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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13호 학습소설] 우리가 되는 법(상) -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ACT! 학습소설

by ACT! acteditor 2019.03.07 14: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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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13호 학습소설 2019.03.14.]


우리가 되는 법 (상) - 미디어 리터러시 교육


주일(창작자)


산골소년 훈이


  칠 년 전 아주 잠깐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 있다. 산골소년 훈이. 훈이는 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지리산 깊숙한 골짜기에서 보호자 없이 혼자 살았다. 언제부터 혼자 살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주민등록번호도 없고 말도 못하는 소년은 사람이라기보단 짐승에 가까웠고, 사람들의 관심은 그 어린 소년이 어떻게 음식을 조달하며 살아남았는지, 어느 정도의 지적 능력을 갖고 있는지, 무엇보다 세상에 나와서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며 평범하게 살 수 있는지에 집중됐다.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부터 국내외 언론들은 훈이를 취재하고 인터뷰를 담고 싶어 했지만 청소년 복지기관과 시민단체가 연계하여 소년의 완벽한 격리를 주장했고 국가도 상황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언론과 학계의 접근을 철저히 차단한 채 소수 관계자의 접촉만 허락했다. 정부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강원도 모처에 훈이만을 위한 집을 마련해주었고, 엄정한 선발 절차를 거쳐 위탁 부모 역할을 할 학계 전문가 두 명을 뽑았고, 24시간 상주시키며 부모와 교사의 역할을 맡겼다. 물론 생존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모종의 과학 실험도 이뤄졌음은 부인할 수 없다. 

  2016년 나라 전체가 어수선한 상황에서 관련 정보가 살짝 유출되었지만 대략 10대 초반일 것으로 추정되는 소년 훈이가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고 어떤 교육을 받고 있는지, 지금은 어느 정도 사회화 되었는지에 대한 최후의 정보만은 비밀로 지켜졌다.


일지1


2011년 8월 O일 : 아이에게 훈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맹수처럼 날뛰기만 해서 연구는커녕 관찰조차 힘들었는데 며칠 지나자 쉼터를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닫고는 얌전하게 변해 방구석에 자리를 잡고 모든 것을 지켜보기 시작했다. 호칭이 필요해서 이런 저런 이름을 말했는데 그 어떤 것에도 반응이 없었다. 그러다가 ‘훈’이란 발음에 반응을 해서 훈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전 양육자가 ’훈’자가 들어간 이름으로 불러주었을까? 


2011년 8 월 O일 : 겉모습은 평범한 또래 남자아이였다. 하지만 지각 능력 검사나 운동 시간에 훈이를 지켜보면 짐승을 보는 듯 했다. 동체 시력을 비롯해서 모든 감각기관의 능력이 현대인의 수준을 훨씬 뛰어 넘었고 음식과 장난감에 대한 집중력은 맹수 수준이었다. 어른들이 보호자의 역할을 할 때는 대개 얌전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연구자의 입장에서 무언가를 제지하면 날선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이곳을 집이 아닌 자신을 가둔 우리로 생각하는 것처럼.   

  

2011년 12월 O일 : 산속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고 훈이의 지적 능력을 영아 수준으로 판단했는데 오판이었다. 말과 글을 모를 뿐 각종 기억력, 판단력, 추론능력 등은 또래 아이들 이상이었다. 검진 결과 성대나 혀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늘 일을 보면 확실하다. 훈이가 벽면을 기어오르는 그리마를 보더니 짧은 괴성을 질렀다. 누가 제지하기도 전에 재빨리 달려들어 손바닥으로 그리마를 눌러 죽인 후에는 만족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슬슬 말을 가르쳐도 좋지 않을까.



버려진 아이


  아라는 휴게소에 버려졌다. 강원도 명소 견학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던 중 휴게소에 멈춘 버스에서 내려 화장실로 달려갔던 아라는 자기도 모르는 새에 잠이 들었다. 황당하게도 버스는 제대로 인원 점검을 하지 않고 출발했고 아라는 휴게소에 덩그러니 남았다. 일단 전화를 걸어 해온 언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아라는 언니가 데리러 오기로 한 시간까지 휴게소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휴게소 근처 공원을 돌던 아라는 바람에 날리는 서류를 따라 걸어갔다. 종이를 한 장씩 주우며 걸어가던 아라는 낡은 서류가방을 발견하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는데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영화 같아. 텅 빈 공원 벤치 위 가방에서 종이가 한 장씩 날리는 모습을 보고 아라는 중얼거렸다.

  가방에는 노란 메모지 한 장이 붙어있었다. ‘방송국에 제보해주세요.’ 누군가의 당부가 적힌 메모지를 본 아라는 갑자기 심각해져서 서류에 적힌 내용을 읽지도 않고 바람 따라 춤을 추고 있는 하얀 나비들을 채집하듯 낚아채기 시작했다.


일지2


2012년 3월 O일 : 언어 습득 속도가 놀랍다. 사물에 대응하는 자기만의 낱말을 갖고 있는 듯 매번 같은 소리를 정확하게 발음했고, 짧은 문장의 형태로도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어는 아니지만 자기만의 언어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부모에게 배웠을까. 부디 우리말과 유사한 언어이길 바란다. 


2012년 11월 O일 : 1년도 되지 않아 4,5세 수준의 언어 능력을 습득하다니 믿을 수 없다. 그 원동력은 호기심이다. 그림책으로 보여주는 사물마다 관심을 갖고 질문을 한다. 마치 외계인에게 말을 가르치는 것 같다. 지구의 모든 것에 관심을 갖는 아이를 가르치는 건 보람되지만 지치는 일이다. 그나저나 이젠 놀이방이 작게 느껴진다. 새로운 시설로 이사를 가야겠다.


2013년 3월 O일 : 잘한 일일까. 쉬지 않고 이어지는 질문 세례가 힘들어서 휴대폰으로 DMB 방송을 보여주었더니 훈이가 얌전해졌다. 망부석이 되어 밥도 잊은 채 하루 종일 화면을 바라보는 게 안타까워 전화기를 빼앗으면 난폭한 짐승으로 변하기 때문에 되돌릴 수도 없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거실에 텔레비전을 들여서 시청각 교육으로 방향을 전환해야겠다. 


▲ 출처: Broti Bhattacharya 작품



대외비


  휴게소 담당 바깥 논으로 날아간 것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서류는 원래 자리로 되돌아왔다. 쪽 번호가 적혀 있지 않아 정확한 순서를 파악할 순 없었지만 짧은 글과 사진, 검사 결과들로 가득 찬 서류는 아라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했다. 2011년부터 기록하기 시작한 일지는 한 소년의 성장 과정을 꼼꼼히 담고 있었다. 하루 종일 무얼 하는지, 무얼 먹는지, 키와 몸무게는 어떻게 변하는지. 훈이란 이름의 어린 소년은 자식이나 학생이라기보단 실험용 쥐처럼 다뤄지면서 객관적이고 차가운 낱말들로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수 십 장의 서류를 넘기자 소년의 최근 사진이 나타났다. 아라 또래로 보이는 소년은 컴퓨터 앞에 앉아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증명사진처럼 보이던 이전까지의 보고서 사진과는 다른, 좀 더 어른 같은 느낌의 얼굴을 갖고 있었다. 서류를 보며 아라는 훈이라는 이름의 소년에게 호기심이 생겼다. 누구일까, 어떤 아이길래 이렇게 현미경으로 감시당하는 삶을 살아야 했을까. 그러다가 중간에 끼워져 있던 표지를 발견했다. ‘대외비’. 아라의 심장은 전보다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일지3


2014년 1월 O일 : 훈이는 텔레비전에 빠졌다. 너무 많은 정보와 강한 자극을 피하고자 어린이 채널과 자연 다큐멘터리 채널만 열어줬지만 그것만으로도 온 세상을 다 만난 것처럼 들뜬 모습을 보이며 주변의 진짜 세상은 등졌다. 함께 지냈던 기간 중 가장 조용한 시기를 보내는 중이다. 


2014년 5월 O일 : 텔레비전만 보느라 한글 학습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예 모르는 것 같지는 않다. 책은 대충 훑어보기만 하면서 티비 화면에 뜨는 자막들은 열심히 읽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곧잘 읽고 질문까지 한다. 자신이 읽고 이해하는 게 맞는지 확인하는 차원에서. 문자나 그림, 소리, 제스처 등 기호에 대한 전반적인 해석 능력은 말과 글을 배운지 3년 된 아이 같지 않다. 앞으로의 발전이 기대된다. 티비를 줄이는 건 불가능할 것 같다.


2014년 11월 O일 : 훈이가 자기만의 목소리를 잃었다. 대신 텔레비전에서 본 말과 말투, 행동을 따라한다. 가끔 꾸짖으려고 하면 우리의 말투까지 놀리듯 따라한다. 아무 말이나 던지는 게 아니라 적확한 맥락에서 사용한다는 점도 놀라울 따름이다. 트랜스포머에서 범블비가 라디오의 소리로 말하는 느낌이다.


2015년 1월 O일 : 설날을 맞이하여 파티를 했다. 즐겁게 먹고 떠들던 훈이가 자기 전에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난 왜 밖으로 나갈 수 없어요?’ 그동안 줄곧 하던 거짓말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훈이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몸이 약해서 감기만 걸려도 위험할 수 있단다. 나중에 건강해지면 나가자.” 얼마나 거짓말을 더 해야 할까.


2015년 3월 O일 : 8월 생일(처음 만난 날)에 사주었던 어린이용 태블릿에 반 년 만에 흥미를 잃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원하는 콘텐츠를 직접 골라 볼 수 있어서 즐거워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판 입력과 업로드를 막아둔 걸 깨닫고는 화를 냈다. ‘검색 기능을 이용하고 싶어요.’ 지원팀과 의논해서 제한적 업로드가 가능하게 처리를 한 뒤 성인용 태블릿을 하나 선물해주어야겠다. 요즘 프로젝트 비용에 대해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난감하다.  



도시로 가다


  점점 기온이 내려가서 아라는 휴게소 식당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두유 한 병을 마시며 나머지 서류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내용을 요약해보면 훈이라고 불리는 소년은 2011년에 산 속에 위치한 보호시설로 들어가서 최근까지 그곳에 머문 것으로 보였다. 처음에는 말도 못하고 교육을 받지 못한 것처럼 보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말과 글을 배우고, 그림도 그리고 사진이나 동영상까지 찍으며 동시대의 어린이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성장했다. 아니, 오히려 몇 가지 점에서는 또래 아이들을 능가할 정도였다.

  서류는 누군가에게 보고하기 위한 서류와 훈이를 데리고 있던 관찰자의 개인 일지가 뒤섞여 있었다. 보고서에는 딱딱한 수치와 도표들이 가득했고 훈이가 사람인지 동물인지도 알 수 없는 기계적인 서술로 가득 찼지만, 일지에는 개인적인 느낌과 정돈되지 않은 독백들도 잔뜩 적혀 있었다. 아라는 보고서보다는 일지에 더 마음이 갔다. 하지만 최근 훈이의 근황을 담은 일지는 꽤 많이 누락되어 있었다. 아마 바람에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해가 지자 해온 언니에게 휴게소에 도착했다는 전화가 왔다. 자동차를 빌려 아라를 데리러 온 것이다. 인원 점검도 제대로 못하는 인솔자와 벌써 전화로 한바탕 전쟁을 치루고 온 상태라고 했다. 언니가 무서웠냐고 묻자 아라는 괜찮다고 말했다. 정체 모를 대외비의 서류 때문에 오히려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지만 아직은 다른 사람에게 말해도 될지 몰라서 아라는 일단 배낭 속에 비밀을 감추고 서울로 돌아가기로 했다.


다음 화에서 계속 To be continued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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