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한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평가하는 본인만의 특별한 기준이 있는가? 사람들마다 본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을 기준삼아 작품을 평가하기 마련이다. 성평등 측면에 있어서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벡델 테스트(Bechdel Test)가 있다. 벡델 테스트는 세 가지 질문 ― ①이름을 가진 두 명 이상의 여성이 등장하는가? ②그 두 명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가? ③그 대화의 주제가 남자 이외의 것인가? ― 을 가지고 해당 미디어가 얼마나 성평등한지를 평가한다. 이 세 가지 질문을 가지고 통과 여부를 판단하는 단순하고 손쉬운 특징 덕분에 벡델 테스트는 여전히 많이 사용되지만 동시에 성별 이분법적이고 여러 맥락을 무시해 정교하지 않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주1)
최근에는 이 최소한의 기준에 다른 조건들을 덧붙여 보완하는 시도들이 있었다. 한국영화감독조합은 2020년부터 한국영화 속 성평등 현황을 돌아보고 문화적 다양성 향상을 위해 ‘벡델데이’를 주최 및 주관하며 인디스페이스에서 상영 및 토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주2) 기존 벡델 테스트의 세 가지 질문에 네 개를 더하여 ‘벡델 테스트 7’을 만들고 이에 기반한 한국 영화와 시리즈를 선정하고 있다. 새롭게 추가된 네 가지의 질문 ― ④감독, 제작자, 시나리오 작가, 촬영감독 중 1명 이상이 여성 영화인일 것, ⑤여성 단독 주인공 영화이거나 남성 주인공과 여성 주인공의 역할과 비중이 동등할 것, ⑥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적 시선을 담지 않을 것, ⑦여성 캐릭터가 스테레오 타입으로 재현되지 않을 것 ― 은 성평등 인식과 문화 다양성 제고를 위해 고안되었다.
그렇다면 성평등만큼이나 현재 삶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기후위기 측면에서 스크린을 바라보면 어떨까? 기후위기 측면에서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평가할 수 있는 테스트가 있다. 비영리 스토리 컨설팅 기관인 굿 에너지(Good Energy)에서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와 TV 프로그램 등에서 기후 변화가 어떻게 다뤄지고 표현되고 있는지를 점검할 수 있는 The Climate Reality Check(기후 현실 점검 테스트)를 제시했다. 굿 에너지와 매튜 슈나이더 메이어슨(Matthew Schneider-Mayerson) 박사가 이끄는 콜비 대학(Colby College)의 Buck Lab for Climate and Environment 연구팀은 기후 현실 점검 테스트를 앞에 언급한 벡델 테스트에서 영감을 받아 개발했다.
이 테스트는 미디어에서 기후 변화에 대한 표현이 부족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미디어 콘텐츠가 현재의 기후 현실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지 측정하고, 제작자들이 기후 변화를 더 정확하고 현실적으로 다룰 수 있도록 개발되었다. Climate Reality Check를 통과하려면 아래 두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① 이야기 세계에 기후 변화가 존재한다
② 등장인물이 기후 변화에 대해 알고 있다
영화에서 기후 변화의 현실이 반영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연구팀은 Climate Reality Check를 사용하여 20213년에서 2022년 사이에 개봉한 가장 인기 있는 영화 250편을 대상으로 체계적인 콘텐츠 분석을 진행했다. 여기서 영화는 극영화만을 선정하였고 2006년 이전을 배경으로 한 영화, 2100년 이후를 배경으로 한 영화, 은하계 공상과학 영화, 하이판타지 영화, 지구를 배경으로 하지 않는 영화를 제외했다.
연구 결과는 다소 충격적이다. ‘이야기 세계에 기후 변화가 존재한다’의 첫 번째 질문을 통과한 영화는 250편의 영화 중 12.8%(32편)에 불과했고, 여기서 9.6%(24편)만이 ‘등장인물이 기후 변화에 대해 알고 있다’는 두 번째 질문을 통과했다. 또 3.6%(9편)만이 기후 변화를 두 장면 이상에서 언급했다. 이런 예견된 실망스러운 결과에도 불구하고 연구팀은 개봉 시기 기준 전반부(2013~2017년)에 비해 후반부(2018~2022년)에 기후 변화를 다룬 영화들이 두 배 더 많이 개봉하였다는 유의미한 결과를 발견했다. 또 기후 변화를 포함하는 스토리가 수익성이 있다는 사실도 발견했다. 극장 개봉된 220편의 영화 중 기후변화를 다룬 영화(테스트 1단계 통과)가 기후 변화를 다루지 않은 영화보다 흥행 수익이 평균 8% 더 높았다. 또 기후 변화를 인식하고 있는 캐릭터가 최소 한 명 이상 등장하는 영화(테스트 2단계 통과)는 그렇지 않은 영화보다 흥행 성과가 10% 더 높았다.
Climate Reality Check를 통과한 몇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기후 변화를 작품에 녹여내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아 보인다. 테스트에 통과한 <저스티스 리그>에서는 배트맨이 아쿠아맨을 찾아와 팀에 영입하기 위해 설득하는 대사 중 기후 위기가 점점 더 심각해져간다고 언급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 때문에 <저스티스 리그>는 테스트를 통과했고 이 영화의 감독판 <잭 스타이더의 저스티스 리그>도 같은 이유로 통과했다. 기후 변화을 언급하는 장면이 가장 많은 영화는 2017년 개봉한 <해피 데스데이>였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생일날 우연한 사건을 통해서 죽게 되고 동일한 시점으로 다시 깨어나는 상황을 반복적으로 겪게 되는데 이때마다 '지구 온난화를 막읍시다'라며 서명 운동을 하는 운동가를 마주치는 장면이 6번이나 반복되어 나온다. 이렇듯 기후변화라는 현실을 스크린에서 볼 수 있도록 반영하는 것은 어떤 장르든 가능해보인다.
Climate Reality Check를 개발한 굿 에너지는 TV와 영화 제작자들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즉 기후 위기에 처한 세상을 솔직하게 반영하는 재미있는 스토리를 만들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모든 장르의 스토리에서 기후 위기를 묘사하는 것을 가능한 한 쉽게 만드는 것을 목표로 활동하고 있어 Climate Reality Check 뿐만 아니라 컨설팅 서비스와 워크숍을 운영하며 창작에 기후변화를 반영하는 것에 대한 새로운 시각 등을 제공한다. □
■ 굿 에너지(Good Energy) 홈페이지 https://www.goodenergystories.com/
■ The Climate Reality Check 홈페이지 http://www.theclimaterealitycheck.com
*주
1) [든든칼럼] 벡델 테스트 사용법에 대하여 (조혜영 영화평론가)
글쓴이. 김세영
미디액트에서 다큐멘터리를 배우고 미디어 활동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돌봄, 다큐멘터리, 독립영화 생태계에 관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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