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95호 이슈와 현장 2015.11.15]
피칭, 이분법을 넘어서 바라보기
- 독립영화와 자본 사이 (3) 독립영화 피칭의 현 주소, 그리고 고민해야 할 미래
성상민(ACT!편집위원회)
[편집자 주] 지난 93호와 94호에서는 한국 독립영화의 유통이라는 주제를 통해 독립영화와 자본 사이의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독립영화와 자본 사이에 놓인 쟁점은 유통 이외에도 다양한 것들이 존재한다. 이번 시간에는 독립영화와 자본 사이에 얽혀 있는 큰 걸림돌인 ‘제작비’, 그리고 최근 몇 년 사이에 한국에 속속들이 생겨난 제작비 지원 방법인 ‘피칭’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독립영화를 제작하는데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일까. 감독들마다 걸림돌은 제각기 다르겠지만 역시나 가장 큰 걸림돌은 제작비 마련이다. 주제와 시나리오를 구성하는 데는 큰 돈이 들지 않지만 본격적으로 촬영에 돌입하는 순간부터 돈을 쓸 부분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촬영 장비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며 평균적인 제작비는 줄었지만 여전히 독립영화를 만들고자 하는 감독들에게 제작비는 큰 걱정거리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독립영화 감독들은 공동체라는 이름 아래 동고동락하며 함께 영화를 만들거나, 영화진흥위원회를 비롯한 공공 기관의 독립영화 제작지원 제도를 활용하기도 한다. 또한 ‘텀블벅’ 같은 온라인 후원 사이트가 일상화된 지금에는 공개적으로 전국의 누리꾼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며 제작비 모금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온라인 펀딩 못지않게 최근 몇 년 사이에 확대되고 있는 제작비 마련 방법이 있다. 바로 ‘피칭’(pitching)이다.
1979년에 본격적으로 시작한 ‘피칭’, 1998년 한국에 상륙하다
‘피치’(pitch)에는 다양한 의미가 존재하고, 그 중에는 ‘권유, 홍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후보자가 유권자들에게 자신의 정책을 선전하거나, 영업부 직원이 바이어나 고객들에게 자신이 파는 물건을 홍보하는 것에 출발한 이 단어는 자연스럽게 영화판에서는 감독이 제작자로 하여금 자신이 제작할 예정에 있는 작품에 투자를 요청하기 위해 발표하는 행위를 일컫는 말이 되었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감독과 제작자가 1:1로 만나는 사적인 행위에 불과한 단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단어는 조금씩 넓은 의미로 확장되어 쓰이기 시작했다. 1979년 미국에서 처음 막을 올린 IFP(Independent Filmmaker Project, 독립영화 제작자들을 위한 마켓)은 ‘피칭’이라는 행위를 지극히 사적인 움직임에서 공개적인 행사로 탈바꿈했기 때문이다. IFP는 미국에 퍼져 있는 수많은 독립영화 감독과 제작자들, 그리고 독립영화에 투자할 의향이 있는 단체와 기업들을 한데 모아 놓고서 자유롭게 작품을 소개하고, 다시 흥미로워 보이는 작품에 자금을 투자하는 장을 만들었다. 알음알음 감독과 제작자들이 제작비를 마련하던 당시로써 IFP는 무척이나 획기적인 행사였고 이는 많은 영화제와 감독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다.
IFP의 성공은 곧 세계 각국에 영향을 미쳤다. 1984년 네덜란드 로테르담국제영화제는 ‘시네마트’(CineMart)라는 이름으로 피칭 행사를 만들었고, 또한 미국 내의 감독과 제작자들에게 한정했던 IFP와 달리 자국뿐만 아니라 전세계 영화인 대상으로 문호를 넓힘으로써 많은 감독들에게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IFP에 이어 시네마트까지 인상적인 성과를 남기자 세계 각국의 많은 영화제들이 비슷한 형식의 피칭 행사를 연달아 개최하게 되었다.
▲ 1979년 미국에서 처음 막을 올린 피칭을 통한 영화 지원 행사는
한국에서는 1998년 부산국제영화제의 부산프로모션플랜(PPP, 현 APM)를 시작으로 처음 선보이게 되었다.
사진은 2014년에 진행된 APM의 피칭 장면. (사진제공=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프로젝트마켓)
이렇게 전세계에 퍼져나가던 피칭이 한국에 상륙한 것은 1998년 부산국제영화제였다. 2015년 6월 25일, <부산일보>에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는 부산국제영화제가 처음으로 피칭 행사가 생기게 된 것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APM(구, PPP)의 제안자는 1998년 당시 박광수 부집행위원장이었다. 박광수 감독은 로테르담영화제의 '시네마트'를 참관한 경험이 있었고, 이를 부산영화제에 도입하자고 주장해 관철시켰다.” 이미 1996년 이재용 감독의 <한 도시 이야기>, 1997년 이광모 감독의 <아름다운 시절>이 시네마트에 선정되며 조금씩 한국의 영화인들이 피칭에 주목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또한 1996년 정부의 사전 검열이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 판정을 받고 독립영화 제작을 가로막던 거대한 장벽도 사라지던 상황이었다. 한국의 영화인들은 자국에서도 비슷한 행사가 생기길 원했고, 그 결과 1998년 부산프로모션플랜(PPP)라는 이름으로 한국에서 피칭 행사가 최초로 개최되었다.
첫 행사가 열린 1998년 단 16편의 작품으로 시작한 PPP는 아시아프로젝트마켓(APM)으로 이름이 바뀐 2015년 현재 30편의 작품이 모여 자신의 작품을 알리는 장으로 자리매김하였다. APM의 정착에 관심을 기울인 다른 영화제들도 속속 비슷한 행사를 열게 되었다. 2008년에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아시아 판타스틱영화 제작네트워크(NAFF), 2009년에는 전주국제영화제와 EBS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가 각각 전주프로젝트마켓(JPM)과 사전제작 지원 프로젝트, 2010년에는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피치&캐치 프로젝트라는 이름으로 피칭 행사를 만들었다. 또한 완전한 피칭 행사는 아니지만, 인디다큐페스티발도 미디액트와 함께 2009년부터 ‘프로젝트 봄’이라는 이름으로 프레젠테이션 발표가 포함된 신진 작가 지원 프로젝트를 만들게 되면서 독립영화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영화제 역시 피칭 행사에 조금이나마 발을 담그게 되었다.
피칭 행사의 존재감이 커지면서 처음 출범할 때부터 피칭 행사를 염두에 두거나, IFP처럼 순수하게 피칭에 중점을 둔 행사도 생겨났다. 2009년에 처음 개최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와 2013년에 처음으로 막을 올린 인천다큐멘터리포트가 그러한 행사들이다.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는 출범 당시부터 피칭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계속 지원 규모를 늘려가며 2015년 현재에는 장편다큐 제작지원(한국, 아시아), 대명문화공장 다큐펀드, DMZ 프로젝트, 신진작가 제작지원까지 다양한 분류의 피칭 행사를 운영하고 있다. 또한 인천다큐멘터리포트의 경우 ‘다큐멘터리 펀딩의 신개념 플랫폼’을 표방하며 극장 개봉을 목표로 하는 다큐멘터리는 물론 TV 방송을 염두한 다큐멘터리부터 해외시장을 겨냥하는 다큐멘터리, 국제공동제작 및 선판매를 목표로 하는 다큐멘터리, 후반작업 및 완성단계에 있는 다큐멘터리 등등 다큐멘터리를 세세하게 분류하며 피칭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하는 중이다.
1998년 한국에 처음 선을 보인 피칭 프로그램은 이렇게 2015년 현재 한국 독립영화 제작의 핵심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물론 여전히 독립영화를 제작하는 공동체나 피칭 형식이 아닌 서류 심사와 면접으로 작품을 선정하는 전통적인 형태의 제작지원 사업이 존재하지만, 독립영화 공동체들 역시 피칭 사업에 참여한지 오래며 기존의 제작지원 사업 역시 조금씩 비중이 줄고 있는 상황이다. 특히 이러한 제작지원 사업을 운영하던 큰 축인 영화진흥위원회가 해가 갈수록 독립영화계와 마찰을 빚고 있는 상황이라 현재의 제작지원 규모가 얼마나 오래갈지는 미지수이다. 이제 대다수의 독립영화 감독들에게 작품 제작비를 마련할 길은 크게 세 가지 밖에는 남지 않은 셈이 되었다. 알음알음 제작비를 구하러 이리저리 발품을 팔거나, 온라인으로 모금을 받거나, 아니면 피칭 프로그램에 참여하거나.
특히 한국을 비롯해 전세계적으로 독립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이들에게 피칭이 가장 큰 제작비 마련 수단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다큐멘터리는 극영화에 비해 시장도 협소하고, 작품을 발표할 길도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상대적으로 프로덕션 규모를 최대한 줄이면서 제작비를 줄일 수 있는 극영화와 달리 다큐멘터리는 제작비를 줄이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다큐멘터리는 일찍이 제작지원 사업은 물론 피칭 프로그램도 활발하게 전개되는 장르가 되었다. 독립 애니메이션 역시 다큐멘터리와 비슷한 상황이지만 아직까지는 피칭 프로그램이 활발하게 개최되고 있지 않은 상황이다.
피칭,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되다
이렇게 피칭은 독립영화를 만들려고 하는 이들에게 있어 한 번쯤은 참여를 고민하는 행사가 되었지만, 모든 이들이 피칭에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독립 다큐멘터리 공동체 ‘서울영상집단’의 김청승 감독이 2014년 10월 말에 페이스북을 통해 올린 한국 독립영화 전반에 대해 비판하는 글은 피칭에 비판적인 반응을 보이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글에서 김 감독은 최근 몇 년 사이에 생긴 피칭 프로그램이 독립 영화 제작자들 간의 경쟁과 인맥 싸움을 부추기고 있으며, 또한 SJM문화재단 같이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킨 기업이 피칭 지원에 참여하는 것은 독립영화가 자본에 휘둘리게 만들어 ‘독립적’이지 못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김 감독의 글은 올라온 순간부터 독립영화판의 뜨거운 감자가 되었다. 한국 독립영화 전반에 대해 매우 강도 높고 급진적인 시선으로 비판하는 것도 컸지만 독립영화를 제작하는 이들에게 가장 큰 요소인 ‘제작지원’, 특히 피칭에 대해서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불이 붙은 논쟁은 그 다음해인 2015년 3월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열린 포럼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다큐멘터리 피칭을 말하다’는 주제 아래 열린 이 포럼에서는 피칭 행사를 주최하는 주체(인천다큐멘터리포트, DMZ국제다큐영화제)와 피칭에 참여하고 실제 작품을 만드는 제작자들(프로듀서, 감독)이 발제자로 참여하였다.
▲ 2014년 말 촉발된 피칭에 대한 논쟁은 그 다음해인 2015년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다큐멘터리 피칭에 대한 포럼을 개최하게 만들었다. (사진제공=인디다큐페스티발)
비록 다큐멘터리에 국한된 논의였지만, 포럼에는 흥미로운 부분들이 여럿 있었다. 피칭 행사를 대표해서 온 이들은 피칭이 단순히 제작비를 지원하는 행사가 아님을 강조했다. 강석필 인천다큐멘터리포트 프로그래머는 피칭이 투자자와 잠재 관객, 스토리와 연출 방향이 발굴되는 행사임을 주장했다. 박혜미 DMZ국제다큐영화제 프로그래머는 강석필 프로그래머와 비슷하게 피칭은 다큐멘터리 제작과 산업을 확대하고, 시장을 형성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다만 두 프로그래머 모두 현재 진행되는 피칭에 한계가 분명 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앞으로의 피칭은 경쟁 대신 피드백을 얻는 것을 지향하며, 단순히 ‘상품’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으로 다큐멘터리를 바라보는 이들이 심사에 참여해 균형을 맞추어야 한다고 그들은 보고 있었다.
한편 실제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이들은 피칭에 참여하는 감독과 제작자들의 시선에서 피칭을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의 제작에 참여한 한경수 프로듀서는 “다큐멘터리 제작자에게 피칭은 피할 수 없는 관문이 되었다.”고 말하며 피칭을 통해 제작지원 심사와 선정이 풍부한 자료를 바탕에 두며 공개적으로 이뤄지는 계기를 마련했지만, 피칭을 준비하기 위해 제작자들이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으며 많은 부담이 생기는 것은 물론 혹시라도 제작지원을 받지 못할 경우에는 적지 않은 열패감을 느낄 수 있는 부작용을 지적했다. <밀양, 반가운 손님> 등의 독립 다큐에 참여한 허철녕 감독 역시 피칭은 많은 이들의 피드백을 받을 수 있는 자리이자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좋은 과정이지만, 감독으로써 피칭은 분명 부담스러운 행사이며 기존의 서류-면접 평가 제작지원도 계속 존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피칭에 대해서 감독들이 부담감을 느끼고 있다는 비판은 분명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피칭은 기존의 제작지원 사업과 달리 서류를 제출하고, 면접을 하는 것에서 그치는 대신 제작자, 투자자, 그리고 심사위원을 비롯한 수많은 영화 관계자들 앞에서 자신이 기획 중인 영화에 대해 조목조목 설명하고 발표를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딱히 이전부터 프레젠테이션에 대해 준비를 하지 않은 이상 대다수의 감독들은 영화 제작에만 집중할 뿐 피칭에 참여하기 전까지는 발표에 별 신경을 쓰지 못한 경우가 다반사이다. 제작비를 구하기 위해 절박한 심정으로 피칭에 참여해 운 좋게 본선에 진출하더라도, 최종적으로 제작비를 얻기 위해 난생 처음 대중 발표를 준비하는 것은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고 만다.
발제가 끝난 뒤 발언된 청중들의 의견 역시 마찬가지였다. “피칭에는 소재, 인물이 중심인 정형화된 다큐멘터리만 살아남는다.” “투쟁 현장에 있어야 할 제작자들이 피칭에 참여해야만 하는 분위기에 놓이고 있다.”는 비판적인 의견에서부터 “피칭이 분명 피곤하지만 다양한 작품들이 발굴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한다.”는 긍정적인 의견, “한국 사회의 풍토에 맞는 피칭 행사가 필요하다.” “피칭이 다큐멘터리의 제작, 배급, 유통까지 아우르는 선순환 구조를 지닌 장이 되었으면 한다.”와 같이 향후의 한국 피칭이 변화하길 바라는 의견까지 다양한 의견이 포럼에서 이야기되었다.
피칭, 다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렇게 피칭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도출된 것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이제 더 이상 피칭을 마냥 피할 수도 없지만 반가운 존재는 더더욱 아니며, 한계점이 분명 존재하지만 피칭이 가지고 있는 장점 역시 존재한다는 것이다. 과연 독립영화를 만드는 이들에게 피칭은 어떤 존재일까. 그리고 피칭 행사를 만드는 이들은 이러한 의견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다양한 사람들에게 피칭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기로 했다.
최근 <밀양 아리랑>을 개봉한 동시에 부산 지역의 독립 다큐멘터리 공동체 ‘오지필름’에서 활동하는 박배일 감독은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와 부산영상위원회, 그리고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주최하는 피칭 행사에 참여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피칭 본선에 함께 올라온 이들이 가까운 동료들이었죠. 경쟁하는 느낌이 들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제작비를 지원받기 위해 작품이 아니라 피칭 발표를 남들보다 더 잘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들어 그쪽에 더 과하게 시간과 노력을 쏟게 되죠. 선정 유무에 따라서도 오랫동안 후유증이 남기도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피칭을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을 거치며 작품을 정리하고 발전시키는 유용한 점도 존재한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그는 자신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겪은 피칭을 경험담으로 들려주었다. 그 피칭은 일반적인 피칭 프로젝트처럼 피칭 자체로 선정하는 것과 달리, 미리 제출한 기획서를 바탕으로 지원작을 미리 선정하고 영화제 기간 중 작품의 기획 · 개발을 위해 피칭을 비롯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선정에 대한 부담이 사라지니 피칭을 하는 동안 작품 제작에도 도움이 되고, 제작자와 배급 관계자들과도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더군요.”
<붕괴>를 비롯해 실험적 성향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왔던 이원우 감독은 자신이 한 번도 피칭에 참여한 적이 없음을 먼저 밝혔다. “저는 모든 오디션 프로그램을 반대하고 불쾌하게 느끼거든요. 피칭 역시 영화판의 오디션 프로그램으로 느껴져 한 번도 참가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참가할 의향은 없습니다.” 이 감독은 피칭이 기존에 존재하던 제작지원 제도를 조금 더 ‘트랜디’한 형식으로 바꾼 형태에 불과하며 오히려 이전보다 경쟁이 더 치열하게 되었다고 보고 있었다. “영화는 상품도 되고 작품도 되죠. 하지만 제 생각에 피칭은 영화를 철저히 상품으로만 분류하는 것 같습니다. 필름메이커는 영화로 경쟁하고 평가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한국 다큐멘터리가 해외에서 인정과 찬사를 받았던 것 역시 해외에서는 일상화된 피칭에서 자유롭게 작업했기에 그럴 수 있었다고도 주장했다.
2014년 단편 다큐멘터리 <무노조서비스>로 처음 다큐멘터리 연출에 한 걸음을 내딛은 이병기 감독에게도 피칭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았다. 이 감독은 아직 피칭 행사에 참여한 경력은 없다. 그는 주변에서 보았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많은 감독들이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피칭에 참여하고, 피칭을 위해 대본과 트레일러를 만들고 다시 그 대본을 완벽하게 외우는 모습을 보면서 불편함이 들었어요. 피칭은 일종의 경쟁이고, 그 경쟁을 준비하는 것 자체가 굉장한 에너지 소모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동시에 앞으로 자신이 만들 작업이 걱정된다고도 밝혔다. “솔직히 발표에 큰 자신이 없거든요. 제가 잘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래서 마음속에 답답함이 생겼죠.” 그는 피칭을 피하기 위해서 돈이 적게 드는 방식으로 작업을 할 의사도 있음을 밝혔다.
한편 본격적으로 피칭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제기한 서울영상집단의 김청승 감독에게도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그는 이미 페이스북과 다큐 제작자들이 모인 단체 ‘신나는다큐모임’(신다모)의 카페를 통해 자신의 입장을 여러 번 밝힌바 있지만, 좀 더 직접적으로 그의 주장을 듣고 싶었다. 그는 처음부터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솔직히 피칭은 없어져야죠. 지극히 상업적인 시스템이에요.” 김 감독은 ‘독립’적이어야 하는 독립영화가 제작하는 과정에서 이미 경쟁 구도에 놓인 것이 아이러니함을 지적하며 제작비를 절감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기 소신을 가지고 작품을 만드는 것의 중요함을 밝혔다. 동시에 인디다큐페스티발에서 열린 피칭에 대한 포럼에 대해서도 짧은 소감을 말하였다. “피칭에 찬성하든 반대하든 모두 피칭을 부담스러워하고 있어요. 그것 참 이상하지 않나요.”
▲ 2013년 처음 막을 올린 인천다큐멘터리포트는 다양한 다큐멘터리에 대한 피칭과 펀딩,
네트워크 플랫폼을 강조하는 행사이다.
마지막으로 인천다큐멘터리포트의 조지훈 프로그래머에게 피칭에 대한 의견, 그리고 피칭에 대한 여러 감독들의 의견에 대한 생각을 들어보았다. 그는 피칭이 단순히 제작비를 지원하는 행사로 여기지 말아야 함을 강조했다. “피칭은 원래 산업적인 측면에서 시작한 것입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형태와 주제의 다큐멘터리가 있죠. 특히 저희 행사는 단순히 제작비를 지원하는 대신 관객과 만나기 쉬운, 아니면 좀 더 다양한 소재의 다큐를 발굴하는 것은 물론 다큐와 관련된 모든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파트너십을 맺는 등 상금 지급 이상의 의미를 구현하려 했습니다. 어떤 다큐멘터리는 지원을 받을 수 있고 아니면 동료를 얻을 수도, 정보를 발굴 할 수도 있는 거죠.” 그는 피칭을 다양한 사람들과 단체, 기업이 만나는 공간으로써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피칭에 대한 감독들의 의견에 조 프로그래머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피칭이 지나치게 감독들 간의 경쟁을 부추긴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피칭에 대한 선입견을 벗어던져야 한다고 그는 지적했다. “누군가가 보기엔 피칭이 소모적일 수도 있죠. 하지만 피칭은 단순히 돈만 던지고 끝인 행사가 아닙니다.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하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장이 생긴 것을 중요하게 봐야죠.” 그는 행사에 기업이 참여하면서 독립영화가 기업에 휘둘릴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문제제기에 대해서도 좀 더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SJM문화재단의 경우 작년 인천다큐멘터리포트를 통해 용산 참사에 대한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 2>를 지원했습니다. (편집자 주 : SJM은 2012년 노동조합의 파업을 용역을 투입해 진압하여 논란이 되었던 회사이다.) 기업에 대한 비판과 지원 프로젝트는 어느 정도 분리해서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조 프로그래머는 더 다양한 소재를 발굴하고 지원하기 위해서라도 많은 기업과 재단, 단체들이 피칭에 참여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했다.
피칭은 어떻게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까
이상과 같이 살펴보았던 것처럼 피칭에 대한 의견과 입장은 제각기 다르다. 이렇게 모두 생각이 다르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비슷한 지점들이 엿보인다. 피칭을 준비하고 실행하는 과정은 감독들에게 있어 무척이나 힘들고 고된 일이라는 것,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품을 돌이켜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거나 기획 · 개발, 다른 감독들이나 제작자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것에 있어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두 개의 특성은 서로 다른 위치에 놓여 있다. 그 말은 곧 피칭을 이야기하는 것에 있어 한 가지 특성만 바라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피칭은 분명 전통적인 제작지원 프로젝트를 보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기획서와 포트폴리오, 그리고 심사위원과의 면접으로 판단했던 기존의 방식과 달리 감독과 프로듀서로 하여금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신의 작품을 직접 발표한 결과를 가지고 최종적인 지원 및 투자 여부를 판단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독과 제작자는 이런 방식의 행사에 익숙지 않고, 바로 그 지점에서 피칭에 대한 의견이 분화된다. 하지만 피칭을 경쟁을 부추긴다는 차원만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하기엔 쉽지 않아 보인다. 이전의 지원 제도 역시 공개적인 프레젠테이션을 제외하면 한정된 예산을 놓고 경쟁하는 체제였기 때문이다. 또한 독립영화가 무수히 분화된 상황에서 모든 작품이 독립적인 제작을 위해서 모든 제작지원을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 되었다. 이제 대다수의 독립영화 감독과 제작자들에게 제작지원은 선택이 아닌 사실상의 필수가 되었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감독들이 피칭에 겪는 스트레스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다. 인디다큐페스티벌에서 진행된 피칭에 대한 포럼이나 필자와 감독들 간에 나눈 인터뷰에서 드러나듯 피칭에 대한 호오에 상관없이 감독들은 피칭을 고된 행위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미 제작비 지원 사업이라는 경쟁에 뛰어든 상황에서 감독들은 심사위원과 투자자들에게 자신을 어필하기 위해서 최대한 정갈하고 인상적인 발표를 하려고 노력한다. 물론 피칭을 주최하는 이들 역시 이러한 사실을 모르지 않기에 피칭 본선에 오른 감독들로 하여금 다양한 발표 교육을 이수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담감이 크게 주는 것은 아니다. 피칭이 가져오는 장점은 결코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쉽지 않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인디다큐페스티벌 포럼에서는 앞서 언급했듯 피칭 행사 주최자들이 피칭 행사에 제작자나 평론가, 영화산업 관계자, 그리고 관객이나 앞으로 작품을 만들려는 사람 등 다양한 이들이 모여 피칭 행사에 참여해 균형을 맞출 필요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포럼에서 강석필 프로그래머와 허철녕 감독은 비록 독립 다큐멘터리에 한정된 발언이긴 했지만 독립영화판에 좋은 프로듀서들이 계속 참여하는 등 제작 시스템이 어느 정도 확립될 때 비로소 피칭이 제 기능을 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이러한 의견들이 독립 영화의 제작 시스템 개선을 바탕으로 피칭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다면, 박배일 감독의 경우에는 약간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그는 피칭이 진행되는 ‘틀’을 좀 더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외국 같은 경우에는 딱히 프레젠테이션 없이 작품 예고편 보여주고, 그 뒤에 간단하게 감독과 프로듀서가 프로젝트를 소개한 뒤 질의응답을 받는 방식으로 어느 정도 규격화되어 있습니다. 한국도 이렇게 일정한 틀을 마련해 피칭을 진행하면 제작자의 부담이 줄어들겠죠.” 동시에 박 감독은 자신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경험한 ‘선지원 후피칭’ 같이 피칭이 곧바로 제작 지원 유무와 직결되는 부담을 줄여 피칭이 지니는 장점을 살릴 필요가 있다고도 넌지시 주장했다.
이는 인디다큐페스티벌의 포럼에서 한경수 프로듀서와 허철녕 감독이 주장한 것과도 비슷한 이야기이다. 한경수 프로듀서는 선댄스 영화제가 피칭을 하는 대신 감독과 제작자가 기획안과 예고편만 제출하면 인권과 예술적인 스타일을 추구하는 특유의 심사기준으로 지원작을 선정하는 사례를 예로 들며 특색 있는 세션과 피칭 행사가 생길 필요성을 주장했다. 또한 허철녕 감독은 피칭을 통한 제작지원이 주가 되는 행사에서도 기획안 심사를 통한 제작 지원이 곁들여질 필요가 있음을 이야기했다.
한국의 ‘굿 피치’를 모색하기 위해
이미 해외에는 기존의 피칭 행사의 한계를 넘는 동시에 피칭의 장점을 살리기 위한 행사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영국의 다큐멘터리 지원 재단인 Britdoc이 만든 ‘굿 피치’(Good Pitch)가 바로 그러한 행사이다. 2005년 영국의 공영 방송인 채널 4의 지원으로 설립된 이 재단은 미국의 포드재단과 선댄스재단의 후원을 바탕으로 2008년 런던을 시작으로 세계 각국에서 굿 피치를 개최하였다. 굿 피치는 다른 피칭 행사와 달리 영화 제작자들과 시민 사회와의 파트너십 형성을 전면에 내걸고 있다. 또한 동시에 굿 피치는 사회 변화 또는 사회 정의에 도움을 주는 작품을 주로 선정할 것임을 밝히고 있으며, 단순히 피칭에 참여한 투자자들의 지원뿐만 아니라 온/오프라인을 통해 작품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제작비를 후원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도 한다.
▲ Britdoc이 주최하고 포드재단과 선댄스재단이 후원하는
다큐멘터리 피칭 행사 ‘굿 피치’(Good Pitch)의 로고.
그 결과 굿 피치는 기존의 피칭 행사와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페이스북이나 구글, 구찌, BMW 재단 등 다른 피칭 행사에서도 종종 참여하는 사기업들도 참여하지만 BBC나 PBS, ARTE, 뉴욕 타임스, 알 자지라 등의 언론, 그리고 TED, Change.Org, 옥스팜, 아바즈(Avaaz), 그린피스, 국제앰네스티와 같은 시민단체들도 피칭 행사에 활발히 참여한다. 선정되는 작품의 주제들 역시 젠더 문제나 농촌 빈곤, 국가기관의 폭력 등등 사회적인 이슈와 긴밀하게 연결된 것들이다.
비록 선정되는 작품들은 다른 피칭 행사와 비슷하게 소수이지만, 선정되지 못한 작품들도 개인들의 후원을 받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 굿 피치를 통해 다양한 단체들과 연결되며 작품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게 되었다. 2015년 5월 13일에 게재된 독립영화 웹진 <인디와이어>(Indiewire)에서 굿 피치를 담당하는 Britdoc의 제스 서치(Jess Search)는 피칭과 자신들이 여는 행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분명 돈은 영화 제작자들에게 중요하죠. 하지만 우리는 단지 자동차 바퀴에 칠하는 윤활유 역할에 그쳐야 한다고 생각해요. 우리는 돈보다는 네트워크과 공동체가 더 가치 있다고 봅니다.” 굿 피치의 이러한 성과와 피칭에 대한 생각은 국의 피칭 행사는 물론 독립영화에 관계된 모두가 참고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물론 해외의 시민사회는 한국의 시민사회와 규모와 영향력 모두 차이가 나며 이러한 사례를 단순히 한국에 적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운동과 함께 성장해온 한국 독립영화의 성격을 최대한 반영하고, 동시에 새로운 환경에 걸맞은 제작 지원을 모색하는 행사를 구상하는 것에 있어 굿 피치는 분명 훌륭한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한국의 경우 전통적인 제작 지원 프로젝트가 존속에 위협을 받는 상황에서, 제작비가 한 푼이라도 급한 감독과 제작자들이 부랴부랴 피칭에 참여해 더 큰 스트레스를 받는 아이러니를 생각하면 피칭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단점을 보완하고 시민사회와의 동반을 강조하는 굿 피치와 같은 행사를 한국에 도입할 필요성은 분명 존재한다.
피칭에 대한 의견을 찾고 들으면서 ‘피칭에 참여하는 감독들이 피칭을 힘들어 한다’는 말 다음으로 들을 수 있던 말은 ‘제작자들은 지푸라기를 잡는 마음으로 피칭에 임한다’는 말이었다. 익명을 요청한 한 다큐멘터리 감독은 피칭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말하며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고민한 끝에 고른 방법 중 하나가 피칭이었을 뿐, 피칭에 대해서 특별히 생각을 가지고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고 답했다. 박배일 감독 역시 온라인 펀딩조차 쉽지 않은 상황에서 독립영화 생태계를 유지하는 자립 시스템이 생기지 않는 한 많은 부담감과 후유증에도 불구하고 피칭에 참여하는 이들이 계속 존재할 것이라 말했다.
이러한 감독들의 이야기에서 느껴지듯이 독립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계속 제작비 마련에 골몰하고, 피칭은 고심하는 감독과 제작자들에게 한 줄기 빛이 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렇든 모든 수단에는 한계가 존재하고 피칭 역시 마찬가지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단순히 피칭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피칭만으로 모든 제작지원을 구성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어쩌면 진정으로 좋은 피칭을 만들 수 있는 길은 피칭 이외에 다양한 제작 지원을 확충하고, 각종 권리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는 독립영화 제작자를 비롯한 이들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방법이 아닐까. 어떠한 방법론이 실행되든, 피칭에 대한 논의는 결코 피칭 자체에 대한 논의만으로 결론내릴 수 없을 것이다. □
* 참고자료
[스무 살 BIFF, 뜨거웠던 순간들] 26. 프로젝트 마켓의 역할, 김지석 부산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 2015년 6월 26일, 부산일보
http://news20.busan.com/controller/newsController.jsp?newsId=20150626000021
인디다큐페스티발2015 포럼 - ‘다큐멘터리 피칭을 논하다’ 발제 및 녹취 전문
인천다큐멘터리포트
Britdoc Good Pitch
Reality Checks: How Good Pitch Raises Millions of Dollars for Documentaries, Anthony Kaufman, 2015년 5월 13일, Indiewire
[필자소개] 성상민(ACT!편집위원회)
지금은 사라진 만화언론 [만]에 2005년 얼떨결에 객원필진으로 데뷔해 한 10년 이상 팔자에도 없을 줄 알았던 글쓰기를 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 빨리 졸업하려고 다짐했던 경희대학교 사회학과는 2010년 입학한 이래 졸업 학점은 아직 한참 많이도 남았지만 이젠 뭐 언젠간 졸업하겠거니 하고 만다. 지금은 [ACT!]와 [미디어스]를 중심으로 만화, 영화, 미디어 등 각종 문화에 관련된 글을 줄창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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