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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53호 특집] 저항의 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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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6. 8. 10.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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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53호 / 2008년 7월 30일

 

 

저항의 중계 



손 장 훈 (ACT! 객원 편집위원)
 
중견수에게 하늘은?


“39년간 필드에서 대략 1만 3천여 개의 플라이를 잡았지만, 그 때를 제외하고는 하늘을 본 적이 없구나.”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소설 <중견수>에 나오는 주인공에게 ‘하늘'은 그저 공이 날아오는 장소에 불과했다. 높고 파란 하늘이 인간에게 주는 감동은 그에게 없었다. 사람은 무언가를 바라볼 때, 자신의 경험과 그것에 바탕을 둔 관점으로 ‘대상'을 인식한다. 우리는 그 인식의 틀을 ‘프레임'이라고 부른다. 
프레임은 개인적으로 형성되는 것만은 아니다. 특정한 종류의 사건이 한 사회에서 반복되고, 그 누적된 경험은 또한 사회적 프레임을 만든다. 사회적 프레임은 자연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 어떤 대상을 인식하는 관점을 사회적으로 통제하는 것은 권력자들에게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특히 권력에 반대하는 집회나 거리 행진과 같은 사건에 대해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 사건들을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고, 인식하느냐' 하는 문제에 있어서 권력은 두 개 프레임을 사람들에게 유포해 왔다. ‘합법-불법', ‘폭력-비폭력' 프레임이 바로 그것이다.





두 개의 프레임


법은 가끔 통하지 않는다. 이번 촛불집회에서 일몰 이후 집회, 무단 도로 점거는 불법이라는 논리는 명박산성 너머에서 나오는 경찰 안내방송에서도 꾸준히 반복되었지만 효과가 없었다. 미국산 소고기가 불러올 건강권의 위협과 정부의 권위주의적 형태는 더 많은 사람들을 시청과 광화문의 도로로 불러 모았다. 평소에 무단횡단도 주변을 둘러보고 하던 평범한 사람들이 ‘법'을 어기고도 태연했다. 불법에 대한 동의는 광범위했다. 참여하지 않은 사람들은 집회가 주는 시끄러움과 교통체증이라는 불편을 감내했다. 몸으로 느낄 수 없는 법전 속의 ‘법'은 전면적 저항의 국면에서는 전혀 사람들을 설득하지 못했다. 합법-불법 프레임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다른 프레임이 등장했다. ‘폭력-비폭력' 이었다. 

인간의 신체에 가해지는 물리적 위해인 폭력은 사람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생명의 존엄성이 최고의 가치인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 폭력은 금기이며, 개인이나 비국가 단체가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폭력은 사회계약으로 질서를 유지할 권한을 부여받은 국가만이 사용할 수 도구이다. 국가에 의한 폭력의 독점은 ‘폭력'을 정의할 수 있는 권한까지 가질 수 있게 해 주었다. 경찰을 동원해 거리의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것은 법과 질서를 유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예방이지만 사람들이 청와대에 가지 위해 버스를 들어내고, 경찰을 밀어붙이는 것은 국가의 정의에 의해 ‘폭력'이 된다. 사진과 영상으로 찍힌 폭력의 현장은 사람들의 시각을 자극하고, 곧 시위대의 정당성을 의심하는 기제로 활용된다. 'Seeing is Believing'의 시대, 눈에 보이는 것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한다.




전술로서의 ‘비폭력'


저항의 방식으로 ‘비폭력'이 줄기차게 외쳐졌던 것도 바로 이런 측면 때문이다. 자신들을 ‘폭도'로 규정하려는 국가에 맞서 ‘비폭력'의 전술을 고수했던 것이다. 비폭력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이것은 6월 10일 100만 국민대행진 이후 소강상태 빠졌던 촛불집회는 ‘비폭력'을 주장하며 서울 시청 앞에서 미사와 법회, 예배 등을 올린 종교단체에 의해 다시 활기를 되찾았다. 그런 과정에서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은 국가의 관점에서 늘 저항자들을 ‘폭도'로 만들려 했던 기존의 언론, 미디어에 대항해 저항의 ‘중계'를 시도했다. 웹캠과 와이브로, 노트북을 가지고 자신들의 눈으로 집회를 중계함으로써 폭력을 사용하는 국가와 비폭력의 저항자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려 했다. 

비폭력 전술은 평화시민과 폭력경찰과 같은 방식으로 무력한 자신과 공격하는 상대를 나눈다. 힘없는 자를 때리는 사람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도덕적 반응을 환기시키고, 그런 과정을 통해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희생자로 미디어에 표상시키는데 중요하다. 하지만 집회에 참가한 모든 이들에게 오른뺨을 맞으면 왼뺨을 내미는 ‘성자'가 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 저항의 국면에서는 국가에 의해 자신의 삶을 침식당한 누군가에 의한 우발적 폭력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그 순간 비폭력 전술과 저항의 중계로 확보한 저항자들의 도덕적 정당성은 무너지고, 그들 전체는 더 이상 희생자가 아니다. 다시 폭도가 된다.




‘비극적' 존재


고대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들과 달리 근대적인 주체들에게 더 이상 슬픔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는 운명의 장난으로 ‘죄'를 범하는 오이디푸스와는 달리 자유로운 근대적 주체는 자신의 선택으로 ‘죄'를 짓기에 윤리적인 문제만을 낳는다. 폭력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물리력을 행사한 과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제기를 하기 않은 채 개인 혹은 단체의 ‘행위' 그 자체에만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근대 아니 탈근대의 인간은 여전히 자유롭지 않다. 신이 주재하는 운명에 좌지우지 되지는 않지만 자본과 국가라는 ‘구조'는 개인의 생존까지 쥐락펴락 하고 있다. 이번 촛불집회를 가장 먼저 주도한 것은 10대 청소년들이다. 그들은 급식이라는 방식을 통해 어쩔 수 없이 미국산 소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는 계층들로, 선택의 기회를 박탈당한다. ‘입시'라는 지옥을 벗어나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실현할 미래에 의도하지 않는 원인으로 죽음을 맞을 수도 있다는 불안은 그들로 하여금 촛불을 들게 했다. 소고기 문제로 촉발된 문제제기와 소통을 거부하는 정부의 권위적인 모습은 정부의 정책으로 ‘생존'을 위협받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을 10대와 함께 거리로 이끌었다. 그들은 현대적 의미의 비극적 존재들이다. 우리가 그들이 어쩔 수 없이 행사하는 물리적 행동을 단지 ‘폭력'으로 바라보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번 촛불집회는 ‘먼저 간 자'들에 대한 죄의식과 권력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찼던 이전의 저항과는 달리 재치 있고 발랄한 방식이었다. ‘거리를 가득채운 자발적 시민들의 유쾌한 축제', 대부분의 사람들이 보고 있는 촛불집회의 모습이다. 하지만 저항은 그 방식에 있어서 ‘축제'일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슬픔'을 품고 있다.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국가권력의 횡포에 대한 사람들의 반작용이 저항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현재의 대의제 하에서는 자신의 삶을 방어하기 위한 다른 방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거리로 나왔으며, 시간이 지나도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막막함은 권력의 대리인인 경찰에 대한 물리적 행동을 불렀다. 타인의 육체에 위해를 가한 경험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도덕적 상처로 남고, 또다른 사람들에게는 내재되어 있던 공격적 성향을 강화시키는 기제로 작용한다. 비폭력은 ‘선'이고, 폭력은 ‘악'이라는 단순한 이분법과 그것에 기반한 저항의 중계로는 그 속에 은폐되어 있는 비극적 요소들을 발견하지 못한다.





중계가 아닌 ‘이야기'


촛불 집회동안 ‘아프리카'에는 수많은 중계방이 개설되어, 저항의 생생한 현장을 사람들에게 전했다. 국가의 직접적 폭력이 그대로 노출된 집회 중계방송을 보면서 사람들은 분노하고, 동시에 비폭력의 희생자들에 공감했다. 방송을 보다가 택시를 타고 시청과 광화문으로 나오는가 하면, 먹을 것과 마실 거리를 보내기도 했다. 아마 아프리카의 중계방이 없었다면 이렇게 광범위한 저항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계는 비폭력의 저항자와 폭력을 행사하는 국가라는 모습만을 부각시키면서 국가가 설정해놓은 ‘폭력과 비폭력'의 프레임을 넘지 못했다. 진정 비극적인 것은 경찰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당하는 저항자들이 아니라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삶이다. 그들이 희생자의 자리에 고정되어 있기를 거부하고, 경찰에게 욕을 하고, 돌을 던질 수도 있다. 그런 장면에서 ‘중계'는 적절하지 않다. 중계라는 방식을 통해 ‘무엇이 그들을 거리로 나오게 했으며 폭력으로까지 이끌었는가?' 하는 질문에 답을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촛불집회는 미국산 소고기라는 단일 이슈로 시작되었지만 나중에는 한국 사회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미디어로 할 수 있는 일에 ‘중계'만 있는 것은 아니다. 김경욱 이랜드일반노조 위원장은 촛불집회에서 이런 고백을 했다. “촛불집회에 나오면서도, 전기가 끊겨 아이들이 촛불을 켜 놓고 공부한다던 비정규직 조합원의 말이 떠올라 차마 촛불을 못 켰다.” 김경욱 위원장뿐만 아니라 집회에 나온 사람들에게는 다 나름의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촛불집회에 나온 사람들의 다양한 비극적 이야기를 짧은 영상으로 만들어 중계와 함께 편성했으면 어떠했을까? 단지 그것으로 국가의 최종무기를 무력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폭력-비폭력 프레임과 그것이 빚어내는 스펙터클에만 주목하는 것에서 벗어나 ‘구조'에 대해 잠시라도 고민할 수 있는 계기는 되었을지 모른다. 현장에서 그들의 말을 잠깐 듣는 거리 인터뷰보다 더 생생한 그들의 이야기를 영상은 할 수 있다. 색다른 기획과 약간의 수고로움만 있으면 된다.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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