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지난 2016년 초 97호에서 첫 막을 올린 '작지만 큰 영화제'가 '인디애니페스트'를 끝으로 약 일 년 반 동안의 여정에 잠시 마침표를 찍으려 한다. 그간 '작지만 큰 영화제'는 이번 호까지 총 17개의 영화제를 다루면서 영화제가 거둘 수 있는 다양한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크기는 비록 작을 지라도, 영화제에 담긴 고민과 생각의 크기는 어느 영화제 못지 않게 크고 풍부했던 행사들. 비록 '작지만 큰 영화제'는 105호에서 끝이 나지만, 바로 그 뒤를 이어 '작지만 큰 영화관' 기획을 통해 전국 각지의 다양한 극장들을 찾아다닐 생각이다. 그간 이 기획에 많은 응원의 목소리를 들려준 독자들과 쉽지 않은 마감과 인터뷰를 흔쾌히 응해주신 전국 각지의 영화제 관계자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드린다.
[ACT! 105호 작지만 큰 영화제 2017.09.11]
독립 애니메이션을 위한 사랑방, 인디애니페스트
성상민(ACT! 편집위원)
독립 영화라는 용어는 이제 많은 이들에게 익숙한 말이 되었지만, ‘독립 애니메이션’이라는 말은 여전히 생소하다. 그나마 작년 좀비 블록버스터 <부산행>으로 일약 화제의 감독이 된 연상호가 <돼지의 왕>(2011)이나 <사이비>(2013), <서울역>(2016) 등 꾸준히 자신의 장편 독립 애니메이션을 개봉하며 조금씩 관객들의 주목을 받았을 뿐이다.
독립 영화가 지닌 정신처럼 독립 애니메이션 역시 자본과 권력으로부터의 독립을 강조하는 것은 큰 차이가 없지만 독립 영화보다도 인지도가 낮은 것은 극장에 쉽게 걸기 어려운 단편 작품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만들기 위해서는 수많은 인력이 소모된다. 1초 가량의 움직임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 8장의 그림(‘프레임’)이, 좀 더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위해서는 초당 24장의 그림이 필요하다. 제작비가 한정된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써는 단편 하나를 만드는 것부터 무척이나 큰 난관이 되고 만다. 단편보다는 장편 작품이 배급이나 유통이 수월한 상황에서, 대다수의 독립 애니메이션들은 대중들에게 알려질 기회도 잘 얻지 못한채 사라지기 일쑤다.
▲ 13회차를 맞이한 인디애니페스트 2017의 포스터.
올해 인디애니페스트는 9월 21일부터 26일까지 남산 서울애니메이션센터와 CGV 명동역, 명동 애니살롱에서 개최된다.
하지만 이렇게 녹록치 않은 상황 속에서도 인디애니페스트는 2005년 처음 영화제의 막을 올린 순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매년 9월 영화제를 개최하며 대중들로 하여금 독립 애니메이션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는 작지만 큰 장을 마련하고 있다. 동시에 좀처럼 모일 곳이 마땅치 않은 독립 애니메이션인 관계자들이 매년 정기적으로 얼굴을 맞대며 함께할 수 있는 공간이 되기도 한다. 인디애니페스트의 초창기 무렵부터 꾸준히 영화제와 함께 하고 있는 최유진 집행위원장을 대학로의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 사무실에서 만나 영화제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독립 애니메이션, 스스로 돌파구를 찾아 나서다
한국에서 최초로 탄생한 독립 영화를 전문적으로 상영하는 영화제 ‘인디포럼’은 이렇다 할 영화제도 없고, 자신들이 손수 만든 영화들을 틀 곳을 찾지 못하던 일군의 감독들이 1996년에 뭉쳐 스스로 영화제를 만들며 시작했다. 인디애니페스트 역시 비슷한 고민과 과정을 거쳐 탄생한 영화제다. 인디애니페스트가 처음 막을 올린 2005년은 1990년대 각지의 대학에서 경쟁적으로 세워진 애니메이션 학과를 통해 수많은 애니메이션 감독들이 배출되던 시기이자, 1990년대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독립 애니메이션들이 국내외 영화제들을 통해 한창 소개되던 때였다. 하지만 동시에 작품을 소개할 기회가 너무나도 제한적인 모순된 시기기도 했다.
“한국에서 열리는 애니메이션 영화제는 일찌감치 국제영화제를 표방한 SICAF(서울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나, PISAF(부천국제학생애니메이션페스티벌, 현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같은 학생영화제 밖엔 없었어요. 정작 독립 애니메이션이 한국에 소개될 장이 마땅치가 않았던 거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마치 ‘인디포럼’을 만든 독립 영화 감독들이 그랬던 것처럼,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들 스스로가 움직이는 수밖엔 없었다. 그렇게 인디애니페스트는 탄생해 한 발짝을 내딛었다.
최유진 집행위원장 역시 인디애니페스트가 한창 막을 올릴 때 발걸음을 함께 했던 사람이다. 2017년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기 전까지 2006년 2회 영화제부터 인디애니페스트에서 꾸준히 사무차장-사무국장 직위를 맡으며 영화제의 많은 일들을 도맡아서 해온 일꾼이다. 그는 어떻게 영화제와 함께 할 수 있었을까. 최유진 집행위원장은 잠시 자신의 고등학생 시절을 떠올렸다. “케이블 방송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해외 독립 애니메이션을 소개하던 프로그램을 봤었죠. 너무 충격적이었어요. 세상에 이런 애니메이션이 있었을 줄은 몰랐었으니까요.” 이후로도 꾸준히 독립 애니메이션에 관심을 가지던 최유진 집행위원장은 이후 문화 관련 대학원에 진학해 행사 기획에 관심을 가지다, 인디애니페스트가 깃발을 막 올릴 무렵 자연스럽게 함께 할 수 있었다.
▲인디애니페스트와 12년째 함께 해온 최유진 인디애니페스트 집행위원장
인디애니페스트와 함께 한지 어느 덧 12년, 인디애니페스트가 처음 지녔을 때 지녔던 문제의식들은 지금도 유효할까. “사실 여전히 큰 차이는 없어요. 한국의 다른 애니메이션 영화제들은 한국 작품을 거의 소개하지 않고요. 인디애니페스트만 한국 애니메이션을 전문적으로 소개하고 있죠.” 하지만 바뀐 것도 있었다. 2005년 영화제의 밑바탕이 된 독립 애니메이션인들의 모임 ‘한국독립애니메이션협회’(KIAFA)나 인디애니페스트가 탄생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독립 애니메이션의 입지는 너무나도 협소했기 때문이다. “2005년 전까지는 정말 극소수의 작품만 영화제를 통해 대중들에게 소개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어요. 협회가 생기고, 인디애니페스트가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작품들을 소개할 수 있는 길이 생겨났죠.”
물론 그 길을 만드는 여정이 결코 쉬웠던 것은 아니다. 다른 독립 영화인들이나 문화예술인들이 그러하듯, 최유진 집행위원장 역시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초의 상황이 결코 쉽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독립’이라는 말이 들어가면 예산을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았던 시기였죠. 그냥 단순히 예산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었어요. 분명 심사를 통과해 지원을 받기로 되어 있는데, 인디애니페스트 개막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도 예산 집행을 언제 할지 정해지지 않고 계속 ‘미정’ 상태인 거예요. 그래서 너무나도 힘들었는데, 그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돼지꿈을 꿨어요. 그리고 그 꿈을 꾼 날 통장에 예산이 입금된 것을 확인했죠. 정말 너무나도 감격스러웠어요.”
영화제만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2007년 인디애니페스트가 상시적으로 독립 애니메이션을 소개하기 위해 연 정기 상영회 프로그램 ‘인디애니씨앗터’도 부득의하게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원래는 인디스페이스가 명동에 개관하며 시작한 상영회였죠. 인디스페이스에 정부 지원이 끊기면서 문을 닫은 이후로 여러 곳을 전전하다 지금은 문을 닫은 신사동 인디플러스에서 한동안 상영회를 진행했었는데, 갑자기 2015년에 영화진흥위원회가 영화제 상영작 등급분류 면제추천 제도를 없애고 ‘사전 심의’를 하겠다는 뜻을 밝혀 논란이 된 적이 있었죠. 그때 상영회를 중단했어요.” 다행히도 영화인들의 많은 반발 끝에 제도 폐지는 없던 일이 되었지만, 상영회 재개는 결코 녹록치 않았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운영하던 독립영화전용관 인디플러스는 이미 정상적으로 굴러가던 상황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다른 상영관을 구하는 것도 도저히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꾸준하게
이렇듯 인디애니페스트는 2005년 처음 막을 올린 이래 순탄한 길만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 독립 애니메이션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이다. 인디애니페스트가 막을 올리기 전보다는 분명 상황은 나아졌다. 연상호를 비롯해 SF 애니메이션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2014)의 장형윤, 학생 시절에 만든 네 개의 단편들을 이어 붙인 옴니버스 애니메이션 <생각보다 맑음>(2015)의 한지원, ‘기러기 아빠’에 정리 해고 위기에 놓인 중년 남성의 애환을 그린 단편 <화장실 콩쿨>(2015)의 이용선 같이 주목받는 독립 애니메이션 감독들도 속속 등장하는 등 대중과의 접점도 증가했다. 그러나 과제 역시 산적하다. 독립 애니메이션이 지속적으로 계속 만들어질 수 있는 재생산 구조는 여전히 미비하고, 애니메이션을 어린이의 전유물로 생각하는 고정관념도 공고하다.
독립 애니메이션에 대한 정책이 부족한 것도 많은 어려움이 되고 있다. 현재 한국의 영화 정책은 장편 독립 영화에 많이 치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원을 잘 받지 못했던 것도 문제였지만, 독립 애니메이션을 위한 유통-배급 플랫폼에 대한 접근이 없어서 많이 힘들었어요.” 최유진 집행위원장은 개봉되지 않은 단편 독립 애니메이션들이 적극적으로 아카이빙되어 많은 공간에서 접근할 수 있는 정책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 해에 약 200여편의 독립 애니메이션이 제작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작품 정도만이 한국영상자료원에 소장되어요. 좀 더 제대로 된 영화 라이브러리 정책, 플랫폼 정책이 도입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순간들이었던 인디애니페스트의 지난 13년, 이런 상황 속에서 인디애니페스트는 어떻게 자신만의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었을까. 최유진 집행위원장은 2008년에 제작된 홍학순 감독의 단편 독립 애니메이션 <띠띠리부 만딩씨>(2008)을 떠올렸다. 어딘가 대충 그린 듯 하면서도 사물이나 인간의 특징을 잘 짚어낸 드로잉과 경쾌한 움직임이 인상적인 단편 애니메이션이었다. “사실 이 작품이 처음 제작될 당시에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았던 작품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이 작품이 인디애니페스트에서 대상을 받았죠. 굉장히 흥겨운 작품인데, 영화제가 다양한 독립 애니메이션을 바라다볼 수 있는 하나의 장이 되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보람찼었죠.”
<띠띠리부 만딩씨> 외에도 많은 독립 애니메이션들이 인디애니페스트를 통해서 주목받고, 새로운 작품들이 계속 제작될 수 있는 길을 만들 수 있었다. “<화장실 콩쿨>을 만든 이용선 감독은 작품을 만들 때 굉장히 힘들었다고 해요. 그런데 이 작품이 인디애니페스트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건 물론 3관왕에 오르고, 그 기세를 타서 작품이 개봉도 할 수 있었죠. 최근 장편 <반도에 살어리랏다>를 완성해 개봉을 준비하고 있는 걸 보면, 우리 영화제가 하나의 계기를 마련한 듯해서 무척이나 감명 깊었죠.” 꾸준히 인디애니페스트를 통해 다양한 독립 애니메이션을 소개한 것이 많은 독립 애니메이션 창작자에게 소중한 버팀목이자 디딤돌이 된 셈이다.
▲ 이용선 감독의 첫 극장 개봉 애니메이션 <화장실 콩쿨>의 포스터.
인디애니페스트에서 호평을 받으며 3관왕(독립보행상, 관객심사단상, 관객상)에 오르며 주목받은 것은 물론,
그 기세를 타고 인디애니페스트와 함께 극장 개봉도 할 수 있었다.
한국에 애니메이션 영화제가 소수에 불과한 상황에서, 유일하게 독립 애니메이션을 위한 공간인 인디애니페스트는 감독들에게 있어 무척이나 소중할 수밖에 없다. “예전에 한 감독이 저에게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인디애니페스트는 매년 찾아오는 명절이자, 명절마다 방문하는 고향 같은 영화제라고요. 언제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고, 다시 돌아올 수 있어서 더욱 그렇게 느낀다고 그러더군요.”
그런 상황에서 인디애니페스트 역시 독립 애니메이션인들에게 큰 힘이 될 수 있도록 다짐을 하고 있다. 최근 아시아 지역의 독립 애니메이션을 다루는 섹션 ‘아시아로’를 추가하는 등 조금씩 영화제가 다루는 범위를 넓히고 있지만, ‘독립 애니메이션’이라는 목표에선 벗어나지 않겠다고 최유진 집행위원장은 선언했다. “갑자기 크기만 키우는 행사가 되고 싶진 않아요. 다소 더디게 보일지라도 조금씩 성장하는 영화제가 되야 하죠. 지금 하는 프로그램을, 부대 행사를, 영화제 운영을 잘 하는 게 중요하지 않나요. 그게 영화제의 기본이니까요.”
인디애니페스트 2017은 9월 21일부터 26일까지 남산 서울애니메이션센터와 CGV명동역, 그리고 인디애니페스트가 2017년 초 새롭게 명동에 마련한 다목적 전시 공간인 ‘애니살롱’을 통해 열릴 예정이다. 독립 애니메이션을 위한 섹션 ‘독립보행’과 ‘새벽비행’을 비롯해 올해 영화제에는 애니메이션과 다큐멘터리를 적극적으로 조합하는 시도를 택했던 오스트레일리아의 데니스 투피코프의 마스터클래스와 그간 한국에 잘 소개되지 않았던 인도 애니메이션 기획전이 눈길을 끈다. 올해 처음 시도하는 기획이자, 팟캐스트를 통해 인디애니페스트의 각종 소식을 전달하는 ‘애니듣수다’도 인디애니페스트를 처음 접하는 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 인디애니페스트가 2017년 초 명동에 마련한 다목적 전시 공간 ‘애니살롱’의 전경
이렇게 풍부한 프로그램들도 인디애니페스트를 빛나게 하지만, 무엇보다 영화제를 더욱 빛나게 만드는 것은 꾸준히 독립 애니메이션의 전초기지로 활약하고 있는 인디애니페스트의 든든한 모습 그 자체가 아닐까. 최유진 집행위원장은 마지막으로 영화제의 스태프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함께 일하는 스태프들에게는 ‘고맙다’라는 말보다 ‘멋지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어렵고 쉽지 않은 순간들에도 때로는 묵묵히, 때로는 웃으며 극복해가는 모습에 제 자신이 매일매일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관객들에게 남기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관객분들에게는 상상 이상의 것들을 보여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특히 독립 애니메이션이란 말이 다소 딱딱하고 어렵다고 느끼셨던 분들은 영화제를 찾으면 다른 세계를 만나실 수 있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영화제가 명절처럼, 고향처럼 느껴진다는 어떤 애니메이션 감독의 말처럼 많은 이들이 독립 애니메이션의 세계를 경험하고 인디애니페스트를 새로운 마음의 고향으로 삼을 수 있기를 바랄 따름이었다. 크기는 다른 영화제들보단 작을지라도, 영화제를 만들고 접하는 이들에게는 결코 이 영화제는 작지 않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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