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106호 특별기획 박종필을 기억하며 2017.9.14]
박종필을 기억합니다.
박세연(영상 활동가)
지난 7월 28일, 급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난 박종필을 기억합니다.
저는 한 번도 그를 박종필 감독님, 혹은 박감독으로 불러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제게 종필 형이거나 “박종필!”이었습니다. 이 글에서도 박종필 감독을 그렇게 호칭하겠습니다.
#1. 1997년 가을, 홍익대학교.
제2회 인권영화제였다. 표현의 자유를 위해 모든 검열을 거부한 인권영화제를 무산시키려는 경찰의 학교 봉쇄와 침탈로 영화제의 하루하루는 전쟁 상태였고 우리는 그 상황을 촬영하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종필 형은 경찰로 가득한 학교 정문에서 계속 같은 장면을 촬영하고 있었다. 별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뭘 그리 오래 시간을 보내는지 불만이었던 나는 그에게 말했다. “형, 가자.” “세연아, 이런 상황에서 설정샷은 굉장히 중요해.” 구도가 어떻고, 수평이 어떻고…… “응. 그래. 그래. 이제 들어가자.” 그때 형은 영화제 내내 학교에서 살면서, 새벽에 경찰이 침탈해서 화장실에 숨겨둔 발전기를 압수하는 현장을 촬영했다. 이후 내 촬영 실력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지만, 촬영 교육을 할 때마다 형이 장황하게 설명했던 촬영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유용하게 써먹었다.
#2. 1998년, 편집실.
우리가 영상 작업을 시작하던 초기, 형이 다큐인을 만들기 전, 우리는 같은 제작단체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내가 편집을 하고 있으면 어느 틈에 형이 옆에 와서 한마디씩 툭툭 잔소리를 던졌다. “세연아, 데크를 그렇게 일시정지 상태로 해 놓으면 헤드가 금방 닳아. 잠깐이라도 정지했다가 다시 재생해.” “웅.”(아, 귀찮아) “야, 데크를 그렇게 해 놓으면 안된다니까~” “알았다구~”(아, 귀찮아) 나는 대략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보냈다. 장비에 대해 욕심이 많고 관리에 약간 엄격했던 형의 잔소리를 나는 좀 귀찮아했다. 하지만 우리가 각자 다른 단체에서 활동하게 된 이후에도 나는 영상장비에 대한 정보가 필요하면 재깍 종필 형에게 전화를 했고, 그는 성능별, 가격대별 장비를 쭉 뽑아서 장단점을 적은 문서를 보내주었다. 나는 늘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누구에게 물어보지……
#3. 이천년대 초반, 어느 술집.
당시 나는 ‘노동자의 힘’이라는 정치조직 소속이었다. 조직에서 미디어 활동가들을 모아서 사업을 한다는 얘기를 듣고 종필 형을 조직에 가입시키려고 했다. “형, 노힘이라고 알지? 들어오지 않을래?” “어, 나 노힘 회원인데” “잉? 뭐야, 언제 가입했어?” 왜 생각도 하지 못했을까. 에바다 투쟁에 헌신적으로 결합했던 형은 그 투쟁을 함께 했던 노힘 동지들을 보고 이미 조직에 가입하고 난 후였다. 형은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영상 외에도 다른 활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미 현실에서 실천하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형을 너무 띄엄띄엄 보고 있었던 거다.
#4. 2008년 여름.
광우병 촛불 집회 후 뒤풀이 자리였다. “형, 나는 정말 이 나라에서 살기가 싫어. 동남아 어디쯤 가서 살면 좋겠지?” “진심이야? 니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있니? 활동가가, 여기서, 이 사회를 바꿔야지!” “아, 그냥 그렇다는 거지, 내가 지금 당장 나간대? 뭘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래!” 내가 도리어 형한테 화를 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형은 그런 사람이었다. 문제를 피하거나 에둘러 가지 않는 사람. 그런 생각도 못하는 사람.
#5. 2016년 4월 13일, 시청 근처
21대 총선이 있는 날이었다. 지인들과 총선 결과를 보면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종필 형은 제도권 정당에 일말의 기대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박주민 의원이 당선 확정되자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날 형은 세월호 이야기와 특히 김관홍 잠수사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했고, 박주민 의원의 당선 후 김관홍 잠수사와 긴 전화통화를 했다. 얼마 후 김관홍 잠수사의 부고를 들었다. 괜찮냐고 물어보니 형은 괜찮지 않다고, 힘들다고, 김관홍 잠수사는 평생 자신이 챙겨야 할 사람으로 생각했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와 생전에 나눴던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그런 형에게 나는 제대로 된 위로도 건네지 못했다.
#6. 2016년 가을, 망원동
초기부터 함께 활동했던 지인들 몇 명이 모였다. 몇 십년 동안을 봐 왔던, 나이든 사람들끼리 만나면 늘 그러하듯 옛날 이야기들을 하며 웃고 떠들었다. 그러던 중 한명이 문득 종필 형에게 물었다. “종필아, 근데 너는 입신은 언제 할 거니?” 그랬다. 1997년 무렵 영상 활동을 처음 시작했던 시절, 각자 영상작업을 통해서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때 형은 영상작업으로 입신을 하겠다고 했고, 우리는 그때부터 형을 놀려먹기 시작했다. 활동가가 무슨 입신이냐, 그런 세속적인 목적을 가졌다니, 너무 불순한 거 아니냐? 숱한 놀림에도 형은 굴하지 않았다. 이십 년 후 그 질문을 받은 형은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야, 이 정도면 나, 입신한 거 아니냐?” 일동 외쳤다. “뭐라? 입신을 했다고? 지금?” “아이고, 형의 입신은 소박하기도 하구나.” “아냐. 아냐. 그건 아닌 거 같애. 좀 더 노력해봐”
▲ 2017년 2월 21일 진천, 사회변혁노동자당 2017년 정기총회 당시 박종필 감독.
#7. 2017년 초, 광화문
2016년 10월부터 매주 토요일마다 광화문엘 갔다. 자주 종필 형과 마주쳤다. 나는 사회주의 정당에서 상근활동을 하고 있고, 형은 같은 당 당원이었다. 촬영하느라 바쁜 와중에도 형은 가끔씩 조직 깃발을 찾아와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곤 했다. 그날도 내가 잠시 자리를 떴다가 와보니 형이 와 있었다. 길에서 만나는 형은 늘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 형이 어딘가에 걸터앉아 지치고 힘든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세연아.” 그 모습이 낯설어서 나도 모르게 형의 손을 잡았다. 얼음장 같았다. “손이 왜 이렇게 차니,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좀 따뜻하게 입고 다니고 몸 좀 챙기면서 살아라.” 지금도 형을 생각하면 그 지친 표정이 떠올라서 마음이 먹먹해진다.
#8. 2017년 7월 29일 새벽, 박종필 감독 장례식장
7월 28일. 형이 떠난 날, 강릉엘 가서 형이 가기 전 마지막 모습을 봤다. 고마웠다. 형이 떠나고 나서 서울 장례식장으로 왔고,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속속 장례식장으로 모였다. 장례위원회를 구성하고, 장례 절차에 대한 회의를 하고, 남은 사람들이 새벽까지 종필 형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입신 이야기가 다시 나왔다. 우리는 모두 형이 입신했다는 걸 인정했다. 입신뿐만 아니라 양명까지 했다는 것도. 종필 형, 참 잘 살았어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너무 짧아서 속상하지만, 고단했을 그 길.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오느라 애 많이 썼어요. 종필 형. 형이 살아있을 때도 그랬지만 앞으로도 살면서 힘들 때 형을 기억하겠습니다. □
글쓴이 박세연
1996년부터 영상 활동을 시작하여 다큐멘터리 제작집단 ATV, 노동자뉴스제작단에서 활동했다. 이후 개인 작업을 하다가 2015년부터 현재까지 사회변혁노동자당 상근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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