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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10호 길라잡이] 4,5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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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8. 7. 16.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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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10호 길라잡이 2018.07.31.]


4,526일


차한비(ACT! 편집위원)


감히 헤아리지도 못할 긴 시간이다. 무려 12년 2개월, 일수로는 4,526일 만이다. KTX 해고승무원들이 일터로 돌아간다. 기자회견을 여는 그들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이곳에서 감사하다는 발언을 하게 될 줄 몰랐습니다. 이런 날이 정말 오네요. 오늘이 투쟁 시작한지 4,526일째 되는 날입니다. 발언하고 있는 이 자리가, 항상 투쟁의 현장이었습니다.” 복직 투쟁을 이끌어 온 김승하 KTX열차 승무지부장은 지난 7월 21일 KBS뉴스 인터뷰에서 투쟁의 원동력을 질문하는 앵커에게 ‘사람’과 ‘희망’이라는 대답을 돌려주었다. 지칠 때마다 서로 격려와 위로를 나눈 동료 조합원들, 지난한 싸움의 본질을 놓치지 않고 들여다보며 해고노동자에 공감하고 지지를 보내준 국민들, 그리고 나와 우리가 옳기에 끝내 이길 것이라는 희망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는 이야기였다.



지독한 땡볕 아래 다홍색 능소화가 한 움큼씩 피어 있었다. 걷다가 멈춰서 잠시 바라보았다. KTX 해고승무원들이 떠올랐다. 꽃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꽃말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능소화의 꽃말은 명예, 그리고 그리움이다. 부당하게 싸우는 사람들, 싸우다 지는 사람들, 오래 싸워서 더 많이 지는 사람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해고된 노동자들은 싸움을 견뎌내는 4,526일 동안 수없이 많은 폭력에 노출되었다. 공기업이 시행한 사상 최초의 대량해고에 뾰족한 수는 보이지 않았고, 그들의 주장에 귀 기울이기보단 외모를 품평하는 시선이 부지기수였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며 포기하라는 말도, 억지를 부린다며 비난하는 말들도 끊임없이 들려왔다. 어렵게 재판이 진행되었지만 1심과 2심의 판결을 뒤집고 대법원장이 해고를 확정했다. 그 소식에 오랜 시간 싸움을 이어오던 해고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승하 지부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승무업무 복직과 직접고용 문제를 협의하는 일뿐만 아니라,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청와대 간의 소위 ‘재판거래’ 의혹의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자가 처벌받는 날까지 힘을 모아 싸우겠다며 연대를 청했다. 4,526일 투쟁의 목표는 단순 복직 이상이었다. 그들은 모두가 인간답게 사는 세상을 위해 싸웠다. 약속을 지키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다 같이 안전한 환경에서 살자는 외침이었다. 그 인간다움을 위한 투쟁은 명예와 그리움을 동시에 가져왔다. 누군가에게 명예란 그저 이상적인 가치에 머무는 정의가 아니라 오늘과 내일을 말하는 현실의 문제가 되고, 생을 거는 이들의 뒷자리에는 별 수 없이 그리움이 남는다. 그 누구도 사방에 흩어져버린 삶과 죽음을 한데 그러모을 수는 없다. 다만 남겨진 사람들의 세상에 명예와 그리움이 이토록 선명히 매달려 있다. 


* * *


싸움을 멈추지 않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사와 존중을 전하며, 진보적미디어운동연구저널 ACT! 110호를 소개한다. ACT! 또한 다양한 기사를 통해 미디어영역 각지의 인물과 활동, 최근의 흐름을 조명하며, 보다 인간다운 세상을 힘껏 희망하고자 한다.


[이슈와 현장]은 고 박종필 감독의 1주기 추모포럼 현장을 찾아갔다. ‘차별에 저항한 영상활동가’ 박종필의 족적을 살피며 그가 생전 몸과 마음을 다했던 운동의 현장에서 그를 기억하고 의미를 되새기는 자리였다. 성상민 편집위원의 글로 추모와 애도의 마음을 전한다. 


[이슈와 현장] 두 번째 기사는 이상길 전국영화산업노조 부위원장의 “시간은 체크하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2018년 7월 1일, 개정 근로기준법이 본격적으로 시행됨에 따라 영화 현장 또한 기대와 불안으로 술렁이고 있다. 영화노동자와 노동시간, 노동환경에 대한 질문을 통해 영화산업의 노동구조를 다시금 고민하게 한다.  


[미디어 인터내셔널]에서는 미국 공영방송 PBS 프로그램 <POV(Point of View)> 사례에 비추어 독립다큐멘터리 제작배급 환경을 조명한다. 독립다큐멘터리와 공영방송이 ‘손잡는’ 방법을 제시하며 현재 한국의 상황을 돌아보고, 실천적 한계를 곱씹는 한편 대안 방향을 모색한다. 


미디어교육 현장을 담는 [나의 미교 이야기]에서는 분당정자청소년수련관 청소년활동팀에서 일하는 김기봉 미디어교육자의 운영담을 소개한다. 그가 진행한 ‘뉴스로 단편소설쓰기 꿈의 학교’ 사례를 중심으로 청소년미디어교육의 발전을 위한 과제를 함께 고민해본다.


이번 호 [인터뷰]는 삼성 반도체 직업병 투쟁에 오랜 시간 참여해온 1인 미디어 활동가 ‘미디어뻐꾹’과, 연말을 장식하는 독립영화 축제 ‘서울독립영화제’의 사무국 활동가들을 차례로 만나보았다. 각각의 인물들이 위치한 장소는 다르지만, 그들 모두 눈에 보일 때보다 보이지 않는 순간이 훨씬 많다는 공통점이 있다. 현재 자신의 자리에서 애쓰고 있는 그 얼굴과 목소리가 해당 지면을 통해서 전해지길 바란다. 


[페미니즘 미디어 탐방]은 콘텐츠 제작소 ‘스튜디오 소문자에프’를 찾아간다. 2016년부터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페미니즘을 이야기해온 스튜디오 소문자 에프는 최근 퀴어 웹 예능 제작 등 영역을 확장해나가고 있다. 일상과 실천으로서의 페미니즘을 궁리하고 있는 소문자에프와 찬찬히 만나보길 권한다. 


[리뷰]에는 두 편의 영화 글이 실렸다. 지난 호 [페미니즘 미디어 탐방]에서 만난 ‘생각 많은 둘째 언니’ 장혜영 씨가 연출한 다큐멘터리 <어른이 되면>(2018)과 최근 낙태법 폐지와 관련하여 재차 회자되고 있는 <파도 위의 여성들>(연출 다이애나 휘튼, 2014)이 그 주인공이다. 여성이자 소수자로서 사회의 부당함과 폭력에 끊임없이 노출되면서도 ‘연대’를 실천하는 인물들의 모습을 차분하고 당당한 어조로 글에 담아냈다.


매호 흥미로운 상상력을 자랑하는 [학습소설]은 “안네의 SNS : 인터넷 시대의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이어간다. 이번 호에서 ‘아라’는 나치 점령 하의 암스테르담에 숨어 살며 일기를 남긴 안네 프랑크를 만난다.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해 변화하는 시대의 기록에 대해 생각한다. 


한편 오랜 시간 동안 영화를 향한 질문과 답을 이어주던 [우리 곁의 영화]가 이번 호로 마무리 된다. 필자 조민석은 맺는 글에서 “지금 이 순간이 영화적인 순간인 것 같”다고 회고한다. 그와 함께 영화의 지도를 그려왔던 독자들을 응원하며, 나름의 방식과 방향으로 그려질 또다른 지도를 기대해본다. 


이 외에도 여러 사람의 참여와 도움으로 110호가 완성되었다. 무더위를 감당하며 보내온 글과 소식들에 감사를 전한다. 여름의 피로로 뜨거워진 이마가 조금이나마 식어가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백 하고도 열 번째 ACT!를 당신에게 건넨다. 다시 만날 때까지 우리 모두 잘 싸워내고 있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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