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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90호 리뷰] 잃어버린 시간, 한국의 90년대에 관한 하나의 기록 - 다큐멘터리 <논픽션 다이어리(2013, 정윤석)>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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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4. 7. 31.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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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90호 리뷰 2014.9.22]


잃어버린 시간, 한국의 90년대에 관한 하나의 기록

- 다큐멘터리 <논픽션 다이어리(2013, 정윤석)> 리뷰


김형준(ACT!편집위원) 


한국사회의 1990년대는 어쩌면 실종된 시대다. 1997년의 외환위기가 한국사회에 뿌려놓은 충격과 후폭풍이 너무 강렬했던 탓일까.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민주화의 공간을 열었던 ’87년의 6월을 기억하고, IMF 이후 도래한 혹독한 생존경쟁을 여전히 살아가고 있지만, 그 사이에 끼인 십년에 대한 기억은 다소 희미하기만 하다. 비단 세월호 참사뿐만 아니라, 우리사회를 뒤덮고 있는 온갖 사회문제들과 사람들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대체 왜 이런 상황이 됐지?’라는 대책없는 질문에 빠져있을 즈음, 다큐멘터리 <논픽션 다이어리>를 접하게 됐다. ‘잃어버린 10의 기억들을 살인이라는 프레임으로 기록해내는 영화 <논픽션 다이어리>, 나의 우문에 하나의 실마리를 던져주는 반가운 영화였다.

 

강렬한 포스터에서 예고된 것처럼, <논픽션 다이어리>는 희대의 반인륜적 범죄로 회자되었던 지존파 살인 사건을 이야기의 중심축에 놓는다. ‘지존파 살인 사건199420대의 농촌출신 청년들이 벌인 계획적 연쇄살인으로, ‘부자들의 대한 증오라는 범죄동기와 그 잔인한 범죄방식 때문에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이다. 엽기적이고 극단적으로 잔혹하며, 반인륜적이고 비인간적인. 주저없이 이들을 악마의 대리자들로 칭하는, 분노에 찬 뉴스앵커의 음성은 당시 이 사건을 대하던 사회의 충격이 적지 않은 것이었음을 반영한다.

영화는 이 잔혹한 악마들의 실체가 무엇인지 해명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체포 후 가까이서 그들을 지켜봤던 이들은 그들이 태생적 괴물이 아니라, 이제 갓 스물을 넘은 순박한 시골 청년에 가까웠다고 증언한다. 강탈한 돈을 놓고도 쓸 줄 모르고, 효도가 여전히 중요한 가치인 청년들. 순진한 시골 청년들과 극악무도한 범죄자 사이의 이 간극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지존파는 말하자면, ‘한국의 눈부신 경제발전라는 신화적 이야기의 필연적인 부산물이었다. 산업화 시기, 농촌인구가 값싼 노동력으로 대도시로 흡수되면서 텅텅 비어 버린 농촌에서 자란 젊은이들. 농촌의 절대적인 희생으로 구축된 한국사회의 번영 속에서 이들은 극단의 주변부를 점하고 있었다. 반면 눈앞에는 손에 잡힐 듯이 너울거리는 풍요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80년대의 암울함을 벗어던진, 문화와 소비의 향연. 한국의 ’90년대는 억압을 벗어난 온갖 욕망들이 뿜어져 나오면서 자본과 손쉽게 결합하고, 그럼으로써 의 궁극적인 승리가 선포되던 시간이기도 했다. 생각할 수 있는 부의 최대치일 ‘10빨간 스포츠카에 대한 선망으로 동시대의 욕망을 공유하고 있었던 그들은, 그러나 그것을 취할 수단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루저루저로 만드는 것이 욕망과 수단의 괴리라고 한다면, 아마 이들은 한국사회 최초의 공식적인 루저이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들은 루저로 머물지 않기로 한다. 그들은 중심을 공격하여 수단을 강탈하기로 한다. 빼앗기로 한 자들의 결심은 결연했고, 그만큼 잔혹했고, 그럼으로써 퇴로를 봉쇄했다.

언론은 손쉽게 그들을 의 화신으로 만들었다. ‘은 성취되거나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그러한 것이기 때문에 별다른 설명을 요하지 않는다. 그것의 적절한 담당처는 사회나 사법기관이 아니라 종교다. 다분히 사회적인 범죄는 범죄자의 정신구조를 가진 이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범죄로 축소되었고, 종교의 영역으로 이관되었다. 이어진 신속하고 강력한 처벌은 낙오자들에 대한 극단적 배제를 신속히 실행함으로써 한국사회는 자신의 현재를 대면할 한 계기를 상실한다. 지존파 사건으로 시작한 티브이 토론회의 논의가 도덕성 회복과 사회기강의 확립으로 귀결되는 장면이 주는 우스꽝스러움은 촌스러운 자료화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말하는 것은 물론 면죄부가 아니다. 영화는 그저 조용히 권한다. 다만 한번 생각해 보라고. 그 괴물들이 그들의 이야기를 가진 인간이었다는 것을. ‘내일을 향해를 즐겨 부르고 부모님께 효도하고 싶었던 평범한 청년들이기도 했다는 것을.

 

영화는 지존파의 옆자리에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의 붕괴를 나란히 놓으며, 살인의 정의와 법의 공정성이라는 이슈로 이야기를 확장시킨다. 지존파 사건과 짧은 시간적 간격을 두고 일어난 두 붕괴 사건은 수십에서 수백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며, 엄청난 사회적 혼란을 야기했다. 격앙되어 지존파를 힐난하던 바로 그 앵커가 이제는 떨리는 목소리로 삼풍백화점 구조 현장을 보도하고 있다.

영화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이 사건들에 대한 처벌이다. 두 건축물의 붕괴로 인한 희생은 다섯 명이라는 지존파의 희생자 수와는 비교할 수 없이 컸지만, 그 처벌과정과 결과는 매우 상이하게 나타났다. 지존파에 대한 신속한 재판, 극형의 선고·집행과 비교해 두 사건의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은 경미했다고밖에 할 수 없는 정도다. 인터뷰에서 말하듯, 범죄의 목적()과 내용(생명의 박탈)이 동일한데도 말이다. 희생자의 숫자가 처벌의 수준을 결정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단순히 돈을 뺏고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고문하고 자르고 태우고 하는 살인방식의 잔혹함, 그리고 그로 인해 피해자가 겪었을 고통과 범죄의 계획성 등은 지존파에 대한 극형을 정당화하는 듯이 보인다.



그래서 영화는 참혹함과 피해자의 고통, 범죄의 고의성에 대한 우리의 관념적인 구별을 흐트러뜨린다. 붕괴 현장은 지옥이었다는 생생한 증언, 건물잔해에 깔려 꼼짝달싹 못하는 희생자, 어떻게 살아있는 신체들이 토막나고, 해체되고, 살해당했는지 (목에 칼을 꽂는 것은 살인의 전형적인 모습 아닌가? ) 죽어가는 사람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공황상태, 결국 난지도의 쓰레기더미 속에 처박힌 실종자들의 처참함, 그리고 이러한 참사가 얼마나 고의적인 것인가에 대한 증언까지. 매우 정교하게 편집된 자료화면과 인터뷰를 통해 영화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보였던 살인들간의 거리를 차근차근 좁혀나갈 뿐 아니라, 시스템의 이름으로 잔인함을 탈색시킨 사회적 범죄들의 비교할 수 없이 참혹한결과들을 눈앞에 펼쳐놓는다.

영화는 두 범주의 살인에 대한 극히 대조적인 처벌과, ‘사형’-‘무기징역’-‘특별사면으로 귀결된 5.18 책임자 처벌을 병치시키며, 법의 공정성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그러나 살인의 무게와 그 불공정성을 직접적으로 평가하는 대신 과연 사형제도가 정당한가?’라는 질문으로 우회한다. 만일 법이 권력과 자본에 종속되고 그 편파성이 숙명적인 것이라면, 또 권력자의 인성과 상황에 따라 좌우될 수 있는 임의적인 것이라면, 그렇다면 생명을 박탈하는 사형제도가 존속하는 것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분명 <논픽션 다이어리>가 전해주는 ’90년대의 이야기는 우리가 알던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것은 전쟁폐허의 한국의 성공적인 재기를 뽐냈던 화려한 ’88서울올림픽, 새로운 시대의 아이콘으로 부상했던 서태지와 기성세대의 권위에 당돌하게 딴지를 걸던 신세대가 떠오르던 90년대가 아니다. 그 시간은 한국자본주의의 번영을 가능케 했던 바로 그 힘들이 양산한 온갖 의도하지 않은 결과들빈부격차와 상대적 빈곤, 정경유착이나 관료주의의 폐해 같은 것들 이 속속 모습을 드러낸 시기였다. 동시에 그에 대한 대면을 통해 가능했을 성찰의 기회들이 외면되고 봉쇄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지존파와 같은 낙오자들은 서둘러 영구격리되었고, 백화점 붕괴의 잔해는 백구가 넘는 시신과 섞인 채 역시 서둘러 난지도 쓰레기장으로 옮겨졌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은 재빨리 눈앞에서 치워졌다. 그리고 1997년 말에 닥친 IMF 위기는 이 시기를 너무나 깔끔하게정돈해 주었다.



영화가 세월호 참사 발생 이전에 제작되었다는 것을 확인하면 이십년의 시간이 무안하다. 그럼에도 역사는 단지 단절적으로 반복된 것이 아니라, 계속되었을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여느 공포영화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편모슬하에서 어렵게 자란 대학생이 혼란한 사회를 안타까워하며 보낸 편지. ‘소수낙오자패자를 간단히 경계선 아래로 떨어내며 분명 이사회의 건전한 소시민이 되었을 이 청년이 우리의 또 다른 자화상이 아닐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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