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91호 이슈와 현장 2014. 12. 01]
하룬 파로키의 ‘기계, 이미지’ ... 그리고 인간
남수영 (한국예술종합학교)
지난 여름, 하룬 파로키(Hrarun Farocki)가 7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주1)
다큐멘터리 작가, 미디어 아티스트, 필름 에세이스트 등, 그를 따라다니는 타이틀이 다양한 만큼, 파로키는 지난 50여년간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는데, 아직도 그의 포트폴리오는 진행형이다. 일례로, 그의 부고가 전해진 7월 30일에도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작품이 전시되고 있었는데, 백남준아트센터가 전시하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 2014>전에 포함된 <카운터-뮤직>이 바로 그것이다.(*주2)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은 주제로 작업을 해왔지만 —이번 작품이 재구성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저하게 생산 관계에 기반하며, 통제·감시로 이어지는 현대도시의 영상이미지들은, 파로키 평생의 작업의 주된 주제라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도 알 수 있듯이, 파로키가 읽어내고 (재)해석하는 현대 영상기술과 관련 문화 비평의 스펙트럼은 영상 매체에만 한정되지 않는다.(*주3) 그를 경험한 수많은 관객들에게 그가 각기 다른 모습으로 각인되어 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는 이유다.
이 글이 기록하는 것은 그렇게 수많은 파로키의 실험과 작업들 중 하나의 기억일 뿐이다. 주로 다큐멘터리를 통해 파로키를 만나왔던 필자는,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기계들의 이미지, 그리고 카메라, 모니터 등과 같은 이미지 저장/재현 기계들에 의해 매개된 이미지들로 그를 기억한다. (이들은 기계에 대한 이미지이자, 기계에 의한 이미지다. 그들은 재현하는 기계를 가리키기도 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 전체를 뜻하기도 하기에, 앞으로 이들 이미지를 이제 ‘기계, 이미지’로 칭하기로 한다.) 그 수많은 ‘기계, 이미지’들은 인류의 물적 존재를 대리 증명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기계가 인류의 노동을 대체하여 온 것처럼 이미지는 기록과 증명의 기능으로 우리 존재를 대체하고, 결국 ‘기계, 이미지’는 인류의 존재를 위협하는 파괴의 기술과 기록이 된다.
바로 그런 이유로, 딱딱한 기록 영상들의 몽타주로서 파로키의 이미지는, 일견 회복되어야만 하는 인간성에 대한 알리바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기계의 움직임에 던져진 그의 시선은 애틋할 정도로 집요하다. 기계로 대체되고 기술적으로 파괴될 인간에 대한 걱정으로 설명하기엔 무언가 부족하다. 오히려 그의 ‘기계,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우리의 일상적 삶을 구성하는 파편화된 상태 그대로의 경험을 닮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인식’이라 부르는 —허구에 지나지 않는 자아중심적 주체에 의해 인위적으로 통일성이 부여된— 폭력적인 의미체계 이전의 경험 말이다. 파로키의 영화에서 언제나 ‘기계, 이미지’가 주인공인 이유다.
파로키에게 이미지 중심의 물적 환경은 삶의 조건일 뿐 아니라 사유의 전제다. 이미 1995년에 파로키는 자신의 다큐멘터리 작업들을 돌아보는 자리에서, <분할>(Schnittstelle, Interface)이라는 명제로 이를 분명히 한 바 있다. 몽타주 기법을 시각화한 이 작품에서 그는 두 개의 화면을 병치하여 자신의 다큐 클립들과 그 편집에 몰두하는 자신의 모습을 함께 제시한다. 이 ‘분할’된 이미지들은 그에게 작업장이지만, 동시에 실험실이다. 일상 생활에서뿐 아니라 창조와 재현의 주체로서 오늘날 인간과 기계는 공존한다.(*주4) 기계를 향한 눈과 그것을 만지는 손을 통해서, 기계, 이미지는 인식의 지점들이 된다.
<분할>(1995)
파로키에게 기계를 매개로한 인식이라는 것은, 폭력으로 이어지는 인간 중심적 인식과 차별화된다. 2003년 <인식과 결과>(Erkennen und Verfolgen)는 이 차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인식과 결과>는 명실공히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세상의 이미지와 전쟁의 기록>(1988)의 속편과도 같다. <세상의 이미지와 전쟁의 기록>에서는 이미지의 생산과 저장 기술이 전쟁과 같은 파괴의 기술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파로키의 주된 비판이, 사진측량법과 제2차 세계대전의 항공 정찰 사진들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영화는 한편, 이미지의 양가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시선의 사각지대를 재조명한다. 재현대상이 이미지 안에 존재하더라도 그에 대한 선제적 인식(텍스트)이 결여될 때는 식별조차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지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 곧바로 인식을 약속하지 않는다면, 인간과 기계의 공존이란 결국 현실과 이미지 세계 사이의 거대한 간극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간극은 무자비한 폭력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깨달음만으로 파국으로 치닫는 이미지 기술의 ‘발전’을 멈출 수는 없을 것이다. 특히 전쟁과 같은 인류의 반목에 이미지 기술이 조력자가 될 수밖에 없다면, 파로키의 작업이 기계와 인간의 공존을 이야기 한다는 것은 이율배반일지 모른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세상의 이미지와 전쟁의 기록>은 감각적 경험(이미지)과 주체적 인식(텍스트)의 상호작용이 현실의 인식과 변화를 위해 필수적인 요소임을 주장하고 그들 사이에 균형을 내세우지만, 사실 이는 명쾌한 해답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모순은 이미지와 텍스트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이중적 의미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찰 사진 안에서 식별(인식)된다는 것은 파괴의 위험에 노출되는 것이지만, 현실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정치적 행위를 위해서는 (예를 들면, 2차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에게) 스스로의 존재와 현실을 적극적으로 알릴(인식시킬)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인식과 결과>(2003)는 이미지 기술과 전쟁의 관계를 소위 전자 시대(electronic age)의 전쟁들을 매개로 이야기한다. <세상의 이미지와 전쟁의 기록>에서 사진에 국한되었던 이미지 생성/저장 기술은 <인식과 결과>에서는 90년대 통신 기술과 결합되어 파괴의 주체와 대상 간의 거리를 더욱 키웠다. 또한 전쟁의 이미지가 스펙터클하게 유통되는 만큼, 우리는 그 폭력성에 더욱 무감각해졌다. 그 결과 오늘날 전쟁뿐만 아니라, 원거리의 통제와 감시는 자연스러운 배경음악처럼 너무나 익숙한 환경이 되어버린 것이다.
<인식과 결과>가 구체적인 전쟁의 모습에서만 <세상의 이미지와 전쟁의 기록>을 업데이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에서 파로키는 이전 영화에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다시 접근한다. 바로 정치를 위하여 시도되어야 하지만, 그것이 파멸을 부를 수도 있는, 양날의 ‘인식’ 말이다. 우리는 감정이 없는 기계가 이미지들을 아무 의미 없는 선과 모양으로 분절시키는 것을 폭력이라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기계, 이미지가 우리를 이미 해체된 존재로 담아내기 때문이다. 영화 <인식과 결과>는 수많은 컴퓨터 원격 이미지 인식 영상들을 분석하며, 실제로 오늘날 전쟁에서 사용되는 이러한 이미지 기술은 인식의 기술임을 재확인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술이 불행의 시작인 것은 그것이 인간의 인식을 목표하면서부터다. 어떠한 선이 가로등이며, 어떠한 선이 선로인지, 무의미해 보이는 선과 도형들을 ‘식별’해내는 것은 컴퓨터에 도입된 인간의 눈인 것이다. 기계의 인식은 외관의 외관을 파편화되고 분리된 채 그대로 기록하지만, 인간의 인식은 이들을 건물과 도로로 만든다. 폭격, 즉 파괴의 대상이 되게 하는 인식은 후자의 인식이다. <인식과 결과>가 조각조각, 조목조목 증명하는 것은, 파괴와 폭력은 기계, 이미지의 파편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조각난 기계, 이미지들을 총체적 대상으로 연결 짓는 인간적 시각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인식과 결과>(2003)
이러한 깨달음은, 파로키가 어떻게 총체적 인식을 거부하는 파편화된 형식을 고수하면서도, 이미지의 생산과 저장 기술이 통제와 파괴로 연결된다는 문제의식, 즉 ‘인식’을 전달할 수 있었는지 또한 확인하게 한다. 파로키가 전달하고자 했던 것은 인간 중심의 인식이 아니라, 기계의 시선이었던 것이다.
또한, 우리는 깨닫는다. 전쟁이 아무리 당대 최고의 기계와 기술이 결합된 결과물이라 하더라도, 사실 그 폭력은 기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파로키는 앞으로 이미지 기술의 발전이 새로운 전쟁을 필요로 할지 모른다고 말한다. 반면, 전쟁은 이미지 기술에 발전에 따라 고도화될 것이다. 문제는 이 기술들이 분배가 불평등한 만큼, 전쟁의 폭력이 항상 힘없는 자들에 가해진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크고 작은 전쟁들은 이러한 불평등을 너무도 극명히 증명하고 있다.
파로키가 남긴 영화는 우리에게 말한다. 폭력은 결국 인간에 의한 것이다. 폭력은 결국 인간에 의한 . . . 결국 우리가 멈추어야 한다.
[필자소개] 남수영 (한예종 영상이론과 조교수)
비교문학을 전공하며 문화 연구의 일환으로영화이미지의 특성과 매체 담론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였다. 저서에 『이미지시대의 역사 기억: 다큐멘터리, 전복을 위한 반복』이 있으며, 최근 논문으로 「랑시에르와 영화적 모더니티 - 영화를 둘러싼 미학적 위계에 대한 고찰」, 「스펙터클과 중력의 무대: 랑시에르와 영화의 관객성」, 「문화적 순환의 원동력으로서의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 등이 있다.
*주
(주1) 파로키는 제2차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현재는 체코령인 노비지친(Nový Jičín)에서 인도계 아버지와 독일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아버지의 고향에서 보내기도 하였지만, 독일 방송 영화 아카데미에서 수학하는 등 이후 독일에서 교육받았고, 『필름크리틱』을 십 년간이나 맡아 편집과 글을 썼다. 1960년대 말부터 감독, 각본, 편집, 제작 등으로 100편이 넘는 작품을 통해 사회, 정치, 경제의 다양한 이슈들을 다루어 왔다.
(주2) 파로키는 <카운터-뮤직>에 대한 설명에서 “오늘날 도시는 생산 과정으로 합리화되고 통제된다”고 단언하며, 도시의 모양새와 흐름을 통제하고 재현하는 교통이나 통신 신호 등의 시스템을 지적하는데, 이는 “대로나 골목길, 시장, 아케이드, 교회 등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이런 도시들이 이미 삶과 노동을 위한 기계”라고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http://www.farocki-film.de/index.html “Installation” 섹션 91. http://farocki-film.de/flash/gmusikg.htm
(주3) 우리나라에서는 그의 작품들이 비단 영화제뿐만 아니라 미술과 무용 등 다양한 분야의 전시를 통해 소개되어 왔는데, 바로 그러한 이유로 파로키는, 그 작품들의 실험성과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국내 팬들에게는 꽤 친숙하게 다가온다.
(주4) 릴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The World of Photography》(1995) 전시에 포함되었던 작품. http://www.farocki-film.de/index.html “Installation” 섹션에서 그 간단한 설명을 볼 수 있다.
(주5) 영어로 <War at a Distance> 그리고 우리에게는 <원거리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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