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91호 이슈와 현장 2014. 12. 01]
미디어가 풍경을 만든다, 역사를 만든다.
- 복지갈구 화적단의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삼척
옥수수 (라디오 미디어 활동가)
저는 요즘 제가 보는 이 세상 풍경이 조금 변한 것을 느낍니다. 그 이전에는 있었는지 없었는지 몰랐던 사물들이 갑자기 눈 안에 들어옵니다. 버스를 타고 혹은 기차를 타고 먼 길을 갈 때 나란히 곁을 따라오는 기나긴 송전탑의 행렬이 그렇습니다. 이전에는 이렇게 많은 송전탑이 있었다는 걸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2012년 1월 16일, 멀리 밀양에 살고 있는 한 어르신이 자기 몸에 불을 놓기 이전까지 말입니다.
아, 이렇게 말을 뱉어 놓고 보니 저는 이 전에도 송전탑과 관련한 강렬한 기억 하나를 가지고 있음이 퍼뜩 생각났습니다. 한강에 바람이 꽤 매섭게 불어대던 계절이었고, 근처 망원동에 살고 있던 나는 공원을 산책하다가, 송전탑 위에서 농성중인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바람에 쓸려 너덜너덜 해지기 직전인 대자보들은 강가 거센 바람에 나뭇가지 나뭇잎처럼 나부끼고 있었지요. 저 위에 바람은 더 거셀 것 같은데... 내 몸뚱이가 느끼는 한기만큼, 아니 그보다 더 매서운 바람을 저 송전탑 위 사람들은 온 몸으로 받아내고 있을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몸이 떨렸던 기억이 납니다. 박영호. 콜트콜텍 사장인 그 사람이 바로, 해고된 노동자들을 송전탑에 올라가게 한 '나쁜 놈'이라는 것을 몇 년 시간이 흐른 뒤 알게 되었지요. 그 기억 속에서 저는 그 송전탑을 지나치는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잠시 멈춰서 있다가 가던 길을 재촉했던 기억이 납니다. 밀양에 살고 있었던 한 노인의 죽음은, 지역 신문 작은 사건사고를 벗어나 제 눈과 귀에 들어오고, 그것이 제가 보는 세계를, 이 일상의 풍경을 바꾸었습니다. 제 눈이 보는 것은 이제 이전과 같지 않습니다.
▲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삼척 (출처 : http://www.media-net.kr/hwajuck/)
지난 2014년 10월 7일부터 11일까지 강원도 삼척에서 있었던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삼척’에 참여하겠다고 한 까닭은 이 기억들이 저를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자연스럽게.
미디액트에서 독립다큐멘터리 교육을 받은 6명을 비롯한 영상활동가와 라디오를 하는 저를 포함한 10여명이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습니다. 삼척에서 10월 9일에 있었던 주민투표를 기록하기 위해서요. 삼척에 원자력발전소를 만들 것이냐 말 것이냐를 가지고 삼척주민들이 직접 선거인명부를 일일이 만들고 선거를 관리하는 등 주민자치,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장이기도 해서 사회적 의미가 많은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지금과 같은 때에요. 다소 절망적인 소식들이 사회 도처에서 당연한 듯, 일상인 듯 전해지는 그런 때 말입니다. 내 주변 사람들은 자기를 둘러싼 세계가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불안감을 느낄 뿐 아니라, 그것을 바로잡는 것도 이미 늦어버린 때가 아닌가 망연자실 하고 있기도 하고요.
그러나, 10월 7일 직접 눈으로 목격한 삼척 시내 풍경은 이제까지의 삼척과도, 또 다른 곳과도 달랐습니다. "주민투표 성사시켜 원전을 막아내자", "아름다운 고향땅에 원전이 웬말이냐", "정부는 각성하라, 원전백지화를 촉구한다" 등 플랑카드가 시내 곳곳에 달려 있었습니다. 진보정당이나 환경단체 뿐 아니라 식당, 회사, 학교 동문회 이름을 내건 플랑카드들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요. 송전탑이 올라가고 있는 밀양이나 미군해군기지가 건설되고 있는 강정에서는 접하기 힘들었던 장면들이었습니다.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삼척'에 참여했던 미디어활동가들은 궁금해졌습니다. 삼척의 풍경은 왜 다른 걸까? 삼척이란 곳에서 눈앞에 펼쳐진 이 풍경은 무슨 의미일까?
5일간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 미디어활동가들은 이 '다른 풍경'에 실린 이야기, 뜻을 담아내려 했던 것 같았습니다. 삼척에서 반핵투쟁위원회 활동 하는 사람을 인터뷰하기도 하고, 주민투표 현장도 취재했습니다. 또 삼척에 살고 있는 해녀와 농민들이 사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려 두문불출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고요. 삼척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이들과 청소년들에게 '주민투표'나 '원자력발전소'에 대한 의견을 묻기도 했습니다. 물론 삼척 원전유치 찬반 주민투표 의미와 삼척 반핵투쟁 역사에 대한 강의를 듣고 기록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습니다.
▲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삼척 프로젝트 영상 중 (출처 : http://www.media-net.kr/hwajuck/)
그리고 그 결과는, 참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저와 함께한 활동가, 반핵활동가인 지역주민들에게는요. 비단 상영작들의 완성도를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삼척에서 우리가 보고 듣고 기록한 것들은 '주민투표 승리' 이상의 무엇이었습니다. 1983년 정부가 처음으로 삼척 지역에 원전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이래, 끈질기고도 생명력 깊은 투쟁의 역사가 이어졌습니다. 그 뿌리를 접한다는 것은 타지역에서 온 미디어 활동가들에게 새로운 '역사적 발견'이었습니다. "나라에서 하는 일인데, 끝가지 반대해봐야 소용없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삼척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 이전에는 농민이자 해녀이기도 했던 - 2번이나 정부 원전 계획을 물리친 기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1993년 8월 29일, 근덕면 48개 면장들이 모두 사의를 표하고 7천여 명에 이르는 주민들이 학교운동장과 거리에 모여 원전반대를 외쳤던 그 날은 일명 '8.29'로 불립니다. 그 날의 투쟁은 근덕면뿐 아니라 삼척 반핵투쟁 전반에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었습니다. <내 마음은 근덕근덕>(이인현/조영은)은 당시 투쟁 현장에 있었던 근덕면민들을 인터뷰하면서 지금의 '주민투표'와 마주하기까지 그들이 겪어온 역사가 가진 힘을 담아냈습니다. <반복>(송이/정종민)과 <선택>(변규리/박소영/최기명), 이 2개의 영상작품은 찬핵과 반핵이라는 질문에 막혀 이야기되지 못하고 있는 지역주민들, 특히 대진리 주민들의 가슴을 담아냈습니다. 정부의 대규모 에너지계획, 건설계획 속에서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 그 타들어 가는 심정에 귀를 기울인 작업이었습니다. <투표하러 갈남>(김희봉/오다은)에서는 바닷가에 살고 있는 갈남면 주민들의 흔들릴 수 없는 노동과 일상 속 '주민투표 나들이'를 따뜻하게 담아냈습니다. 유일한 라디오 작업이었던 <고향의 봄>은, 밀양 행정대집행의 기억과 진도 팽목항, 그리고 삼척의 현재를 이어가며 '우리'가 지키는 고향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이야기, 또 그 고향을 지키기 위해 우리가 함께 나누고 이어지길 바라는 기억들을 그러모아냈습니다.
이 작업을 통해 서로가 만든 미디어 작업들을 공유하면서, 우리는 이제 삼척의 풍경을 낯설거나 예외적으로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삼척'에 함께한 미디어 활동가들은 지금의 풍경이 가능했던 '역사'를 들었고, 목격하였기 때문입니다. 삼척주민들이 이미 예상했던 10월 9일 주민투표 결과 - 67.9%가 투표했고, 그 중 84.9% 원전에 반대 - 에도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축하할 수 있게 되었고요. 더불어 이후 싸움이랄지 풀어야할 숙제들도 반핵활동가, 지역주민들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유하는 기억, 역사가 새롭게 우리를, 혹은 새로운 우리를 묶어주며 자연스럽게 '연대'로 인도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국 이곳저곳에서 뉴스와 보도를 통해 들려오는 소식들은 얼핏 패배로 가득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 어떤 주류 매체나 전문가들조차도 이후 일어날 일에 대해 낙관적이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이 작업을 하며 활동가들, 또 함께 했던 사람들은 중요한 진실들이 간과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삼척에서 쓰여진 승리의 역사는 근덕면민과 삼척시민들에게 있어 "주민들이 반대하면 당연히 원전은 들어서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의 근거입니다. 또 정부가 들이미는 '찬핵과 반핵'이라는 부당한 질문에 훼손당하지 않아야 할 일상과 삶의 권리들을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최소한의 권리'가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민주주의의 구현',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인간다운 삶의 쟁취'가 지금 싸움의 목적이 되었어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습니다.
▲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삼척 참여자들 (출처 : http://www.media-net.kr/hwajuck/)
이제 삼척의 풍경은 더 이상 낯설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전에도 그랬거니와 지금도 이후에도 당연한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미디어는 단순한 기록을 넘어섭니다. 무엇이 당연한 풍경인가, 혹은 그러했는가를 되묻는 역사를 만들고 쟁취하는 일이기도 함을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삼척'을 하며 다시 새롭게 새길 수 있었습니다. □
* 함께 보면 좋은 자료 : 미디어로 행동하라 in 삼척 날짜별 일지 http://www.media-net.kr/hwajuck/archives/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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