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ACT! 103호 인터내셔널] 미국의 퍼블릭 액세스, 1인 미디어의 날개를 달다

전체 기사보기/미디어인터내셔널

by acteditor 2017. 5. 15. 15:44

본문

[ACT! 103호 인터내셔널 2017.5.19]


미국의 퍼블릭 액세스, 1인 미디어의 날개를 달다


성상민 (ACT! 편집위원회)



 한국을 비롯한 세계가 ‘4차 산업 혁명’이란 말로 시끄럽다. 기존의 산업 구조가 송두리째 뒤 바뀌고, 인간이 기계에 자리에 빼앗길 것이라는 두려움이 점차 잠식하고 있다. 그러나 최소한 미디어 영역에 있어서는 이러한 변화가 이미 현실이 된지 오래다. 당장 한국만 해도 TV 시청률과 신문 구독률이 큰 폭으로 하락했다. 굳이 시간에 맞춰 TV를 보는 대신 VOD 서비스로 시공간의 제약 없이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거추장스러운 종이 신문 대신 포털과 SNS를 통해 내 입맛에 맞는 기사만 보는 시대가 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변화는 퍼블릭 액세스에 큰 타격으로 돌아오고 있다. 전통적인 TV와 라디오 매체를 기반에 두었던 퍼블릭 액세스였기에 올드 미디어의 퇴조가 고스란히 퍼블릭 액세스가 점차 사람들과 멀어지는 위기로 되돌아 온 것이다. (물론 2000년이 되어서야 겨우 퍼블릭 액세스가 법적으로 보장된 한국은 애초에 전파를 활용하는 것에 제약이 너무 심했기에 빠르게 인터넷을 택한 지 오래다.)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뉴 미디어가 보편화된 세상, 미국의 퍼블릭 액세스는 어떤 길로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는가.



68 운동으로 시작된 미국 퍼블릭 액세스, 위기를 맞다


 한창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가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는 물결로 뒤덮였던 1960년대 중후반, 시민권을 보장하라는 요구가 뜨겁게 휘몰아쳤고 사회의 모든 영역이 변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빠르게 확산되었다. 미디어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자본을 앞세워 말초적인 즐거움과 편향적인 시각으로 일관되던 TV 매체를 실제 TV를 보는 일반 ‘시청자’들에게 실질적으로 활용할 권리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이러한 주장에 발맞춰 1968년 버지니아주, 1970년 위스콘신주와 뉴욕시에서 퍼블릭 액세스 채널에 대한 실험적 시도가 이뤄졌다. 국지적인 흐름이었지만, 자본의 요구에 순응하는 채널들이 득시글거렸던 상황에서 이전에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공공적인 성격의 TV 채널이 나왔다는 것은 화젯거리가 될 수밖엔 없었다.


 미국 연방정부 산하의 방송-통신을 총괄하는 기관인 ‘연방통신위원회’(FCC)는 발빠르게 이러한 흐름을 미국 전체 차원으로 만들기로 나섰다. 1970년에 FCC가 제출한 보고서에서는 케이블 방송이 지역 사회에 속한 개인의 의사를 자유롭게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 되어야 하며, 대중이 선택할 수 있는 프로그램의 종류를 늘려야 한다는 입장을 드러냈다. 이후 1972년, FCC는 ‘미국 전체 100위 내에 속하는 모든 케이블 방송 사업자가 3개의 PEG 채널(’Public, Education, Goverment‘의 줄임말. 공공적-교육적-지역자치적 성격을 지니는 퍼블릭 액세스 채널을 의미하는 말.)을 서비스할 것’을 의무화했다. 이 규제는 1976년 더 확대되어 ‘3,500명 이상의 가입자를 보유한 지역 케이블 방송 사업자는 최대 4개의 PEG 채널를 서비스하며 대중들이 방송 장비, 스튜디오를 사용하여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할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케이블 방송 사업자들이 가만히 이 규제를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미국 중서부 지역에서 케이블 방송 사업을 하던 ‘미드웨스트 비디오’(Midwest Video Corp.)는 ‘FCC의 규제가 기업에게 부당한 간섭을 하는 것’이라며 1972년 소송을 제기했고, 이에 1979년 연방대법원은 미드웨스트 비디오의 손을 들었다. FCC의 요구는 미국 수정헌법 1조가 명시한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사진 1] 1984년, 케이블 방송 사업자가 퍼블릭 액세스 채널을 자유롭게 방송할 수 있도록 규정지은 ‘케이블법’을 발의한 공화당 배리 골드워터 상원 의원. 비록 그는 1964년 대통령 선거에서 핵무기 사용을 긍정하다 민주당의 린든 B. 존슨에게 대패할 정도로 보수적 성향을 지닌 인물이었지만, 퍼블릭 액세스를 미국에 자리 잡게 만든 중요한 존재였다.


 하지만 곧바로 FCC가 미국 전체에 제기한 퍼블릭 액세스 채널의 요구가 바로 고꾸라졌던 것은 아니었다. 1984년 공화당의 배리 골드워터 상원 의원이 발의한 ‘케이블법’(Cable Communication Policy Act of 1984)은 기업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퍼블릭 액세스가 방송의 공공성을 지키는 확고한 방패막이 되었다. 비록 PEG 채널을 서비스하는 것은 케이블 사업자가 허용할 수 있지만 결코 의무가 아니라며 타협했지만, 대신 케이블 방송 사업자가 PEG 채널에 간섭을 가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퍼블릭 액세스의 채널이 자유로운 표현의 수단이 될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케이블 사업자의 저항이 끊긴 것은 아니었다. 연방법을 쉽게 바꾸기 어렵다면, 이보다 좀 더 로비나 개정이 수월한 주법을 건드리는 식으로 전략을 바꾼 것이다. 2006년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케이블 방송 사업자가 일반 대중들에게 스튜디오 및 장비 대여, 방송 제작 교육을 무료로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골자로 하는 ‘디지털 인프라 및 비디오 경쟁법’(The Digital Infrastructure and Video Competition Act of 2006)을 통과시키며 많은 퍼블릭 액세스 스튜디오가 문을 닫는 상황이 벌어졌다. 물론 여전히 케이블 방송 사업자가 퍼블릭 액세스 채널을 제공해야 한다는 조항은 있었지만, 법 개정안으로 인해 제작비용이 급증한 마당에서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또한 직접적인 법 개정은 아니어도 PEG 채널의 번호를 최대한 뒤로 미루거나, 심지어는 채널의 화질을 최대한 낮은 수준으로 서비스하는 등 소비자들이 PEG 채널에 접근하는 빈도를 최대한 줄이려는 시도를 저지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TV나 라디오 같은 전통적인 매체를 시청하는 사람들도 점차 줄기 시작했다. 여기에 지역 퍼블릭 액세스의 든든한 기반이 되준 PBS나 NPR과 같은 공영 TV/라디오 채널마저 위기에 놓이며 미국 퍼블릭 액세스는 점차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다.



TYT 네트워크, 데모크라시 나우… 1인 미디어를 통해 다시 성장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퍼블릭 액세스를 기반으로 시작했던 매체들은 저마다 자구책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 기사에서 소개한 TYT 네트워크는 이중 미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 몰이를 하며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처음부터 TYT 네트워크가 1인 미디어의 길을 걸었던 것은 아니었다. 2011년 폐국한 미국의 위성 라디오 채널 ‘시리우스 위성 라디오’(Sirius Satellite Radio)에서 2002년 첫 방송을 시작한 <더 영 턱스>(The Young Turks)(*주1)가 TYT 네트워크의 시작이었다.


 위성 라디오에서 퍼블릭 액세스 성격을 지닌 프로그램을 서비스하기 위해 막을 올린 <더 영 턱스>는 차츰 시간이 흐르며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되었다. 특히 2006년, 보수적 성향을 지닌 판사 사무엘 알리토(Samuel Alito)가 연방대법관으로 지명되기 위해 열렸던 국회 청문회를 99시간 동안 연속 생방송한 것이 크게 주목을 받으면서 <더 영 턱스>는 단순한 위성 라디오 프로그램을 넘어 수많은 미국 국민들이 찾아듣고 싶어하는 프로그램이 되었다.



[사진 2] TYT 네트워크의 기반이 되었던 시사 토크 프로그램 <더 영 턱스>의 진행자이자 제작자 센크 위구르(Cenk Uygur). 위성 라디오의 퍼블릭 액세스 프로그램에서 시작된 <더 영 턱스>는 2006년 유튜브로 매체를 이전하며 위세를 떨치고 있다.


 하지만 <더 영 턱스>의 기반인 위성 라디오는 조금씩 무너지고 있었다. 라디오 전파가 잘 닫지 않는 지역에서도 손쉽게 들을 수 있으며 공중파 라디오보다 규제가 약하다는 것이 위성 라디오의 강점이었지만, 인터넷이 보편화되면서 위성 안테나를 별도로 구입해 비싼 요금을 주며 들어야 하는 위성 라디오는 점차 시청자들과 멀어지고 있었다. 결국 2009년, <더 영 턱스>는 오랜 시간 동안 함께한 시리우스 위성 라디오와 결별을 선언했다. 대신 2006년. <더 영 턱스>는 당시 막 서비스를 시작한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유튜브’를 통해 자신들의 방송을 음성 기반에서 영상 기반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2010년부터는 <더 영 턱스> 외에도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제작하며 ‘TYT 네트워크’를 선언하게 되었다.


 이후로 TYT 네트워크는 유튜브를 기반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2017년 1월을 기준으로 TYT 네트워크의 유튜브 채널은 일 평균 910만건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2016년 10월까지 누적 조회수가 총 30억 회를 돌파했다고 발표했다. <인디펜던트>는 기사를 통해서 TYT 네트워크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온라인 뉴스 쇼”라고 발표했을 정도다. TYT 네트워크는 2014년 사모투자 회사로부터 400만 달러의 투자를 받는 것은 물론, 수익의 2/3 가량을 유튜브 광고 수익으로 얻으면서 한동안은 온라인 시사 토크 프로그램에서 위세를 게속 떨칠 전망이다.


 이렇게 TYT 네트워크가 1인 미디어의 길을 택하며 사업적으로 폭발적인 위세를 드러냈다면, <데모크라시 나우!>(Democracy Now!)는 철저하게 비영리적으로 매체를 꾸리며 1인 미디어와 함께하는 길을 택한 매체로서 주목할 만하다. 원래 <데모크라시 나우!>는 1996년 뉴욕 WBAI-FM에서 퍼블릭 액세스의 일환으로 첫 방송을 시작한 진보적인 성격의 뉴스 프로그램이었다. 특히 동티모르 분쟁과 미국 셰브론(Chevron) 사의 원유 유출 사건에 항의하던 나이지리아인 두 명이 사망한 사건을 집중적으로 취재하며 호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2001년 <데모크라시 나우>를 방송하던 WBAI-FM를 소유한 비영리 단체인 퍼시피카재단(Pacifica Foundation)과 벌어진 갈등은 이들의 발목을 잡게 되었다. 개별 프로그램들의 독립성을 부여하던 퍼시피카 재단이 조금씩 프로그램의 제작과 방향성에 대해 간섭을 시작했고, <데모크라시 나우!>에 대해서도 너무 프로그램이 좌편향이라는 등 수정 의견을 내세우며 충돌이 점차 잦아졌다. 결국 <데모크라시 나우!>를 제작하던 이들은 WBAI-FM에서 나와 독립할 수밖엔 없었다.

 이후로 <데모크라시 나우!>는 철저하게 비영리적이며 독립적인 길을 추구하고 있다. 운영비용은 오직 시청자나 공익/비영리 재단의 후원금을 통해서만 충당하며, 광고주나 기업 스폰서는 물론 정부 기금조차 받지 않고 있다. 덕분에 제작진들이 프로그램 제작은 물론 홈페이지나 SNS를 관리하고, 다시 온라인 서비스를 위해 영상을 재편집하는 등 1인 다역을 맡고 있지만 최소한 WBAI-FM에 있던 시절과 달리 방송의 독립성은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사진 3] 퍼블릭 액세스 뉴스 프로그램에서 시작해 어느덧 비영리 대안 언론으로 자리잡게 된 <데모크라시 나우!>의 진행자 에이미 굿맨(Amy Goodman)과 후안 곤잘레즈(Juan Gonzalenz).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비판적으로 다루면서 시청자들의 수도 늘고, 라디오 프로그램으로 시작했던 매체는 어느덧 영상을 기반으로 한 독립적인 온라인 뉴스 사이트가 되었다. 하지만 <데모크라시 나우!>가 고용할 수 있는 취재원의 수는 한정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데모크라시 나우!>는 적극적으로 1인 미디어와 협력하는 길을 택했다. 일반 시민들이나 시사적 성향의 1인 미디어들이 직접 파헤친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매체에 싣거나, 함께 취재에 협력하면서 공동으로 취재하고 기사를 생산한다. 그리고 그렇게 생산된 기사들은 다시 유튜브나 SNS를 비롯한 인터넷을 통해 유통된다.


 이는 <데모크라시 나우!>를 통해 활동하는 이들의 면면에서도 관찰된다. <데모크라시 나우!>의 PD인 샤리프 압델 쿠드더스(Sharif Abdel Kouddous)는 자신의 개인 블로그와 유튜브를 통해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초토화된 뉴올리언스, 아이티 대지진, 이라크 전쟁 당시 바그다드의 상황 등을 전하면서 스타 1인 미디어가 되었다. 심지어는 2004년과 2008년에 각각 민주당과 공화당과 취재 협약을 맺을 정도였다. 브루클린을 기반으로 지역 원주민, 흑인 및 소수자 공동체를 주로 다루는 1인 영상 제작 활동을 해왔던 안드레 루이스(Andre Lewis) 같은 이들도 <데모크라시 나우!>와 함께하는 파트너이다.


 2015년 5월 2일, <한겨레21>과 나눈 인터뷰에서 <데모크라시 나우!>의 러네이 펠츠(Renée Feltz) PD의 발언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볼티모어에서 누군가 영상을 찍어서 우리에게 보내오면 그 사람은 풀뿌리 기자가 되는 셈이다. (중략) 뉴스 플랫폼 유통도 마찬가지다. PBS, NPR 같은 공영방송뿐만 아니라 유튜브, 트위터 등 최대한 여러 가지 플랫폼을 통해 시청자에게 다가서려 노력하고 있다.”



퍼블릭 액세스, 1인 미디어 속 경쟁에서도 살아남기 위해


 TYT 네트워크와 <데모크라시 나우!>는 미국 퍼블릭 액세스가 급변하는 동시에 위협받는 미디어 환경 속에서 돌파구를 찾은 대표적인 사례이지만, 이 둘의 사례만으로 안심하긴 이르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가 새로운 미국 대통령에 집권한 이후로 친기업, 친자본적인 미디어 정책 변화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가뜩이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공영방송 PBS, NPR은 물론이고 이미 벼랑 끝에 몰려 있는 미국 전역의 수많은 퍼블릭 액세스 프로그램과 채널들은 언제 폐국해도 이상하지 않을 위기에 몰려 있다.



[사진 4] 2011년 미국 공화당이 PBS와 NPR에 대한 예산을 줄이려 하자 이에 반발하여 미국 국회의사당에서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1980년 레이건 정권 이후로 PBS와 NPR에 대한 예산은 점차 줄어들고 있으며, 트럼프 정권을 맞이한 지금 두 공영방송국은 다시 한 번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런 상황에서 TYT 네트워크의 기록적인 성공은 ‘유튜브’가 도입되던 초창기에 온라인 시사 프로그램 시장을 빠르게 선점한 것에 어느 정도 운이 더해진 결과임을 유념해야 한다. TYT 네트워크와 다르게 철저하게 비영리적인 행로를 걷고 있는 <데모크라시 나우!>도 물론 존재하지만, 개인-공익재단의 후원금에만 의존하는 상황은 <데모크라시 나우!>의 상황이 결코 안정적이지 않음을 의미한다. 여기에 CBS를 비롯한 전통적인 대형 미디어들이 속속 SNS, 유튜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심지어는 기존 1인 미디어들마저도 속속 인수하는 상황은 인터넷에서도 퍼블릭 액세스가 대형 매체들에 밀려날 수도 있다는 위험성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결국 지금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정책적으로 확고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케이블과 라디오가 상업적인 방송으로만 뒤덮였을 시절, 68 운동이 만든 사회적 분위기는 연방 정부와 정치인으로 하여금 방송의 공공성을 확고하게 박는 계기를 만들어 퍼블릭 액세스가 한동안 미국에서 중요한 가치로 자리 잡게 만들었다. 1인 미디어 시대의 퍼블릭 액세스 역시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정부 기관의 규제든, 새로운 조항을 삽입한 법을 제개정하던 명확한 흐름을 정부 차원에서 제시하는 것이 현재의 혼란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망 중립성’ 같은 기초적인 흐름마저 폐기하려는 수순을 걸으려하는 트럼프 정부가 과연 자신에게 눈엣가시 같은 1인 미디어와 퍼블릭 액세스의 공공성을 지키려 할까. 한동안 미국의 대안 언론을 지향하는 1인 미디어들과 퍼블릭 액세스 활동가들은 정부의 압박과 자본의 파상공세에 맞서 매체의 공공성을 지키기 위해 쉽지 않을 싸움을 계속 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


(주1) <더 영 턱스>(The Young Turks): 직역하면 ‘젊은 터키 사람들’. 이는 진행자 센크 위구르가 터키계 미국인을 드러내는 표현이기도 하지만, 영미권에서 ‘Young Turks’는 20세기 초 오스만 제국을 붕괴시킨 터키 혁명의 주도세력 ‘청년터키인당’을 칭하는 말이라 ‘젊은 개혁파’ ‘급진분자’를 말하는 관용어구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더 영 턱스>는 방송의 성격이 사회 개혁을 원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중의적인 방식으로 사용된 프로그램 제목이다.


참고자료


<Cable flips channel on public access TV>, 2009년 1월 5일, <Los Angeles Times>

http://articles.latimes.com/2009/jan/05/entertainment/et-publicaccess5&usg=ALkJrhhYlXIx_KLE9koKqKFmFzt59UhNIw


<Time Warner Cable moving PEG channels to digital-only format>, 2013년 7월 8일, <FierceCable>

http://www.fiercecable.com/cable/time-warner-cable-moving-peg-channels-to-digital-only-format


<Democracy Now!>의 스태프 소개란

https://www.democracynow.org/about/staff


<뉴스를 위해 셸 위 댄스?>, 2015년 5월 20일, <한겨레21> 1062호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9548.html





[필자소개]

성상민(ACT!편집위원회)

지금은 사라진 만화언론 [만]에 2005년 얼떨결에 객원필진으로 데뷔해 한 10년 이상 팔자에도 없을 줄 알았던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 빨리 졸업하려고 다짐했던 경희대학교 사회학과는 2010년 입학한 이래 졸업 학점은 아직 한참 많이도 남았지만 이젠 뭐 언젠간 졸업하겠거니 하고 만다. 지금은 [ACT!]와 [미디어스]를 중심으로 만화, 영화, 미디어 등 각종 문화에 관련된 글을 줄창 쓰고 있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