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원고는 인디앤임팩트 뉴스레터에도 공동게재되었음을 알립니다.
지난 몇 년간 한국 영화산업은 심각한 위기를 겪어왔다. 팬데믹 이후 극장 관객 수는 절반 이하로 줄었고, 투자와 제작 환경은 더욱 불안정해졌다. 중소 제작사는 문을 닫고, 신진 창작자는 진입 기회를 잃었다. 산업의 붕괴는 곧 창작의 위기였고, 관객의 선택권이 줄어든다는 것은 곧 문화적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의미였다.
이처럼 총체적 위기 속에서 영화인들이 모여 새로운 질서를 다시 그려보자고 제안한 자리가 바로 [한국영화 위기해법, 머리를 맞대다 - 중·장기 5대 핵심 정책 제안] 영화인연대 포럼이다. 영화계 22개 주요 단체가 함께 준비하여 5월 1일 전주에서 진행된 이 포럼은 개별 현안을 넘어, 산업과 예술, 교육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새로운 생태계를 상상하고 제안하기 위한 도약이었다. 단기 대응을 넘은 중장기 정책, 공공성과 지속 가능성을 아우르는 비전이 절실히 요구되는 지금, 이 포럼은 영화인들 스스로 다음 세대를 위한 정책 제안을 한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깊다.
영화산업 위기극복 영화인연대와 동의대학교 영화·트랜스미디어연구소의 공동 주최, 제26회 전주국제영화제의 후원으로 전주중부비젼센터에서 진행된 이 포럼에는 많은 영화인들이 참석했다. 이번 포럼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한국영화 산업의 위기를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과 실행 방안을 제안하는 발제와 현장 토론으로 구성되었다. 산업 구조 재정비, AI 시대의 창작 환경 변화, 영화의 공교육화 등 다양한 주제가 다뤄졌다.
1부. 한국영화의 미래 [사 회] 김조광수 영화제정책모임 공동대표 [발제 1] K- 무비 재도약을 위한 집중 투자와 영발기금 재원 구조 법제화·다각화 | 박관수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부대표 [발제 2] AI 시네마 뉴딜 – 창작자 보호와 R&D 지원의 필요성 | 김병인 한국영화시나리오작가조합 대표 [발제 3] 미래관객개발과 미래형예술교육을위한「영화」독립교과추진 | 장은경 한국영상미디어교육협회(미디액트) 사무국 [토 론]이동하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대표ㅣ김윤미 한국영화제작가협회 이사 |
2부. 한국영화의 지속가능한 성장 [사 회] 김선아 여성영화인모임 대표 [발제 4] 한국 독립영화 시장점유율 10% 달성을 통한 창의적 영화생태계 구축ㅣ원승환 인디스페이스 관장 [발제 5] K-무비의 지속 동력, 공정환경 조성-노동법 준수와 성평등ㅣ이상길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사무국장 [발제 6] K-무비의 지속 동력, 공정환경 조성-제도 개선ㅣ이하영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 운영위원 [토 론] 이은 한국영화제작가협회 회장ㅣ최낙용 한국예술영화관협회 대표 |
박관수 한국프로듀서조합(PGK) 부대표는 한국 영화산업이 겪고 있는 재정 기반의 붕괴를 정조준하며 발제를 시작했다. 그는 2006년 한미 FTA로 촉발된 영화발전기금의 역사와 함께, 코로나19 이후 급감한 관객 수로 인해 입장권 부과금 기반의 기금 시스템이 한계에 직면했다고 진단했다. 특히 최근 영화기금이 체육기금, 복권기금 등 타 기금에 의존해 연명하는 구조는 지속 가능하지 않으며 영화산업을 위한 독립적이고 안정적인 재정 구조가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대한 해법으로 그는 정부 출연금, 복권기금 법정 배분, 입장권 부가세 면제, OTT·방송에 대한 연발기금 부과 등을 조합해 5년간 1조 원의 집중 투자를 실행할 것을 제안했다. 더불어 중예산 영화 지원 확대, 기획개발 생태계 회복, 펀드 운영의 공공책임 강화 등도 병행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김병인 한국영화시나리오작가조합(SGK) 대표는 최근 창작자들 사이에서 뜨거운 이슈가 된 AI에 대해 “두려움과 기대가 교차하고 있지만, 결국 우리는 이 기술과 공진화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그는 직접 구독료를 내고 AI 시나리오 도구를 사용한 경험을 공유하며, AI가 보여주는 높은 분석력과 빠른 피드백 속도, 냉철한 진단 능력에 주목했다. 동시에 AI의 한계로는 감정 없는 문장, 대체 불가능한 인간적 표현력의 부족, 그리고 학습에 사용된 기존 저작물에 대한 보상 부재 등을 꼽았다. 그는 향후 시나리오 단계에서 흥행 예측, 예산 추산, 프리 비주얼라이제이션, 후반작업 효율화까지 AI의 활용이 점차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를 위해 정부가 영상특화 AI를 개발하도록 지원하고, 창작자들이 AI를 창작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실험 프로젝트를 적극 도입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아울러 AI 학습에 사용되는 저작물에 대해 유럽식 ‘사적복제 보상금’ 모델을 도입할 것을 제안하며, 창작자 권리를 보호하는 제도적 기반 마련을 촉구했다.
장은경 한국영상미디어교육협회(미디액트) 사무국장은 “영화라는 단어 자체가 사회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포럼에 던졌다. 그는 영화가 단지 한 예술 장르가 아닌, 영상 시대의 문해력을 키우는 핵심 교육 도구라는 점을 강조하며, ‘영화의 공교육화’를 제안했다. 핵심 제안은 2028년 고등학교 선택과목으로 영화 과목을 정규 교과화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교사 양성, 교과서 개발, 법제도 기반 조성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 BFI와 같은 사례를 인용하며 한국 역시 영상 기반 사회에 맞춘 교육 혁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특히 협회가 직접 운영 중인 ‘단체관람+영화인 특강’인 너랑봄 프로그램의 사례를 들며, 공교육 내 영화 경험이 학생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강조했다. 영상 리터러시의 격차는 계층에 따라 디지털 정보 접근의 불균형을 초래하며, 이는 단지 교육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권과 표현권의 문제라고 짚었다.
1부 토론에서는 영화인 연대에 참여한 각 단체의 실무자들이 발제자들의 제안에 현실감을 더하는 논의를 이어갔다. 한 토론자는 “22개 단체가 1년 가까이 함께 논의하며 5개의 핵심 정책을 정리했고, 이를 여야 정당에 제안해 정책 반영을 요청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또 다른 토론자는 영화 산업 내 투자 펀드 구조의 문제를 짚으며, “올해 모태펀드 GP(운용사) 모집에서 영화 관련 펀드가 전부 탈락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며 우려를 표했다. 이는 영화 산업의 투자 수익률 하락이 민간 투자자의 이탈로 이어진 구조적 문제의 방증이며, 정부의 출자 비율 확대나 초기 손실 보전 시스템 도입 등 실질적인 유인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토론자들은 공통적으로 “이제는 말이 아니라 실천이 필요한 시기”라며, 영화인들이 연대로서 정책 집행을 밀어붙일 수 있는 구조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진 2부에서는 보다 현장 밀착형 이슈들이 다뤄졌다. 발제자들은 ‘공정한 영화 제작 환경’과 ‘현장 중심의 지원체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김선아 여성영화인모임 대표는 2부의 문을 열며, 이번 포럼에서 제안된 정책들이 단기간 준비된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는 “정권 교체 등 정치 환경의 변화 가능성을 감지한 영화인들이 위기의식을 공유하며 지난 3월부터 본격적으로 논의를 시작했다”고 밝혔다. 이어 기존 영화제 토론들이 하나의 이슈에 집중했다면, 이번 포럼은 영화산업 전반을 아우르는 다섯 개 공약을 종합적으로 다루고자 했다는 점에서 차별성이 있다고 말했다. 특히 공약들은 “영화발전기금, 영화제, 독립영화 등에 국한되지 않고 산업 전체를 포괄하고자 했다”며, 이는 한국영화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환점이라고 강조했다. 2부에서는 이 가운데 마지막 두 개 공약을 바탕으로 제작 환경과 공정성, 권리 보장을 둘러싼 구체적인 정책 제안들이 이어질 것임을 예고하며 발제를 시작했다.
원승환 인디스페이스 관장은 독립영화 시장 점유율을 1%에서 10%로 확대하기 위한 정책 전환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단순한 제작 지원을 넘어 관객의 실제 관람으로 이어지는 ‘유효수요’를 창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프랑스, 미국 등 해외 사례를 통해 두 자릿수 점유율이 독립영화 생태계의 자생적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 임계점임을 설명하고, 케인즈 경제학의 유효수요 개념을 바탕으로 상영 기회 부족, 정보 단절, 접근성 문제 등 수요의 장벽을 제거하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이를 위해 독립영화를 ‘지원 대상’이 아닌 ‘발견과 공감의 문화상품’으로 재정의하고, 관객 중심의 인프라 확대, 디지털 전환, 지역 생태계 강화, 글로벌 진출 전략 등을 종합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특히 독립영화 회원제 구축 구독 모델인 ‘인디 필름 패스’ 같은 제도적 장치를 통해 관객의 접근성을 높이고, 영화발전기금의 40%를 독립영화에 할당해야 실질적인 생태계 전환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이상길 전국영화산업노동조합 사무국장은“K-무비의 지속 동력, 공정환경 조성”을 주제로, 현재 영화 및 OTT 시리즈 제작 환경에서 근로자-사업자 간의 근로계약 미체결, 장시간 노동, 성평등 교육 미이수 등 기본적인 노동권과 평등권이 침해되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며, 이를 개선하지 않으면 산업의 지속 가능성이 위협받는다고 강조했다. 그는 특히 근로계약 체결과 4대보험 가입 등 법적 보호 장치가 유명무실화된 현장을 비판하며, 숙련 인력의 이탈과 계약관계 불균형이 심화되고 있음을 수치로 제시했다. 성희롱 예방교육 이수율이 급감하고 방송계 일부 관행이 영화 현장에 유입되며 조건이 퇴행하는 상황에서, 영화산업의 기초가 되는 ‘근로기준법’ 준수가 출발점임을 강조하고, 노사정 협력 아래 안전보건체계 구축과 표준보수지침 수립 등을 통해 공정한 제작환경을 조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하영 한국영화프로듀서조합(PGK) 운영위원은 한국영화 산업이 팬데믹 이후 관객 수, 투자, 제작의 동반 감소로 체력이 급격히 저하되었으며, 산업 전반의 불공정한 구조와 수직계열화가 위기를 심화시키고 있다고 진단했다. OTT의 부상에도 불구하고 수익 배분 구조의 불균형으로 제작사는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메인 투자사 중심의 제작 구조는 중소 제작사의 영세화를 가속시키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영화의 지속가능성을 위해 공정한 산업 환경 조성이 핵심 과제라고 강조하며, 과거 한국영화 동반성장 및 공정환경 조성 협의체의 사례를 바탕으로, 표준상영계약서 이행, 스크린 독과점 해소, 정보 투명화, 러닝개런티 공동 부담 등의 내용을 담은 공정경쟁 정책을 다시 활성화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불공정 행위에 대한 모니터링 체계와 정산 투명성, 스태프의 노동권 보호가 영화산업 신뢰 회복과 투자 활성화의 출발점이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2부 토론자들은 발제에 공감하면서도 실질적인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 필요한 전제조건들을 조목조목 짚었다. 한 토론자는 “현장 제작자들이 겪는 어려움은 정책 문서에만 담겨 있지 않다. 제작 기간 동안 병원 한 번 가기 힘든 환경에서 영화가 만들어진다”며, 현재 영화 노동의 조건 자체가 정책 효과를 흡수할 수 없는 상태라고 말했다. 또 다른 토론자는 영화진흥위원회의 정책 집행 방식에 대해 비판하며, 정책 설계부터 실행까지 창작자와 현장 종사자의 참여가 보장돼야 함을 강조했다. 실효성 없는 지원보다 “작은 돈이라도 일관된 구조와 기준 아래 예측 가능하게 집행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특히 창작자 보호를 위한 제도적 기반 마련, 그리고 장기적인 산업 전망을 고려한 시스템 설계가 필요하다는 점이 여러 발언자들에게서 반복되었다. 현장을 반영하지 못한 정책은 결국 표류한다는 우려가 강하게 제기된 자리였다.
이번 포럼은 단지 위기를 진단하고 정책을 제안하는 자리에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은 영화라는 예술과 산업이 한 사회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를 되묻는 자리였다. 발제자들은 공통적으로 산업의 재건뿐만 아니라, 창작자의 권리, 관객의 문화 향유권, 교육의 공공성을 함께 이야기했다. 이는 영화가 단지 ‘흥행 콘텐츠’가 아니라, 사회적 인프라로서의 예술, 공적 가치를 지닌 노동, 표현과 학습의 매개체임을 다시 선언하는 것이기도 했다. 발언자들이 반복해서 언급한 ‘마지막 기회’라는 말은 위기의식이자 결단의 언어였다. 창작과 산업, 교육이 균형을 이루는 지속 가능한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지금은 영화인 각자의 고립을 넘는 연대와 실천의 시간이다.
이번 포럼은 지난해에 이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영화산업의 위기를 일회성 논의가 아닌 연속적인 흐름으로 다루고자 했다는 점은 분명한 성과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다. 포럼을 구성하고 참여하는 이들이 대부분 업계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 실제로 영화 현장에서 일하는 창작자나 상영관 실무자, 특히 관객들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적게 들릴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투자 자본, 상영관 기업 담당자 등의 시장 주체의 미참여도 아쉬웠다. 논의의 깊이는 충분했지만, 그것이 현장의 현실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는 더 고민해볼 지점이다.
앞으로는 이런 논의의 자리가 특정 시기나 행사에만 머무르지 않고, 더 많은 사람이 일상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방식으로 운영되기를 바란다. 창작자와 관객, 지역의 다양한 영화 관계자들이 함께할 수 있는 소규모 간담회나 온라인 토론, 지역 순회 포럼 같은 방식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정책은 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장과 함께 만들어져야 현실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이번 포럼이 그런 방향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
[정책 제안집] 영화산업 위기극복 영화인연대 (2025.5.)
https://drive.google.com/file/d/1xfMa_RgjzNsI8q69cq8EAdV4sUHvHKvO/view
글쓴이. 김세영
미디액트에서 다큐멘터리를 배우고 미디어 활동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돌봄,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생태계에 관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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