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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95호 리뷰] 우리 사회에서 여성노동이란 무엇인가? - 영화 <위로공단>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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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5. 10. 27.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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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95호 리뷰 2015.11.15]


위로공단 : 임흥순 감독이 그린 여성 노동

- 영화 <위로공단> 리뷰


박준도 (사회진보연대 사무처장)



 임흥순 감독의 『위로공단』은 우리가 알고 있던 ‘영화에 대한 통념’을 뒤흔든다. 극영화는 물론 기록영화도 아닐뿐더러, ‘영화’라는 장르 자체와 ‘설치 미술’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소설이라는 장르가 확립한 극적 구조를 해체하다 보면, ‘서사’가 없는 오락영화가 되거나 전위영화(이미지의 무의미한 연쇄)가 되기 일쑤 인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다. 여성노동의 역사를 바탕으로 한 탄탄한 이야기를 미술적 형식(사진미학)으로 가공해 우리에게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그림’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 사회에서 여성노동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의문을 갖게 한다.


 이 영화에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시대 구분과 직업별 구분을 동시에 가능하게 하는 10여개의 ‘무대’가 있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봉제공장에서부터 콜센터 사업장까지 다양한 형태로 꾸며진 그 무대들을 이 영화는 작가의 의도대로 관객들로 하여금 차례로 걷게 한다. 모든 무대에는 그 공간을 암시하는 ‘연극 행위’가 있고, 칸막이마다 그림과 사진, (일상적 시각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영상들이 걸려 있으며, 가운데 의자에는 그 공간을 설명해주는 여성노동자 ― ‘화자’(인터뷰이)가 있다. (공간을 이렇게 배치했기 때문에 여기서는 기록물 또한 작품을 구성하는 소재가 된다.) 그리고 두 명의 배우들이,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함께, 서로 이끌기도 하고 따라가며 업히기도 하면서 무대의 시공간을 이어나간다. 각각은 70년대, 80년대, 90년대, 2000년대를 상징하기도 하고, 또 각각은 봉제노동자(어머니), 전자산업노동자(자매), 서비스산업노동자(딸)을 상징하면서 극 전체를 이끌어나간다. 





 인터뷰이의 진술은 사실을 전달하기도 하지만, 감정이입의 매개자가 되기도 한다. 생생한 이야기일수록 관객을 몰입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1970년대 동일방직 사건을 “몹쓸 짓”이라며, 여공들의 순수한 얼굴을 회고하는 사진작가의 증언, 폐결핵에 걸려 결국 선술집 마담의 길을 선택한 1980년대 여성노동자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하는 동료의 증언, 반도체 공장에서 알 수 없는 화학약품을 사용해 결국 자신의 머리를 밀어야 했던 여성노동자의 증언, 투쟁하는 여성노동자의 삶을 선택했지만 주변의 무관심과 권력자의 조롱 속에서 자괴감을 토로할 수밖에 없었던 투사의 증언까지, 그리고 어머니에서부터 자신까지 서로가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감내하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오늘날 여성의 증언까지… 각각의 장면에서 순간 밀려드는 감정을 조금 더 몰아치면, 눈물을 짜낼 수 있었지만 감독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감정이 치우친다 싶으면 그는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그걸 차단시켰다. 상징적인 그림이나 영상, 배우들의 연출행위를 동원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아예 카메라 앵글을 다른 곳으로 고정시켜 시선을 강제로 돌리게 하기도 했다. 여성노동에 대한 동정적인 시선은 노동의 현실을 직시하고, 본질을 들여다보게 하는데 장애 요소가 되기 때문이다. 


 말과 이미지의 배열, 수많은 상징적 요소들과 다양한 미적 표현은 관객들에게 많은 것을 사고하게 한다. 매 장면마다 등장하는 상징적 요소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작품 전체를 끊임없이 재구성하게 하고, 그 의미에 대해 말(비평)을 하게끔 한다. 인터뷰이의 증언을 그대로 묘사한 수많은 미적 상징들, 잔혹함을 묘사(혹은 재현)한 직접적 비유(똥물 통, 가발, 형광등, 도살된 소, 손 동작, 움직이는 마네킹)과 여성노동자들의 상황을 암시하는 간접적 비유(개미, 거미, 눈, 꽃잎, 숲, 까마귀, 하늘, 석양)들이 어떻게 구성되느냐에 따라 관객들에게 전달되는 의미가 달라진다. 

 그렇게 해서 관객들로 하여금 멋쟁이 언니의 환상, 초일류 대기업의 환상, (마우스 클릭 한번 모든 것이 될 것 같은) 정보화 사회의 환상에서 빠져나와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유지되고 있는지 그 실체를 직시할 수 있도록 한다. 영화라고만 규정하기에는 애매한 요소들이 오히려 (극영화이든, 다큐멘터리 영화이든) 영화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도록 한다. 


 마지막, 두 여성노동자가 서로를 의지하며 교각을 건넌다. 동반자가 된 두 여성노동자는 어머니와 딸일 수도 있고,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비닐 반대편을 걷는 개미로 상징화된) 생산직과 서비스직일 수도 있다. “하늘 위에 사람 없고, 하늘 아래 사람 없다.”는 1980년대 노동자대투쟁의 자부심을 기억하는 여성일 수 있고, “너는 신념 있어 보인다. 잘 되길 응원한다.”는 권력자의 비아냥거림을 기억하는 여성일 수도 있다. 

 “위로되는 말 한마디, 힘이 되고 용기 된다.” 영등포 교도소 입구에서 이 문구를 본 기억이 있는 여성노동자들은 지금 공단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구로공단이 어떻게 남아있기를 바랬을까? 이 작품을 본 1만여 관객들이 그 물음까지 나아갈 수 있다면 이 영화는 더할 나위 없이 성공한 영화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이제 관객의 몫이다. 








[필자소개] 박준도 (사회진보연대 사무처장)


서울디지털산업단지(구 구로공단) 노동자 권리찾기 사업단인 「노동자의 미래」에서 정책기획팀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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