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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02호 Me,Dear] 그럼에도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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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7. 3. 9.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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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02호 Me,Dear 2017.03.10]  



그럼에도 기억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


양주연(ACT! 편집위원)



 2015년, <옥상자국>이라는 30분짜리 단편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내가 우연히 광주의 외가댁에서 1980년에 생긴 총탄자국을 발견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시작부터 난항이었다. ‘나’, ‘할머니’, ‘총탄자국’, 이렇게 세 가지 단서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벌어지는 일이 아닌 1980년에 이미 일어났고 지금은 각자의 기억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영화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이 글은 그때 내가 느꼈던 여러 어려움들을 복기시켜보는 글이 될 것이다.



△ <옥상자국>(2015) 중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기억이라는 것의 속성에 있었다. 애초부터 단일하고 논리적인 기억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었다. 너무 더운 여름 날, 할머니는 수박을 드시다가 불현듯 날씨처럼 그 날을 기억해내셨다. 혹은 밖이 너무 시끄러워 창문을 닫다가 창문 밖 풍경처럼 그 날을 기억해내셨다. 또 할머니는 엄마와의 말다툼 속에서 과거를 꺼내오기도 하셨다. 그때마다 나는 카메라를 들고 있기도 했고 또 들고 있지 않기도 했다. 기억이 불쑥 튀어나오는 순간들은 언제나 갑작스러웠다.


 하지만 이렇게 스쳐지나가는 기억만으로는 영화가 만들어질 수 없었다. 그해 봄, 여름, 가을, 나는 계절마다 한 차례씩 할머니께 인터뷰를 요청했다. 봄의 인터뷰에서 할머니는 그 일에 관해서라면 당신보다 할아버지가 더 잘 아신다며 할아버지를 옆자리에 대동하시곤 최대한 말을 아끼셨다. 할아버지는 군인을 대변하는 입장에서, 할머니는 자식들을 지켜야했던 ‘엄마’의 입장에서 당시의 기억을 복기하셨다. 첫 번째 인터뷰의 결론은 “우리는 잘 몰라”였다. 그리고 할머니는 나에게 신신당부하셨다. “그런 거 묻지 말고 평범하고 조용히 살라”고. 


 여름에 진행된 인터뷰에서는 할머니 혼자 카메라를 마주했다. 할머니는 살짝 긴장한 내색을 보였다. 평소 집에서 편하게 입고 계시던 옷을 의식하시며 이렇게 입고 촬영해도 되냐고 계속 물으시더니 결국에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으셨다. 인터뷰 도중에는 갑자기 본인이 장사한 이야기를 카메라 앞에서 해도 되냐고 물으시기도 했다. 그러한 긴장감 속에서 할머니는 80년 5월의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할머니의 언어 중에 ‘민주화운동’, ‘민주항쟁’, ‘광주시민’이라는 말의 빈도수가 현저히 증가했다. 급기야 할머니는 이러한 말도 하셨다. “우리 같은 여자들도 다들 그렇게 마음을 먹었어. 학생들 도와줘야한다고.”


 이 말을 들었을 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사실 처음 이 영화를 찍으려했던 이유는 5.18에 대한 기존의 서사에서 반복되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문제의식 때문이었다. 이때의 주된 서사는 ‘주먹밥’으로 상징된다. 실제로 광주 양동시장에는 5.18 당시 시장의 여인들이 학생들에게 주먹밥 등의 먹을 것을 주며 도왔다는 내용의 비석이 새겨져있다. 이 이야기만으로는 포섭될 수도, 되어서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해보고 싶었다.


 가을의 인터뷰는 할머니와 이모할머니, 두 분과 함께 진행했다. 두 분은 1980년 당시 양동시장에서 주단집을 이웃해서 운영하셨을 만큼 막역한 사이이다. 그래서 지금까지의 인터뷰와 달리 세 번째 인터뷰는 두 분이 ‘수다’를 나누듯, 가장 편안하게 진행되었다. 흥미로웠던 것은 친밀한 관계로 늘 함께 시간을 보내시는 두 분이, 35년 전 그 날만큼은 처음 이야기하듯이 기억을 상기시키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이 대화 속에서는 ‘민주화운동’이나 ‘민주항쟁’, ‘광주시민’같은 단어는 등장하지 않았다. 둘의 대화 속에서는 그저 그 날 다른 시장 상인들, 주변 행인들로부터 들었던 소문들, 목격담 등이 주로 흘러나왔다. 이모할머니는 지금도 나라가 시끄러워질 때면 그때가 생각나서 무섭다는 이야기를 해주셨다.



△ <옥상자국>(2015) 중에서


 겨울이 오고, 1년 여간 할머니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내가 얻은 결론은 한 인물의 단일하고 논리적인 기억이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여전히 할머니의 기억에 다가갈 수 없다. 그 세계는 내가 알 수 없는 ‘침묵’과 ‘망각’이 채우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할머니는 때로는 ‘민주화운동’을 힘주어 이야기하시고, 또 때로는 아직도 광주의 5월을 이야기하는 자들에게 시니컬한 반응을 보이신다.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애초부터 ‘완연한 기억’이란 가능한 일이었을까. 오히려 물어야할 것은 ‘완연한 기억’ 그 자체라기보다는 무엇이 그렇게 이야기되고 있는 지에 대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 우리에게 ‘완연한 기억’으로서 기억되는 기억들은 어떠한 자리에 위치해있는 것일까.


 <옥상자국>을 만들었던 경험은 기억을 이야기한다는 것이 단지 할머니와 관계 맺고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것 이상의 또 다른 무언가를 필요로 한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다. 밀려난 기억들은 ‘완연한 기억’의 주변을 맴돈다. 그 기억들이 어떤 말을 건네 오고 있는지 그 말을 듣고 해석하고 재배치하는 일은 오롯이 연출자/연구자의 몫이다. ‘당사자’의 기억에 갇히지 않으면서도 기존의 주된 서사에 대해 문제 제기할 수 있는 또 다른 기억은 어떻게 가능할까. 그 수많은 기억의 결들이 몇 개의 질문과 만났을 때, 새로운 이야기는 언젠가 태어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



<필자소개>



양주연


비판적 관점의 영상작업이나 글쓰기 작업에 관심이 많다.

<양동의 그림자>(2013), <내일의 노래>(2014), <옥상자국>(2015)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여성사에 대한 관심을 가졌다면

지금은 여성학을 배우며 여성사가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을 만들어 가고 있다.

재미있는 작업들을 계속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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