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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81호 Me, Dear] Back to the Future: 한 신진 감독의 독립 다큐판 1년 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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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3. 4. 12.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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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81호 Me, Dear 2012.11.13] 

 

Back to the Future:  

한 신진 감독의 독립 다큐판 1년 체험기

 

스이(ACT!편집위원회)

 
  "당신들은 프로가 아니잖아?"(지난 6월, 영진위 사전제작지원 심사장. 월 80만원의 인건비 지원 신청에 대한 모 심사위원의 반응)
 
  나는 이 말을 들으면서 약 1년 여 에 걸친 나의 독립 다큐판 생존 프로젝트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씁쓸하고, 한편으로는 시원했다. 마치 현실계로 돌아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것 같았다. 
 
  작년 4월, 미디액트에서 독립 다큐멘터리 제작과정을 수료한 이후 진짜 백수가 된 나는, "지속 가능한 작업 기반"을 위해 생존 프로젝트를 시작하기로 했다. 이 생존 프로젝트의 요체는, 독립 다큐판에서 일을 배우면서 작업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것이었다. 혹은, 독립 다큐판에서 살 길을 찾는 것이었다. 정리하자면, 독립 다큐판에서 생활비와 작업비용을 벌면서 독립 다큐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 때는 이런 생각들이 그렇게 큰 욕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때만 해도, 나에게는 직전의 직장 생활 동안 모아뒀던 얼마 안 되는 적금이 있었다. 일단 작업에 필요한 (소형)캠코더와 편집용 컴퓨터를 살 만한 돈은 있었으니 출발은 순조로운 편이었다. 나는 용기 반 두려움 반으로 적금을 깨고, 기초적인 작업 기반을 마련하면서 운 좋게 따낸 LGBT 미디어 프로젝트 전시의 기획을 하기 시작했다. 
 
  5월은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달이었다. 모아놓은 돈이 약간 남아 있었고, 하고 싶었던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으니. 카페와 집을 왔다갔다하면서 전시에 필요한 물품을 만들고, 함께 독다큐를 수료한 동기들과 영화제 출품을 위한 단편 영상을 편집하고, 진보적 미디어 연구 웹진 'ACT!' 편집회의를 하느라 정신없이 바빴지만, 마음에는 분주함이 없었다. 그 때 나를 만난 사람들은 다들 “얼굴이 폈다”고 했다. 
 
  알음알음 조금씩 미디어 관련 알바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임금은 항상 문제가 되었다. 어떤 미디어 전시 보조 알바는 유급인 줄 알고 시작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무급이었다. 또 다른 행사용 영상 조연출 알바는 행사가 끝난 몇 달 후에야 겨우 돈을 받을 수 있었다.  
 
  두 번의 알바를 하고 전시 작업을 준비하는 동안 6월 말이 되자, 통장 잔고는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다른 영상 알바를 열심히 찾았지만, 영상학과 출신이 아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이번에는 누군가 식당 알바를 소개시켜주었다. 예전에 영상 활동을 했던 사람들끼리 만든 식당이라는 말에 덥석 물었다. 시급은 6000원 정도였다. 
 
  주 3-4일 저녁 다섯 시부터 밤 열한 시까지 식당에서 일했다. 한 달에 들어오는 돈은 60만원 남짓. 방값과 각종 공과금, 교통비, 전화비를 제하고 나면 10만원도 남지 않았다. 각종 영화제의 출품 마감 기간이 하릴없이 지나가고 있었다. 신진 작가 지원에서는 서류 통과도 쉽지 않았다. 영화인들이 자주 들렀던 그 식당에서 손님으로 온 어떤 감독님은 '스이 씨, 작업하셔야죠'라고 말해주었지만, 영상 작업은 내게서 점점 멀어져 갔다. 식당의 사장님들도 영상 작업에 대해 이런 저런 조언을 해주었지만, 혼자 아등바등하는 듯한 느낌은 시간이 갈수록 강해졌다. 
 
  7월 말, 식당에서 나를 본 사람들로부터 일자리 제의가 들어왔다. 하나는 독립 다큐 조연출. 다른 하나는 미디어 운동 단체의 실무자. 장편 독립 다큐 제작과정을 가까이 보면서 일을 배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8월 중순부터 조연출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다. 
 
  조연출 생활은 끊임없는 갈등의 연속이었다. 첫 번째 작업은 감독과의 소통 문제를 이유로 2주 만에 끝이 났다. 얼마 뒤 두 번째 작업에 자료 검색 조연출로 참여하면서 시급을 받아 생활했지만, 조연출과 내 작업을 병행하는 것은 애초부터 희망사항이었던 것일까. 풀타임 조연출로 일하면 내 작업이 어려웠고, 파트로 일하면 내 생활이 어려웠다. 결국 두 번째 조연출 작업도 지지부진하게 진행되다가 올해 초에 밀려났다.
 
  게다가 임금 문제는 언제나 예민하고 모호한 문제였다. 한정된 예산 규모는 '을'의 저임금을 불가피한 것으로 만들었다. 물론 나의 '갑'은 임금 수준을 최대한 맞춰주려고 했지만, 나의 월 지출은 항상 월 수입을 넘어섰다. 쌓여가는 카드빚을 보면서 나는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독립 다큐멘터리가 지향하는 '(자본과 권력, 기존 제도로부터의) 독립'이 누군가의 저임금으로 실현되는 이 상황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그렇게 해를 넘겼다. 반년 넘게 준비했던 LGBT 미디어 프로젝트 전시는 무사히 마쳤지만, 경제적 기반은 여느 때보다도 불안정해졌다. 같이 사는 애인과, 언젠가부터 용돈을 조금씩 보내주는 가족들이 아니었다면 밥을 굶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일출을 보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생활비와 작업 비용을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각종 영화제의 사전제작지원제도를 활용하는 것. 
 
  올해 초부터 공동으로 준비해온 장편 다큐 작업의 기획서를 각종 사전제작지원제도에 제출하기 시작했다. 운이 좋은 경우, 면접이나 공개 피칭까지 가기도 했다. 6월까지 그런 생활이 계속되었다. 기획서와 구성안을 쓰고, 제출하고, 면접 보고…이 모든 것이 경쟁이었다.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독립 다큐멘터리라고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았다. 제작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작품이 나오지 않으니, 제작비를 받아내기 위해 또 다시 자본의 희소성 법칙에 따라 경쟁 구도 안에 들어가야 했다. 
 
  운 좋게 참여한 모 영화제의 피칭 행사는 흡사 모 케이블 방송의 오디션 프로그램을 연상하게 했다. 피칭 강사는 감독들에게 어떻게 투자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지 가르쳤다. 특히 인물 다큐는 인물이 얼마나 흥미로운지,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있는지를 놓고 경쟁해야 했다. 가치를 좇아 제작하는 장편 독립 다큐 세 편에 순위가 매겨지고, 상금을 독식하는 1등이 되지 못하면 결국 영화제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 동원되는 모양새가 될 뿐이었다. 피칭 행사가 끝난 후 허탈함만 남았다.  
 
  영진위 사전제작 심사는 마지막에 본 면접 중 하나였다. 가장 문제가 되었던 지점은, 우리가 인건비를 너무 많이 써내었다는 것이었다. 1인당 월 80만 원. 최저 임금도 채 되지 않는 액수였음에도, 심사위원들은 어이없어 했다. '당신들은 프로가 아니'라는 말이 면접 후에도 계속 귀를 맴돌았다. '프로가 아닌' 신진들은 인건비를 당연히 스스로 마련해야 하는 것이었군, 지난 1년간의 분투 끝에 얻어낸 간명한 답이었다. 
 
  나의 생존 프로젝트는 이렇게 1년 여 만에 끝이 났다. 얼마 전 나는, 생활비 마련을 위해 그 동안 그렇게도 싫어하던 사교육 시장에 뛰어들었다. 생활을 유지하는 동시에 내 작업도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은 독립 다큐판이 아닌, 사교육 시장에 있었다.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작품을 위해 결국 자본의 세습을 돕는 사교육 시장에 종사하게 된 이 상황이 아이러니하지만, 신용불량의 기색이 점점 짙어져 가던 내게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누군가는 다큐를 하려면 무산계급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또 누군가는 피칭 행사와 독립 다큐멘터리가 추구하는 가치 간의 괴리로 인한 마음의 갈등은 감독이 혼자 마음속으로 해소해야 한다고 했다. 예전에는 전무했던 지원제도가 생겨나면서 어떤 작품은 제작비 일부를 해결할 수 있게 된 것도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렇지만, 1년을 버티면서 들었던 생각은 '버티는 것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독립 다큐판은 애초부터 돈이 없다’는 이유로 저임금(혹은 무급)으로 버티면서 작품을 만들어내는 관행은 지속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 (누군가의 저임금에 의한) 값싼 제작비를 의미하지 않으려면, 독립을 지켜낼 수 있는 자본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무산계급이 되어도 좋다’는 말은 ‘누군가에게 저임금을 주어도 된다’는 말과 동의어가 아니다. 신진 감독들이 안정적인 작업 기반을 마련할 수 있는, 신진 감독들의 미래를 앞서 만들어주는 시스템이 없다면 다음 세대는 성장하기 힘들다.      
 
  사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다. 피칭 행사 및 각종 면접을 치르는 동안 좋은 감독님들과 피디님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작품에 대한 조언도 많이 얻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인디다큐페스티발과 모 그룹의 신진작가지원을 받으면서 좋은 멘토를 만나고 제작비 걱정도 덜 수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극히 소수에게만 주어지는 신진작가지원 조차 받지 못한 다른 신진 감독들은 어떻게 작업을 계속해나가고 있을지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하다.   
 
덧붙여. (혹시나 궁금해 할지도 모르는 당신을 위해) 영진위 면접 결과 
  당연히 우리는 떨어졌다. 당시 면접을 보았던 6팀 중에 유일하게 지원을 받지 못했다. 다른 팀은 적어도 500만원은 받았다고 했다. 이 사건으로 받은 심리적 충격을 바탕으로 단편 모큐멘터리를 준비 중이다. 모두에게 정당한 인건비를 지급할 수 있기 위해 지금은 돈을 모으고 있다. 
 
 

 

[필자소개] 스이 (ACT! 편집위원회)

ACT!에 발을 들여놓은 후 미디어운동의 의미를 ABC부터 배우고 있다. 조금 더 배웠으면 좋겠다. LGBT 이야기가 미디어운동 판에서 활발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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