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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59호 읽을거리] 『지역예술운동-미국의 공동체 중심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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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6. 8. 9.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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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59호 / 2009년 3월 17일

 

 

『지역예술운동-미국의 공동체 중심 퍼포먼스』
- 공동체 예술 속에서 민주적 소통에 대한 성찰을 얻다



수수(마포FM 비혼 페미니스트 라디오 방송 야성의 꽃다방)
 


영상을 제작하든, 라디오를 녹음하든, 대부분의 미디어를 제작하는 모임이나 조직 중에는 수직적인 위계를 가진 곳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죠. 제가 방송을 하고 있는 마포fm의 경우 CP가 있고, 그 아래 PD가 있고, 또 그 아래 스텝이 있고, 그리고 그 아래 관리를 받는 자원 활동가가 있습니다. 이런 수직 체계는, 하는 일에 따라 기능적으로 나누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체계로 생각됩니다. 또, 이런 체계들이 방송의 안정성과 책임선을 명확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실제 운영에서는 이런 직급을 둔 수직적인 조직 체계는 위에서 아래로 명령하는 식의 소통 흐름을 만들고, 가장 마지막에 ‘명령? 혹은 소식'을 듣는 사람들은 정보 접근에 시간적 지연에 생겨 결과적으로는 평등하지 못한 접근권을 가지게 됩니다. 또, 윗사람이라고 생각되는 국장이나 CP들의 의견에 문제제기를 하려고 해도, 직접 그 사람들의 답을 듣지 못하고 대리자들을 통해 이야기를 하게 되니 - 이럴 때 책임자들이 모호해지는 경향이 생기곤 하지요, 예를 들어 갑자기 국장의 의견을 잘못 전했다고 간주되는 자원 활동가가 사라졌다던가 하는 - 책임자가 오히려 명확하지도 않아지기도 합니다.


이렇듯 미디어를 제작하거나 아니면 미디어 관련 운동 조직체들/모임들의 수직적 소통체계들은, 그 곳을 운영하는 사람들을 소외하기 쉽습니다. 효율 운운하며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제도 안 조직이라면 그러려니 포기라도 하겠지만, 소수자 미디어 접근권을 고민하는 공동체 미디어 운동모임 같은 경우는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위계와 그로 인한 일방적인 소통 구조로 인해 소수자들이 접근이 어려워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원래 미디어 운동모임의 단체가 만들어진 취지를 무색하게 하는 것이니 안타까울 수밖에요.


그렇지만 현실에서 이런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난감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턱없이 자원이 부족한 지역에 근거지를 둔 미디어 단체나, 이제 막 공동체에 뿌리 내리기를 시작한 센터의 경우는, 더욱 어려움을 겪는 것 같습니다. 말이 좋지, 너무 이상적인 것 아닌가?


이에 대해 실천 가능한 경험의 예시를 보여 주는 책이 있으니, 바로 『지역예술운동』(LOCAL ACTS: Community-based Performance in the United States)입니다. 『지역예술운동』은 미국의 공동체 중심 퍼포먼스의 시작 배경부터 현재에 이르는 역사 뿐 아니라 공동체 중심 퍼포먼스의 원칙과 방법론, 비평과 평가 원리를 담고 있습니다. 잠시 책의 일부를 살펴보도록 하죠.


“공동체 중심의 예술은 예술가들이 사람들과 함께 하는 공동 작업으로, 참가한 사람들의 삶이 직접적으로 주제가 되고 집단적인 의미를 표시하게 되는 예술의 영역이다.”


“공동체 중심 퍼포먼스에서 볼 수 있는 군중 시위, 노조 건물에서의 희극 공연, 스토리텔링모임, 제의, 무용, 음악 연주, 연극 등은 모두 사람들이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의미를 만들어 내고 그 의미를 실행에 옮기기 위한 수단이자 방법이다”


위에서 알 수 있듯이 공동체 중심 퍼포먼스는, ‘공동작업'을 통해 ‘사람들의 삶이 직접적으로 주제가 되고 집단적인 의미를 표시하는' 재현이고, 이는 당연히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의 미디어 접근권과 삶을 말하고 재현할 권리를 옹호하는 모든 사람에게 유효한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이 책은, 공동이 주체가 되는 작업을 강조하면서, 천재적 개인의 성취라는 예술의 정의에 도전하기도 하는데, 이는 현재 미디어 제작에 있어 일인 ‘감독' 체계, 혹은 막강한 권력을 지닌 ‘프로듀서' 중심의 기획/제작 구조에 대해서도 고민을 던져 줍니다. 예술을 고급화하여 제도에 안착시키고, 대중들은 다다를 수 없는 권위를 주는 것은, 예술을 포함한 문화 재현에 사람들 특히 소수자의 접근권을 차단하는 효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고려하여 탄생한 ‘집단적 천재'의 개념과 ‘정착하여 사는 예술가' 개념은 개인과 공동체가 대립하지 않고 예술을 통해 매개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술가는 사회에서 소외된 예민한 존재라기보다, 한 장소에 정착하여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작업하기로 결심한 사람이며, 함께 사는 사람들과 정착한 장소에서 예술적인 자양분을 얻는다. 그런 다음 예술가는 가장 접근하기 쉬운 방법으로 자신의 예술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방법으로는 저렴한 입장료, 찾기 쉬운 장소, 환대하는 분위기 등을 꼽을 수 있다”


공동체 중심 예술을 관통하는 호혜의 원칙은 비단 개인과 집단 속에서만 유요하지 않습니다. 공동체 중심 예술에서 상정하는 공동체는 균질하지 않으며, 오히려 복잡하고 다양한 차이들의 지닌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공동체 중심 예술의 기획은 이를 ‘통제해야 하는 변수나 제거해야 하는 방해물로 인지하기는커녕 오히려 기획 안에서 적극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공동체 중심 예술의 정치적 목표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한 공동체의 다양한 측면에 대해 서로의 관심을 교차시키고,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이 논쟁을 벌이면서 그 문제에 대한 다양한 관점, 때로는 서로 대립적인 관점을 이끌어 내 주는 예술 프로젝트들”


“즉 <우리는 게이, 여성, 푸에르토리코인이다, 등. 그러니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달라>와 같은 주장이 성립된다. 그러나 정체성 정치의 궁극적인 목적은 특정 정체성의 필요성을 넘어서는 데 있다.”


“오랫동안 공동체 중심 퍼포먼스는 통일된 균질의 공동체에 관한 것이기 보다, 여러 다양한 참가자가 공동의 관심사를 함께 탐구하는 것이다. 타협의 여지가 있는 차이가 그러한 퍼포먼스에서 주요한 실천적 요소가 되어 왔다는 것은...”


소수자들이 정체성 정치의 함정에 빠지지 않고 예술의 영역, 혹은 미디어를 매개로한 소통의 영역에서 ‘타협의 여지가 있는 차이'들을 가지고 공동체의 공동의 관심사를 탐구하는 것, 이것이야 말로 소통을 통한 연대가 가능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런 연대가 가능하도록 기획에서 요구되는 몇 가지 원칙들은, 놀랍게도 아방가르드 예술 전통, 여성주의, 문화인류학 등 다양한 학문과 실천 영역에서 불러온 것들입니다. 집단의 문맥, 상호성, 하이픈 연결, 창작의 과정, 그리고 행동하는 문화 등의 원칙은 사회의 주변부와 중심부를 넘나드는 예술적 공간을 창출하기 위한 방법으로 고급과 저급, 혹은 생산과 소비라는 이분법적 시스템 속에 미디어 운동을 하고 있는 나와 주변의 활동가들에게 큰 시사점을 줍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공공 재현의 기획의 실천에서 중요한 원칙들이 이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런 원칙들이 지켜졌을 때 다양성과 포괄성이 보장되는 공동체 예술의 기획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실천을 통해 알려준다는 점입니다.


이쯤에서 미디어 운동이 ‘이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왜 불가능한가에 대해 되짚어 보게 됩니다. 일상을 점령하고 있는 윤리들과 일의 틀거리들 - 효율과 합리, 기획과 통제, 조망과 관리 등 - 은 그대로 인데, 민주적이고 평등한 소통이 가능할 수 있을까요?


‘소통'의 기획자로 미디어를 고민하는 모든 이들에게 <지역예술운동>은 소중한 성찰의 기회를 줍니다. 조망자와 조직자로써, 코어(중심)에서 소통을 책임지는 자가 아니라, 나 자신 또한 차이가 있는 타자로써, 다양성을 가진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동등하게 소통의 권리를 나누어 가지는 위치에 서는 것에서부터, 공동체와 함께 만들어가는 미디어 운동의 첫 발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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