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큐레이션 정의를 향하여

전체 기사보기/이슈와 현장

by acteditor 2025. 6. 13. 13:35

본문

※ 본 원고는 인디앤임팩트 뉴스레터에도 공동게재되었음을 알립니다.

[ACT! 이슈와 현장 2025.04.25]

 큐레이션 정의를 향하여

 

 

김보람

 

‘큐레이션’은 작품과 제작자를 관객과 연결해 주는 것. 단순히 작품을 선택하는 것을 넘어, 어떤 이야기를 세상에 보여줄지 결정하는 행위를 뜻한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주로 사용하는 용어로 알려졌지만, 오늘날 큐레이션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존재한다. 일상적으로 접하는 온라인 미디어의 알고리즘부터, 영화, 저널리즘, TV 프로그램에 이르기까지 큐레이션은 모든 미디어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최근 영화를 포함한 예술 분야에서 윤리적인 제작 환경을 만들기 위한 논의가 활발히 이뤄지면서, 영화를 선정하고 소개하는 영화제 역시 책임감 있고 윤리적인 큐레이션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등장했다. 지난 2024년 발간된 보고서 <큐레이션 정의를 향하여(Toward Curatorial Justice)>가 그것이다. 이 글은 영화제가 단순히 영화를 상영하는 공간이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가치를 공유하고 소외된 커뮤니티와 연대하는 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미국 및 유럽 지역의 영화제에서 활동하는 BIPOC(흑인, 원주민 및 유색인종) 프로그래머 및 영화 관계자 50여 명의 인터뷰를 통해 만들어진 이 보고서는, 그동안 잘 다뤄지지 않았던 영화 큐레이션에 대한 새로운 담론을 제기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총 52쪽의 보고서에 담긴 방대한 내용 중, 영화 큐레이션 과정을 둘러싼 윤리적인 문제들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접근 방식 및 사례 일부를 소개하고자 한다.  <큐레이션 정의를 향하여> 보고서는 미디어 예술 분야에서 피해 감소를 중심에 두는 프레임워크를 공동 제작하고, 시스템 전반에 걸친 회복적 정의 실천 방안을 개발하는 네트워크 ‘Restoring the Future’가 제작했다.

 

▲ <큐레이션 정의를 향하여> 보고서 표지

 

 

큐레이션 정의가 필요한 이유

“영화와 영화제는 단순히 예술적 표현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큐레이팅을 한다는 것은 문화에 서사를 투입하는 일이며, 그 서사가 현실에 미칠 영향은 엄청난 책임을 동반한다.” 

- Themba Bhebhe (칼라 컬렉티브 프로그래머, 유로피안 필름 마켓)

 

익히 알려져 있듯 영화 제작의 뿌리에는, 특히 영화 감독과 촬영 대상 사이에는 힘의 불균형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북극의 나누크> <국가의 탄생>과 같은 영화는 기술적으로는 선구적인 영화로 인정받았지만, 흑인과 원주민에 대한 인종 차별적이고 식민주의적인 묘사로 비판받았다. 각종 영화와 TV 프로그램에서 무슬림 커뮤니티를 왜곡해 묘사하는 것과, 실제 현실 사회에서 무슬림 혐오가 전염병적으로 늘어나는 것 사이의 연관성을 연구한 보고서 Missing and Maligned를 통해서도 미디어가 사람들의 인식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살펴볼 수 있다.

 

영화 산업은 다양성보다는 경쟁과 위계 구조를 바탕으로 구축되어 왔다. 명시적으로든 암묵적으로든 게이트 키퍼가 작동하는 시스템 속에서 아직 모두의 이야기가 보편적으로 전달되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안에서 영화를 선택하는 이들은 어떤 관점과 과정을 통해 큐레이팅하고 있을까? 큐레이션에 막중한 책임이 부여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비윤리적인 영화뿐 아니라, 무책임하거나 악의적인 영화 큐레이션도 특정 커뮤니티에 피해를 주는 해악의 참여자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보고서에서 인터뷰에 참여한 프로그래머들은 대규모 영화제 또는 문화 기관에서 일한 경험에 대해 공통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큐레이션에 대한 명확하고 성문화된 프로세스가 부족하거나 일부만 존재하며, 고위급 프로그래머의 결정에 의존하게 되는 제도적 관행이 있다는 것. ‘히트작을 놓치지 않는 것이 큐레이션의 우선 순위라고 언급한 이도 있었다.

 

“잘 팔리는 영화를 프로그래밍하는 것이 우선이라면, 종종 선정적이고 비윤리적인 영화가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 상황에서 피해를 보는 것은 배급사도, 영화제도, 영화 제작자도 아닌 영화에 묘사되는 커뮤니티입니다.”

 

 

가치에서 실천까지

지난 10년간 이런 전통적인 관행을 해체하고, 보다 정의롭고 윤리적이며, 커뮤니티에 뿌리를 둔 큐레이션의 방향을 설계해 나간 프로그래머들이 있었다. 보고서에 언급된 영화제들의 실천 사례 중 일부를 소개한다. 큐레이션 정의는 커뮤니티와 깊이 연결되고 참여를 유도하는 것, 조직의 예술적, 윤리적 가치를 개발하고 성문화하는 것, 배제와 피해의 시스템이 지속되지 않도록 끊어내는 데 의도적으로 집중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작품과 커뮤니티의 관계를 엄격하게 살피기

“정기적으로 우리는 한발 물러서서 프로그램을 검토하고, 전반적으로 누가 빠져 있는지 질문합니다. 점수 측면에서 다른 모든 것이 동일하다면 소외된 커뮤니티에서 제작된 영화를 의도적으로 선택합니다. 그리고 외부인의 목소리보다 현지 원주민의 목소리를 우선합니다.” 

- Nehad Khader (블랙스타 필름 페스티벌)

 

 

장르의 경계를 벗어나 활동하는 흑인, 원주민 및 유색인종 작가들을 위한 블랙스타 영화제(BlackStar Film Festival)의 홈페이지에는 영화제의 모든 활동에 인종과 성별, 권력에 대한 분석을 도입하고, 큐레이션 방식에 있어 일관된 수준의 엄격함을 적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엄격함이라는 기준에는 미적인 조건 외에 윤리적인 조건도 포함된다. 작품 제작에 누가 참여했는지 질문하며, 작품을 선정할 때 감독이 작품에서 묘사하고 있는 해당 커뮤니티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함께 살핀다. 작품과 커뮤니티의 관계를 프로그래밍의 핵심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커뮤니티 구성원과 함께 심사하기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되는 아시안태평양 영화제(LAAPFF)는 영화제의 주요 관객인 아시아계 미국인, 하와이 원주민, 태평양 섬 주민(AANHPI) 커뮤니티와 긴밀히 소통하며 그들의 목소리를 듣는 과정을 큐레이션의 시작으로 여긴다. 뉴올리언스 영화제(NOFF), 클리블랜드국제영화제(CIFF), 블랙스타 영화제, CAAMFest(Center for Asian American Media) 등의 영화제에서도 비전문가인 커뮤니티 구성원들을 프로그래밍 과정에 끌어들여 작품에 대한 프리뷰를 함께 하기도 한다. 프로그래머 개인이 작품의 진위성이나 잠재적 위험성을 평가하는 유일한 게이트키퍼가 되지 않도록 하는 이 과정은 매우 중요하다. 누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뿐만 아니라 영화 속에 누구의 목소리가 반영되었는지에 대해 정보를 토대로 토론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프로그래밍 가이드라인 개발하기

영화제가 추구하는 가치를 문서화하는 과정은 프로그래머의 개인적 선호도를 뛰어넘는 큐레이션의 틀을 만들고, 스태프들에게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기 위한 방법이다. 미국 남부의 뉴올리언스 영화제(New Orleans Film Festival) 2017년 영화제의 프로그래밍 가치 개발을 시작했다. 작품 선정 과정에서 인종, 지역 등의 인구 통계 데이터를 작품 선정에 활용하기로 했으나 일부 섹션에서 이 과정이 누락됐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프로그래밍 결정을 내릴 때, 지침보다 합의를 따라가는 경우가 많았다. 원칙을 개발하는 과정은 스태프들의 헌신으로 이뤄지는 매우 긴 과정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그동안 유지되어 왔던 전통적 큐레이션의 유해성을 강력하게 인지하고, 구조적 차원의 재창조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 뉴올리언스 영화제 소개 페이지에는 다양성과 새로운 발견을 위해 50% 이상은 여성 또는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감독의 연출작으로, 50% 이상은 유색 인종 감독의 연출작으로 구성된다는 약속이 명시되어 있다.

 

 

미래를 위한 로드맵

인터뷰에 참여한 프로그래머들이 구상한 큐레이션의 미래는, 그동안 피해를 받아왔던 커뮤니티가 자기 서사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보고서는 미래를 향한 로드맵의 첫 단계로 다음과 같은 프로토타입을 구축할 것을 제안한다.

 

  • 큐레이터 가치: 조직의 예술적 가치와 책임감 있는 큐레이션에 대한 약속을 공개할 것.
  • 데이터 분석: 인구 통계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해 우선순위에 있는 커뮤니티의 이야기를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
  • 팀 확장: 프로그래밍에 참여하는 팀원의 구성을 다양화하고, 영화를 심사하는 다양한 관점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
  • 피해 대응 절차: 위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있는 영화가 발견될 경우, 그 영화가 묘사하고 있는 커뮤니티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명확한 절차를 마련할 것.
  • 권력 공유: 커뮤니티 중심의 접근을 위해 모든 프로그램 팀원, 커뮤니티 구성원, 외부 전문가 등과 협력하여 책임감 있게 심사할 것.
  • 운영 프랙시스: 영화제의 큐레이션은 운영, 제도, 정책 및 문화 생태계에 존재하므로 기관의 리더와 이사회는 프로그램팀을 지원하고 보호할 것.
  • 지속 가능한 구조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
  • 회복적 정의를 위한 문화와 프레임워크를 구축할 것.
  • 장기적으로 변화를 이끌기 위한 프로그래머 단체의 지속적인 지식 공유 및 업계 조직화

 

 

정의로운 영화 생태계를 지속하기 위해 남은 과제들

많은 이들의 노력에도 여전히 이런 관행들을 실현하기 어렵게 만드는 현실이 존재한다. 기업 후원을 받았을 때 프로그램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문제, 프로그램팀과 고위 이사진 간의 의견이 상충할 때 결정의 문제, 영화제 프로그래머의 고용 방식에도 한계가 있다. 프로그래머의 대다수는 풀타임 근로자가 아닌 계약직이며, 조직의 큐레이션 가치나 커뮤니티와의 관계 맺기를 깊게 검토할 수 있는 자원이나 시간이 부족하다. 이런 한계는 영화제 규모가 커질수록 분명해진다.

 

“정의의 장벽은 돈이다” 

- Lucy Mukerjee (칼라 콜렉티브, Firelight Media) 

 

 

중요한 것은 재정적 지원과 지속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보고서는 일반 운영 보조금, 행정 지원, 프로그래머 및 영화제 운영팀 등 화려하지 않은 분야에 더 많은 자금을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영화제의 접근성을 높이고, 더 많은 커뮤니티들이 포함될 수 있도록, 큐레이션 과정을 개발하고 개선하기 위한 보조금이 조직에 제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 및 커뮤니티 지원에 대한 필요성도 강조한다. 다양한 큐레이션 방식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 업계 내 불균형을 해결하기 위한 집단적 노력을 장려하는 것. 지난 2018년 설립된 프로그래머 네트워크인 ‘칼라 콜렉티브(Programmers of Colour Collective)’가 그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칼라 콜렉티브 프로그래머(Programmers of Colour Collective)는 유색인종, 여성, TSLGBTQ+로 구성된 프로그래머 단체이다.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며 영화제 프로그래밍과 스탭 구성 등에서 다양성을 확장할 수 있는 활동을 한다.

 

 

앞서 소개된 사례들을 지금 우리의 생태계에 적용한다고 생각해 보면 조금은 낯설고 급진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큐레이션이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미디어 세상 속에서, 새로운 목소리를 발굴하고, 다양성을 확보하며, 커뮤니티와 연결되고자 하는 것은 모두가 추구하는 가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독립영화가 찾아가야 할 자리에 대해서, 더 크게 들려야 할 목소리에 대해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면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어가는 출발점이 되지 않을까.

 

 

“영화제를 모든 것이 검증되고 순수하게 윤리적으로 고려되는 권위의 공간이 아니라, 영화가 만들어지는 모든 방식을 보여주는 거울로 생각한다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요? 이것이 우리가 원하는 생태계인지에 대해 더 강력한 대화를 나누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 Jemma Desai (This Work Isn’t For Us)

 

 


글쓴이. 김보람 

다큐멘터리 제작자. 불안을 돌파할 방법을 고민하며 미디액트 독립 미디어 세미나에 참여하고 있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