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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02호 이슈와 현장] 마침내 극장의 입구에서 -프로젝트 취재: 마침 내 극장 ‘목욕탕을 지나야 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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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7. 3. 9.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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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02호 이슈와 현장 2017.3.10]


마침내 극장의 입구에서

- 프로젝트 취재 : 마침 내 극장 ‘목욕탕을 지나야 입구’


차한비 (ACT! 편집위원)



2월 4일(토)은 입춘이었다. 새해의 첫 번째 절기, 봄의 시작이라지만 날은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우중충했고 찬바람에 입김이 새어 나왔다. 재개발 지역 특유의 정다움과 누추함이 교차하는 아현동에 접어들자 저 멀리 굴뚝 하나가 보였다. 1960년대에 문을 열고 동네 목욕탕으로 오랫동안 자리하다가 지금은 더 이상 연기를 피워 올리지 않는 ‘행화탕’. 그곳에 젊은 문화기획자와 큐레이터, 그리고 독립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이 모여 ‘마침 내 극장-목욕탕을 지나야 입구’라는 제목으로 2월 3일(금)부터 5일(일)까지 사흘간 전시와 상영회를 연다고 했다. 나무보다는 높고 고층 아파트보다는 낮은 굴뚝을 목표점으로 찍어두고 행화탕을 향해 걸어가는 길에, 문득 ‘새로움’에 대한 의문이 생겨났다.



△ '마침내극장' 상영회가 열린 행화탕 입구



사람들은 종종 새로운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금과는 다른 무언가를 보여주고, 이제까지와는 차별된 방식으로 해내야 한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듣는다. 그 새로움이란 무엇인지, 새로우면 과연 다른 것인지, 미래는 현재나 과거를 대체할 때 특별함을 획득하는지, 맥락을 단번에 정리하기 어려운 질문들이 겹치면서 잠시 머뭇거렸다. 집이 비워지고 사람들이 떠나고 건물을 부수고 나면, 새 집과 새 건물이 세워지고 이전에 살던 사람들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들어와서 그 자리를 채운다. 새 것이자 다른 것이지만 그야말로 식상하고 소모적인 재개발처럼 ‘젊음’과 ‘예술’, 그리고 ‘독립’이라는 영역에도 언젠가부터 비슷한 요구가 반복되고, 그것은 결국 닮은꼴의 새로움으로 표현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의심과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러니까, 붉은 벽돌로 쌓은 굴뚝을 바라보면서 ‘새로움’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몇 개의 키워드로 연상되는 빤한 그림도 가급적 지워내려 했다. 처음 방문한 공간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처음으로 감상하는 영화들이 있겠지만 단지 ‘처음’이라는 이유만으로 호들갑을 떨지는 않겠다고, 레고 블록을 얹어 놓은 듯한 노란 외벽의 목욕탕 앞에서 그런 다짐 아닌 다짐을 한 후에야 문을 열었다.



△ 입구에 상영회 포스터가 걸려있다



“입구를 지나면 8개의 입구”


상영회는 행화탕 건물 뒤편의 주택과 창고에서 이루어졌다. 주택 1층은 관객들을 맞이하는 로비로 사용하고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가면 2층의 크고 작은 방들에서 다섯 편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녹슨 타일과 수도꼭지가 여전히 남아 있는 반지하에서는 두 편의 작품을 상영 중이었고, 주택과 목욕탕 사이의 널찍한 창고 또한 상영 공간으로 구성하여 단편부터 장편까지 총 여덟 편의 영화를 감상할 수 있도록 배치했다. 기획자와 참여 감독, 그리고 관객들이 어울리며 공간을 채웠다. 이쪽 방에서는 영화를 보고, 저쪽 방에서는 상영을 위한 준비 작업이 이루어지고, 중앙에서는 인터뷰가 진행되는 식이었다. 


2층 맨 왼쪽 방에서는 재능교육 학습지 교사 노동자들의 투쟁과 갈등을 담은 다큐멘터리 <명자나무>(연출 김석, 2015)를 상영 중이었다. [단체협약 원상회복 해고자 전원복직 농성투쟁 2815일차]라고 매직으로 눌러쓴 피켓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 뒤에 누군가가 서 있는 듯 피켓 상단에는 거뭇하게 닳은 장갑이 얹어 있고 그 위로 조끼와 모자가 세워져 있었다. 어둑한 벽에는 재능노조 유명자 지부장 앞으로 도착한 편지들이 부착되었고, 비닐 천막으로 둘러싸인 텐트 안에서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감독은 투쟁 현장에서 직접 가져온 물품들로 방을 채우며, 다큐멘터리 제작 과정에서 그 자신이 경험했을 ‘현장’을 충실하고 정직하게 재현해냈다.



△ 김석 감독의 <명자나무>를 보기 위해서는 농성장을 재현해놓은 듯한 텐트에 들어가야 한다 


부성필 감독이 연출한 <목소리톡>(2015)을 보기 위해서는 정방형의 작디작은 문을 열고 들어가야 했다. 문고리 대신 매달아놓은 끈을 잡아당기면 문자 그대로 ‘목소리톡 전용관’이 등장하는데, 좁은 방에는 모니터와 이불 한 채뿐이었다. 어떤 설명이나 지침도 없지만 1평도 안 될 법한 방에 혼자 있자니 자연스레 이불을 두르고 몸을 웅크리게 되었다. ‘목소리톡’이라는 음성 랜덤채팅 어플을 하는 감독과 그가 채팅을 통해 만난 사람들과의 대화를 지켜보다가 나도 모르게 주머니에 손을 넣어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감독은 공간의 면적이 주는 효과를 최대한 활용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가 내포하고 있는 답답함과 불안, 그리고 외로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정서를 적극적으로 체험하도록 만들었다.


감독 스스로 ‘국내 최초 본격 SF 질병 다큐멘터리’라고 소개한 <덩어리>(연출 오쟁, 2016)는 단순 상영을 넘어선 2차 창작에 가까웠다. 외계인과 유에프오, 종내에는 실체가 없는 질병으로서의 공황장애까지 위태로우면서도 거침없이 유영하는 이 작품은 영상뿐만 아니라 설치 구조물과 그림, 글, 사운드와 함께 복합적으로 재탄생하며 현란하고도 음산한 ‘덩어리’의 존재를 공간 전체에 등장시켰다. 영화만을 위한 공간을 또 하나의 작품으로 연출한 노력과 감각이 눈에 띄었고, 다른 누군가가 아닌 감독이 주체가 되어 상영 조건을 선택했다는 점이 분명하게 전달되었다.



“기억에는 어쨌든 영화가 더 오래 남을 거예요.”


그제야 눈치를 챘다. 지금 여기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이곳은 의도로 가득한 세계였다. 폐허가 지닌 매력에 기대어 일시적인 새로움을 부여하는 도구로써 공간을 사용한 것이 아니었다. 참여자들은 행화탕을 단순히 기존의 극장 상영을 대신할 만한 ‘비(非)극장’ 또는 낡고 드물어서 관객들의 시선을 끌기 쉬운 ‘힙플레이스’로 기능하게끔 내버려두지 않았다. 이들은 공간에 의지하기보다는 공간을 점유했으며, 관객과의 만남 자체를 넘어서 만남의 정확함에 몰두했다. 


프로젝트 기획자 중 한 명인 김다영 씨에게 기획의도에 대해 묻자 ‘영화’와 ‘창작자’라는 명확한 답변이 되돌아왔다. “일단은 사람들이 다큐멘터리를 봤으면 좋겠어요. 흔히 텔레비전 예능 프로그램에서 ‘다큐’가 농담으로 쓰이잖아요. ‘웃자고 한 이야기를 왜 다큐로 받느냐’ 라면서요. 심각하고 재미없다는 선입견이 있어요. 독립다큐멘터리라고 할 경우 더욱 어렵고 다가서기 힘든 지점이 있고요. 그런데 사실 사회적인 이슈를 담고 무거운 다큐멘터리가 있는가 하면, 가볍고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도 많잖아요. 의미적으로 생각거리를 주는 다큐멘터리라고 해서 재미를 전부 놓친다고 할 수도 없고요. 영화에 대해서 더 보여주고 싶었어요. 영화를 만드는 과정과 창작자들이 말하고 싶었던 것들을 보여주면서 영화의 힘을 잘 전달하고 싶었어요. 처음에는 관객들이 이곳에 와서 공간을 보고 감탄할지 몰라도 집으로 돌아가서는 영화가 떠오를 것 같거든요.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에는 어쨌든 영화가 더 오래 남을 거예요.”



△ 조이예환 감독의 <불빛 아래서>가 창고 공간에서 상영되고 있다



넉넉하지 않은 준비 기간과 3일이라는 짧은 상영 일정에도 불구하고 여러 언론 매체를 통해 노출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서 묻자, 김다영 씨가 이어서 대답했다. “저도 마찬가지인데, 여기 있는 감독들은 계속 설명을 해야 하잖아요. 자기소개부터 독립다큐멘터리란 무엇이고, 나는 이걸 왜 찍었고, 영화 속의 상황은 어떻게 일어난 일이고 등등. 보도자료가 나오면 질의응답을 줄일 수 있고, 개인적으로는 감독들에게 다양한 작업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주고도 싶었어요. 나중에 대외적으로 소개할 일이 있을 때 인터넷 기사 링크를 공유할 수도 있고요.”



“한 번 하고 말 거 아니니까, 와서 기록을 좀 해주시면 좋겠어요.” 


김다영 씨는 액트에 취재를 제안한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저희 한 번 하고 말 거 아니니까, 와서 기록을 좀 해주시면 좋겠어요.” 앞뒤가 맞지 않는 문장이었다. 기록은 저장하는 일이고, 때문에 대개의 경우 일회적인, 이때가 지나면 다시는 볼 수 없고 곧 사라져버리는 것이 그 대상이 된다. 하지만 김다영 씨는 ‘지속’을 염두에 두고 기록을 요청해왔다. “작품을 통해서 관객들과 만나고 우리끼리 즐기는 것도 물론 의미가 있죠. 하지만 그런 의미로만 작업하는 건 지속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앞으로 이어질 시간들과 계속 맞닥뜨리고 통과해내야 할 과정에서 함께 고민해보자는 제안으로 들렸다.


그간 영화의 유통과 배급 환경이 변화함에 따라, 영화와 관객을 만나게 하는 상영 방식과 형태 또한 다각도에서 논의할 필요성이 제기되어 왔다. 독립영화의 극장 개봉 편수가 늘어나고 온라인 상영이 보편화되는 동시에, 공동체 상영에서도 배급사를 통한 상영부터 개인이나 팀별 소규모 상영회 기획, 제작자들의 직접 배급 및 상영까지 다종다양한 활로가 탐색 중에 놓여 있으며, 공동체 상영의 욕구가 있는 커뮤니티와 영화를 매칭하는 온라인 플랫폼이 생겨나기도 했다.



△ 극장 한 켠에는 '미완의 풋티지'라는 타이틀로 사진 전시도 진행되고 있었다



한편 이와 같은 시도가 거듭될수록 새롭고 다른 것에 대한 요구 역시 재차 반복되었고,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함에도 실제 현실은 정체되어 있거나 도리어 악화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김다영 씨는 단호하게 말했다. “사회적으로 지어지는 테두리가 너무 싫더라고요. 왜 예술 하면 가난해야 되지? 상업영화에서는 돈 벌면 흥행이고 능력을 인정받은 거고 당연히 더 벌어야 되는 건데, 독립영화 하는 사람들이 돈 많이 벌고 싶다고 하면 안에서도 밝힌다든가 초심을 잃었다든가 라는 말들을 하잖아요. 저는 솔직히 여기 있는 사람들 다 잘 됐으면 좋겠어요. 아르바이트 하고 쫓길 시간에 작업에 집중하고, 외국도 다녀와 보고, 그렇게 돈 걱정 안 할 때 더 좋은 작품 나올 수도 있는 건데. 이런저런 아쉬움이 있어요. 이 프로젝트를 계기로 다음 기회를 잡고 이후 작업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나의 최고, 내 영화의 최상”


저마다의 위치에서 가능한 길을 찾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내 극장 ‘목욕탕을 지나야 입구’ 프로젝트 참여자들은 이제껏 그 누구도 갖지 못한 ‘처음’을 선취하는 것에는 큰 관심이 없는 듯했다. 기획자의 과감한 결정과 창작자의 영특한 고집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와 상영에서 제일 인상 깊었던 것은 그들이 관객을 배려하거나 이해시키기 위해, 또는 더 많은 숫자의 관객을 불러 모으기 위해 ‘지나치게’ 노력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다르게 보이기 위해서 애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노력을 했고, 그것은 ‘나의 최고, 내 영화의 최상’을 보여주겠다는 자긍과 의지로 다가왔다. 


차갑고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모래>(연출 강유가람, 2011)를 보았다. 스크린으로 사용된 흰 벽과 의자 사이에는 진짜 모래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어떤 순간에 도착했다. 영화 안과 밖이 마치 깍지를 낀 두 손처럼 꼭 맞물리는 순간이었다. 텅 빈 아파트와 그 아파트가 맨 처음 지어졌을 마른 땅, 조금의 점성도 없이 바스락거리는 모래알들이 약속한 듯 하나로 합쳐지며 이 영화를 오래 기억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 오현진 감독의 <시력교정 불청객 나비>, 최현호 감독의 <무지개 그림자>가 상영되고 있다



그렇게 어느 겨울날, 아현동 행화탕에서는 영화와 공간과 사람이 가장 정확하게 만나는 실험이 진행되었다. 그들은 관객과 만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만남의 형질을 고민해야 할 시점임을 주지시키며, 사흘이 지나고 나면 철수해야 할 공간을 더욱 풍성하고 최고로 적합하게 만들기 위해 계속 욕심내고 있었다. 여덟 편의 영화들은 각기 다른 영화적 재현과 체험, 그리고 창작을 통해 잠시 동안 그들이 머물렀던 공간을 차지했다. 그 안에서 무엇을 대신하거나 무엇으로 교체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새로움을 뒤쫓지 않으면서 그들은 전혀 새로운 위치를 확보했고, 영화와 공간과 관객은 서로에게 찰나의 순간을 선물했다.


늦게까지 행화탕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기획자는 “그래도 오늘 손익분기점을 넘겼다.”며 시원하게 웃었고, 감독은 “비가 안 와서 다행이네.”라며 관객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 다음이 있으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마침 내 극장을 가질 수 있었다. □


※ 사진 출처 : 마침내극장 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마침-내-극장-367078117002125


[필자소개]

차한비

어려도 추워도 가방을 내려놓지 않아도 

아무데나 걸터 앉아서도 가능한 것들이 언제까지나 그랬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것을 지켜내는 가장 좋은 방법을 찾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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