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95호 이슈와 현장 2015.11.15]
공동체라디오 10주년 기념 기획 <내 삶의 라디오>
만만한 라디오, 성서공동체FM에는 이PD가 산다
이영수 (성서FM)
<공동체라디오 10주년 기념 기획 - 내 삶의 라디오>는 공동체라디오 운영 10주년을 맞아 각 공동체라디오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삶 속에 녹아 있는 공동체라디오의 역사와 의미를 되짚어보고자 기획되었다. 전국 7개 공동체라디오에서 방송을 제작하고 진행하며 라디오를 이끌어온 7개 방송국 8명의 인물이 쓴 에세이를 소개한다.
“이PD, 저 오른쪽에 야트막한 동산 보이제? 저기서도 참 마이 놀았다. 근데 거는 애기무덤이 많았지. 산골이라 애는 생기는 대로 낳지만 애기가 아프면 병원 한번 못 가보고 저세상으로 가는 일이 많았거든. 그러면 거적에 둘둘 말아 지게에 얹어 앞동산에 묻는기라. 아~들이 노는 장소를 가리나 말이지. 야트막하고 집에서 부르면 다 들리는 동산이 아~들이 놀기에 딱 안성맞춤이었거든. 놀다 배고프면 산딸기, 잔대, 송구, 꼬드밥, 삐삐, 진달래도 따 먹고 그래 놀았제. 근데 애기무덤 옆에는 가끔 하얀 진달래가 피기도 했어. 그러면 아~들이 암만 배고파도 그 꽃은 따먹지 않았어. 죽은 애기들이 꽃으로 폈다고 생각했거든”
지난 2011년부터 3년간 내가 진행했던 프로그램 <월배를 찾아서> 중 도원동을 소개한 내용이다.
▲ <월배를 찾아서> 2011~2013
월배를 찾아서
월배는 내가 사는 지역의 행정구역이 개편되기 전 불리던 명칭이다. <울아부지 지게 위에 복숭아꽃 피었네. 그리운 내 고향 도원동을 찾아서>라는 다소 긴 타이틀로 그 지역에 사시는 분과 함께 마을을 돌며 마을의 유래와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설화 등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도원동뿐 아니라 월배를 크게 다섯 지역으로 나눠서 같은 방식으로 진행하였다.
돌아보면 나는 늘 내가 사는 지역의 한가운데 있었고, 그래서 방송의 소재 역시 마을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아마도 그것은 공동체라디오를 만나면서 생겨난 책임감과 방송이 거듭될수록 차곡차곡 쌓인 내가 사는 마을에 대한 애틋함과 따뜻한 시선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서 라디오와 마을, 그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사람이란 소재는 지금도 방송프로그램 기획의 가장 밑바탕에 깔린 지향점이 된 이유이기도 하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인연을 쉽게 흘려보내기도 했던 예전의 나와 지금의 나를 비교한다면 지금은 익어가는 나이만큼 인연의 소중함도 알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가끔 하게 된다. 우연히 건네받은 이면지 한 장으로 만나게 된 성서공동체FM은 내게 인연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려 준 곳이기도 하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이곳에서 횟수로 8년을 보냈으니 이면지 한 장으로 나는 꽤나 오랜 인연들을 쌓아가고 있다.
▲ 성서FM 개국 준비
▲ 성서FM은 이주노동자와 지역주민의 자치방송을 꿈꾸며 만들어졌다.
8년을 드나들었으니 이젠 집만큼 편안하고 익숙해졌지만 스튜디오 안에서만은 여전히 신참을 벗어나지 못한다. 기계를 다루는 일에 여전히 서툴고 그러다 보니 남들보다 곱절의 시간이 걸리지만 분명한 건 이 일을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소박한 일상을 담아내고 따뜻한 노래 한 곡에 닫혔던 마음을 열어 주며 동네의 크고 작은 일들을 취재하며 동네 방송장이로 거듭나는 이 일이 내게는 천직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이제는 욕심도 내본다. 방송을 준비하는 스튜디오 안에서는 지랄 맞은 피디로 굳건히 자리매김했고 스튜디오 문을 나서면 푼수 아줌마로 본연의 모습을 되찾으니 함께 하는 자원 활동가들도 나의 욕심을 그야말로 일욕심이라고 흔쾌히 받아주시니 나로선 고맙고 늘 감사한 일이다.
돌아보면 그동안 수없이 저질렀던(?) 잦은 실수의 결과물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것이 아닌가 싶다. 사수가 건네준 원고에 숨 고르기를 잊어 깔딱깔딱 신음이 마이크를 타고 나오기를 여러 번, 취재하러 나갔다 취재당하고 온 것처럼 주객이 전도되어 황당함에 넋이 빠지기를 또 여러 번, 번뜩 스친 아이디어로 기획한 코너가 단 시간에 막을 내려야 했던 낭패도 여러 번... 그야말로 실수의 실수를 거듭하며 배우고 익힌 8년간의 시간은 내게는 지겨울 틈도 없이 내달린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었다.
처음 라디오방송국에서 일하는 엄마를 K본부, M본부, S본부가 아니니 시시해하던 아이들도 이제는 대놓고 얘기하진 않지만 누가 묻기라도 하면 “성서공동체FM에서 PD로 일하세요”라고 대답 정도는 하니 어느덧 집안에서도 이PD로 인정받기 시작한 모양이다.
▲<성서공동체FM개국10주년기념-잔치잔치 열렸네> 애청자의 아코디온연주 (2015. 8. 21)
▲ <성서공동체FM개국10주년기념-잔치잔치 열렸네> 자원활동가 가족의 연주와 노래 (2015. 8. 21)
▲ <성서공동체FM개국10주년기념-잔치잔치 열렸네> (2015. 8. 21)
또 다시 월배를 찾아서
빨간 날 없이 일주일 내내 방송은 돌아가니 같은 날의 반복일 것 같기도 하지만 각 담당 PD들은 늘 새로운 기획들로 머리를 비워내지 못한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다.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다. 첫머리에 언급한 <월배를 찾아서>의 경우 품이 많이 드는 일이고 마을 분들의 수고로움을 빌리는 쉽지 않은 작업이었지만 3년의 세월을 통해 마을을 알리는 일에 누구보다 앞장섰다는 자부심을 가진다. 선사시대의 역사를 품고 있는 곳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3년의 시간만으로 충분하지 못했지만, 방송내용을 기초자료로 하여 좀 더 구체적이고 세밀한 <월배를 찾아서>의 새로운 시즌을 구상해보려는 노력이 진행 중이다.
시즌1이 월배의 전반적인 역사와 마을의 유래, 설화 등을 다루었다면 시즌2에서는 월배의 역사와 함께했던 ‘사람’의 이야기로 채워가려고 한다. 시즌2의 스타트를 끊어주신 90세에 가까우셨던 선생님은 아쉬운 결말을 끝으로 고인이 되셨고 지금은 잠시 프로그램이 중단된 상태지만 그분으로 인해 빨리 시즌2를 재계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생기기도 했다. 월배를 이야기로 전해주실 분들의 연세가 그만큼 많다는 것이 이유이기도 하고 그분들의 머릿속에 남아 있는 민요와 구전동화, 전통놀이 등 많은 귀중한 자료들이 점점 퇴색되어 가는 것도 이유가 될 것이다.
▲ ‘딸과 함께’ 이영수 PD
오래전 나는 삶의 고단함으로 하루가 48시간이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지금은 또 다른 이유로 하루가 48시간이기를 바란다. 월배라는 지역의 주민으로서, 성서공동체FM이라는 동네라디오방송국의 PD로서 해야 할 일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함께 가야 할 마을과 공동체라디오의 숙명 같은 것이기도 하고 내가 좋아서 하는 나의 즐거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이의 등교 시간에 맞추느라 이른 출근을 하면서 방송국의 첫 문을 여는 그 시간을 나는 가장 사랑한다. 오롯이 나만의 시간으로 차 한 잔을 마주하며 라디오로 들려오는 나지막한 음악을 들으며 시작하는 하루의 그 평화로움을 나는 사랑한다. 이 작은 공간에서 나는 얼마나 단단해지고 당당해졌는가? 나를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가 아닌 이영수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게 한 곳, 성서공동체FM은 그렇게 마흔의 나의 인생의 새로운 시작이 되어주었고, 그렇게 평생의 벗이 되었다.
먼 곳에서 벗이 찾아와 준다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수많은 인연 가운데 나에게 찾아와 벗이 되어 준 이곳에서 이제 나는 또 누군가의 새로운 벗이 되어줄 채비를 서둘고 있다. □
* 성서FM : http://www.scnfm.or.kr/
[필자소개] 이영수 (성서FM)
마흔여덟 살의 아줌마. 신문기자가 꿈이었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한 성적으로 심리학과를 택함. 그래도 꿈을 버리지는 않고 가슴 속에 고이 간직하다 성서공동체FM에서 자원활동가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덥석 달려 듬. 아나운서부터 시작해 당당히 상근 피디로 승진(?). 2015년 8월 성서공동체FM 개국10주년을 맞아 <만만한 라디오>라는 책 출간과 함께 170여명의 하객들을 모시고 10주년 잔치를 성황리에 마친 자칭 장한 PD. 할 일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은 하고재비(아무 일에나 끼어드는 사람을 가리키는 경상도 사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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