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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10호 미디어 인터내셔널] 남미로부터의 교훈 (2) : 미디어 민주화를 위한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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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8. 7. 16.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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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 본 글은 ACT! 105호 '남미로부터의 교훈 : 미디어 민주화를 위한 조건 (1)' 과 연결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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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10호 미디어 인터내셔널 2018.08.10.]


남미로부터의 교훈

: 미디어 민주화를 위한 조건 (2)


박채은(미디어 활동가)



  1990년대 말부터 2014년까지 파라과이와 콜롬비아를 제외한 남미 10개국에서 ‘온건한 사회주의’를 표방한 좌파 정권이 등장하면서, 커뮤니케이션 분야에서도 새로운 미디어 법률이 제정되고 공동체미디어가 합법화되는 등 정책적으로도 변화의 물결이 시작되었다. 물론 현재는 남미의 많은 국가들에서 우파와 보수파가 정권을 잡는 등 정치적 급변의 시기를 지나고 있다.

  남미의 미디어를 둘러싼 민주화 투쟁은 보다 넓게는 전체 사회의 민주화 투쟁과 궤를 같이 하지만, 정권의 교체가 곧바로 미디어 민주화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특히 거대 미디어기업과 정치 엘리트의 유착, 주류미디어의 상업화와 소유 집중 등 신자유주의 정책은 공고했으며, 공동체라디오 등 대안미디어의 사회적 존립은 여전히 위태로웠다. 

  남미 각국의 정치적 변화와 미디어 민주화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는데, 이 글에서는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과 칠레 4개국의 미디어 민주화 과정을 분석한 연구를 바탕으로 정치적 변화와 미디어 민주화와의 관계, 미디어 민주화를 위한 조건 및 미디어 개혁 모델을 소개한다.



1. 남미 미디어 개혁 분석을 위한 프레임


  정치사회적 조건이 유사한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 칠레의 미디어 민주적 개혁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가. 2016년 발간된 저서 『라틴 아메리카의 정책연합과 민주적 미디어 개혁』(Mauersberger, 2016)은 각 나라의 미디어 개혁을 둘러싼 다양한 요소, 즉 시민사회 조직, 자원, 전략 등을 분석 검토하여 어떤 조건에서 사회적 주체들이 성공적으로 미디어 분야의 민주적 정책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는지, 그 원인과 조건을 분석한 연구이다. 

  장기간에 걸친 미디어 정책 변화를 분석하기 위한 이론적 틀로서 ‘정책옹호연합모형’(Advocacy Coalition Framework, ACF)을 활용하였는데, 이 분석틀은 제도 자체보다는 정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참여하는 다양한 주체들의 전략과 정책참여에 초점을 둔다. ‘정책옹호연합(Advocacy Coalition)’은 신념체계를 공유하는 매우 긴밀한 수준의 협력적 활동을 하는 연대체를 의미하는데, 남미 4개국에서 미디어 민주적 개혁을 추진하는 정책옹호연합들이 어떻게 정책결정과정에 개입하고, 결과적으로 법령을 바꾸어 미디어 시스템 변화에 성공하였는지, 혹은 실패하였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정책옹호연합의 핵심 요소는 조직구성, 신념체계, 자원이다. ‘조직구성’은 연합에 참여하는 NGO, 연구자, 활동가, 정치인, 기관 등 행위 주체들의 유형 및 내부 조직 구조를 의미하며, ‘신념체계(Belief system)’는 연합 내 공유된 핵심가치와 근본 규범, 신념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자원’은 신념을 정책으로 변환시키는 수단으로서, 특히 정책결정을 만들어내는 공식적 법적 권한, 정책중재역량, 여론, 동원가능규모, 재정, 리더십 등이다.


  위 연구는 또한 민주적 미디어 시스템을 평가할 수 있는 4가지 지표를 제시하고 있는데, ➀민주적 기본규범, ➁미디어다양성, ➂비상업미디어, ➃제도의 대응성이다. 

  ‘민주적 기본규범’은 한 사회의 모든 정책에 적용되는 근본가치를 의미하여, 미디어 시장 경쟁에 대한 직접적 규제, 미디어를 통한 문화·교육 증진, 커뮤니케이션 권리 보장 등을 그 내용으로 한다. ‘미디어다양성’은 사회 다양성을 반영하는 요소로서, 소유규제, 콘텐츠 제작 생산에서의 다양성을 포괄한다. ‘비상업미디어’는 민주적 미디어 시스템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 중 하나로서, 소유구조의 다양성이 콘텐츠의 다양성을 보장하지 못하는 등 시장실패로 이어진 상황에서 공영, 공동체미디어 등 비상업적 미디어 영역을 의미한다. ‘제도의 대응성(responsiveness of institutions)’은 정책 집행에 있어서 필수적 요소로서, 정책 또는 제도가 대상집단이나 수혜자들의 요구에 얼마나 민감하게 대응하는지, 정책의 성과가 그 요구에 부합하는지를 평가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공동체라디오 허가에 있어서 기술적 요건을 강화하면 소규모 공동체라디오들에게는 진입장벽이 될 수 있어, 대응성이 낮아지게 된다. 정책 과정과 제도에 있어서 참여를 보장하는 것이 중요한 척도이다.


  남미 주요 나라의 10여년(2003~2013)에 걸친 미디어 개혁 과정을 분석하기 위한 핵심 프레임은 결국 ‘정책옹호연합’의 신념과 전략, 그리고 정책결정과정에 개입해 가는 전략이다. 아르헨티나 CRD(민주방송연합)의 10여년에 걸친 미디어 개혁 시도를 중심으로, 우루과이의 CCD(민주적 커뮤니케이션 연합), 브라질의 FNDC(커뮤니케이션 민주화를 위한 전국 포럼), 칠레의 FUCATEL(미디어 민주화를 위한 연합)의 사례를 통해 미디어 민주화를 위한 과정을 탐색해 본다.



2. 아르헨티나 : 커뮤니케이션 민주화를 위한 10년의 실천


  1) 정치적 변화와 민주방송연합(CRD) 조직화


  1920년대 남미 최초의 라디오 방송국을 시작한 아르헨티나는 1930년대 미국 방송 시스템을 모델로 한 3개의 상업 방송 네트워크가 출현하였고, 1940-50년대 페론이 집권하면서 TV방송국을 국영화하였다. 1976년 쿠데타 이후 1990년대까지 미디어는 군부의 통제 하에 있었고, 1992년 미국과의 투자 조약 체결 후 미디어 분야를 외국인 투자자들에게 개방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실시하였다. 2003년 좌파 페론주의자인 키르츠네르(Kirchner) 정부가 출범하면서 사회분야의 개혁에 대한 기대가 높아졌으나 미디어 민주화를 위한 정책 개혁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었다. 

  앞서 제시한 미디어 민주적 시스템 요소로 당시 아르헨티나 미디어 상황을 진단하면 다음과 같다. 키르츠네르 정부의 미디어 정책의 기본 이념은 공익 관점을 표방하였으나 권위주의적 잔재가 남아 있었고, 미국의 영향으로 상업논리가 지배적이었다. 미디어다양성의 측면에서는 소유구조 집중을 제한하는 규제가 부재하였고, 소수 대기업 미디어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비상업미디어는 공영미디어가 있었으나, 운영구조만 공공적일 뿐 이윤중심의 상업논리로 운영되었다. 공영방송의 시청률은 평균 1.3%에 불과해 사회적 영향력도 미미하였다. 공동체라디오는 군부독재 말기에 출현하기 시작했는데, 1990년대 초 아르헨티나 연방방송위원회(COMFER) 추정 400개, 공동체라디오연합(FARCO) 추산 1,000여개에 달했다. 그러나 법적 지위가 없어 공식적 허가와 공적기금을 지원받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2004년에 들어와 아르헨티나 최초로 미디어 민주화를 위한 연합조직 ‘민주방송연합(CRD)’이 결성되었다. 사회운동 조직들은 정치 투쟁에서 미디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나, 그 전략은 주로 기존 주류미디어에 보도되는 것 또는 공동체라디오와 같은 대안적인 커뮤니케이션 채널을 만드는 것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었고, 연합조직을 중심으로 미디어 시스템 자체를 민주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정책적 연대와 사회적 투쟁이 본격화되었다. 


  아르헨티나 ‘민주방송연합(CRD)’은 공동체라디오연합(FARCO)의 제안으로 출범하였고, 다양한 조직과 개인들의 참여를 조직화하였다. 공동체라디오 활동가, 커뮤니케이션 학자, 지역마을조직, 노동조합, 저널리스트, 원주민조직, 인권단체, 국제활동가, 공공기관 등 다양한 주체가 참여하였고,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위해 공식적 대표, 대변인과 같은 위계적 구조를 두지 않았다. 

  그러나 활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공동체라디오 활동가들과 학계가 주축이 된 소규모의 전략적 구심체가 존재하였다. ‘민주방송연합(CRD)’의 조직 특성을 정리하면, “수평적으로 긴밀히 조직된 시민 사회 네트워크”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그 구심이 되었던 공동체라디오는 ‘공동체라디오연합(FARCO)’과 ‘아막(AMARC) 아르헨티나’를 두 축으로 하고 있는데, ‘공동체라디오연합’은 1985년 설립되어 100여개의 공동체 라디오 방송국이 참여하고 있는 공식적 조직이며, ‘아막 아르헨티나’는 전세계공동체라디오연합(AMARC)의 지부로서 미디어규제 및 정책 관련 전문성을 바탕으로 국제적 협력을 추진할 수 있는 국제기구였다. 아르헨티나 공동체라디오 방송국들은 ‘공동체라디오연합’과 ‘아막 아르헨티나’에 동시 가입이 가능하였다. 

  또 다른 핵심 역할을 담당하였던 학계는 대학의 커뮤니케이션 학자 그룹이었다. 이들은 사회 투쟁에 참여하며, 미디어 활동가들과도 긴밀히 연계되어 있었다. ‘민주방송연합’에서 학계는 커뮤니케이션 권리 등 미디어 운동의 관점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공적 토론 및 정치 영역에서 민주적 미디어 개혁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도 지역 및 국제 네트워크를 조직하는 과정에 참여하였다.


▲ 아르헨티나 민주방송연합(CRD)의 

커뮤니케이션 민주화를 위한 대중 집회 현장



  2) 「커뮤니케이션 권리를 위한 기본 의제 21」


  아르헨티나 ‘민주방송연합(CRD)’의 이질적이고 다양한 연대의 결과물이 바로 「커뮤니케이션 권리를 위한 기본 의제 21」이다. 연합조직의 ‘신념체계’라고 할 수 있는 이 의제는 인권과 민주주의를 핵심가치로 하고 있다. 민주방송연합은 2004년 연합조직을 결성한 후 사회적 토론을 바탕으로 커뮤니케이션 권리를 위한 의제를 제안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새로운 법률을 위한 이 제안은 독재정권과 이후에도 계속된 인권침해, 참여금지와 탄압, 헌법에 대한 부정에 맞서 싸운 민주주의를 위한 역사와 투쟁, 그리고 시민 참여, 법치주의, 인권이라는 가치에 기반하고 있다.”


  사회적 커뮤니케이션은 인권이자 헌법적 권리임을 확인하고, 미디어가 공공의 의제임을 사회적으로 선언한 「커뮤니케이션 권리를 위한 기본 의제 21」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표현의 자유와 인권은 미디어 정책의 근본 규범이다.

 2. 방송은 사업이 아닌 권리이다.

 3. 미디어는 독립적이어야 한다.

 4. 주파수는 사적 재산이 아닌 인류의 유산이다.

 5. 다양성을 보장하는 것은 국가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6. 반독점 규제의 필요성

 7. 미디어 종사자의 전문가적 소명의식 

 8. 노동자와 저널리스트의 미디어 내 역할 강화

 9. 공적 규제의 투명성

 10. 군대 관련 인사 또는 인권 침해자 주파수 할당 제외

 11. 공영, 상업, 공동체 미디어 간의 균형 보장

 12. 공영미디어는 정부가 아닌 공공의 것이어야 한다.

 13. 주파수의 33%는 비상업미디어를 위해 보장되어야 한다.

 14. 지역방송과 전국방송을 위한 고정 쿼터제

 15. 방송사업자의 의무는 대리될 수 없다.

 16. 다원성 장려를 위하여 개인 방송네트워크는 예외로 두어야 한다.

 17. 광고는 전국적으로 제작되어야 하고, 보도 컨텐츠와 구별되어져야 한다.

 18. 지역 방송사업자 포용

 19. 통합 규제기구 설립

 20. 옴부즈맨 제도의 운영

 21. 법제화 과정에서 지금까지 배제되어온 방송사업자들을 포함시켜 정규화하여야 한다.

▲ 「커뮤니케이션 권리를 위한 기본 의제 21」(2004, 아르헨티나)



  민주방송연합의 주요 참여주체인 공동체라디오 활동가들도 이 선언을 통해 공동체라디오가 단순히 ‘대안미디어’가 아니라 ‘커뮤니케이션 권리’라는 헌법적 가치를 표현하는 매체임을 인식해 나갔다. 이는 미디어 운동의 방향이 독점미디어에 대한 액세스, 또는 대안미디어 설립에 머무르지 않고 미디어 시스템에 대한 민주화 요구로 이동하였음을 보여준다. 위 의제 1, 2는 표현의 자유와 인권이라는 헌법적 가치가 미디어 개혁 요구에서 가장 핵심적인 가치임을 선언하고 있으며, 주파수는 돈으로 거래되는 사적 재산이 아니라 인류의 유산(의제 4)이므로, 주파수의 33%를 비상업미디어를 위해 할당(의제 13)하여, 공영, 상업, 공동체 미디어 간의 균형을 보장(의제 11)할 것을 주창하고 있다. 이 외에도 미디어의 사회적 책임(의제 7, 8, 15)과 규제기구의 책무(의제 9, 10, 19, 20), 그리고 미디어의 다양성을 보장(의제 5, 6, 11, 16, 18, 21)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3) 민주방송연합(CRD)의 사회적 투쟁과 급진적 미디어 개혁


  2004년 민주방송연합 결성 이후 「커뮤니케이션 권리를 위한 기본의제 21」를 바탕으로 한 미디어개혁법이 최종 통과되기까지 10년여의 시간이 필요했다. 외부 정치적 조건과 환경의 변화에 따라 활동 방식을 다양하게 전개해 나간 민주방송연합의 활동은 크게 4단계로 시기를 나누어 볼 수 있다.


  1단계는 조직이 결성된 2004년으로 공동체라디오 및 학계의 핵심 멤버들을 주축으로 아르헨티나 전역에서 다양한 수준의 조직화가 이루어진 시기이다. 「기본의제 21」을 선언한 후, 국영라디오 방송에서 2시간 프로그램으로 방송되고, 전국의 공동체라디오 방송국에서도 커뮤니케이션 권리와 미디어 개혁의 필요성을 담은 프로그램을 제작 방송하였다. 이 시기 민주방송연합은 정부에 「기본의제 21」을 제안하였으나, 의제의 내용이 정부 이슈가 아니라는 이유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단계는 2005년부터 2008년까지로, 연합 결성 이후 활동이 급격히 위축되던 시기이다. 당시 키르츠네르 정부는 상업미디어에 대한 방송면허를 조건 없이 10년 연장하는 결정을 하게 된다. 좌파정부였으나, 미디어 부문에 있어서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하는 등 미디어 시스템의 민주적 개혁은 요원해 보였다. 이 시기에 민주방송연합은 핵심 인권 조직 및 정치 운동과의 연계를 더욱 강화해 나가며 다시 찾아올 기회를 준비하였고, 2007년 대통령 선거 기간 재조직화 되었다.


  3단계는 아르헨티나 농민투쟁이 일어난 2008년 이후로서, 새 대통령과 아르헨티나 최대 미디어그룹 클라린(Clarín)과의 갈등 국면에서 민주방송연합의 의제가 정부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이 시기에 「기본의제 21」에 기초한 뉴미디어법이 의회에 제출되면서, 커뮤니케이션 민주화에 대한 공적 토론이 본격화되었다. 민주방송연합은 아르헨티나 전국적으로 수백 차례의 포럼, 의회 공청회, 대규모 집회 등을 개최하였다. 특히 정부 규제기관에 민주방송연합 핵심 구성원들이 참여하면서 실제 정책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상당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


  4단계는 새로운 미디어법률안이 2009년 10월 의회를 통과한 이후이다. 이 법은 미디어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 인권에 기반한 최초의 미디어법이자, 방송의 3영역(공영, 상업, 비영리)을 인정하고 각 섹터에 33% 주파수를 할당하는 등 기존 미디어 시스템의 패러다임을 변화시킨 급진적 개혁이었다. 이 법에 따라 공동체라디오도 그 법적 지위를 보장받게 되었다. 그러나 방송 신문 잡지 등 전 미디어 영역을 소유한 거대 기업이자 2007년에는 거의 대부분의 케이블 TV 네트워크를 소유한 미디어그룹 클라린은 새 미디어법에 대한 반대 캠페인과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민주방송연합은 법 통과 후 조직을 해산하였으나, 전문가 그룹들을 중심으로 법률 투쟁을 지원하였고, 긴 소송과정 끝에 2013년 10월 비로소 새로운 미디어법이 시행될 수 있었다.



3. 우루과이 : 시민사회가 주도한 미디어 정책 개혁


  인구 350만의 작은 나라인 우루과이는 1985년 정치적으로 민주화되었으나, 미디어법은 1977년 독재정부 시기에 만들어진 체계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2005년 좌파 정부 수립 후 시민사회 진영에서 미디어 민주화를 위한 논의가 본격화되었고, 아르헨티나의 ‘민주방송연합(CRD)’과 같은 연합체 ‘민주적 커뮤니케이션 연합(CCD)’이 출범하였다. 이 연합체는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을 계승하고 1990년대 공동체라디오 운동 출현으로 확장된 미디어운동을 기반으로 하였다.


  ‘민주적 커뮤니케이션 연합’은 공동체 라디오 활동가, 인권NGO, 노조 등에서 참여하였으며, 오픈 네크워크 형식의 연대체였다. 특히 UN, OAS(미주기구) 등 국제조직과의 연계가 미디어 개혁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불법 해적라디오를 공동체라디오로 재규정하는 과정에서 국제기구의 표현의 자유 또는 인권 관련 리포트가 중요한 참고가 되었다. 연대체 조직 및 국제기구와의 연계에 있어서 전세계공동체라디오연합 아막(AMARC) 우루과이 지부의 적극적 역할이 있었다.


  다양한 미디어 네트워크 및 정치활동, 정책역량을 바탕으로 ‘민주적 커뮤니케이션 연합’은 단계적인 미디어 개혁 입법을 추진하였다. 2007년 공동체라디오 법안이 통과되었고, 2010년에는 주파수 3분의 1을 공동체미디어에 배분하는 내용이 포함되었으며, 최종적으로 2013년 미디어 개혁법이 발의되어 2015년 관련 법률이 공표되었다. 우루과이는 미디어 개혁 과정에서 아르헨티나와 같은 대규모 집회 등은 없었지만, 공개 토론을 활성화하여 광범위한 대중적 지지를 획득하였다.



4. 분열된 시민사회, 미디어 개혁의 실패 : 브라질과 칠레


  브라질은 커뮤니케이션 민주화를 위한 연대체가 가장 먼저 출범한 국가이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기반으로, 1991년 노조가 중심이 되어 다양한 시민사회 조직을 포괄하는 ‘커뮤니케이션 민주화를 위한 전국 포럼(FNDC)’을 결성하였다. 2003년 룰라 대통령 당선으로 좌파 노동자당(PT) 정부가 출범하였으나, 브라질의 거대 주류 상업미디어들의 반대로 미디어 개혁은 지체되고 있었다.

  ‘커뮤니케이션 민주화를 위한 전국 포럼’은 하위조직을 거느린 상부조직을 의미하는 ‘우산조직’이었다. 노조, 단체 등 전문가 조직을 중심으로 체계적 조직 운영을 표방하여 조직의 안정성은 높았으나 다른 운동과의 연계나 긴밀한 연대는 취약하였다. 조직된 시민사회 바깥의 개인 활동가들은 물론 대학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교수, 연구자들의 참여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연합체가 내세우는 핵심 가치(신념체계)는 전통적인 계급 관점이라고 할 수 있는 미디어에 대한 공적 통제, 즉 국영화, 공영화 담론에 치우쳐 있었다. 2009년 이후 연합체 내부에서 NGO 그룹들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어졌고, 커뮤니케이션 권리 관점으로의 전환, 민주적 방송법 제정 등 미디어 시스템 개혁을 위한 전략 수립, 외부 단체들과 연계 강화를 요구하였다.

  90년대 초기부터 커뮤니케이션 민주화를 목표로 활동해 온 ‘커뮤니케이션 민주화를 위한 전국 포럼’이였으나, 결국 미디어 개혁에는 실패하였다. 개혁 실패의 원인은 조직구성의 측면에서 외부의 다른 운동들과 연계되지 못한 점, 정책개입역량의 부족, 비공식적 전략 토론의 부재 등을 들 수 있으며, 신념체계에 있어서도 미디어에 대한 공적 통제를 강조하는 관점은 상업미디어 등 반대세력에 의해 ‘검열’로 공격받기도 하였다. 2011년 이후 내부적 비판을 통해 ‘커뮤니케이션 권리’ 관점으로 변화하고자 하였으나, 구체적인 정책 실현 방안을 제시하지 못하였다. 이 외에도 거대 미디어 네크워크(O Globo network)가 보수 정치 엘리트들과의 담합을 통해 강력한 사적 연합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도 브라질의 미디어 개혁 실패의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칠레의 미디어 개혁 과정도 브라질의 실패와 유사하다. 1973년에 집권한 독재자 피노체트에 의해 미디어에 대한 검열이 일상화되었고, 80년대 이후에는 신자유주의 정책이 강화되었다. 1990년 중도좌파 연합 정부가 출범하였으나 미디어 영역은 시장미디어가 지배적인 상황이었다. 공동체라디오는 민주화 이행기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으나, 법적 지위를 보장 받지 못한 불법의 상태였고, 공영TV는 시청률은 높은 편이었으나 콘텐츠의 대부분이 상업방송과 유사하고 광고 판매로 운영되었다.

  칠레에도 ‘미디어 민주화를 위한 연합(FUCATEL)’이 결성되었으나, 브라질과 마찬가지로 학계 및 사회운동 조직의 참여는 제한적이었다. 좌파의 전통적 전략인 미디어 집중 및 소유 규제에 대한 비판과 대안미디어 설립에 초점을 두고 활동을 전개하였다. 칠레의 광범위한 사회 참여와 사회운동과의 연계도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2011년 90년대 이후 칠레에서 최대 규모의 학생운동이 일어나 비민주적 미디어 시장에 대한 문제제기가 있을 때에도, ‘미디어 민주화를 위한 연합’은 가시화되는 사회적 투쟁과 연대하지 못했다.

  ‘미디어 민주화를 위한 연합이 새로운 미디어 법안 제정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나 2010년 통과된 공동체라디오 법의 경우, 상업라디오협회와의 협상을 통해 법률안을 마련하면서 미디어 활동가들의 비판을 받았다. 디지털 방송 관련 법 제정 과정에서 정부가 시민사회조직에 참여를 개방하면서 정책입안과정에 참여하였으나, 미디어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 개혁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5. 미디어 민주화의 조건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브라질, 칠레 남미 4개국의 미디어 민주화를 위한 연합 조직을 분석한 연구 결과, 2003년 이후로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총체적인 미디어 개혁에 성공한 반면, 브라질과 칠레는 의미 있는 수준의 미디어 개혁을 이루어내지 못하였다. 아래 그림은 2003년부터 2013년까지 10년간의 미디어 민주화 개혁 단계를 보여준다. 아르헨티나는 2009년 급진적 개혁을 이루었고, 우루과이는 2007년 이후로 점진적으로 개혁을 성취하였다.


▲ 2003년 이후 미디어 민주화 개혁 단계



  미디어 민주화 과정에서 어떠한 조건과 요인이 위와 같은 결과의 차이를 만들어내는가. 시민사회연합에 의한 미디어 개혁 모델에 있어서, 두 가지 핵심 요인은 바로 조직 구조와 운동의 관점이다. 사례연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처럼, 아르헨티나와 우루과이는 개방·집중적인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커뮤니케이션 권리를 기준틀로 하여 미디어 민주화를 추진하였다. 반면 브라질과 칠레는 국영화와 같은 미디어의 공적 통제에 초점을 둔 계급적 관점을 오랫동안 유지하였으며, 커뮤니케이션 권리에 입각한 다층적 참여와 연대를 조직하지 못하였다. 네트워크의 형태 역시 브라질의 민주화 연합체는 지나치게 제도화되었고, 칠레의 네트워크는 핵심 주체의 부재로 분열된 양상을 보였으며, 이러한 조건은 미디어 개혁을 수행하는데 한계로 작용하였다.


▲ 커뮤니케이션 민주화를 위한 연합 유형

(가로축 : 네트워크 조직구조 / 세로축 : 관점 기준틀)



  아래는 미디어 민주화를 위한 요소와 4개국에 대한 사례 분석 결과를 요약한 표이다. 그동안의 논의를 종합하여 볼 때, 민주화를 위한 연합이 개방-집중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조직되었는지, 커뮤니케이션 권리 관점을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미디어 시스템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시장 미디어들의 사적 연합의 정도에 따라 민주적 미디어 개혁 결과의 차이가 비롯됨을 알 수 있다.


 

민주화를 위한 연합

분열된 사적 연합

(시장미디어)

민주적 미디어 개혁

(결과)

개방-집중

네트워크

권리 관점

아르헨티나

O

O

(정략적 연합)

O

(2009년 급진적 개혁)

브라질

X

X

X

(미디어와 정치인 결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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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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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한 비즈니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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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루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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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이후 점진적 개)

▲ 미디어 민주적 개혁을 위한 촉진 요소와 그 결과 (4개국 사례 분석)



  이 글에서 소개한 『라틴 아메리카의 정책연합과 민주적 미디어 개혁』(Mauersberger, 2016)에 대한 연구는 미디어 개혁법의 실제 집행보다도 미디어 시스템의 근간을 이루는 법 개혁 과정에 중점을 두고 있다. 

  4개국의 정책연합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미디어 민주화, 커뮤니케이션 권리를 위한 사회적 투쟁, 공론화, 정책개입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결국 한국의 정치적 조건에서 미디어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은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탁월한 소수의 리더십이 아닌 수평적 네트워크의 힘으로, ‘커뮤니케이션 권리’라는 공통의 목표 아래, 그리고 언젠가 다가올 정치적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중요한 것은 미디어운동의 지속과 준비에 있다는 것을 되새기며 글을 마친다. □


참고자료

『Advocacy Coalitions and Democratizing Media Reforms in Latin America : Whose Voice Gets on the Air?』(Christof Mauersberger, 2016, Springer International Publishing)


이전 글 보기>> [ACT! 105호] 남미로부터의 교훈 : 미디어 민주화를 위한 조건 (1)

http://actmediact.tistory.com/1165




글쓴이. 박채은(미디어 활동가)

- 공동체미디어, 다큐멘터리, 미디어액티비즘, 운동의 연결과 네트워크가 주 관심사이며, 이론과 실천을 함께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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