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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92호 학습소설] (3) 님아, 그 시계를 차지 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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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5. 1. 29.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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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92호 학습소설 2015.03.23]


(3) 님아, 그 시계를 차지 마오

- 웨어러블 디바이스와 e헬스


주일 (창작자)

 


편집자 주 : 본 소설을 읽기 전에 최근 미국 CES 2015 박람회에서 발표된 각종 웨어러블 디바이스를 한 번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http://venturebeat.com/2015/01/07/i-tried-on-56-wearables-today-heres-a-photo-of-every-single-one-of-them/





프롤로그

 

 때는 바야흐로 이천 십팔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고 그간 고삐처럼 옥죄던 각종 규제가 완화되거나 폐기되자 기업들은 본연의 목적인 수익 증대를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한 번도 그러지 않은 적은 없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전보다 훨씬 심해졌다는 이야기다. 그런 분위기는 2017년에 대대적으로 벌어진 대못박기식’ FTA 이후로 전세계적 규모로 확장되는데 처음 예상과는 다르게 자유 시장, 자유 경쟁을 부르짓던 국내 대기업들이 다국적기업들과의 경쟁에서 희생양이란 배역을 맡고 만다. 화무십일홍이라 했던가.

 국가대표 기업 S사조차 중국 기업에 밀리며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자 온국민이 하나가 되어 S사 제품 사모으기 운동을 벌인다. 11제품 사모으기 운동에 이어 S사 제품을 사지 않으면 매국노 취급을 당하는 상황도 종종 벌어지고 만다. 덕분에 굳이 K모 스케이트 선수나 L모 배우가 아니라도 S사 제품으로 시작되고 S사 제품으로 끝나는 PPL 드라마를 찍을 수 있을 정도였다. S사가 지은 아파트에 사는 누군가가 S사 스마트폰 알람으로 아침에 일어나고 S사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마신 뒤 S사 텔레비전으로 뉴스를 보고 S사에서 만든 옷을 입고 S사가 소유한 언론사의 신문을 들고 출근을 한다는 식의 광고. 그런 거대한 변화 속에서 사람들은 그저 묵묵히 그리고 열심히 일할 뿐이었다.

 국가의 모든 구성원과 주체들이 수평적으로 대동단결하여 기업 밀어주기에 힘을 썼다면 개인들의 삶은 수직적으로 통합되었다. 이른바 디지털화. 정부와 기업의 업무가 완전히 전산화된 것을 넘어 국민 각자가 생산하고 향유하는 모든 자료들이 디지털로 가공되어 축적·유통되었고 친구간의 수다나 일기, 가계부 같은 지극히 사적인 자료까지 활용이 쉽고 가공하기 쉽다는 이유로 01로 변환되어 여기저기에 저장되었다. 모든 것이 저장된다는 말은 모든 것을 뒤져 볼 수 있다는 말이지만, 그런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우려는 효율성이라는 대의 앞에서 한낱 옹알이에 그치고 만다.

 이 이야기는 그 모든 것이 시작되던 무렵, 건강에 관심이 많던 두 사람의 이야기다.



- 서울특별시 GS동에 사는 L씨의 이야기 -

 

 공원이 내려다 보이는 적당히 높은 오피스텔의 수많은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밤 늦게까지 일을 한 지원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배개에 얼굴을 파묻고 엎드린 채 잠을 잤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누가 건드려도 깨지 않을 것만 같던 그가 일어난 건 아주 작은 알람 소리 때문이었다. 손목에 차고 있던 얇은 밴드에서 알람 소리와 진동이 울렸고 지원은 불과 몇 초 전에 눈을 감았던 것처럼 눈을 떴다. 매일 아침을 깨우는 소리는 지원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스트레칭을 시작하자 비로소 멈췄다.

 지원의 손목에 감겨 있는 그것은 얼핏 보면 예쁘장한 모양의 손목 시계 같지만 요즘 한창 유행하고 있는 스마트 시계로 다양한 기능이 내장되어 있는 제품이었다. 기본적으로는 스마트폰에서 보내는 각종 메시지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용도로 쓰지만 시계 자체에도 크기만으로는 들어 있으리라 짐작하기 힘들만큼 여러 가지 최첨단 기능이 들어 있었다. 사용자의 움직임을 매분 매초 기록하고 분석하여 정보나 서비스를 제공할 필요가 있을 때 알아서 스피커와 화면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손목에 직접 닿는 부분에는 심박센서가 달려 있어 평소 사용자의 맥박을 측정하여 나중에 건강 상태를 확인할 수 있음은 물론 사용자의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명상이나 휴식을 권유하는 등 개인 주치의의 역할까지 수행하는 정도다. 얼마 전까지 아침마다 잠과 싸우느라 늘 피곤한 상태에서 깨어나던 지원도 스마트 시계의 수면 습관 분석 기능에 힘입어 출근 시간 무렵에는 가볍게 일어날 수 있는 상태로 저절로 바뀌기도 했다. 예전에는 미래 사회를 그리는 소설이나 영화에나 나올 법한 혁신적인 변화였지만 지금은 대부분의 스마트 시계에 기본으로 내장되어 있는 기능이었다. 그러다 보니 각 제조사들은 그저 브랜드와 디자인으로나 차별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때 스마트폰이 그랬던 것처럼.

 가볍게 스트레칭을 마친 지원은 조깅복으로 갈아입고 집에서 내려다 보이는 곳에 있는 공원으로 갔다. 운동 삼아 달리는 삼십 분 동안 스마트 시계가 밤사이 저장해둔 주요 뉴스를 블루투스 헤드셋을 통해 음성으로 읽어 주었다. 운동을 마치고 슬쩍 시계의 버튼을 누르니, 달리기 거리-속도-소모 열량-맥박 등을 요약해주며 지원이 건강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주기도 했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무선인터넷과 연결되어 있는 스마트 체중계에 올라가니 체질량지수와 체지방지수가 스마트 시계 화면에 나타났다. 지원은, 좀 더 뛰어야 하나, 라고 자조 섞인 말을 내뱉고는 출근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몸이 불편한 교통 약자들을 위해 도시 곳곳에 승강기와 에스컬레이터가 생겼지만 지원은 5층 이하의 건물에선 매번 계단을 이용했다. 단순히 운동을 통해 불필요한 열량을 소모하는 것을 넘어 같은 시계를 쓰는 직장 동료들과 한 달에 한 번씩 회식 내기를 하기 때문이다. 운동량이 최하위를 기록한 2인이 다섯 명 전체가 함께 하는 회식을 책임지는 일종의 벌칙인 셈인데, 갈수록 바빠지는 일상 속에서 지원처럼 따로 시간을 내어 운동을 하는 건 모두에게 가능한 일은 아니기 때문에 각자 처지에 맞는 운동을 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였다. 출근길 전철에서 지원이 스마트 시계와 연동되는 건강 관리 앱에 들어가 보니 친구로 등록된 사람들의 운동량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는데 늘 그렇듯 1위는 지원의 차지였다. 아마 다음 달쯤이면 다른 사람들의 규칙 개정 요구가 들어 올 지도 모르겠다.

 출근 후 책상 정리와 업무 준비를 하던 지원은 갑자기 옥상으로 올라갔다. 갑자기라기보다는 시계의 긴급한 알람에 따라 지체없이 움직였다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옥상에서 마천루 너머 먼곳을 바라보며 지원은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다. 시계에서 흘러나오는 나긋한 목소리가 일러주는 대로 심호흡을 한 것이다. 맥박이 갑자기 빨라졌습니다, 스트레스를 받으셨나요,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릴랙스, 들이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지원이 몇 달간 준비하던 프로젝트의 최종 발표를 불과 두 시간 앞에 두고 긴장하자 시계가 친절하게도 자기 주인이 평정심을 찾도록 도와주었다.

 

경제적, 공간적 제약 때문에 의료 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일은 사라질 것입니다.”


 어두운 회의실에서 프로젝터의 불빛을 받으며 지원은 발표를 시작했다. 의료서비스로부터 소외되어 있는 계층과 지금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손쉽게 건강을 관리받고 싶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보건복지부와 S사의 협력사업인 국민e헬스 프로젝트홍보 영상을 처음으로 소개하는 자리였다. 짙은 색 양복을 입고 헛점 하나라도 찾으면 그 즉시 단두대의 줄을 끊을 것 같은 표정을 한 임원급 관계자들 앞에서 지원은 차분히 발표를 이어갔다.


낙도와 산간 지방의 의료 서비스 취약 계층과 장애인, 독거 노인처럼 병원 왕래가 힘든 계층을 위해 이 서비스를 준비했습니다.”


 화면 위로는 그동안 사업을 준비하며 개념으로만 오가던 내용들이 구체적인 일러스트 형태로 뿌려지고 있었다. 산속에서 단둘이 살면서 폭설이 내리면 고립되어 병원이나 약국을 갈 수 없는 노부부, 장애인 자녀가 집에 있지만 밤늦게 퇴근하기 때문에 자식의 위급한 상황을 돌보기 어려운 홀어머니, 매일 폐지를 주으며 홀로 쓸쓸히 살아가면서 건강보험으로 저렴하게 병원에 다니는 것조차 미안하고 부끄러운 할아버지. 시간이 흐르고 의료 서비스의 품질이 높아져도 여전히 혜택의 사각지대에 놓인 소외 계층의 모습이 잔뜩 이어졌다.


국가는 한 사람의 국민조차 의료 기본권으로부터 소외되도록 방치해서는 안됩니다.”


 면 단위 지역에 개설된 허름한 보건소와 직접 찾아다니는 왕진 의료진의 초라한 모습이 화면에 나왔다. 열정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 화면 속 의사들의 모습은 점점 흑백으로 변해가며 어두워졌다. 잠시 후 화려한 효과와 함께 몇 개의 제품이 등장했다. 스마트 시계보다 단순해진 형태의 팔찌, 가정용 믹서기 크기의 원격 검진기, 진료실에 설치된 의사를 위한 첨단 원격 진료 시스템, 슈퍼컴퓨터와 비싸 보이는 거대한 장비들로 가득한 데이터 센터 등이 하나씩 보여지자 의자에 깊숙히 몸을 묻어 두고 있던 사람들의 눈빛이 호기심 어린 모습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우리에겐 성공 경험이 있습니다. 90년대 말부터 보급된 국민컴퓨터와 초고속 인터넷망의 아이티 인프라가 그것입니다.”


 국가가 주도하여 저렴한 가격에 일반 국민들에게 보급했던 국민PC’란 이름을 단 컴퓨터 광고들이 짧게 흘러 지나갔다. 그리고 인기 연예인들을 모델로 내세워 전투적으로 마케팅했던 초고속통신망 광고가 이어졌다. 마지막으로는 전세계에서도 유례를 보기 힘들 정도로 높았던 컴퓨터와 인터넷망 보급률을 나타내는 숫자와 그래프들이 화려하고 역동적인 애니메이션으로 보여졌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모두가 건강한 대한민국입니다.”


 많은 가정에 비치된 원격 검진기의 모습이 보인다. 노인들이 검진기의 센서에 손을 갖다 대자 맥박과 혈압이 수치로 나타난다. 검진기의 액정 화면에는 도시에 있는 의사의 모습이 떠 있고 노인들은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를 통해 진찰을 받는다. 잠시 후 검진기의 한쪽에선 처방전이 출력된다. 화면이 바뀌면 다양한 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그들의 손목에는 어김없이 스마트 팔찌가 채워져 있다. 각자의 팔찌에서 생산된 데이터들이 하늘로 날아가면 데이터 센터의 컴퓨터들이 불빛을 깜빡거리며 무언가를 처리한다. 곧이어 사람들 앞에 놓인 스마트폰과 컴퓨터 화면에는 건강 관리를 위한 안내사항이 나타난다. 시골에 있는 고령 부모의 건강 정보를 확인하는 자녀들의 모습, 유치원과 학교에서 활동 중인 어린 자녀들의 건강 상태를 확인하는 젊은 부부의 모습 등이 교차되며 나타났다. 그리고는 웃는 사람들의 얼굴이 작아지며 거대한 모자이크의 일부가 된다.


환자들이 아픈 뒤에 찾아가는 서비스가 아니라 아프기 전에 미리 알아 차려서 건강 문제를 해결하는 미래의 의료 서비스, ‘국민e헬스를 통해 시작합니다.”


 지원은 발표를 마치며 조심스레 인사를 했다. 청중의 반응은 나쁘지 않아 보였다. 곧이어 지원의 상사로 보이는 사람이 나타나서 그동안의 업무 진행과정을 간략히 설명했다. 설명이 끝난 후 상사의 신호가 떨어지자 지원은 위에서 장황하게 설명했던 내용들이 모두 담긴 1분 짜리 정책 홍보 영상을 틀었다.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게 딱 필요한만큼의 내용을 담고 있는, 결론은 언제나 희망적으로 끝나는 그런 류의 영상. 재생이 끝나자 회의실이 천천히 밝아졌다. 곧이어 굳은 표정으로 앉아 있던 청중들의 질문이 이어졌다. 하지만 굳은 표정과는 다르게 그들의 목소리에는 만족감과 칭찬이 묻어 나왔다. 아무래도 오늘은 거한 회식이 있겠네, 지금 몸매를 유지하려면 얼마나 더 뛰어야 하는 걸까, 라며 지원은 고민에 빠졌다.

 



▲ 그림2 Fitbit사의 제품 홍보 내용 중 건강 관리 소프트웨어 화면




▲ 그림3 Fitbit사의 제품 홍보 내용 중 기능설명



- 경기도 PG면에 사는 J씨의 이야기 -

 

이게 말이 돼!”


 민협이 보험회사에 온 건 사 년만이었다. 사 년전에 왔을 땐 고래고래 소리를 치며 난동을 피웠다. 평소엔 얌전한 그였지만 그땐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취직을 했을 즈음, 그의 어머니가 암에 걸렸다. 가족이라곤 어머니와 민협 단둘이었기에 누구에게 의지할 수도 없던 터라 입사한 지 한 달밖에 안되는 회사를 그만두고 어머니 간병에 매달려야만 했다. 다행히도 그의 어머니는 생명보험사의 보험설계사였고, 종신보험과 CI보험, 실비보험 등 병과 싸울 준비는 진작부터 단단히 해두었기 때문에 경제적 걱정은 잠시 미뤄두고 유명 암 전문병원에 입원하여 성실하게 항암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반 년간의 치료가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도 된다는 말에 퇴원까지 했는데 고작 석 달만에 암이 재발하여 순식간에 말기에 이르고 말았다. 그 석 달간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민협은 지금도 혈압이 오르며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김난희 고객님은 OOO 질병코드에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암진단자금 대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신청하신 보험금을 지급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퇴원 후 보험사에 보험금 지급을 신청하자 한참만에 나온 답변이었다. 항암치료를 받으며 병원비만 삼천 만원이 넘게 나왔고 반 년 넘게 수입 없이 생활하느라 늘어난 빚을 갚기 위해서는 보험금이 절실히 필요했는데 수많은 서류를 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보험사는 약속했던 보험금을 지급할 수 없다고 했다. 아무리 따지고 울고 불고 매달려도 소용이 없었다. 보험사 측 의사가 심사한 뒤 적어낸 질병코드가 민협모가 가입한 보험의 보장 질병과 다르다는 것이 이유의 전부였다. 그나마 실비보험과 일부 수술비에 대한 보험금이 나와서 필요한 돈의 절반은 메꿀 수 있었지만 이십 년 넘게 주변 사람들에게 보험을 권유하고 다닌 설계사조차 보험사에게 배신당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민협모는 즉시 기력을 잃었고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입원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늘 건강해라.”


 민협의 어머니는 이 말만 남기고 다신 퇴원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로 민협은 한동안 실의에 빠져 폐인처럼 살았고, 반 년쯤 지난 후에야 일상으로 돌아왔다. 다행히 직장에 들어가자마자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도 낳았다. 그리고 지금, 민협은 아이를 데리고 어린이 보험을 들기 위해 직접 보험사에 찾아 왔다.


여기, 여기, 여기에 동의해주시면 됩니다.”


 담당 보험설계사는 태블릿PC를 내밀며 동의와 서명을 요구했다. 약관 내용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듣긴 했지만 워낙 말이 빠르고 생소한 용어들 투성이라 대충 넘어갔다. 어차피 누가 이런 것에 신경을 쓰겠어, 그렇게 큰 일을 겪었던 민협이지만 오랜만에 찾아온 행복에 눈이 멀어 있던 터라 꼼꼼이 읽어 보지 않고 시키는 대로 동의와 서명을 했다. 대체 몇 개의 항목에 를 선택하고 서명을 한 건지 셀 수도 없었다.


지금부터 일 년간 이 밴드를 착용하고 계셔야 합니다.”


 보험사에 방문하여 보험을 가입한 뒤 며칠 지나지 않아 민협의 집으로 보험사 측 간호사가 방문했다. 처음에는 의례적으로 아이의 건강만 검진하는 듯 했으나 곧이어 부모들의 건강도 확인했다. 혈압을 재고 맥박을 재고 이 동작 저 동작을 시켜보더니 갖고 있는 스마트 패드에 열심히 기록했다. 그 이후에 한참을 떠들었는데 요약하자면 이랬다. 보험 가입시에 개인 정보뿐만 아니라 개인 의료정보 수집에도 동의를 했기 때문에 사측에서는 피보험자의 3대까지 의료기록을 조회했다, 민협 아버지의 사인은 교통사고여서 질병과는 무관하지만 어머니는 암으로 사망하여서 가족력일 확률이 있다, 또한 민협의 장인 장모도 심장 질환으로 병원을 다닌 기록이 있기 때문에 곧바로 보험이 승인되기는 어렵다, , 앞으로 일 년 사계절 동안 세 명의 가족이 보험사에서 지급한 스마트 밴드를 착용한 채 생활을 한 뒤 수집된 생체 정보를 분석해 아무런 문제가 없을 시에는 보험의 효력이 발행된다, 만약 측정 결과 이상한 점이 발견되면 장래에 발생할 확률이 높은 질병을 제외한 나머지에 대해서만 가입이 승인될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보험료가 계약 당시보다 오를 수도 있다. 민협은 황당했다. 자신의 어머니가 설계사로 활동하던 당시만 해도 보험 가입은 쉬웠다. 건강 진단도 특이 사항이 있는 사람을 제외하곤 매우 요식적이었다. 그런데 이젠 보험에 가입하려면 직계 가족 3대의 의료 기록을 제공해야 했다. 게다가 성폭행범이 전자 발찌를 차듯 일년 동안 이상한 팔찌를 차고 일상의 모든 행동과 몸의 변화를 자발적으로 갖다 바쳐야 했다. 간호사가 부모 두 사람에 이어 아이의 팔에 유아용 스마트 밴드를 채우는 모습을 보며 민협은 구역질이 났다.

 일 년이 지났다. 다행히 세 사람의 건강에는 문제가 없는 것으로 판명됐다. 하지만 보험사의 스마트 밴드를 반납하자마자 광고 폭격이 시작됐다.


서미선씨는 운동량이 현저히 부족합니다.”


 민협 아내의 스마트폰으로는 피트니스 센터와 운동기구를 홍보하는 광고물이 날아왔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운동할 틈과 정신이 어디 있겠냐만 집에서도 쉽게 운동할 수 있다는 기구들을 홍보하는 요란한 광고는 그칠 줄을 몰랐다.


전민협씨는 왼쪽 다리가 불편하신가요?”


 스마트밴드를 착용할 당시 민협은 정기적으로 컴퓨터에 데이터를 전송해서 자신의 건강 상태를 확인했다. 택배 배송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또래들 중에서는 활동량이 많은 편이라 건강에 대해 특별히 걱정하지 않았던 그였는데, 건강 관리 앱은 그의 걸음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는 경고를 해주었다. 두 다리의 근육량이 비대칭이어서 걸음걸이가 고르지 못합니다, 바른 자세를 유지하도록 노력하세요. 그때는 그저 특이사항을 알려주는 줄로만 생각했는데 이젠 교정 신발이나 재활의학과 물리치료를 권유하는 광고의 근거 자료로 사용되는 중이었다.


암을 예방하고 아토피로부터 아이를 보호해주는 이유식!”


 당연히 아이를 위한 음식과 의약품에 대한 광고도 쏟아졌다. 스마트폰 스팸 문자는 기본이고, 컴퓨터로 인터넷을 돌아다닐 때마다 유기농 건강식 광고 배너가 떴고, 심지어는 아이피티비를 볼 때도 방송 프로그램 사이 광고시간마다 민협 가정에 필요한 맞춤 상품 광고가 흘러나오기까지 했다.


국민e헬스가 국민 건강 시대를 열겠습니다.”


 텔레비전에선 수많은 전문가와 정치인들이 머지 않아 각 가정마다 원격 검진기가 보급된다고 떠들었다. 이것만 있으면 더이상 병원에 찾아가지 않아도 의사에게 진찰을 받을 수 있고, 몸에 특별한 문제가 생기기 전부터 미리 이상한 징후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예전처럼 치료할 수 있는 시기를 놓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장담했다.


걱정하실 필요 없다니까요. 스마트폰이나 스마트밴드에서 수집되는 생체정보들은 사용자가 누구인지를 알려주는 개인식별정보는 삭제된 채 저장됩니다. 이렇게 모인 불특정다수의 정보들은 국민 전체의 건강을 위한 연구의 근거 데이터로 사용될 뿐입니다. 이제 노령사회를 넘어 백세 시대인데 언제까지 주먹구구식으로 보건의료정책을 세워야 한단 말입니까. 우리가 매일매일 생산하는 생체정보와 활동정보가 결국 우리 자신을 건강하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되는데 대체 왜 반대를 한단 말입니까. 그런 걸 뭐라고 부르는 지 아세요? 기우입니다, 기우요!”


 세 가족이 소파에 기대어 잠을 자고 있는 동안 텔레비전 토론회에서는 패널들이 국민e헬스 정책을 둘러싸고 뜨거운 논쟁을 펼치고 있었다. □

 

 


* 참고자료


1. Abraham Verghese "의사의 손길"(TED 강연) http://download.ted.com/talks/AbrahamVerghese_2011G-480p-ko.mp4 (한글자막)

2. Daniel Kraft "의료 분야의 미래를 위한 앱"(TED 강연) http://download.ted.com/talks/DanielKraft_2011X-480p-ko.mp4 (한글자막)

3. 서울대병원과 SKT의 '묘한' 자회사(뉴스타파) http://www.youtube.com/watch?v=qHqYWaW6AOc

4. 서울대병원 자회사 "의료기록수집 않겠다"(뉴스타파) http://www.youtube.com/watch?v=VHNELnxByvk

5. 당신의 처방전 정보가 새 나가고 있다(뉴스타파) http://www.youtube.com/watch?v=D36j8R7HPM4

6. "병들면 '묻고 따지고 거절하는' 보험"(기사) http://www.danbi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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