 블로그 서비스의 보급 등이 그렇다. 이렇게 기술발전, 신자유주의의 자기모순과 함께 사람들은 자신들의 표현 욕구에 따라 정치적 목적에 미디어를 활용하였고 그런 점에서 이번의 촛불은 직접행동의 영역이 거리를 넘어 미디어로 새롭게 확장되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드러나는 양태가 재기발랄하여 축제라고 말할 수 있다 하여도 촛불이 일어나게 된 원인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과 대운하 개발과 물, 의료 민영화 등으로 생명과 건강에 대한 위협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근원적인 ‘슬픔'이자 ‘비극'이다. 하지만 폭력과 비폭력으로 양분하는 담론은 기본적으로 폭력에 대한 반대를 갖고 있되, 왜 폭력이 일어나는가, 무엇이 사람들로 하여 분노하게 하는가, 왜 사람들은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등의 물음에는 취약하기 쉽다. [저항의 중계]에서 던지는 손장훈의 질문들은 이러한 점에서 생각해 볼 여지들을 남긴다.


그런가하면 우리 모두 공통적으로 볼 수 있었듯 70일이 지나는 동안 촛불의 모습에서, ‘낡았던' 집회가 ‘낯설게' 드러났다. 오래된 집회의 모습을 촛불의 무엇이 새롭게, 혹은 낯설게 만들었을까. [이제, 다음 슬로건을 던질 때이다]에서 김완은, 오래된 것을 새롭고 낯선 것으로 만들면서 생동하게 만들었던 힘에는 분명 ‘배후'를 인정하지 않는 ‘(집회)문화의 민주화'가 있었다고 말한다. 지금의 촛불은 문법의 전환을 통해 새로운 감성으로 이야기하고, 운동의 실질적 민주화까지 요구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김완은 이를 통해 대안미디어운동이 고민해야 할 ‘오래된 새로운' 운동의 논쟁지점을 다시 한 번 던지고 있다.




4.


아직도 촛불은 진행 중이고 그것의 진정한 함의는 현재 우리의 시야를 벗어나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촛불이 밝혀진 틈으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고 이후 미디어운동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스스로의 물음이 계속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 신자유주의의 전면화와 이에 대한 지속적인 대응과 투쟁이 진행될 때, 미디어운동은 무엇을 할 것인가.


먼저 지난 80일간 거리에 쏟아졌던 자발적 미디어의 위치를 파악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더 촉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를 생각해야 한다. 자문, 컨설팅, 기술지원등 그동안 축적했던 것을 지원하고 다양한 흐름을 만들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이번 촛불의 모습을 지나면서 이전의 주류미디어와 대안 미디어 사이의 구분을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시민들은 자발적인 미디어행동을 했던 것과 더불어 조중동 불매운동과 한겨레/ 경향 광고운동, KBS/ MBC 공영방송 지지 및 수호 등 주류미디어를 자신들의 싸움에 활용하고 있었다. 또한 주류미디어 내부에서도 이번 촛불집회에 대한 고민을 외화하기도 하였다. 또 다른 사회적 조건들이 만들어지면서 주류미디어의 재편에 따라 대안미디어 진영은 어떠한 네트워킹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밖에도 대중과 결합하는 네트워크를 실험하고 예상 시나리오를 그리면서 준비하는 것과, 소고기/교육 민영화/의료 민영화/물 민영화/미디어 민영화 등 촛불집회의 의제들을 계속해서 확대해 나가야 하는 등 촛불이 드러내고 남긴 과제들이 많다.


이제 촛불의 수는 많이 줄었다. 지난 주말의 촛불집회에서 40여명이 연행되고 비슷한 수의 사람들이 다쳤는데도 이제 언론에서는 별다른 말이 없이 새로운 이슈들을 전한다. 지금의 국면이 새로운 민주주의의 모델로서 지속가능하기 위한 우리의 실천은 무엇일까. 촛불의 수가 줄었음에도 동일한 고민과 질문을 여전히 계속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우리의 몫이다. □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