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108호 작지만 큰 영화관 2018.03.14.]
관객과 영화인의 소실점, 자체휴강시네마
박래경 (자체휴강시네마 운영자)
[편집자 주] 이번 호 ACT!에서 이야기를 청한 ‘작지만 큰 영화관’은 바로 관악구 신림동 고시촌에 위치한 ‘자체휴강시네마’입니다. 이태원 극장판, 옥인영화관 등을 중심으로 조금씩 붐이 일고 있는 ‘커뮤니티 시네마’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자체휴강시네마. 멀티플렉스는 물론 단관 영화관보다도 적은 좌석수를 지니고 있지만 마을 공동체와 같은 ‘커뮤니티’와 함께 하기에 더욱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영화관입니다. 고시촌에서 ‘자체휴강시네마’는 어떻게 관객들과 함께하고 있을까요? 자체휴강시네마를 운영하는 박래경씨의 이야기를 함께 경청해주셨으면 합니다.
그 겨울의 기억
지금도 공사가 진행되던 당시를 또렷이 기억한다. 나는 영화관 공사현장에서 살고 있었다. 살던 원룸 보증금을 빼 상영관 만드는 데 부은 바람에 숙식을 해결할 곳이 없었던 것이다. 인중에 물기가 맺힐 정도로 날씨가 추웠다. 나는 잠이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는데 눈을 뜰 때마다 컴컴한 천장이 시야를 완전히 덮었다. 그때마다 나는 나이 서른 먹고 뭐하는 거냐고, 이게 뭔 고생이냐고 한탄을 늘어놓곤 했다. 확신 없이 시작한 일이라 적잖이 불안했던 모양이다. 밤새 불안한 상념과 싸우며 뒤척이다보면 어느새 아침이었다.
햇살이 들이치면 비로소 현장 안이 밝아진다. 그러면 스크린이 희부옇게 빛나기 시작한다. 몸도 마음도 고된 와중에 버틸 수 있었던 건 그 빛 때문이었다. 저 하얀 막에 곧 투영될 영화들. 그 영화를 즐기는 관객들 모습을 상상하면서 힘을 냈다. 그렇게 운영해온지도 벌써 일 년여. 나는 지금껏 비몽사몽간에 보았던 희미한 빛을 더듬어 여기까지 왔는지도 모르겠다.
2017년 2월, 자체휴강시네마는 신림동 고시촌 녹두거리의 한 낡은 건물 지하에 자리를 잡았다. 단편 상영관을 표방하며 최근에는 장편 상영을 개시했다. 현재도 동일한 장소에서 운영되고 있으며, 2018년 3월 까지 80여 편의 단편영화와 2편의 장편독립영화를 관객 분들에게 소개했다. (상영관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홈페이지 http://huegang.com 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막 간판을 달고 찍은 사진
감격한 나머지 한동안 앞을 떠나지 못했더랬다.
고시촌. 그리고 관객들…
애초의 계획은 대학가에 상영관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래서 대학에서만 쓰는 용어를 상영관 이름에 넣고자 했다. ‘쉰다’는 의미를 지닌 용어가 없나 생각하다가 ‘공강’, ‘휴강’등의 단어를 떠올렸다. 그렇게 처음 만든 가게 이름이 ‘공강상영관’이었다. 여기서 발음의 어려움을 고려해 수정을 거친 결과 ‘휴강상영관’, ‘휴강시네마’를 거쳐 지금의 이름이 완성되었다. 단편영화를 감상하는 짧은 순간이나마 관객 스스로에게 잠시 휴식을 준다는 의미를 담은 이름이었다.
자체휴강시네마가 개관한 이후 감사하게도 꽤 많은 언론을 통해 영화관이 소개되었다. 인터뷰를 하다보면 항상 첫 꼭지로 받는 질문이 있다. 왜 신림동 고시촌에 개관을 했느냐는 것이었다.
▲ 일반적인 신림동 고시촌의 모습
몇몇 기사에서는 우리 상영관을 마치 어렵게 생활하는 고시생들을 위한 장소처럼 다루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상영관 장소 선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은 ‘영화가 필요한 사람들이 어디에 많이 살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시촌에 들어왔다. 독립을 준비하는 이들이 모여 사는 곳.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는 독립영화관. 그럴싸하지 않은가. 거기에 상대적으로 저렴한 임대료도 장소를 결정하는 데 한 몫 거들었다. 정리하면, 여러 후보지 가운데 택하게 된 것이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고시촌에 온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물론 동네가 동네이니만큼 고시생 관객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건 맞다. 그날의 공부가 끝나고, 혹은 주말에 짬을 내서 영화를 즐기시곤 한다. 이들을 마치 주변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로 바라보는 시선에 화가 나는 때가 많다. 적어도 내가 만나본 고시생 관객 분들 중 미래를 비관하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노력하고, 종종 여유를 찾을 줄 알며, 매사 당당한 멋진 분들이었다. 고시생 하면 떠오르는 케케묵은 이미지로 현재의 그들을 왜곡해서 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단지 숟가락만 얹었을 뿐
자체휴강시네마를 시작하기 전에 나는 그저 순수한 관객일 뿐이었다. 덜컥 상영관을 만들긴 했지만 작품을 어디서 수급해 올 것인지, 영상과 사운드 등의 설비를 어떻게 갖춰야 하는지, 어떤 방식으로 영화관을 운영해야하는지 아는 것이 전무했다.
도움이 절실한 순간마다 정말로 많은 분들께서 기꺼이 손을 내밀어 주셨다. 센트럴파크, 필름다빈, 호우주의보, 인디스토리, 인디플러그, 상상마당, 한국예술종합학교 등등 많은 배급사들을 통해 좋은 작품들을 소개받을 수 있었다. 운영 측면에서는 춘천의 ‘일시정지시네마’, 이태원의 ‘극장판’으로부터 귀한 조언을 받았다. 이밖에도 도움을 주신 분들은 손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이분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나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근래 자체휴강시네마에서 상영되는 작품을 살펴보면 다시 고민이 깊어지곤 한다. 사회문제·가족·인권·동성애 등을 주제로 삼은 작품들의 라인업이 다양한 변주를 거치며 충실해지는 반면, 상상력과 오락성에 초점을 둔 장르영화의 라인업은 로맨스를 제외하면 점차 부실해지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는다. 최근의 팍팍하고 삭막한 사회상이 작품에 가감 없이 투영되면서 여유가 사라지고 웃음은 옅어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대중이 즐길 수 있는 작품이 줄어드는 것은 상영관을 운영하는 입장에서나 한 사람의 관객 입장에서나 크게 아쉬운 일이다. 이는 단편영화의, 크게 보면 독립영화의 저변을 넓히는 데도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닐 것이다. 하나의 장르와 대중성에 특화된 영화제의 개최가 이러한 현상을 극복하는데 하나의 돌파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의 계획
아직은 정식으로 영화관 설립 허가를 받지 못한 관계로 신작이나 외화를 배급받는데 애로사항이 많다. 상황이 허락된다면 좀 더 큰 공간으로 옮겨 더 다양한 작품을 상영하며 관객 분들을 모시고 싶다. 완전히 자리가 잡힌 후에는 영화제를 개최해보는 것도 희망사항 중 하나다. 물론 앞으로도 단편상영은 이어갈 것이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좋은 시나리오 작가가 되는 게 꿈이다. 아울러 적당한 때에 고시촌을 배경으로 짧은 작품을 연출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날을 대비해 틈틈이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 공부를 하고 있다.
▲ 대기실의 모습. 계단을 타고 자체휴강시네마로 내려오면
처음 보게 되는 풍경이다.
이렇게 하고 싶은 일들은 많지만 아직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운영은 나날이 어려워지고 있다. 하루하루 버티는 게 고작인 정도다. 거의 매월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어 운영비 압박이 심하다. 지하 생활 때문에 건강이 많이 나빠졌고 워낙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아 때론 격한 외로움에 시달리기도 한다.
하지만 마음이 꺾인 적은 없다. “관객에게 선택의 기회를, 영화인에게 상영의 기회를.” 이는 자체휴강시네마의 설립 모토이자 운영자로서의 신념이다. 관객과 영화인들 사이에 다리를 놓을 수 있어 그저 기쁠 뿐이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이라는 사자성어도 있지 않은가. 옳은 일을 가고 있기에 두려울 게 없다는 뜻이다. 그 말처럼, 그리고 응원해주신 분들께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더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좋은 작품을 만들어주신 감독 스태프 배우님. 그 작품을 전달해주신 배급사분들, 그리고 지금까지 찾아와 주신 모든 관객 분들에게 이 기회를 빌어 감사를 전한다.
마지막으로 최근 영화계, 특히 대학 안에서 성범죄 피해를 입은 젊은 영화인들에게 남기는 전언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한번 짓밟힌 존엄은 쉽게 회복되지 않음을 알기에, 위로의 말조차 망설여집니다. 여러분의 용기가 옳은 방향으로 세상을 되돌려놓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해 많은 분들이 함께 분노하고 있습니다. 부디 힘을 잃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
자체휴강시네마
- 상영관 주소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241-43 지하 1층
- 이메일 : hugang241@gmail.com
- 홈페이지 : www.huegang.com
- 카카오톡 ID : hugang241
- 페이스북 : www.facebook.com/huegang
- 인스타 : www.instagram.com/huegang
글쓴이 박래경
87년 토끼띠, O형, 고향은 전라도 남원.
읽고 보고 쓰기를 좋아한다. 소설을 공부하다가 영화에 빠져 시나리오로 전공을 바꿨다.
2017년 2월부터 자체휴강시네마를 개관하여 운영해오고 있다.
[ACT! 110호 작지만 큰 영화관] 독립영화전용관 오오극장,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2) | 2018.07.16 |
---|---|
[ACT! 109호 작지만 큰 영화관] 영화관을 꿈꾸는 영화관, 일시정지시네마의 2년 (0) | 2018.05.18 |
[ACT! 109호 작지만 큰 영화관] 다큐! 씹히다! - 부산 다큐싶다 (0) | 2018.05.18 |
[ACT! 107호 작지만 큰 영화관] 순간을 기억하는 방법 : 부산 국도예술관 (0) | 2017.11.06 |
[ACT! 105호 작지만 큰 영화관] 우리가 만드는 독립영화의 집, 인디스페이스 (0) | 2017.08.29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