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ACT! 89호 Me,Dear] 태어나줘서 고마워 - 어느 새내기 감독의 영화제 상영기

전체 기사보기/Me,Dear

by acteditor 2014. 6. 5. 10:32

본문

[ACT! 89호 Me,Dear 2014.06.25]


어나줘서 고마워

- 어느 새내기 감독의 영화제 상영기

 

김보람 (다큐<독립의 조건>연출 · ACT!편집위원)

 


  아가야, 너를 이렇게 부르는 것이 정말 낯간지럽긴 하지만 그래도 한번 불러본다. 사람들에게 너의 탄생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고 해. 네가 태어나 처음으로 사람들을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그 울렁이고 반짝였던 순간을 말이야.


 

  지금으로부터 1년 전, 나이 서른에 직장을 그만 둔 나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는 길을 고민하고 있었어.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걸까’,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사는 건 어떤 걸까’, 끝없는 질문들 속에서 네 태동(胎動)이 시작됐단다. 한 영화제에서 네 이야기를 처음 꺼냈어. 나의 독립에 대한 다큐를 만들겠다고. 30대가 되어도 여전히 삶의 방향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나를 한번쯤 돌아보고 싶었어. 다행히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이 생겼어.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처음 작가들을 지원하는 인디다큐페스티발 봄프로젝트를 통해 네가 태어날 수 있게 된 거야.

 

  설레는 마음으로 널 만날 준비를 시작했어. 하지만 너는 내 기대와 달리 종잡을 수 없는 아이였어. 촬영을 하면 할수록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았지. 제멋대로 이리 튀고 저리 튀는 너를 장악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많이 좌절했던 것 같아. 내 이야기지만 너를 정말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어느 순간엔 널 만들고 있는 내가 누군지도 알 수 없었고. 이제 와서 하는 소리지만 다 포기하고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도 수없이 했었어. 기대만큼 쑥쑥 자라주지 않는 너를 원망하면서 말이야.

 

  긴긴 계절을 방황하면서 흘려보냈어. 정신을 차려보니 너는 스스로 어떤 이야기가 되려고 하고 있더구나. 그때 알게 됐어. 네가 더 멋있게 보였으면 좋겠다는 욕심 때문에 너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했다는 걸. 너를 통해서 나를 인정받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는 것도 받아들여야 했지. 그런 마음속에는 늦은 나이에 다큐를 시작한 내 상황에 대한 불안과 조급함이 숨어있었다는 것도. 그제야 내 욕심은 내려놓고 진짜 이야기 속에서 너를 찾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 어쩌면 네가 자라는 동안 나도 같이 성장하고 있었나봐.

 

  지난하고 고된 편집기간, 그래도 새로운 네 모습을 발견하는 기쁨이 있었어. 알고 보니 너는 얼마나 많은 이야깃거리를 가지고 있는 아이였는지! 그 중에 더 의미 있는 이야기, 더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인지 찾아내려고 고심했어. 같은 장면도 보고 또 보고. 넣었다가 뺐다가 하고. 신기한 건 한밤중에 몽롱한 정신으로 보면 네가 정말 괜찮아 보인다는 거야.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다시 보면 같은 장면도 별 거 아닌 이야기가 되어 있었지. 아직도 풀지 못한 미스터리, 그 안에서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일희일비하며 보냈는지 몰라.

 

 

2.

  이제 네가 태어난 이야기를 해야겠지? 나는 2013년 인디다큐페스티발의 지원을 받았고 이듬해 영화제에서 너를 처음 선보이기로 약속한 상태였어. 2014년 영화제 개막을 며칠 앞두고 사무국으로 널 데려갔지. 투박한 테이프 안에 담긴 너를 건네고 돌아서는데 이상하게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 거야. 이제 더 이상 널 위해서 뭔가를 더 할 수 없다는 게 이상했나봐.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볼까 궁금하기도 하고. 덜컥 겁이 나기도 하고. 어쨌든 넌 내 손을 떠났고 두려움과 미련이 섞인 묘한 감정으로 영화제를 기다리는 수밖에.

 

  영화제가 시작되자 모든 게 명확해졌어. 우량하고 건강한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너는 작고 볼품없는 아이였던 거야. 적어도 내 눈엔 그렇게 보였지. 다른 상영작을 볼 때마다 괜히 초라해지는 마음. 근데 재밌는 건 뭔지 아니? 영화제에서 다른 감독을 만나 작품 꼭 볼게요하고 인사를 건네면 누가 봐도 멋진 아이를 데리고 온 감독들도 안 보셔도 돼요하고 부끄러워한다는 거야. 그렇다고 그 말이 진심으로 느껴지지도 않았지. 누구나 자기 작품에 대해선 복잡한 감정이 있겠구나. 감독들의 이상한 거짓말속에서 동병상련을 느꼈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드디어 D-day. 널 만나러 극장에 갔을 때 꽉 찬 좌석을 보게 됐어. 부담스럽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지. 그 많은 사람들을 보면서 너는 어떤 기분이었니?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됐을 때, 나는 극장 어디선가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까지 다 듣고 있었어. 얼마나 긴장했는지 온몸의 동물적인 감각이 다 깨어났던 것 같아. 50분이라는 시간동안 관객들의 웃음과 침묵에 반응하며, 사람의 감정이란 게 얼마나 빨리 곤두박질 쳤다가 튀어오를 수 있는지, 한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환희와 좌절과 안도와 체념이 오고갈 수 있는지 그날 알았지.

 

  고맙게도 사람들은 너를 꽤 반갑게 맞아준 것 같아. 영화 속 부모님을 보고 자기 부모님이 생각났다는 사람, 자기와 비슷한 나를 봐서 좋았다는 사람, 그리고 뭔지 모르겠지만 용기를 얻었다는 사람도 있었지. 내 기분은 어땠냐고? 나는 미안했어. 스크린 속의 널 보면서 지난 1년간 힘든 순간마다 도망치려했던 내 모습이 생각나서, 내 소심함과 게으름, 나약함이 결국은 너의 모습이 된 것 같아서 미안했지. 그날은 밤새 잠이 오지 않더라. 영화를 보고 관객들이 던진 질문 하나하나가 머릿속에서 끝없이 재생되고 아쉬운 점들에 대한 지적도 계속 생각나고.

 

  처음 너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던 순간을 기억해. 나는 그때 무미건조한 삶에 질린 직장인이었고 다큐를 찍으면 삶이 재밌어지지 않을까?’ 단순한 생각으로 이 일을 시작했는지 몰라.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진 네가 영화제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던 순간에, 내 이야기가 다른 누군가에게 닿아서 새로운 의미가 되는 과정을 지켜본 그 순간에 나는 다큐멘터리스트로서의 책임감을 다시 생각하게 된 거야. 내 이야기를 위해 다른 사람들의 삶과 이미지를 이용하는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책임감, 뒤늦게 알게 된 다큐의 무게가 한꺼번에 다가와서 쉽게 잠들 수가 없었나봐.

 

 

3.

  영화제가 끝나고 얼마 전, 너를 돌려받았어. 책장 한 편에 너를 세워놓았지. 세련되고 멋지게 디자인된 DVD 사이에 우두커니 자리 잡은 시커먼 테이프 하나. 너를 보면 괜히 짠해. 덩치는 또 어찌나 큰지 절로 눈이 갈 수밖에 없다니까.

 

  태어나게 했으면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게 만든 사람의 도리이겠지. 하지만 너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많지 않구나. 한 영화제에서 상영할 수 있는 작품 수는 한계가 있고 아쉽게 상영기회를 얻지 못한 작품도 많다는 걸 알고 있어. 운이 좋게 첫 상영을 했지만 앞으로의 여정은 알 수 없지. 같은 영화제에서 만났던 어떤 아이들은 또 다른 영화제와 극장으로 걸음을 옮겼고, 공동체를 돌며 바쁜 순회를 시작하는 아이들도 있는데 너를 이렇게 방 안에 혼자 있게 두는 건 왠지 내 잘못인 것만 같아.

 

  다큐멘터리는 참 어려워. 기획부터 제작, 배급까지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앞으로 두 번 세 번 같은 과정을 반복하게 되면 이 어려움이 사라질까. 어쩌면 그렇지 않을지도 몰라. 처음이 어려웠듯 두 번째 세 번째도 어렵게 만들게 될 것 같아. 그래도 요즘엔 내가 다큐를 만들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해. 다큐를 하면서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됐고, 피해왔던 것들을 피하지 않는 법을 배우기도 했고. 많은 것들을 얻었으니 긴 여정의 시작이 아주 나쁘지는 않지?

 

  요즘엔 또 다른 고민도 시작했어. 너를 만들며 배우고 느낀 것들을 다른 작품으로 풀어내고 싶어서. 아직 어떤 형태의 이야기가 될지 잘 그려지지는 않지만 언젠가 또 다른 그날이 오면 그땐 너를 더 자랑스럽게 소개할 수 있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낯선 곳에서 고군분투 하느라 고생 많았다. 무엇보다 네가 있기 때문에 나에게 다음이 생긴 것 같아. 고맙다. 네가 태어나줘서. □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