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73호 / 2011년 3월 31일
농부 K씨가 행복해지는 그 날까지, "종로의 기적" 이혁상 감독 (part. 1) |
인터뷰 진행 및 정리: 스이(ACT!편집위원회) |
국회 날치기와 종편 선정으로 뒤숭숭하던 2010년 말, 행복한 독립영화가 등장했다. 네 명의 게이가 스스로의 삶을 드러내면서 '자신을 긍정하고 타인을 이해하는 용기를 불어넣어 준' "종로의 기적"이 그것이다. 영화감독(소준문), 인권활동가(동성애자인권연대 장병권), 요리사(김영수), 사무직 노동자(정욜)의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이야기는 (4년 째 계속되는) 차별과 억압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종로의 기적"을 연출한 이혁상 감독은 운동과 영화의 접점으로 독립 다큐멘터리를 선택하면서 비가시적 존재로 살아온 자신과 네 명의 주인공들을 가시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요새는 집 청소를 하고 지낸다는 근황 소개로 시작한 이혁상 감독과의 인터뷰는 망원역 근처 S 카페(스타벅스는 아닙니다)에서 장장 두 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 다음은 인터뷰이가 직접 커피를 사주며 응해주었던 ACT 사상 초유의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스이: 안녕하세요, 이혁상 감독님. 오늘 인터뷰에 선뜻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혁상 감독(이하 이): 감사합니다. 제가 영광입니다. (웃음)
스이: 우선 2010년 올해의 독립영화로 선정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이: 저 뿐만 아니라 (2010년 올해의 독립영화인으로 선정된) 미디액트 운영진들도 축하를 받으셔야죠. 함께 뽑히게 되어 영광입니다. (웃음) 저희도 미디액트에 장비 대여, 카운셀링 등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스이: 선정의 이유로, 한국독립영화협회 측은 "소수문화운동, 소수정치운동, 반차별운동과 독립영화운동이 만난 행복한 영화"라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간단한 소감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 저희가 "종로의 기적"을 기획한 당시의 의도와 목적을 잘 이해해 주신 것 같아요.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독립영화계에서 성소수자를 드디어 끌어안아주시는구나', 하는 느낌이랄까요? (웃음) 연분홍치마가 성소수자 관련 다큐를 제작해오면서 독립영화계와 교류는 있어왔지만 같이 간다는 느낌은 별로 없었거든요. 그런데 이번 선정으로 독립영화와 성소수자 영화를 이제 함께 고민할 수 있게 된 좋은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에게는 의미가 깊은 일이지요. 뿐만 아니라 활동을 펼쳐나가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신 것 같아서 저희로서는 영광입니다.
사실 그 동안 독립영화계 분들과의 접점이 많지 않았어요. 연분홍 치마의 위치 자체가 애매했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성소수자 커뮤니티 내부에서는 미디어운동보다 주로 인권 운동에 집중하는 단체가 많았기 때문에 문화운동을 표방하는 연분홍치마가 왠지 다른 활동을 하는 느낌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반면 독립영화계에서는 연분홍치마가 애초에 영화를 표방했다기보다 성소수자 관련 활동을 하던 중에 잘할 수 있는 운동으로 다큐를 선택하게 된 것이었거든요. 이렇게 독립영화계와는 다른 과정으로 시작하다보니 애초부터 연결 지점이 없었죠. 이렇게 두 커뮤니티 사이의 경계지대에 놓여 있다보니 어느 한 쪽으로도 쉽게 다가가기 힘들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이런 문제의식이 단체 내부에서 있어왔기 때문에 요즘에는 연대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어요.
스이: 현 정부 들어 성소수자에 대한 정치적 억압이 더욱 심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문화적으로는 성소수자를 다루는 드라마, 영화 등이 예전보다 많이 등장하고 있는데요, 감독님이 2008년 "종로의 기적"의 촬영을 시작하신 것도 이런 정치적, 문화적 배경이 반영된 것인가요.
이: "종로의 기적"은 사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와 공동기획한 작품입니다. 2008년 당시 '친구사이'는 커밍아웃 사업을 진행하고 있었는데요, 그 중 하나가 커밍아웃 인터뷰 프로젝트('친구사이'홈페이지에 가면 볼 수 있다)였어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던 중에 활자화된 커밍아웃 뿐 아니라 영상을 통해서도 만들어지면 좋겠다는 친구사이 내부 논의가 있었고, 전담할 활동가를 찾던 차에 연분홍치마에 넌지시 제안해주신 것이죠.
그 때 연분홍치마 내부에서도 커밍아웃 3부작 다큐 중 (트랜스젠더를 다룬) "3xFTM"과 (레즈비언을 다룬)"레즈비언 정치 도전기"를 제작한 이후였기 때문에 다음 프로젝트는 "게이"가 되어야 한다는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희 활동가들은 순차적으로 연출 데뷔를 하고 있었는데 당시 제 차례가 되었어요. 사실 그 때 저는 종로, 이태원 등 게이 커뮤니티의 역사에 대한 다큐를 추진하던 중이었는데, 역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면 많은 사전 조사가 필요하더라구요. 데뷔작으로 역사 다큐를 찍는 게 부담이 되기도 했구요. 그 때 친구사이의 그런 제안을 받고 동시대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2008년 초부터 이야기가 되었고 본격적인 촬영은 2008년 퀴어문화축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친구사이의 커밍아웃 프로젝트와 연분홍치마가 기획하고 있던 커밍아웃 3부작의 상황이 잘 맞았던 것이죠.
당시 케이블 채널이었던 tvN에서 "커밍아웃"이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방영하고 있었는데, 홍석천 씨가 진행을 맡았고 많은 게이들이 나와서 커밍아웃을 하는 프로그램이었어요. 그렇지만 공공미디어에서 성소수자를 등장시킬 때 주류적 가치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성소수자의 시선을 담아내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죠. "커밍아웃" 역시 진행자가 홍석천 씨였고 많은 스탭들이 성소수자에 우호적이었지만 저희가 보기에는 부족함이 있었어요. 그래서 성소수자가 만드는 성소수자 이야기, 게이가 만드는 게이 다큐멘터리가 필요하다는 합의가 친구사이와 연분홍치마 사이에서 이루어졌죠.
스이: "종로의 기적" 제작을 결정하셨을 때, 감독님도 커밍아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있으셨나요?
이: (웃음) "종로의 기적"은 커밍아웃 다큐멘터리였기 때문에 당연히 연출자인 나도 커밍아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고민이 많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커밍아웃을 많이 해왔지만 연출자의 입장에서 이렇게 대 사회적으로 커밍아웃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느낌이 있잖아요. 이런 고민은 작품의 형식에도 영향을 미치게 돼서 연출의 객관적 거리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졌어요. 관찰자적 시선을 유지해야할 지 아니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할 지, 나를 드러낸다면 내 정체성까지 드러내야 하는지 등 굉장히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거든요. 결국 형식에 대한 고민은 커밍아웃에 대한 고민이기도 했죠.
물론 '(커밍아웃을) 해야 한다'는 답은 알고 있었지만 커밍아웃 다큐를 제작한다는 상황에 밀려 커밍아웃을 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정체성을 깨달은 이후부터는 영화를 만들게 되면 그 영화를 통해서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해왔지만, 정체성과 무관한 영화를 몇 편 만들고 좋은 평가를 받아서 임권택 감독이나 박찬욱 감독 정도의 반열에 오른 후에 존경을 받으면서 커밍아웃을 해야겠다, 는 정도의 막연한 생각이었던 거죠. (웃음) 그런데 갑자기 시기가 앞당겨져서 데뷔작부터 커밍아웃을 하게 되는 상황이 온 겁니다. 그렇지만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였고, 다만 이런 기회를 스스로 받아들이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사실 창작자의 입장에서 대사회적 커밍아웃을 하는 것은 작품 활동에 스스로 제한을 두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두려움도 적지 않았으니까요. 그렇지만 결론적으로 (작품을 통한 커밍아웃은) 원해왔던 일이었고, 작품의 의미를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추진하게 되었습니다. 정말 단순화하면... 주인공 네 명이 (커밍아웃을) 다 하는데 연출자가 안 할 수 없잖아요. (웃음) 제가 소위 '커밍아웃 시킨' 주인공들에 대한 연출자로서의 책임감이 컸기 때문에 사실 최종 편집하기 전까지도 고민이 많았어요. 결국 작품을 통해 나 역시 커밍아웃을 하고 주인공들과 함께 커뮤니티 안에 살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 작품 전체를 살린다는 생각으로 커밍아웃을 하게 되었죠.
스이: "종로의 기적"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윤리적 갈등이 없지 않았을 것 같은데, 다큐에 등장한 성소수자들을 결과적으로 커밍아웃 '시킨다'는 점에서 말이죠. 이러한 갈등 지점은 어떻게 극복하셨나요.
이: 사실 그래서 제 자신을 드러내게 되었던 것 같아요. (웃음) 주인공을 섭외하는 과정에서도 이런 문제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했고 동의를 받았어요. 주인공들의 대부분이 열심히 활동하는 친구들이었고 커밍아웃에 대한 의지가 있기도 했거든요. 그래서 잘 찍을 수 있었는데 저도 그 친구들도 결과적으로 이렇게 일이 커질 줄 몰랐어요. (웃음) 아직까지 큰 사건은 없었지만, 주인공들은 이 다큐가 가질 사회적 효과에 대한 궁금증, 혹은 약간의 두려움을 갖고 있는 것 같아요. 저도 마찬가지구요. 그러면 안 되겠지만, 보수 집단의 혐오 범죄 등에 대한 우려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에요.
다큐를 찍는 과정에서도 계속 고민했던 것은, 다큐를 만드는 과정에서 주인공들의 삶이 변화할 수 있다는 점이었어요. 그래서 그 지점에 함께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인공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있다면 평생 동안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주인공들에게 '만일 이 다큐 때문에 네 삶에 큰 사건이 생기면 그 이야기를 또 영화로 찍겠다'는 말을 종종 했구요. 사실 이 다큐는 활동의 연장선상에서 기획되고 제작되었기 때문에 이 다큐가 마무리 되었다고 해서 끝은 아닌 것이죠. 이 다큐 이후에도 주인공과 교류하고 그들의 삶의 변화를 목격하고 미디어와 관련된 고민을 하는 것은 계속될 거에요.
사실 "종로의 기적"은 주인공들의 과거라기 보다는 앞으로 남은 인생의 시작 부분이라고 봐요. 그래서 이들을 이렇게 그려도 되는 것인지 윤리적인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었죠. 예를 들어, 준문(소준문 감독)의 경우 남성 중심적 영화 제작 시스템에 대한 그의 고민을 군대에서의 트라우마와 연결시켰는데, 이런 스토리텔링은 저의 해석에 기반한 것이죠. 병권(동성애자인권연대 장병권 활동가)이나 욜(정욜)의 경우에도 역시 이들의 이야기를 최대한 선정적이지 않게, 이들이 활동해온 배경을 최대한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담아내야 할 책임이 있었구요. 특히 영수 씨의 경우 '죽음'까지 다루게 되니까 지나친 선정주의에 대한 고민을 더욱 하지 않을 수 없었죠. 그래서 편집과정이 더 힘들었던 것 같아요. 두 시간 동안 네 명의 삶을 다루면서 선택과 집중이 불가피했는데 이 과정에서 누락되는 삶의 부분에 대한 미안함 혹은 윤리적인 갈등을 갖게 되었거든요. 다큐멘터리의 완결성 있는 서사를 만드는 과정에서 배제되는 삶의 모습이나 그들이 치열하게 활동해왔던 성소수자 이슈가 어느 정도 연성화되는 부분이 필시 생겼을 테니까요.
그렇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큐로 더 이상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것 같아요. 사실 주인공들의 삶을 최대한 온전하게 노력했고, 현재로서는 이 버전이 최선이에요. 남은 문제에 대해서는 몸으로 뛰어야죠! (웃음) 사실 이 다큐가 활동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이고, 앞으로의 활동에 있어서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주인공들과의 관계는 별다른 일이 없는 한 평생 지속될 거구요. 성소수자들의 경우 가족이 아닌 다른 공동체가 점점 중요해지기 때문에 다큐가 아니었더라도 주변 친구들은 계속 접하게 되겠지만, 주인공들과의 각별한 관계는 평생 유지될 것이라고 봐요. 평생 같이 활동하면서 "종로의 기적"으로 빚진 부분을 계속 갚아나가게 되겠죠. 이렇게 하는 것이 다큐를 만들면서 제가 지녔던 윤리적 고민을 풀어나가는 길이라고 봅니다.
스이: 활동하고 계시는 연분홍치마에 대한 간단한 소개를 해 주세요. 어떻게 참여하게 되었는지, 이 곳에서의 활동을 통해 기대하는 변화가 있다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언급도 함께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이: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가 만들어진 것은 2004년도였지만, 2003년도부터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어요. 초기 형태는 제가 당시 영화이론을 전공하고 있던 대학원 내부에서 섹슈얼리티, 페미니즘 등의 주제를 함께 공부했던 세미나 팀이었습니다. 학내 소모임이라기 보다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형식이었는데, 점차 이론 공부에 그치지 말고 활동을 해보자는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죠. 이렇게 실천에 대한 고민을 1-2년 정도 거친 후 정식으로 발족하게 되었습니다.
2004년 첫 프로젝트는 성매매여성 실태조사에 공동으로 참여한 것이었는데, 실태조사를 하던 중에 단순한 보고서 작성을 넘어 다큐를 제작하는 게 어떨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연분홍 치마 활동가의 반 정도가 영화를 같이 공부하던 사람들이었거든요. 실천적인 활동과 영화가 가장 잘 만나는 지점이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이기도 했구요. 이렇게 성매매여성들의 현실을 단지 설문조사나 보고서가 아닌 영상으로 담아내려는 기획으로 제작된 작품이 "마마상"(2005)이었어요. 송탄 미군기지촌 성매매여성들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였는데, 이 때 연분홍 치마가 처음으로 영상이라는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고민하게 된 시점이었습니다.
이후 2008년 제작한 "3xFTM" 역시 민주노동당을 중심으로 다양한 단체가 결합해서 추진했던 성전환자 실태조사를 기반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을 제도화하고 그들의 생존권 및 인권에 대한 문제제기를 위한 실태조사였는데, 이 과정에 연분홍치마가 결합하게 되었어요. 여기서도 성전환자들에 대한 보고서보다는 다큐멘터리를 만들면 다양한 공간에서 보다 많은 사람들과 그들의 상황을 알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실태조사 과정에서 만났던 세 명의 주인공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마마상"은 정말 별다른 준비도 없이 밑바닥부터 시작한 영화였기 때문에 시행착오를 많이 겪었어요. 연분홍 치마 내부에서도 미디어를 다루는 것에 대한 이견이 있었기 때문에 활동 방향과 조직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었구요. "3xFTM"을 제작하는 과정에서는 이런 논의들이어느 정도 정리되었기 때문에, 영상에 대한 고민들을 실질적으로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을 기반으로 2009년에 "레즈비언정치도전기", 작년에 "종로의 기적"이 나오게 되었죠.
스이: 연분홍치마와 같은 영상 집단에 참여하지 않으셨더라도 이런 영상 활동을 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나요?
이: 사실 어렸을 때부터 영화 제작자를 꿈꾸었지만, 집안과 학교의 반대로 영화 전공을 하지 못했어요. 쉬리 이전의 세대라서 그랬는지도 모르죠. (웃음) 대학 입시를 준비했던 게 1993년이었는데 그 때 최대 흥행작이 서편제 정도였거든요. 졸업 후 다른 분야에서 사회활동을 하다가 2002년도부터 대학원에서 영화이론을 전공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 막연하게 극영화를 만들고 싶긴 했지만 다큐를 만들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어요. 당시가 제게는 질풍노도의 시기였는데 (웃음)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운동에 대한 생각과 화학반응을 일으키고 있었거든요. 그러는 동안 연분홍치마에 "자연스럽게" 들어오게 되었죠. 이후에도 다큐 제작을 계속하겠지만 "종로의 기적"을 만들고 나서는 다큐 활동가로서의 책임감, 부담감이 커져서 작품 활동을 언제 재개할 지는 지나봐야 알 것 같아요. 일단 개봉 준비에 집중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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