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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80호 리뷰] 그들을 기억하는 어려운 방법, 『먼지 없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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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3. 4. 12.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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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80호 2012.08.30 리뷰]

그들을 기억하는 어려운 방법, 『먼지 없는 방』

김봉규(프레시안)

 


▲ 『먼지 없는 방』| 김성희 |2012

 
  ‘반올림’(*주1)의 활동을 취재할 당시 안면이 있던 한 미디어 전문 매체의 선배 기자로부터 “언론들이 삼성 백혈병 문제를 다루지 않는 이유에 대해 말해 달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있다. “글쎄요, 백혈병 논란과 관련해 새로운 팩트가 없다고 판단해서가 아닐까요.”라고 답했던 기억이 난다. 며칠 후 발행된 기사에서 그 코멘트는 등장하지 않았다. 
 
  인터뷰가 귀찮아 농담을 한 건 아니었다. 한국 언론 산업계에 ‘광고주 삼성’이 갖는 위상이 크다는 건 알았고, 그런 대답을 기대했겠지만 언론의 침묵을 단순히 광고 문제로만 연관 짓고 싶지 않았다. 
 
  더 중요한 질문은 언론의 침묵이 야기한 결과다. ‘삼성 반도체 공장에 다니던 꽃다운 나이의 여성들이 빈혈과 하혈, 생리불순에 시달리다 퇴직 후 백혈병 등의 희귀질환에 걸렸다’는 삼성 백혈병 논란은 입증하기 쉽지 않은 명제다. 모래를 반도체로 바꾸는 20세기판 연금술을 가능케 한 건 공정에 들어가는 각종 화학물질이고, 대부분은 ‘영업비밀’이라는 레이블을 달고 정체를 감추고 있다. 수십 년  전 반도체가 태동했던 미국이나 영국에서 시작된 희귀병 논란은, 세계화의 흐름을 타고 공장이 아시아에 자리 잡으면서 동남아시아 개발도상국의 사회문제가 됐고, 여기에 반도체를 신성장 동력으로 삼는 ‘선견지명’을 발휘했던 삼성이 포함됐다. 
 
  서방과 아시아 어디에서도 반도체 공정과 노동자들의 희귀질환을 ‘팩트’로 증명하는 작업은 아직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반도체 노동자들의 직무와 산업재해의 연관성을 증명할 수 있는 산업의학계의 연구는 확립된 결론을 내리지 못한 반면, 연관성을 부정하는 과학적 연구는 반도체업계의 풍부한 지원 속에 ‘팩트’를 보태나갔다. 이 맥락을 고려치 않고 ‘삼성’과 ‘반도체’에만 포커스를 맞추다보면 ‘삼성 광고주'를 의식하는 언론들의 침묵에서 명분 아닌 명분을 찾게 된다. 
 
  이런 말이 언론을 위한 변명으로 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실을 추구한다.’는 흔한 사명은 한편으로 변명이 된다. 이건희 회장의 성탄절 사면을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고, 삼성전자의 의뢰를 받은 ‘청부 과학자’들이 삼성 백혈병과 직무 사이의 ‘연관 없음'을 ‘증명'했을 때 보여줬던 언론의 열정은 ‘사람이 죽은 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가 있는가.'라고 울부짖던 피해자와 유족들 앞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찬반을 막론하고) 편향된 보도는 반대 여론을 설득하지 못했고, 이 때문에 삼성 백혈병 문제는 진실보다는 믿음에 대한 사안이 됐다.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부조리의 핵심인 삼성이 저지를 수 있는 인륜 범죄’이거나, ‘한국 최고의 기업으로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며 국가 경제의 근간을 떠받치는 삼성에 대한 무고 혹은 음해’이거나. 삼성 백혈병 논란을 다룬 기사에 딸린 댓글들을 떠올려보면 저 두 가지 ‘믿음’을 벗어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언론의 침묵과 그 침묵이 만들어낸 여론은 찬반을 떠나 피해자들의 구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한국에서 산업재해를 입은 노동자는 자신이 당한 피해와 직무의 연관성을 스스로 입증해야할 의무를 갖는다. 삼성 백혈병 논란은 ‘회식 후 퇴근길에 넘어져 당한 부상은 산업재해인가’ 차원에서 고민할 문제가 아니었다. 노동자가 반도체 공정을 파악해, 그 안에서 자신이 담당한 직무가 어떤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증명해야 했다. 
 
  황우석 사태를 겪으며 생물학 전문가가 되고, 자유무역협정(FTA) 파동을 겪으며 통상 전문가가 되고, 천안함 사태를 겪으며 군사, 물리, 화학 전공자가 되어야 하는 사회에서 당연한 의무였을까. 피해자들이 증거와 증언을 훑어 법정 싸움을 위한 준비를 갖춰나가는데 동안, 이들을 지지하는 ‘믿음’은 다른 믿음의 공격 대상이 역공이 이어져 나갔다. 그래서 반올림의 싸움은 더욱 고독했다.
 
  김성희 작가의 <먼지없는 방>(보리 펴냄)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시작하고 싶었다. 정애정 씨가 삼성전자에 입사해 겪은 이야기를 다룬 이 책에서 눈길을 끌었던 부분은 18페이지에서 31페이지에 수록된 반도체 공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다. 전문용어가 난무하고, 한 번 읽어서 이해하기도 쉽지 않은 반도체 공정이 왜 눈물샘을 자극하는 이 어두운 만화의 서두에 등장해야만 했을까. 자신들의 고통과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 하나의 ‘사실’라도 더 찾아 헤맸을 이들의 모습이 떠올라 쉽게 페이지가 넘어가질 않았다.
 
  『먼지 없는 방』은 세트로 묶여 나온 <사람 냄새>와 함께 “‘왜'라고 아무도 묻지 않았던”(130쪽) 반도체 사업장의 어두운 현실을 보여준다. 삼성 백혈병 피해자 황유미 씨의 부친 황상기 씨가 처음으로 우리에게 그 실상을 알린 이후 4년 간 벌어졌던 이들의 싸움은 지난했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한 산재 인정 소송에서는 참고인으로 나선 삼성 측 변호인단과의 긴 법정이 예고되어 있고, 피해자와 유족들은 지금도 거리에 선다.
 
  예전에 들렸던 삼성 백혈병 피해자 추모문화제에서 ‘우리를 잊지 마세요’라는 문구를 본 기억이 있다. 『먼지 없는 방』은 이들을 잊지 않는 방법이 결코 쉽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 잊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는 사실의 기록이다. 『먼지 없는 방』의 광고조차 고사했던 언론의 현실이 후대에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
 
* 주1
 - 반도체 노동자들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http://cafe.daum.net/samsunglabor
 
 

『먼지 없는 방』 소개 (출처: 교보문고)

‘삼성 공화국’이 침묵하는 반도체 공장 백혈병 노동자들의 비밀 - 우리가 지켜야 할 자유와 인권 틀을 아울러 소개하는 「평화 발자국」 제10권 『먼지 없는 방』. 이 작품은 열아홉 살에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남편을 백혈병으로 잃은 정애정 씨의 이야기를 만화로 되살려 우리 사회의 비극을 밝혀내고 있다. 열아홉 살의 나이에 삼성 반도체 공장에 들어간 정애정은 그곳에서 남편 황민웅을 만난다. 하지만 신혼의 행복을 맛 볼 틈도 없이 남편은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다. 남편을 잃고 홀로 두 자식을 키워가던 정애정은 남편의 죽음이 반도체 공장의 근무 환경 때문일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는다. 그때부터 정애정은 남편이 죽은 진짜 원인을 밝혀내기 위해 용기를 내고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직업병에 걸린 사람들을 만나러 다닌다. 반도체 공장 현장 노동자들에 대한 취재를 통해 현장 근로자들에 대한 이해와 연대를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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