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87호 Re:ACT! 2014. 1. 27]
미디어운동, 10년을 논하다 (6) 공동체라디오
대담: 정수경(성서공동체FM 대표) + 양승렬(동작FM 대표)
진행 및 정리: 현(ACT! 객원기자)
[편집자 주] ACT! 10주년을 맞아 시작된 기획대담이 여섯 번째를 맞습니다. 이번 호에는 지난 2004년 출범한 공동체라디오입니다. 2004년 소출력 라디오 시범사업으로 출발한 공동체라디오는 2009년 정규사업의 지위를 얻고, 현재 관악FM, 마포FM, 성남FM, 성서FM, 광주FM, 공주FM, 영주FM의 7개 방송국이 9년째 활약 중입니다.
이번 기획대담을 위해 양승렬 동작FM 대표가 대구까지 내려가 ‘업계’의 대선배인 정수경 성서공동체FM 대표를 만나고 왔습니다. 성서공동체FM은 전국 최초로 개국한 소출력 공동체라디오로서, 대구 성서공단에서 이주노동자 방송으로 시작하여 8년 넘게 운영되고 있는 공동체라디오 역사의 산 증인입니다. 반면, 동작FM은 더 이상 주파수를 주지 않는 정부의 무관심 속에서도 인터넷 팟캐스트를 통하여 지역 방송을 꾸준히 하고 있는 후발 공동체라디오 중 하나로, 마침 대담을 하는 날 딱 1주년을 맞았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작년 12월에 개최된 세계공동체라디오연합(AMARC) 아시아 태평양 서울대회 이야기를 시작으로, 지난 8년 동안 축적된 성서공동체FM의 운영 노하우 및 재미있는 에피소드 이야기가 만발했고, 후배의 고충과 선배의 조언, 그리고 공동체라디오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많은 의미 있는 대화가 오고 갔습니다. 특히 공동체라디오 방송사 사장님(?)들께서 들어두시면 유익한 ‘운영 비법’이 많이 나왔으나, 분량상, 그리고 사장님들이 아닌 독자들께서는 별로 관심이 없으실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 쳐냈음도 아울러 밝힙니다. ^^
대담은 성서공동체FM 내의 멋진 카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방송 스튜디오가 두 개, 넓은 강의실, 식당, 사랑방, 숙직실, 샤워실과 카페, 그리고 빨간색으로 엄청 튀는 야한(?) 벽지까지, 동네의 사랑방이자 휴게실이자 놀이터, 배움의 공간 역할까지 톡톡히 하고 있는 공간에서, 백전노장 정 대표와 야심청년 양 대표의 수다는 세 시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양승렬(이하 양): 들어와서 매우 놀랐어요. 공간이 크고 방이 많아서.
정수경(이하 정): 저쪽엔 다 강의실이고, 여기는 카페고, 안쪽엔 사랑방도 있고. 스튜디오가 2개 있고.
양: 저기 부엌도 있고, 샤워시설도 있네요?
정: 네. 이번에 리모델링을 했죠.
양: 언제요?
▲ 정수경 성서공동체FM 대표(왼쪽), 양승렬 동작FM 대표
정: 작년 10월 31일 ‘동네인문학’을 개관했으니까, 한 7개월? (동네인문학은 성서FM과 같은 공간에 개관한, 청소년과 성인들의 쉼터이자 삶의 방향을 찾는 공간. ‘축구와 인문학’, ‘엄마를 부탁해’ 강좌가 진행 중에 있으며, ‘남성 인문학’ 강좌도 준비 중에 있다.)
양: 그 전에는 이 공간은 어떻게 쓰였나요?
정: 원래는 다른 단체랑 같이 쓰고 있었어요. 성서공단노동조합이라고, 성서공단 지역의 일반노조예요. 노조가 나가면서 ‘이 공간을 어떻게 할까?’ 하다가, 그냥 건물 주인한테 맡겨놓으면 엉망으로 세를 놓을까봐 무리하지 말고(?) 우리가 쓰자, 이랬죠.
양: 무리하신 거 아녜요? (웃음)
정: 아, 무리했죠. 1억이에요, 1억. 전세 값, 공사비 등등 해서.
양: 우와 1억이라니…이게 10년의 내공인가요?(웃음)
정: 아뇨, 원래 제가 일단 저지르고 수습하는 스타일이라. 후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양: 건물 자체가 엄청 큰데요. 한 층을 다 쓰시는 거죠?
정: 여기가 성서라는 지역의 1호 건물이에요. 맨 처음 지어진. 1층 감자탕 집이 처음엔 상업은행이었어요. 그래서 이 건물이 대구에서 아주 유명합니다. 성서의 구 상업은행 사거리 가자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지.
양: 나름 노른자위 땅이네요.
정: 반전이지. 건물은 허름하기 이를 데 없는데, 5층(성서공동체FM이 있는)에 올라오면 ‘어머나!’ 하는.
첫 만남 - 제3회 세계공동체라디오연합(AMARC) 아시아태평양 서울대회
양: 저희는 서울 동작구에서 작년 1월 16일 개국방송을 했어요. 이제 딱 1년이 됐네요. 그 전에 2012년 가을부터 주민교육을 해서 처음에 교육받은 분들이 열댓 명 정도 되었어요. 그분들을 바탕으로 동네에서 라디오 방송국을 만든 거죠. 그때 한창 정수경 대표님이 쓰신 글을 다 찾아봤어요. 작년에 AMARC(아막(세계공동체라디오연합)) 대회에서 대표님을 처음 뵀는데, 기억하시나요?
정: 기억하죠. 아막 대회를 내가 하자고 했어요. 재작년 8월이었는데 우리 성서공동체FM 개국 7주년 때, 정용석 이사장님(성남FM, 한국공동체라디오방송협회)이 개국 축하차 내려오셨는데, 그 때 아막에 대해 말씀을 드렸어요. 공동체라디오가 자기 위상을 올리기 위해서라도 아막 서울 대회를 유치하면 어떻겠냐고 했죠. “돈이 얼마나 들어?” 하시더라고. “1억보다는 좀 덜 들지 않겠습니까? 돈만 있으면 유치가 가능합니다.” 했죠. 그랬더니 그럼 해보자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시작된 대회였어요.
양: 아막 서울 유치에 가장 혁혁한 공을 세운 게 정 대표님이시군요? 이번 서울 대회 어떠셨어요?
▲ 정수경 성서공동체FM 대표(왼쪽), 양승렬 동작FM 대표
정: 이번 아막 대회는 공동체라디오의 위상 재고라는 목표가 있었어요. 홍보였죠. 그때가 대통령 선거가 끝난 다음이었는데, 저 개인적으로는 대통령 선거에 목숨을 걸고 있었죠. 왜냐하면 공동체라디오의 재정문재를 해결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정권이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열망이 굉장히 컸어요. 그런데 안 됐고, 한 일주일 멘붕에 빠졌었어요. 이렇게 되어서는 공동체라디오가 사람들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겠다는 위기의식이 있었죠. 국민TV, 팟캐스트부터 시작해서 인터넷 기반의 공동체라디오, 이런 플랫폼들이 다양하게 있는 상황에서, 공동체라디오는 굉장히 어중간한 매체거든요. 인터넷도 아닌 것이, 지상파도 아닌 것이. 멘붕에서 딱 깨어나서 허경 사무국장(전국미디어센터협의회 사무국장)한테 전화를 걸었죠. 이러다가는 큰 일 난다, 공동체라디오가 유령이 될 것이다, 일단 미디어 ‘업계’에다가 공동체라디오의 쟁점을 올려라, 다시 재정비를 해야겠다, 이런 말들을 쏟아놓았죠. 나중에 들으니까 허경 사무국장이 “대표님, 그때 정말 절박해 보였어요.” 하면서 굉장히 놀랬다 하더라고요. 당연히 절박하지. 아막 서울 대회는 물론 그 전부터 얘기가 되고 있었지만, 대선 끝나고 정권이 바뀐다는 예상 하에서, 아막까지 쭉 가면서 재정문제를 해결해보자, 정권이 바뀌면 다시 사회적기부나 사회적 환원의 문제가 주요하게 떠오를 것이고, 그러면 정부지원 일부 받고 개인투자부터 기업투자까지 포함해서 공동체라디오 재단을 만들 수 있겠다, 그렇게 생각했지. 꿈이 굉장히 화려했지. (웃음)
잘 아시겠지만, 지금 7개 공동체라디오 대표들만 원년 멤버고 나머진 다 바뀌었어요. 원년 멤버는 ‘저질 책임감’ 때문에 못 나가는 거지.(웃음) 10년 정도 하고 정리 좀 하자. 그러려면 후배들에게 돈이라도 정리를 좀 하고 나가자, 그게 우리 선배들이 해야 할 역할이 아니겠나, 뭐 이런 농담도 하면서. 그런데 결국은 아막 대회만 남게 됐죠. 아막은 그렇게 만들어진 대회였기 때문에, 여러 가지 환경, 우리가 가진 전체적인 역량, 실력 등이 사회적으로 확산되기에는, 워크숍을 하면 평가가 나오긴 하겠지만, 그런 부분에서는 좀 부족한 대회가 아니었느냐 하는 게 제 개인적인 생각이에요.
반면에, 공동체라디오 7개가 이렇게 큰 대회를 치러 낼 수 있었다는 자부심, 이런 건 의미가 커요. 또한 아막 대회를 만들어가면서 공동체라디오가 아니고, 공동체미디어라는 개념으로 확대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죠. 아막 대회 평가 때, 공동체라디오만 아니고 공동체 미디어라는 걸 좀 확정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면 인터넷방송, 인터넷 공동체라디오, 심지어 작은 상영관, 동네 영화관까지 포함해서 공동체미디어의 개념으로 확대될 수 있겠죠. 인터넷 공동체라디오를 어떻게 연계할 것인가도 공동체라디오에서 숙제거리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런 것들이 아막 대회가 만들어준 귀중한 성과 아닐까요.
우리가 내후년이 10주년이에요. 7개 방송국이 모두 10주년인데, 2014년에는 공동체라디오 전체 10주년 준비위원회를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일단은 백서도 나와야 되고, 공동체라디오 만들기 같은 책자도 나오면 좋고. 공동체라디오의 쟁점을 좀 더 예각화 하는 문제들, 공동체라디오와 여성, 공동체라디오와 청소년 문제들에 대해 성과를 좀 내야 하는 상황에 있죠. 편성의 문제든 뭐든, 한국 공동체라디오에 필요한 것들에 대해 매뉴얼을 만들어보자, 이런 말을 하면 다들 ‘미쳤냐.’는 투로 의문의 눈초리를 보내요. (웃음) 아막 끝나고 대회 스탭들과 뒷풀이를 했는데, 내가 “10주년 때는 공동체라디오 500억 재단을 만들자.”하니까 전부 다 띵…(웃음)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냐? 공동체미디어라는 이름으로 재단을 만들면 500억 재단 정도는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 했죠. 사실 농담이 아니고, 이 의제를 띄울 생각입니다. 필요한 부분은 사재도 털고. 우리가 방송국을 만들 때, 지역에서 1억 ‘후원의 밤’을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7천을 벌었죠.
양: 7천을 한 번에요?
정: 예, 한 번에. 원빵에. 그래서 주변에서 그랬어. 5천하면 3천 들어오고, 1억 하면 5천 들어온다. 5백억 재단하면 한 200억은 안 모이겠나? 퉁 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죠. 이게 이번에 아막 대회가 가져다준 소중한 성과예요.
양: 저 같은 후배 입장에서는 재단설립 소식이 제일 반가운데요. 아막이라는 큰 세계대회가 서울에서 유치됐잖아요. 박원순 서울시장도 와서 축사하고, 바로 그 며칠 후에 서울마을미디어 축제도 있었고. 그 때 서울에서는 마을미디어 사업들과 연계해서 참여하는 분들과 관심 있는 분들께는 굉장한 시너지가 있었던 거 같아요. 사실 마을마다 작은 모임과 동아리 수준에서 하던 사람들이, 오~ 세계대회를 서울에서? 그런 느낌 받았거든요.
정: 그거 효과 있어요, 효과.
양: 네. 저도 물론 처음 경험한 건데, 놀라웠어요. 토론회하면서 그런 고민이 되더라고요. 서울시에서 하고 있는 마을미디어 사업이 궁극적으로 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요. 말씀하신 것처럼, 서울시 마을미디어 사업이 공동체 미디어운동으로 확산되는 그런 그림을 그려야 하지 않을까 하고요.
정: 그렇죠. 서울이 모델이 돼야죠. 서울이 모델이 되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고리를 가지게 되는 거죠. 대구는 요원하겠지만.(웃음)
양: 대구까지는 언제 오려나요?(웃음)
정: 아무래도 시장이나 구청장이 오픈마인드를 갖고 있다면 그런 부분들이 학습되겠죠. 만일 박원순 시장이 재선된다면 다른 그림들이 다양하게 갈 것 같아요. 공동체 단위에서 미디어를 중심으로 엮어지기도 하고, 마을 사업과 관련해서 미디어가 어떻게 연관 지어질 수 있는지, 이게 풀뿌리 단위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에 대해서, 모든 단위가 그럴 수는 없겠지만, 굉장한 효과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
양: 대구라는 지역의 토대는 어때요? 사회적 분위기나 정책 결정자들의 마인드나 관심.
정: 제가 이런 얘기를 잘 해요. 우리 동네의 청취자들은 80%가 새누리당이다, 그러니 나는 나의 청취자들을 무시할 수가 없다.(웃음) 성서공동체FM 이전에 제 경력이 있기 때문에, 처음에 우리 방송국은 친민노당 방송국이었어요. 이 동네 새누리당 구의원들도 그렇게 생각했고. 지금은 지방선거 때문에 쉬고 있지만, 전에는 내가 한 3년 정도 ‘라디오달서구의회’라는 의정활동 소개하는 방송을 했었어요. 그걸 하면서 새누리당 의원들이 이 방송국을 매우 좋아하더라고요. 같은 걸 만드는 거예요. 올해는 선거 끝나면 공동체라디오 지원 조례 만들기 이걸 준비해볼 거예요. 물론 이게 곧바로 재정적 지원으로 전환되진 않아요. 지역적, 정책적으로는 굉장히 보수적이죠.
10년 전 우리는 - 무슨 생각으로 이 활동을 시작했을까?
양: 벌써 10년을 바라보네요. 성서공동체FM이 전국 최초로 개국했죠?
정: 심사위원들에게 확인해본 결과, 우리 8개 공동체라디오-나중에 나주가 안 돼서 7개가 됐지만- 중에서 성서공동체가 7등을 했다는 거야. 다른 데는 대학이나 구청이 네트워킹 되어 있기도 하는데, 우리는 순수하게 시민사회단체로 갔거든. 이주노동자 방송이라는 컨셉으로 된 거예요. 그런데 7등, 내 인생에 7등은 아니지.(웃음)그래서 우리 스탭들에게 개국이라도 맨 처음 하자, 도저히 나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하면서 진짜 개국을 미친 듯이 준비했어요. 소출력 라디오 전국 최초 개국이라는 역사는 쓰고 가자, 일단 개국을 맨 처음 하는 것 정도만 승부수를 던지고 나머지는 천천히 가자. 그래서 8월 22일 개국했어요.
양: 정수경 대표님은 한번 꽂히면 막 달리는 스타일이시군요.
정: 확 지르고 수습하고. 빚더미 등에 안고.
양: 대표님이 쓰신 글은 많이 봤는데, 전엔 어떤 활동을 하셨는지 궁금해요.
정: 그전에 노동운동을 했어요. 노동운동하다가 영상교육단체를 만들었어요. ‘노동자의 눈’이라고.
양: 여기 성서에서요?
정: 아니, 대구 전체를 대상으로. 영상 단체를 만들어서 네 명의 영상 활동가를 규합했죠. 노동운동 교육을 영상으로 하자는 거였고. 사실은 내가 꿈이 영화감독이었어요. 이참에 그냥 다큐를 하나 찍어봐? 이런 고민을 함께 하다가, 미디어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됐죠. 미디어가 뭔지, 고민을 시작하는 단계였죠.
양: 아, 그러셨구나. 저도 실은 꿈이 영화감독이었어요. 무턱대고 영화가 좋아서 극영화 감독 되는 게 꿈이었어요.대학교를 2004년에 들어갔는데, 2003년도에 인디다큐페스티발, 인디포럼, 서울독립영화제 이런 데서 처음 본 다큐멘터리가 충격이 컸어요. <노동자다 아니다>, <나도 노동자이고 싶다> 이런 거 보면서 심장이 쿵쾅거렸어요. 내가 영화를 만든다면 다큐 감독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2004년에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이주노동자들이 강제추방 저지와 미등록이주노동자 전면합법화를 위해 380일간의 농성투쟁을 했어요. 거기서 미디어교육도 하고 <죽거나 혹은 떠나거나> 라는 인터뷰 프로젝트도 진행했어요. 2006년에는 평택 대추리에서 주민들이 앵커로 결합하는 <황새울 들소리 방송국>도 만들고 그랬거든요. 저도 그런 거 하면서 자연스럽게 미디어운동이라는 영역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 같아요. 사실 저도 제가 공동체라디오를 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는데, 어떻게 하다보니까 지금 이렇게 라디오를 하고 있네요. 계속 노동운동하시다가 성서공동체FM으로 넘어오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정: 제가 한 9년 동안 받고 있는 질문이에요. 그 전에 방송 하셨어요? 어쩌다가 이걸 하게 됐냐? 황당하다고 들었죠. 그때 막 미디어, 공동체라디오, 이런 거 가지고 (미디액트의) 김명준 소장한테 학습 세례를 받았어요. 우리는 모르니까. 워크숍도 하고 교육도 받고 하는 와중에, 방송위원회에서 소출력 공동체라디오 시범사업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했죠. (당시 같이 일했던) 이경희 PD가 회의 시간에 사업자들을 위한 설명회를 한다는 말을 했어요. “어떡해요?” 하길래, “한 번 듣고 오는 거야 뭐 어렵겠어? 듣고 와봐.” 이랬죠. 그때까지만 해도 소출력 라디오에 대한 생각은 해적방송 수준이었죠. 갔다 온 뒤 얘기를 듣고 나서, “야 그거 재밌겠네.” 했어요. 많은 안건 중에 이 안건은 그때 ‘기타 안건’이었어요. 정식 안건에 채택되지도 못한.(웃음) ‘재밌겠네, 한번 해보지.’이게 의결되는데 5분도 안 걸렸어요. ‘우리가 이제는 정부 관공서 서류도 좀 꾸미고 할 줄 알아야 하지 않겠어? 연습 겸 해보지 뭐.’ 이렇게 시작된 거예요.
양: 세상에… 일을 너무 크게 벌이셨네요.
정: 공식적인 강의에 가면 정말 괜찮다, 열심히 하시라고 말하지만, 뒤풀이 가면 이런 줄 알았으면 안 했다고 말하죠.(웃음) 진짜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안 했어. 몰랐으니까 했지. 서류 꾸미는데, 큐시트가 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그래서 CBS에 있는 후배 PD한테 가서 큐시트란 게 뭐냐, 기획서가 뭐냐, 갖고 와봐라, 편성표가 뭐냐, 이러면서 보고 ‘아, 이게 큐시트야? 아 이게 이런 거야?’했죠. 서류 다 꾸미고 난 다음에는 관공서프로포절 하는 데 승률이 굉장히 높은 선배한테 가서 감수도 받았어요. 또 방송국에 있는 PD들한테 자문을 구했죠. ‘컨셉을 이렇게 가져가려 한다, 어떠냐.’ 하고. 그럴 때마다 이건 무조건 된다고들 하더라고요.
기획서를 쓸 때, “무슨 방송을 하지 우리가?” 하니까 이경희 PD가 “한국 사람들이 정보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요? 이주노동자 방송을 하는 게 어떻겠노?” 해서, “아 그거 괜찮네, 컨셉 좋다, 그렇게 가자.”해서 이주노동자 방송을 컨셉으로 잡게 됐죠. 그래서 서류를 만들어 제출하러 갔는데, 다른 사람들은 서류가 엄청나게 두꺼운 거야. 모두 16팀이 지원했는데. 우리는 겨우 몇 장 안 됐는데 말야. 분량으로 기죽네, 하며 투덜거리며 나왔지.(웃음)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라디오할 거란 생각은 전혀 없었어요. 그땐 영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심지어 그때 서울 올라온 김에 <취한 말들의 시간> DVD를 샀다고. 나는 ‘왜 다큐멘터리는 미술에 대한 관심이 없을까?’하는 의문을 가지고 이 영화를 보면서 색깔에 대한 고민을 하고 싶었다니까. 서류 제출하고 난 다음에 그거를 세 번이나 돌려봤지. 그러다가 11월 15일, 공식적으로 발표하기 나흘 전에 합격됐다는 말을 들었지.
양: 깜짝 놀라셨죠? 아니, 뜨아- 하셨겠는데요?
정: 어, 뭐야 이거! 하다가, 오늘만은 제대로 기뻐하자, 왜냐면 앞으로 ‘우얄 건데?’ 하는 말을 평생 들어야 하니까. 자축하며 술 한 잔 했지. 술자리에서 그랬지. “앞으로 우얄 건데? 란 말 하지 마라, 지금도 머리가 터질 것 같으니까.” 이렇게 시작하게 된 거죠.별안간, 부지불식간에, 우연히, 번개 맞은 것처럼, 이런 말을 제가 자주 합니다. 어떤 때는 이 방송국이 저에게 운명처럼 왔다고 하죠.
양: 대표님 삶에서 전환점이 됐겠네요.
정: 그렇죠. 엄청나게.
▲ 성서공동체FM 간판 (왼쪽), 성서공동체FM 동네인문학 간판
우리의 지금 - 성서와 동작, 안녕들 하십니까?
양: 매일 사고 없이 방송 나가는 거, 자원봉사 관리하는 거, 낮은 주파수 때문에 애먹는 거, 돈 걱정 하는 거, 이게 날마다 고민거리였다고 초창기에 쓰셨던데, 지금은 좀 달라졌나요?
정: 정도 차이는 좀 있지만, 똑같죠. 매일 사고 없이 방송하는 방법은 이제 알지. 저 송신기는 콘텐츠를 인식하는 게 아니고 시그널을 인식하기 때문에 소리만 나오면 된다는 것.(웃음) 그리고 빈번하게 교체되는 자원봉사자들 문제도 시스템이 안정되면서 해결됐죠. 지금은 1인 기획 시스템이에요. 처음에는 스텝들이 기존 지상파 방송과 똑같이 구성되어 있었어요. 한 프로그램에 작가, MC, PD다 있었죠. 일례로, 처음에는 방송 프로그램이 한 20편정도 있었는데, 자원 활동가가 110명 정도 있었어요. 지금은 프로그램 수는 40편 정돈데 자원 활동가 수는 70명 수준이에요.
양: 1인 방송이 그렇게 많아요?
정: 그렇죠. 왜냐면, 재정 문제를 해결하려면 인력비가 밀도 있게 쓰여야 하니까. 그래서 1인 기획 시스템과 납품 방식을 도입한 거죠. 자원봉사자들이 프로그램 단위, 단위를 모두 납품하는 방식으로 짰어요. 그리고 이 시스템을 3년 동안 실험했죠. 그래서 굉장히 슬림하게 만들었어요. 우리 방송국 PD들이 하는 일은 오로지 지원이에요. 기획도 가능하면 자원봉사자 본인이 알아서 하게 하죠. 초기에 방송 프로그램 아이템 잡고 컨셉 잡고 할 때는 도와주는데, 나머지는 알아서 하도록 하죠. 가능하면 편집까지 알아서 하게하고 마지막에 마스터링해서 최종 단계 정도에 우리가 정리하는 것으로 시스템을 갖췄죠. 그게 좀 달라진 점이고, 주파수는 어쩔 수 없고 부족한 재정은 늘 허덕거려요.(웃음)
양: 상근자는 몇 분 계세요?
정: 저 포함 두 명. 두 명 갖고도 됩니다, 이런 시스템이면.
양: 저희 동작FM은 프로그램이 7편 정도 제작되고 있고, 참여하는 사람들은 20명 정도예요. 1년 해보고 나서 내린 결론은, 1인 제작 시스템은 좀 지양하려고 해요. 하다보니까 지치는 사람들도 있고, 두 명, 세 명씩 팀으로 돌아가면 부담이 줄어들더라고요. 작년 1월에 시작할 때 1인 방송으로 시작했던 사람들이 서너 달 하다가 개인사정으로 쉬다보면 재개가 어려워지더라고요. 그래서 부부팀, 모녀팀, 같은 관심사와 활동영역으로 몇 개의 팀을 만들었죠. 1인 제작방송의 어려움은 없나요?
정: 지금은 많이 없죠. 스탭들이 기존 방송처럼 구성되어 있는 프로그램도 있고 두세 명씩 팀으로 하는 프로그램도 있는데, 가능하면 이 단위들이 알아서 방송을 제작하는 시스템이니까. 상근하는 PD들이 늘 붙어주는 게 아니고. 그렇게 시스템 정비하는 데 3년이 걸렸어요. 프로그램 하나를 다시 시작할 때는 납품 방식이 아니면 안 했죠. 우리가 손봐줘야 하고 일일이 기획회의 해줘야 하고, 그런 건 안 했어요.
양: 3년 정도의 실험이 궁금해요. 자원봉사자들에게 굉장한 책임감이 부여되는 거잖아요. 하루 몇 시간 방송하죠?
정: 16시간이요. 프로그램 편성이 기존 지상파처럼 줄띠 편성(연속 생방송으로 편성)은 불가능하죠. 줄띠 편성을 흉내는 내는데, 사실은 바둑판 편성(생방송과 재방송이 섞여있는 편성)이에요. 그 전에는 매일 생방 중심이었어요. 지금도 생방은 있지만 거의 주간이나 월간 프로그램이에요. 매주 제작하는 프로그램도 있고 한 달에 한 번 제작하는 프로그램도 있고 그래요. 그러니까 매일 제작하는 프로그램은 없죠. 그래도 프로그램 이름은 ‘공동체 희망 릴레이’, ‘SCN교육공동체’, ‘라디오 속 동행’ 이런 식으로 해서, 그 안에 개별로 독립된 방송들이 있는 거죠. 예를 들어, ‘라디오 속 동행’ 같은 경우는 매월 한 편씩, 격주 간으로 제작하죠. 첫째 주 A 프로그램 본방, 둘째 주 A 재방, 셋째 주 B 프로그램 본방, 넷째 주 B 재방, 이렇게 ‘라디오 속 동행’ 안에는 금요일까지 총 10개의 색깔이 다 다른 프로그램이 있어요. ‘공동체 희망 릴레이’도 주간 프로그램인데, 금요일까지 5개의 다른 프로그램들이 있죠. 그러면 자원봉사자가 매일 제작하는 게 아니라 한 달에 한 편, 한 주에 한 편 정도 제작하니까 부담이 훨씬 줄어들죠. 대신에 데일리 방송이 주는 일관성, 고정 청취자를 확보하는 문제 등에는 한계가 있죠.
양: 데일리 방송과 월간 방송은 차이가 클 거 같아요. 청취자를 확보하는 데서.
정: 그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해요. 재정적 부담도 있고. 매일 하면 자원봉사가 불가능해요. 어떤 식이든지 프로그램 제작비로 일정 금액이 나가야 하기 때문에 하기가 어렵죠. 초기에는 데일리 생방을 하루에 6시간씩 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죠.
양: 사람이 끊이지 않았겠네요.
정: 나가고 들고 나가고 들고 북적북적 재밌긴 했지.
양: 그럼 지금 하루 16시간 중 생방송은 몇 시간이에요?
정: 생방은 세 시간. 이주노동자 방송 있는 경우는 다섯 시간.
양: 재정 문제를 빼놓는다면, 제가 제일 힘든 건 주민 자원 활동가들 관리하는 거예요. 아주 힘에 부치더라고요. 더구나 ‘1대 다’니까, 항상 스케줄 맞추고 방송하기 힘들어하면 지원도 해주고 방송 아이템 밑천 바닥나면 상담도 해주고 하는데, 1대 다 입장이니까 감정 소모가 대단하더라고요. 1년을 이렇게 하고 나니까 ‘내가 이걸 왜 했지?’ 이런 생각도 들고 스트레스가 너무 쌓였어요. 더군다나 돈도 안 되는 일인데.
정: 우리도 맨 처음에 그랬어요. 그때 우리는 상근 PD가 네 명이 있었기 때문에, 난 자원봉사자를 직접 관리하지 않고 전체를 관리했거든요. PD들 회식이라도 하면 ‘누가 PD가 권력이라 그랬어.’ 하며 자원봉사자들 씹느라 정신없었죠.(웃음) 자원봉사자들이 슈퍼 갑이었어요. 왜냐하면 그들이 펑크 내면 방송이 펑크 나니까.
양: 완전 공감돼요. 저도 상근비를 받는 것도 아니고, 저희 동작 FM은 CMS를 받기는 하는데 아직 20만 원 수준밖에 안 돼요. 방송국 운영비를 제가 알바해서 쏟아 붓는데, 또 갑까지 모셔야 하는 거죠. 지역 활동의 비전을 가지고 하는 거지만, 현실적으로 너무 힘들잖아요. 진짜 혼자서 울컥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어요. 제가 주민DJ들보다 나이만 많았어도 세게 한 소리 하겠는데.(웃음)
정: 우리는 자원봉사자들 관리 매뉴얼이 있어요. 몇 번에 걸쳐 수정된 거죠. 매뉴얼 중 하나가, ‘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 방송이란 걸 하는 것만도 어디냐, 방송국에서 이 정도 서비스 외에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건 없다’ 이런 거지.(웃음) 배짱 장사를 좀 했죠. 실제 그래서 방송 펑크 나면 음악을 넣었어요. 그런 거를 두려워하지 않았죠. 영국에서 나왔던 공동체라디오 핸드북을 보면, 방송사고 같은 걸 두려워하지 말라고 나와 있는데 우리는 완전 공감해요. 방송 사고나 이러저러한 갈등이 생기는 걸 두려워하지 마라, 그건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는 거다. 완전 공감한다니까. 관리 매뉴얼 중 또 하나는 MC 목소리를 포기하는 거예요. 초기에 우리 방송국 MC 목소리 진짜 괜찮았어요. 이건 우리가 방송을 몰랐기 때문에 가진 가장 큰 장점이라고 생각하는데 기존 방송국의 MC 목소리에는 틀이 있어요. 굳어진 목소리.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죠. ‘그러면 공동체라디오에 맞는 목소리도 있지 않겠어?’이런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우리가 트레이닝을 시켜서 목소리를 만들었어요. 정말 좋았어.
양: 어떤 목소리였어요?
정: 주로 대학교 MC 출신들, MC가 꿈인 아줌마들로 해서. 초기에는 자원봉사자들 중에서 기존 방송국에서 일한 작가들, PD들이 많았었어요. 그런 분들이 트레이닝 시켰지. 어떤 MC는 개국 첫 방송 오프닝을, 오프닝만 딱 천 번 읽었어. 그런 훈련들을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MC 목소리를 포기해야겠더라고. 굳이 좋은 목소리가 필요 없다는 걸 알았죠. ‘그냥 편안하면 되겠다, 내용 전달이 분명하게 전달되면 되겠다, 목소리 좋다고 해서 청취율 높은 게 아니다’ 이런 것들. 목소리를 포기하고 나니까 프로그램 교체, 편성, 그런 부분들이 아주 잘 됐죠. MC 목소리는 좋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깬 거죠. 그리고 KBS나 MBC 지역방송을 보더라도 사투리 톤 나올 수밖에 없어요. 억지로 서울 말 쓰려다가 촌스런 톤 나오거든. 우린 사투리 그냥 써요. MC들 오디션 보고 모니터할 때 그러죠, 어중간하게 서울말 쓰지 말고 그냥 사투리 쓰라고.
양: 이게 공동체라디오다 보니까, 지역주민들과의 만남이다 보니까, 항상 나는 모든 걸 열어놓아야 한다는 ‘맞춤형 서비스’강박이 늘 있어요. 사실은 불가능한데 말이죠. 어떤 점이 필요한 걸까요?
정: 자원봉사자들이 내가 뭘 하면 되냐, 방송에 필요한 게 뭐냐고 물으면, 이렇게 대답하죠. 대본? 배우면 되고 MC? 훈련하면 된다. 그런 건 시간이 지나면 된다. 그런데 이 문턱을 넘어오는 순간 따뜻한 마음과 함께 나누는 공동체 마인드가 없으면 이 공간을 못 넘어온다. 아줌마들한테는 내 새끼 혼자 잘 키우려 하면 이 공간 못 들어온다고 하죠. 그건 이 방송국 자원봉사의 철칙이고 원칙이라고. 혼자 자식들 잘 키우려고 하는 이기심 있는 사람들은 못 들어온다. 같이 키우고 같이 성장하고 같이 나누지 않으면 어렵다. 이렇게 지금도 대놓고 얘기하죠. 이렇게 얘기하는 순간 딱 떨어져나가는 사람들이 있어요. 계속 교체되다가 세월이 지나면 안정되는 시기가 와요. 우리는 그렇게 되기까지 3년 정도 걸렸어요. 들고 나고 숱한 분란도 일어나고요. 근데 7개 라디오방송 사장단회의(웃음) 거기 가서 들어보면 아줌마들 사이의 갈등이 우리가 훨씬 적더라고요. ‘아, 나는 진짜 자원봉사자 복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죠. 또 우리는 처음부터 스탭 간의 위상을 정립했어요. MC보다 리포터가 위고, PD 보다 작가가 위다.
양: 리포터>MC, 작가>PD 로군요.
정: 그렇죠. 그래서MC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랬어. 현장에 나와서 리포팅 하는 리포터가 공동체라디오에서는 제일 중요한 사람이고, PD보다는 글 쓰고 대본 쓰는 작가가 더 위라는 서열을 정리를 해놨죠. MC? MC가 제대로 위상을 가지려면, 적어도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클로징을 써라 그랬어. 그리고 목소리 내기 전에 PD가 보내준 기사와 관련해서 한 번 더 검색하라 그랬죠.
양: 다년간의 다양한 경험이 녹아 있는 그런 매뉴얼이 저에게 필요한 거 같아요. 저희도 맨땅에 헤딩하듯이 시작했는데, 그런 조율들이 사전에 안 되어서 힘든 것 같아요. ‘여기 들어오려면 이런 거를 지켜야 한다.’ 하는 것들. 저희는 아직 규모가 작아서 PD는 따로 없고 한 사람이 멀티플레이어로 다 하죠. MC, PD, 작가, 이런 걸 한 명 내지는 한 팀에서 다 하거든요. PD 양성은 어떻게 하시나요?
정: 우리는 들어오자마자 현장투입이지. 시쳇말로, 방송은 글로 가르치지 않는다는 거지. 7~9시까지 ‘나도 DJ’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이 프로그램은 1일 생방 체험이에요. 방송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으면, 처음에 딱 20곡만 선곡해서 뭘 얘기할지 컨셉만 잡고 스튜디오에 들어오게 해요. 6시 반에 들어오게 해서 스튜디오에 앉히고, ‘페이드는 이렇게 올리고요, 이건 마이크고, 이건 음악이에요. 음악이 엉뚱하게 나가는 건 초보한테는 사고가 아닙니다. 사고는 마이크를 올려놓고 음악을 틀면서 수다를 떠는 것입니다. 이것만 지키면 됩니다.’ 이러죠. 그러면 들어가서 음악 선곡해놓고 뭘 얘기할 건지만 생각하고 생방하면서 두 시간 동안 놀아요. 그러면 방송이 갖고 있는 그 떨림과 생경스러움을 몸으로 확 익히는 거지. ‘오, 방송이 이런 거야?!’ 하는 거지. 그 때부터 기획 잡게 하고 프로그램 명, 코너 시그널 다 정하게 하고 대본 쓰게 하죠. 그리고 리딩 연습시켜서 바로 방송 내보내죠.
양: 와, 첫 관문이 생방이네요?
정: 그렇죠. 처음부터 몸으로 익히는 거죠. 그리고 6개월 정도를 끌고 나갈 아이템이 아니면 방송에 투입하질 않죠. 이런 점들을 처음에는 몰랐지만 이제는 알죠. 음악방송도 음악을 좋아해선 안 된다, 아무리 음악을 좋아하고 많이 알아도 매주 하는 프로그램 6개월만 지나면 아는 음악 다 써버린다, 음악을 공부하는 즐거움으로 하지 않으면 음악방송 못한다. 그래서 음악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마이크 앞에 앉으시라 말하죠. 그렇게 6개월만 지나면 기획이 목에 딱 차올라요. 그때부터 공부가 들어가는 거죠. 기획이란 게 뭐며, 방송제작 과정이 어떤 건지, 기획을 한다는 건 어떤 생각을 가져야 하는지, 무슨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PD 같은 경우는 방송제작 관련 책을 주죠. 대신 처음부터 책을 던져주지는 않아요. 글로 배우면 안 되니까. 스탭들 교육은 그렇게 시켜요. 야생이지 야생.
양: 완전 몸빵이네요, 몸빵.(웃음)
정: 제가 좀 야전 체질이라.
양: 저희도 그렇고, 서울마을미디어사업 같은 경우에는 열댓 명 정도 규모로 주민교육을 해요. 1기, 2기, 이런 식으로 두 달, 석 달씩 해요. 이렇게 수료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방송을 하게 하는데 다들 하고자하는 욕구는 있어도 6개월 이상 지속될 수 있는 아이템을 정하는 일은 정말 어렵더라고요.
정: 저는 그걸 사람 안에서 구해요. 그 사람이 잘 할 수 있는 것. 예를 들어, 동네 방송국이니까 가족애창곡 같은 거. 가족 단위가 나와서 노래 틀고 설명하는 것, 이런 것도 아주 아기자기한 프로그램이에요. 공동체라디오는 콘텐츠에 접근할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참여하는가가 문제죠. 처음 시작할 때 우리는 콘텐츠냐 참여냐, 하는 얘기를 아주 많이 했어요.
양: 아주 중요한 문제 같은데요. 콘텐츠냐 참여냐.
정: 의견이 나뉘었어. 공동체에 무게중심이 실리냐 라디오에 실리냐의 문제였죠. 라디오를 주장하는 사람은, 이 또한 방송이니 콘텐츠가 우선돼야 한다고 했고. 결론은 못 냈어요. 나는 둘 다 할 수 있다고 주장했죠. 공동체라디오 핸드북에 보면, ‘공동체가 90이면 라디오가 10이다’라고 하는데, 저는 여전히 의문점을 가지고 있죠. 라디오와 공동체가 그렇게 나눠지는 문제는 아니지 않냐, 공동체 안에 라디오가 들어가고 라디오 안에 공동체가 들어간다면, 그렇게 나누어서 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했지. 우리는 그때 한쪽 방향으로 결론을 내지 않았었어요. 각자 실험해라 그랬지. 청취자 입장에서는 잘 만든 거 들으면 좋은 거고, 지역주민들 우르르 나와서 북적북적 거리는 것도 색다른 재미고, 청취자들은 골라 듣는 재미가 있지 않겠어요? 굳이 한 방향으로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죠.
양: 저희는 팟캐스트로 방송을 보내니까 조회 수가 기록되잖아요. 보면 방송 한 편당 100에서 200 사이로 왔다 갔다 하거든요.
정: 어, 많네?
양: 적진 않아요. 홍보를 열심히 하거든요. 페이스북, 트윗, 카페, 카톡 등으로 열심히 알리니까 그 정도 나오는 거 같아요. 사람들 만나면 피드백을 듣는데, 가장 많이 듣고 또 가장 고민되는 얘기가 그런 거예요. “잘 들었다, 그런 것도 있었구나. 근데… 좀 듣다 보니 지루하데...” 방송이 모두 한 시간 짜리 거든요. 듣다 보니 자기들끼리만 얘기하고, 끝까지 잘 못 듣겠더라, 그런 얘기들을 많이 들어요. 그럴 때는 이게 오락성만 추구하는 방송이 아니고 또 전문적 방송도 아니라고 얘기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요.
정: 주파수가 있는 공동체라디오든 인터넷 방송이든, 방송은 방송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전문 지상파처럼은 아니지만. 그래서 제가 노골적으로 하는 얘기가 있죠. “우리 방송 너무 유익해.” 그 얘긴 너무 재미없단 얘기거든. “너무 유익해. 이제 좀 안 유익해도 돼.” 그런 거.(웃음) 일단 방송은 무조건 재미있어야 해요.
양: 그걸 너무 유익하단 말로 표현하시는구나.(웃음)
정: 너무 유익해, 진짜. 그리고 너무 착해. 아름다운가게에서 활동천사들이 나와서 방송을 한 적이 있었어요. 그거 내가 한 달 딱 듣고 질려가지고 활동천사들 날개를 다 부수고 싶다 그랬어. (웃음) 진짜 너무 착해서 너무 질리지 않아? 내가 악마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너무 싫어. 방송은 재미있어야 해. 방송은 재미와 정보, 그 두 개는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하죠. 재미라는 건 꼭 오락적인 재미가 아니라 감동이죠. 그다음에는 공감능력이고. 공동체도 마찬가지지만 라디오 매체가 가진 일반적인 특징이 공감능력 아니겠어요? 이런 걸 아마추어가 한다고 재미없는 건 아니죠. 콘텐츠를 개발할 때 유머와 오락과 이런 코드들에 대해서 지향점을 갖되 지나치지 않도록 계속 피드백을 줘야죠. 그리고 무엇보다도, 방송하는 본인들은 즐거워하지. 일단 그걸로 만족해요.
양: 저도 거기서 좀 위안을 얻고 있어요.(웃음)
정: 하는 사람이 재미있으면 듣는 사람이 즐거워지죠. 라디오는 TV와 달라서 1인 매체고 1대1이니까, 딱 한 사람한테 이이야기를 전해주고 싶다는 느낌으로 제작하라고 해요.
양: 정확히 타겟팅이 있는 방송이라는 얘긴가요? 누군가 한 사람에게 하고 싶은 방송, 필요한 방송?
정: 네. 저도 누군가 한 사람에게 꼭 들려주고 싶다, 그런 느낌으로 방송을 제작하라고 하죠. 공중파의 ‘두 시의 데이트’나 ‘라디오시대’ 같은 프로그램 제작할 거 아니면 말이죠. 그렇지 않으면 특히 초보들 방송은 굉장히 평범해져요. 그니까 자기 얘기를 하더라도 어떻게 구성해서 얘기하느냐에 따라 확 달라지죠.
▲ (왼쪽) 성서공동체FM 공간의 벽지는 대담하고 화려하고 강렬하고 화사하다.
정수경 대표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
▲ (오른쪽) 조정실에서 바라본 방송 스튜디오, 성서공동체FM에는 이런 스튜디오가 2개 있다.
10년, 바뀐 것과 바뀌지 않은 것
양: 저희 동작구 바로 옆에 관악FM이 있고 거기 안병천 대표님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에요. 제가 영상작업을 하다가 마을라디오 방송을 하게 된 계기도 관악FM이 가까이 있다는 게 컸죠. 저는 처음에 시작할 때, 우리나라 공동체라디오가 어렵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10년 됐고 7개 방송국이 유지되고 있고 하니까 뭔가 좀 있을 줄 알았어요. 경험이나 축적된 노하우나 그런 게 있을 줄 알았는데, 없어. 완전 백지야, 백지.(웃음) 물론 하루하루 버티기가 그만큼 힘들구나 하는 걸 다시 느꼈지만, ‘진짜 이 정도야, 한국 공동체라디오 진짜 아직도 너무 척박하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정: 역사를 축적하지 않았죠. 다들 개별의 역사로 남아 있어요. 그게 제일 아쉽죠. 진짜 하루하루 채워 넣는 게 급급해서. 우리가 그러잖아요, 10주년 백서 만드는 데 콘텐츠만 정리해서 모으는 것만도 어마어마한 작업이라고. 각 방송국 대표의 컴퓨터 안에 흩어져 있죠. 편성표만 해도 그래요. 편성표가 몇 번 바뀌죠? 바뀌더라도, 왜 바뀌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것도 쉽지 않아요. 콘텐츠가 축적되어 있지 않으니까. 한국 공동체라디오에서 가장 잘 되고 있는 거 얘기하라고 하면, 내 개인적인 생각은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노동자 등 방송소외계층에 마이크가 돌아가야 한다는 개념이 있었던 거. 물론 그런 개념을 아이템에서 얼마나 실현했는지의 문제는 있겠지만.
양: 정수경 대표님께는 10년, 저에게는 1년. 공동체라디오를 하면서 지역사회와 지역주민들에게서 발견되는 변화에는 뭐가 있을까요? 사실 저는 이런 거를 말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고요.
정: 가장 큰 변화는 이 동네에서 도서관을 만들었다는 거죠.(*주: 성서공동체FM의 방송인 ‘좋은 도서관 만들기 성서지역 엄마 모임’이 구립 성서도서관 건립에 큰 역할을 했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이 방송제작자이기도 하고 이들이 주민이기 때문에, 그들의 변화가 가장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변화들이고요. 그리고 이 동네 재래시장, 이 동네 아파트주민들, 이 동네 기관단체들에게 성서공동체가 방송매체로서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 외에 공동체라디오가 지역에 아주 직접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건 아웃리치(outreach) 사업들이죠. 예전에는 도서관을 만든다든가 지역주민들과 함께 라디오의 이름으로 오프라인에서 뭔가 한다든가 그런 사업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요즘은 이런 사업들이 중단되어 있어서 좀 갑갑한 상태네요. 그저 어떤 프로그램에 한 코너 정도에서 그런 역할을 할 뿐이죠.
양: 지난 10년 동안 정수경 대표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요?
정: 라디오를 정말 사랑하게 됐죠. 나는 영상을 좋아했기 때문에 라디오를 별로 안 사랑했어. 몸에 맞지 않는 이 옷을 내가 왜 계속 입고 있어야 되나, 3년 내내 그 고민을 했어.
양: 3년이요? 전 2년 더 남았네요.(웃음)
정: 양 대표도 몸에 맞지 않는가?
양: 힘드니까요. 근데 오래 하니까 사랑하게 되시던가요?
정: 오래 해서라기보다는 그냥 라디오를 사랑하게 됐죠. 이 매체가 가진 매력들을 경험하면서 정말 라디오를 사랑하게 됐고, 그런 다음부터는 공동체라디오를 운동으로 보는 사람들은 스탭으로 안 뽑았죠. 처음에는 그런 사람들을 뽑았는데 이제는 정말 라디오를 좋아하는 사람, 방송을 좋아하는 사람을 뽑아요. 그 사람들이 오래 가더라고요. 콘텐츠는 그 다음에 고민해도 되죠. 내가 8년 동안 방송하면서 방송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 안에 꼽았어. 쉽지 않거든요. 1년 만에 모든 ‘운동권’이 달린 프로그램들은 다 간판을 내렸지.
양: 왜요?
정: 너무 유익해서.(웃음)
양: 너무 유익해서요? 재미없어서?(웃음)
정: 저는 대놓고 얘기해요. 너무 재미없다고. 심지어 장애인방송도 그렇게 얘기했어요. 너무 재미없다고, 장애인이니까 봐준다고.
양: 아니 그런 얘기를 어떻게 해요?
정: 직접 대놓고 하지. 장애인방송이니까 그나마 프로그램 계속 열어놓고 있는 거예요, 장애인 방송에서 투쟁한다는 얘기 밖에 할 말이 그렇게 없어요? 이런 식으로 말하지. 비장애인한테 장애인을 설명할 때 꼭 그렇게 설명해야 하나요, 하고. 전교조 선생들한테는 아예 유인물을 읽으세요, 뭘 방송을 합니까, 이렇게. 아주 거침없이. 그러고는 재미없다, 정리합시다하고 프로그램을 거의 싹 다 들어냈지. 그 다음부터는 운동권에 절대 방송 안 줘요. 너무 재미없어요. 그래서 소위 운동권들이 대중하고 소통하는 데 얼마나 미숙한지를 알게 됐죠. 그 전에 제가 했던 운동들도 유사하지 않겠어요? 제가 이렇게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건 그 바닥에서 놀아봤기 때문이죠. 아니, 투쟁하자는 얘기 외에는 할 얘기가 정말 그렇게 없나요?
양: 프로그램을 그냥 내릴 게 아니라, 너무 유익한 방송을 하는 그 사람들에게 재미와 감동이 있는 방송을 할 수 있도록 뭔가 제시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정: 아니야, 안 돼. 근본적으로 안 돼. 절대. 내가 미리 얘기하는데, 시민사회단체는 방송에 끌고 들어오지 말아요.
양: 저희는 사실 80%가 시민사회단체 분들인데요.
정: 그러니까 재미가 없겠지. 일상이 재미없다니까, 그런 사람들은. 다이나믹하지가 않잖아. 한 번 고민해보세요.
양: 맞는 말씀인데. 저는 그런 고민이 있는 거죠. 못 버린다. 그런 말도 못하거니와, 문을 닫지도 못한다. 그런데 또 아이디어는 없는 거죠. 더구나 이런 분들 이외에는 관계망도 좁고.
정: 라디오가 활동가를 키운다! 그런 모델 있죠, 양 대표가 그런 걸 하나 쥘 수 있으면 좋죠.
양: 라디오가 활동가를 키운다고요?
정: 뭐냐면, 지역주민 중 누군가가 동작FM을 만나면서 활동가로 변하더라, 그 경험치를 가지고 있으면 시민사회단체 활동가들에게 설명하기 되게 쉬워줘요. 즉, 어떤 NGO 단체에서 이 사람은 좀 키우고 싶은데 어떻게 키워야 할지 잘 모르겠다, 근데 방송은 좀 재미있어하더라, 그런 경우를 잘 활용하는 거죠. 나는 공동체라디오가 해야 할 역할 중 하나가 임파워먼트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 경험치를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람들한테 그렇게 설명할 수가 있죠. 바쁜 활동가들 말고 회원들 보내, 회원들 한 팀만 만들면 무조건 방송 만들어줄게, 그런 거죠.
양: 그냥 일반 지역주민들을 DJ와 PD, 게스트로 만드는 게 필요한데, 저 같은 경우는 기존에 한 걸음 정도 지역사회로 나와 있는 분들을 끌어들였거든요. 제 주변에 이런 분들이 많기도 했고.
정: 맞아요. 그건 처음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죠. 그런데 어쨌든 재미가 없어. 모든 게 일이야. 그리고 활동가들이 재미없는 또 다른 이유는 뭐냐 하면, 그들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연단을 가지고 있잖아요. 아주 조그마한 모임이라 하더라도 지역의 풀뿌리 공동체든 무슨 모임이든 모든 조직은 자기가 얘기할 수 있는 연단이 있는 반면에 그냥 일반 주민들은 그런 연단이 없잖아. 그런 사람들을 잘만 조직하면 프로그램을 훨씬 더 윤기 있고 윤택하게 만들 수 있어요.
양: 네, 맞는 말씀이네요.
정: 공동체라디오는 무조건 문턱이 낮아야 해. 운동권 활동가들만 득실득실 거리면 일반 지역주민들은 들어오기 좀 어색하거든요. 일반 지역주민들이 하는 프로그램 수를 늘려가면서 PD 시스템을 갖추고, PD가 직접 프로그램을 관리하게 해요. 그리고 가능하면 지역공동체하고 연결돼 있는 활동의 결과물들이 다시 방송으로 송출되게 하세요.
양: 그게 답이네요, 답.
정: 그게 훨씬 공동체라디오가 해야 될 역할이죠.
양: 그런데 맨 처음 공동체라디오 시작하기로 하셨을 때, 운동의 성격을 염두해 두고 계신 거 아니었어요?
정: 아니요.
양: 그래요? 공동체라디오를 통한 이주노동자 운동 이런 거 생각하신 거 아니었어요?
정: 아니에요. 그랬으면 난 망했을 거예요.
양: 그러면 그냥 재밌겠단 생각으로?
정: 처음에 같이 시작한 PD 네 명을 불러놓고 말했어. 이건 공동체라디오 방송이다, 우리 네 명의 팀원이 공동체라디오를 운동으로 본다, 안 본다, 얘기하고 가자, 그랬어요. 운동으로 본다는 사람 한 사람, 안 본다는 사람 세 사람 있었어. 그러면 공동체라디오를 운동으로 보는 사람은 보는 대로 가고, 안 보는 사람은 안 보는 대로 가고, 이거를 결정하지 말자고 그랬어요. 그러고는 공동체라디오를 시작하자마자 소위 나의 옛 동지들에게 선언했지. 방송국은 붉은 머리띠를 매지 않는다, 아니 못 맨다, 붉은 머리띠를 매는 사람들에는 조건이 있다, 실력으로 승부해라, 그랬지. 그렇게 해서 방송을 열어줬는데 재미없다, 그러면 나가라 그랬어요. 그것 때문에 말 많았어요.
양: 대표님 옛 동지들에게 욕 많이 들었겠는데요.(웃음)
정: 많이 들었지. 와~ 정수경 변했네, 배신자, 변절자. 하지만 끄덕 안 했지. 그 다음에는 모든 대책위에서 이름을 빼겠다고 했어요. 뭐 성서공동대책위원회, 이런 것들. 이름 하나 걸라고 하죠. 그러면 이렇게 말했어요. 성서공동체FM에 노조가 만들어지면 그때 노조 이름을 올리라고 하시라. 심지어 지역방송국에서 우리를 시민사회단체로 분류해서 기자하고 대판 싸웠잖아. 시민사회단체가 아니고 우리는 방송사거든요, 방송국으로 분류해주세요, 그런 거. 처음에는 내 양팔이 양쪽으로 완전히 땡겨지고 있는 상태였어요. 소위 운동권은 운동권 방송을 안 한다고 땡기고, 기존 방송국들은 내가 경력이 있으니 방송이 너무 편향적이지 않을까 싶어서 땡기고. 그래서 내가 이 두 개의 진영에 대한 답은 주지 않겠다 했어요, 처음부터.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당신들이 방송의 유효성을 인식하고 그걸 재미있게 잘 활용할 자신이 있으면 받아주겠다, 했고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방송에는 중립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런 기계적 중립은 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하나의 목소리만 내는 세상인데 조금 삐딱한 말 한마디 하는 방송국이 있는 것도 괜찮지 않나? 방송의 기계적 중립성 때문에 해야 될 얘기를 안 하지는 않겠다, 이렇게 말했지.
▲ (왼쪽) 대담이 진행된 성서공동체FM 까페, (오른쪽) 성서공동체FM 주방
양: 아직도 성서공동체FM을 공동체라디오 운동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많은 것 같던데요?
정: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요. 처음부터 운동을 표방한 것은 아니고 그냥 공동체라디오 방송을 만들어보자고 시작했지만, 그게 운동이라면 이름 붙여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요. 이를테면, 담장을 허무는 엄마들(*주: 성서FM의 방송 프로그램으로, 중증장애아 엄마들이 쓴 육아일기, 가슴으로 쓴 편지들을 방송했다. 나중에 같은 이름의 책으로도 나왔다.)이나 도서관 만드는 거 같은 활동들을 공동체라디오운동, 지역운동으로 봐도 상관없죠. 나는 그냥 공동체라디오가 지역사회에서 해야 할 역할이라고 표현했어요. 그런데 방송이냐 운동이냐, 이 두 개가 충돌되진 않았어요. 한 친구는 운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가야겠다고 했고, 다른 세 친구는 아니다, 운동이라는 이름 빼고 실험을 해보자, 했고.
양: 대표님은 실제로 운동이라고 생각하시는데 굳이 표현을 그렇게 안 하시는 거 아니에요?
정: 아니에요, 운동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양: 운동 아니다.
정: 내가 운동을 했잖아요. 나한테 낙인 찍혀 있잖아요. 방송국 대표가 가지고 있는 경력이 아주 독특하기 때문에 굉장히 조심했어요. 심지어 저런 빨갱이한테 방송 어떻게 주냐고 하고, 정보과 형사들에게서도 연락 오고…
양: 저도 사실은 저희 지역에서 그런 인식들이 있거든요. 제가 그동안 해왔던 활동이 뭔지 사람들이 다 알고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사실은 맹점이 분명히 존재하죠. 이미 벽이 하나 존재하는 거고, 방송이라기보다는 동작FM이라는 한 운동단체, 조직이다, 그래서 매체로서의 성장에 큰 걸림돌이 되는 건 분명한 거 같아요. 근데 아직까지도 저의 어떤 혈기와 미천한 경험으로는… 제가 공동체라디오를 시작한 이유도 뭔가 지역사회의 유의미한 변화를 위해서고 그 변화라 함은 많은 사람들에게 채널을 열어주고 사회적 공론장을 만들어 가는 건데, 그게 제 안에서는 목적성과 방향성이 분명하게 정립되어 있다고 생각해요. 저에게는 하나의 지역운동으로서 선택한 하나의 수단인데, 근데 이게 말씀드린 것처럼 걸림돌과 장애로 작용하는 게 있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크게 고민이 되더라고요.
정: 내가 운동을 딱 표방해서 갔으면, 나는 성서공동체FM이 이 지역에서 뿌리를 내리는 게 불가능했다 생각해요. 지금도 난 가장 다행스러운 것 중 하나가 그 결정이었다고 생각하거든요. 안 그러면 유지가 불가능했지. 근데 그것은 뭐냐면요, 일반 시민들에게 방송제작을 한번 해보라고 하는 것은, 방송은 사람을 키워내는 데 있어서는, 임파워먼트하는 데 있어서는 굉장히 유력한 매체거든요. 저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사람들 교육하고 조직도 해봤잖아요. 그 속도에 비하면, 공동체라디오 속도는 광속도예요. 우리 방송국에 있다가 분가한 어떤 방송국 대표한테 계속 설명한 게 이거예요. 지역에서 풀뿌리 활동하는 데 방송만큼 유력한 게 없다, 대신에 운동권 집어넣지 마라, 일반주민들 모아서 하면 금방 큰다. 방송이라는 이름을 다는 순간 사회적인 문제, 시사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거든요. 그러면 질문하게 되고 말하게 되고 궁금하게 되고. 그러면서 성서공동체FM이 일정한 경향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눈치 채죠. 그 경향을 딱 이거다, 저거다, 하고 구체적으로 아는 게 아니라, 아주 두루뭉술한 흐름으로 알죠. 그냥 뭉칫뭉칫한 흐름으로. 이제는 내가 예전에 노동운동을 한 줄도 모르는 스탭도 많아. 지금은 운동권 혹은 운동권 출신들은 자원 활동가 중 1%도 안 돼요. 처음엔 30 : 30 : 30 이었어. 일반 주민 30, 운동권 출신 30, 현재 운동권 30. 처음에는 현재 운동권 30을 드러냈죠. 그 다음에는 운동권 출신에서 걸러냈죠. 운동권들한테는 서서히 마이크를 안 줬어요. 재미없기 때문에. 훨씬 더 절박하고 훨씬 더 방송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그 사람들한테 1차적으로 마이크가 넘어가야 된다고 생각했죠. 그게 ‘담장 허무는 엄마들’이었고 도서관 짓는 지역 주민들이었죠. 그 두 개의 경험은 공동체라디오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방송과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어떻게 주고받으면서 같이 성장하는지를 경험한 사례였기 때문에, 현재 운동권이 아니어도 운동권 출신이 아니어도 시민사회단체가 아니어도 충분히 사람들을 성장시키고 지역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2014년, 도약과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을까?
양: 생활은 어떻게 하세요?
정: 생활? 상근활동비를 받죠. 지금 제가 이쪽 동네로 돈을 쏟아 붓다보니까 (웃음) 체불은 몇 달 됐지만. 지금은 카드로 살죠.
양: 그럼 지금 성서공동체라디오 수익구조는 어떻게 돼요?
정: 후원기부죠.
양: 100%?
정: 그렇죠. 100%
양: 그게 얼마나 돼요, 규모가?
정: 지금은 얼마 안 돼요. 대구 경기도 너무 안 좋고 후원 관리 안 하니까 막 떨어져나가고. 지금은 한 200만 원정도 되나? 많이 떨어졌어요.
양: 지금 한 층을 다 쓰고 계시는데, 그러면 경상비용이 얼마나 들어요?
정: 한 200만 원 정도 드는데, 지금 이 공간(*주: 대담을 진행하는 카페)은 동네인문학 공간이에요. 방송국과는 재정적으로 분리돼 있죠. 동네인문학은 조합 구조예요. 제도적으로는 아니지만 조합원들이 한 구좌 당 30만 원씩 출자해서 만든 공간이니까.
양: 그러면 월세는 동네인문학이랑 성서공동체FM이 분담을 하는군요.
정: 반반씩 분담하죠. 집세에 관리비하고 전기세 포함하면 200 정도 들어가는 거죠. 이것만 아니어도 고맙지. 이것만 아니면 내가 적금 붓고 산다. (웃음)
양: 그러면 제작비, 인건비는 어디서 나오나요?
정: 지원 프로포절 사업들이 좀 있죠. 연초인 지금은 없지만. 3월이나 되어야 그나마 그런 게 나오고, 요즘 같은 때는 우리 표현으로 춘궁기라고 하죠. 뭐 어떡하겠어, 진짜 재정은 답이 없어요. 공동체라디오 재정 관련해서 이번에 20억이 지역 방송 쪽으로 예산이 잡혔다고 하는데, 공동체라디오 몫이 있는지 확인을 해야 할 것 같아요, 방송통신위원회에다가.
양: 요즘 뭐 고민거리는 없으세요?
정: 음… 돈 고민, 이런 건 너무 쉽잖아요. 전 돈 고민이 너무 식상하다고 생각해요. 공동체라디오 고민이 돈이다, 이건 뭐 하나마나한 얘기잖아. 다 아는 얘기거든. 얼마 전에 마포FM 본부장이 나 보고 “정 대표는 콘텐츠 고민해요?” 묻더라고. “나는 온리 콘텐츠지!” 대답했죠. 사실은 제일 많이 고민되는 게 콘텐츠죠. 한 10년쯤 이걸 하다보면 사실 콘텐츠가 고갈돼요. 갖고 있는 어떤 프로그램과 포맷들이 있으면 그것들을 조금씩 비틀어서 이렇게 저렇게 가져가는 거지, 사실은 지역에서 할 수 있는 건 뻔 하거든. 웬만한 인물들 다 만나봤고, 웬만한 공동체 다 들어가 봤고, 와룡시장에 있는 점포 거의 대부분 훑었고, 장기자랑 다 훑었고, 동네 고수 다 만나봤고, 웬만한 유적지 다 찾아가봤고… 대부분 다 그렇죠.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비틀면서 가는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콘텐츠는 고민되죠. 양 대표의 고민은 뭐예요?
양: 저는 돈이에요.(웃음) 올해에도 방송을 계속 할 수 있을까?, 1년 버티는 게 이렇게 힘든데 또 올해도 잘 할 수 있을까?, 아 정말 되게 힘드네, 이런 생각들이 많이 들더라고요.
정: 조회 수가 한 300명 정도 되면 뭔가 광고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데…
양: 그런 걸 이제 열심히 개발해봐야 할 거 같아요. 또 제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거는, 시민활동가들이 방송 제작에 참여하는 일은 많은데, 공동체라디오가 지역사회 변화에 시너지 효과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거 같아요. 뭐 아직 1년밖에 안 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정: 쉽지 않아. 1년 만에 그런 거 기대하면 안 돼요. 프로그램 제작 과정을 숙지하고 그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만 하더라도 1년 걸려요. 아까 말한 자원봉사자들 관리 매뉴얼이라든가 그런 경험을 축적하는 것만 해도 그렇죠.
양: 지역에서도 동네 방송국 그런 게 없다가 있으니까 참 좋네, 이 정도까지는 되는데, 이제 여기에 뭔가 결합해서 힘을 만들어내는 정도까지는 못 하고 있죠.
정: 아까 운동으로 시작한 거 아니냐는 질문도 있었는데, 우리는 성서공동체FM이 청취자들에게 받을 수 있는 최상의 이미지를 그렸지. ‘좋은 방송에 좋은 일 하시네요?’ 하는 이미지. 우리는 그걸 받아내야 돼. 어떤 색깔로 보이는 게 아니라, ‘어 좋은 일 하네, 좋은 방송이네요’, 여기에다가 ‘재미있는 방송이네요’ 하는 말까지 들었으면 참 좋겠어요.(웃음)
양: 예를 들어서, 이쪽 지역의 난개발이나 노동문제 같은 사안에 대해서는 방송에서 목소리를 강하게 내나요?
정: 내죠. 난개발 같은 경우, 앞산터널을 만들 때. 산을 무너뜨려서 터널을 내는 문제를 다룬 방송은 거의 롱런이었죠. 그 싸움을 하면서 지금의 ‘달빛고운 마을 사람들’이란 프로그램이 만들어진 거고요. 노동문제도 물론 다뤘죠. 근데 지금은 간판을 내렸죠. 제일 재미없었거든.(웃음) 노동운동을 20년이나 한 사람의 방송이 이렇게 재미없을 수가 없는 거야. 어쩔 수 없이 간판 내리자고 결심했지.
양: 근데 그렇게 재미없긴 해도 공동체라디오이기 때문에 누군가는 그걸 들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정: 그런 건 있지. 노동 프로그램 중에는, 공장을 돌아다니면서 취재하는 프로그램도 있었고, ‘라디오 차차차’라는 아주 재미있는 방송도 있었어요. 아침 7시에서 8시까지 하는 생방인데, 공장지역으로 들어오는 사거리가 출근하는 차들로 꽉 막히거든. 그때 마이크를 들고 전화로 스튜디오에 연결해서 운전자들을 인터뷰하는 거지. 어디 사는 누구세요, 아침에 어떠시냐, 신청곡은 뭐냐 하면서. 길어야 3분이야. 짧으면 2분. 앞 차에서 인터뷰하고 뒷 차에서 듣는 거지. 재밌었어. 한 6개월 하니까 먼저 창문을 열어주는 사람도 있고, 먼저 인터뷰하고 싶다고 하고, 운전자가 먼저 89.1 주파수(*주: 성서FM의 주파수는 89.1MHz) 맞춰놓기도 하고. 그런데 왜 계속하지 않았냐면 아침 7시에 출근이 가능한 MC를 구하기가 너무 힘들었거든요.(웃음)
그 밖에 뭐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 비교하여 ‘아침 신문 읽어주기’, ‘손에 쥐는 노동시사’ ‘문턱 잡는 노동법’ 등 노동 관련 프로그램들이 있었죠. 초기에는 매일매일 방송했어요. 그런데, 우리 넷이 모두 노동운동을 한 사람들인데 이건 방송으로 내보기엔 너무 재미가 없었죠. 그래서 간판을 내리고 진짜 노동자를 찾아다녔죠. 노동자의 눈높이에 맞으며 대중성 있는 노동자 방송을 만들어보자 했는데 결국 못 찾았어. 찾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더구나 우리가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대본을 쓰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어요. 오랫동안 노동운동 바닥에 있으면서 우리가 가진 건 유인물 투의 방송이란 말야. 사실 부끄러웠죠.
양: 성서공동체FM의 올해 계획은?
정: 올해가 9주년이니까, 내후년 방송 10주년을 준비하는 거예요.
양: 올해는 지방선거가 있잖아요? 10년 동안 방송하시면서 선거를 두 번 해보신 건가요?
정: 그렇죠.
양: 선거와 맞물리는 시기를 어떻게 만들어낼지 고민이에요.
정: 굉장히 노멀한 기획들이 있죠. 선거 관련하여 시사적인 쟁점들에 대해 전문가 대담 토론을 하고, 선거방송을 하고.
양: 선거방송이라면, 후보들 나와서 하는 토론회?
정: 토론회는 새누리당이 안 나와서 안 됐어요. 그들은 큰 방송사 토론회도 제끼잖아요. 근데 이번에는 나올 것 같아요. 제가 ‘라디오달서구의회’를 했잖아요. 제가 새누리당 의원들한테 ‘의자놀이’(*주: 쌍용차 문제를 다룬 공지영 작가의 르뽀)를 팔아먹었어요. 이건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이것은 당의 이념과 전혀 상관없다, 그게 원인과 상관없이 결과가 이렇게 터졌고 이 결과에 책임지지 않는 사회는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 책 판 돈은 그 사람들한테 넘어간다, 그랬죠. 저는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제가 맨 처음에 구청장한테 인터뷰 들어갈 때, 제가 구청장한테 인터뷰 들어갈 게 뭐 있어, 항의방문을 가면 가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굉장히 생경했죠. 근데 이게 바로 공동체라디오의 유익한 점이란 말이죠. 제가 운동을 하고 있으면 어떻게 새누리당 의원들한테 ‘의자놀이’ 책을 팔아먹을 생각을 하겠어. 그렇게 미디어가 갖고 있는 가장 매력적인 요소는 외연의 확장이라고 생각해요. 지역에서 그런 역할을 하면서 주변을 튼튼하고 어떤 새로운 환경을 만들어 가는 거죠.
10년 후 우리는?
양: 10년 후에 여기 계속 계실 거예요?
정: 제가 3년 전에 공동체라디오를 사랑하게 되면서, 아니 공동체라디오가 아니고 그냥 라디오를 사랑하게 되면서, 우리 스탭들한테 선언한 게 있어요. 나의 운명은 앞으로 성서공동체FM과 함께 한다.
양: 대표님 너무 비장한데요.(웃음)
정: 맞아, 다들 그러더라고요. 왜 그리 비장해? 무슨 기자회견해? 저는 아주 편한 자원봉사자로 프로그램 제작하고 싶어요. 양 대표는요? 10년 후에 뭐할 거 같아?
양: 대표님은 대표님 자리를 누군가 채워줘야지 제작자로 내려오실 수 있는 거 아녜요?
정: 찾고 있죠. 근데 이사장 자리에 안 있고 자원봉사를 하더라도 돈 고민은 계속 내가 끌어안아야 할 거 같아요. 그건 내 운명일 거야.(웃음)
양: 10년 후에 저는, 저도 동작FM에 있을 거 같아요. 그때는 저도 같이 일하는 파트너가 몇 명 있고, 동작FM에서 최소한 생활비를 받을 수 있는 상근자, 그게 10년 후에 바라는 모습이에요. 진짜 욕심도 없죠?(웃음)
정: 과하지(웃음)
양: 아, 과한 거예요?(웃음)
정: 쉽지 않죠. 저는 양 대표가 관악FM에 납품을 해도 좋겠다고 생각해. 관악FM으로서는 프로그램 하나 채워서 좋고, 양 대표는 양 대표가 만든 프로그램이 주파수를 타니까 좋고. 서로가 윈윈이지. 우리도 우리에게서 분가한 ‘수성주민광장’ 방송에서 프로그램을 납품받거든요. 수성 쪽에서는 콘텐츠의 일정한 질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직접 라디오 방송을 통해 나가는 거니까. 주파수를 탄다는 건 아주 무서운 거죠. 인터넷으로 듣는 것과 라디오로 듣는 것은 전혀 다른 느낌이에요. 저는 꼭 굳이, 라디오로 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웃음) 그게 아날로그야. 라디오가 가지고 있는 매력이지. 왜 스마트폰으로 들어? 난 그런 거 석연찮아해. 출력을 높여도(높여줘), 난 라디오로 듣고 싶다, 늘 이렇게 말하지.
양: 출력을 높여도, 출력을 좀 도! 이거 괜찮네요. 올해 계획 중 하나로 넣어봐야겠네요.(웃음)
정: 가장 보람된 일은 없었어요? 동작FM 하면서.
양: 요즘에 조금 생긴 게 있어요. 저희 프로그램 중에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라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역사에 조예가 깊은 남자 한 분과 여자 한 분이 있는데, 이 분들이 동작구에 살았던 독립운동가나 사람들이 잘 모르는 사연, 역사, 인물들을 열심히 연구하시죠. 동작구에 사립 고등학교 하나가 있는데 그 학교 설립자가 친일파인 건 워낙에 공공연한 사실이에요. 근데 그 학교 교가에 설립자가 등장해요. ‘~님 나셔서~~’ 이런 가사도 나오고. 근데 그 교가에 해석을 새롭게 시도한 거예요. 친일파 설립자에 대한 숭배를 넘어서 이건 일제와 천황에 대한 찬양이다, 하고요. ‘동쪽에서 먼동이 터올라 온누리를 밝히고 그분이 나셨다~’ 이런 가사인데, 학교가 세워지고 교가가 만들어진 1938년도의 시대적인 상황상 욱일승천기처럼 천황이 사는 동쪽에서 해가 떠서 조선반도를 비치고 설립자들이 학교를 세워서 공을 세웠다, 그런 뜻으로 볼 수 있거든요. 그래서 이게 지금 약간의 이슈가 되면서, 일종의 교가 새로 만들기, 그런 운동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죠.
정: 오, 그거 좋네.
양: 그건 되게 의미가 있는 거 같아요. 역사문제를 다룬 공동체라디오… 그리고 하나가 더 있는데. 동작구 본동에 ‘용양봉저정’이란 작은 정자 하나가 있는데, 정조대왕이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이 있는 수원 화성으로 행차할 때 잠깐 쉬었다 간 정자로, 효의 상징이죠. 그런데 현 구청장이 그 부근에 갑자기 천문대를 짓겠다는 거예요. 서울 한복판 노량진에 천문대를 그것도 지상6층, 지하 2층으로. 근데 그 계획이 자치구 차원에서 아무 데도 안 나와서 사람들이 잘 몰랐어요. 1월에 사업자 선정하고 6월에 착공 들어간다고 하는데 그것도 동작FM ‘낭만과 전설의 동작구’에서 다루게 되었죠. 아까 얘기했던 사립 고등학교 교가 문제와 현 구청장의 천문대 설립, 이 두 가지를 선거와 맞물려서 이슈화시키고 공론화하려고 하는데 지역연대가 잘 되면 좋겠어요.
정: 그게 공동체니까 가능해요. 그 맛에 하는 거죠. 우리도 도서관 만들 때 정말 신났거든요. 바로 그게 공동체라디오죠. ‘담장 허무는 엄마들’도 한쪽에선 방송 나가고, 한쪽에선 교육청에 CD를 가지고 가서 ‘엘리베이터 만들어줘, 아니면 방송 나간다.’ 해서 에스컬레이터 달아주고. 그게 공동체라디오의 매력이에요. 싸우는 상황이 방송을 타고 나오는 거죠. 취재를 하기도 할 거고, 방송에서 기획하면서 싸움을 조직할 수도 있어요.
양: 방송이 먼저 이슈를 만들고 싸움을 만들어낸다고요?
정: 그렇죠. 이를테면 우리가 도서관 만들 때 그런 게 있었어요. 어떤 도서관을 만들 거냐 하는 아이디어를 방송 프로그램에서 먼저 만들었어요. 인터뷰를 하면서 밑그림을 그려서 지역주민 조직에다가 제안을 한 거죠. 그때 나왔던 게 성서에 인디고서원 같은 청소년 인문학 단체를 하나 만들자는 거였죠. 그래서 ‘도서관 친구들’이라고 도서관 만든 지역주민 조직이 여기에 굉장히 적극적으로 결합했다고 하더라고. 양 대표가 말한 그 아이템은 굉장히 재밌겠네.
양: 네, 경험을 해보고 싶어요. 올봄에, 올해 상반기에 동작FM이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시험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걸 겪어내면 어느 정도 성장을 맛보지 않을까 싶어요.
정: 맞아요. 그런 거 한 방만 터뜨리면, 지역에서 동작FM의 주가가 확 올라가죠. ‘와, 저런 것도 하네.’, ‘야, 인터넷이라도 라디오 하나 있으니까 좋네!’ 하지.(웃음)
양: 공동체라디오 후배한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정: 뭐 하러 했어요?(웃음)
양: (웃음)뭐, 어쩌다보니.
정: 방금 양 대표가 얘기했던 그런 부분들이 지역주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재미예요. 이건 시민사회단체가 조직하는 재미와는 다른, 정말 특별한 재미가 있어요. 난 늘 눈 부라리면서 활동가들 말고 일반 지역주민 중에서 역량 있는 사람을 발굴하는 게 공동체라디오, 공동체미디어가 해야 하는 가장 적극적인 노력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사랑방 토론회라고, 방송국이 아닌 다른 데서 토론회를 한 것을 그대로 실황으로 보내거나 녹음해서 보내거나 하죠. 동작FM도 지역주민들과 이런 토론회, 생방송 토론회를 할 수 있어요. 아까 같은 그런 아이템, 교가 새로 만들기나 지역현안, 그런 건 대박 아이템인 걸.
양: 네. 잘 해봐야죠.
정: 근데 방송은 결론을 내리면 안 되거든요.
양: 아 그게 늘 함정이더라고요.
정: 결론 내리면 안 돼요. 방송과 지역주민과의 긴장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경험 중 하나가, 요 앞에 비보호사거리가 있는데 거기서 교통사고 많이 났어요. 정식 신호등 달아달라고 방송국이 직접 나선 거야. 방송국이 이 의제를 마치 운동권처럼 가져가게 된 거죠. 근데 그것보다는 어떤 사업이든 싸움이든 주체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 주체와 방송국이 만나는 과정들이 있어야 하는 거죠. 그 주체들이 하는 것을 방송은 그냥 따라가는 방식, 취재하는 방식으로. 그러니까 동작FM이 어떤 결론을 내릴 수는 없어요. 방송은 결론을 못 내려요. 굳이 내릴 필요가 없죠. 참여주체들, 주민들이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면 되는 거예요. 판을 만들어주되, 주민들 조직이 이 성과물을 가져갈 수 있도록 방송국이 해주는 거죠.
이런 방송을 해서 동작FM이 공동체라디오로서 위상을 높일 뿐만 아니라, 주민들 사이에서 방송을 제작하는 주민활동가를 키우는 역할도 할 수 있죠. 그거는 아마 고민 많이 될 거예요. 우리는 아예 운동 아니다 하고 처음부터 확 꺾어가지고 왔기 때문에 일정한 긴장을 유지할 수 있었거든요. 그래도 중간중간 많이 휘청거렸어요. 방송이 운동권처럼 활동하게 되면 방송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방송은, 운동적인 개념으로 보면 운동의 무기예요.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포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확장될 수 있는 유력한 무기죠. 그런데 운동권들은 이 매력적인 무기를 절대 이해 못 하죠. 왜냐하면, 그들은 발언할 수 있는 연단이 있기 때문에 이 채널이 절박하지 않거든요.
양: 아, 오늘 저에게는 많은 고민거리가 생기네요.
정: 진짜 고민될 거예요. 양대표는 실제 활동을 하는 사람이라 더 갈등될 거예요. 이 고민을 꼭 나처럼 하라는 건 아니에요, 운영자와 참여자, 방송국과 지역사회 간에 긴장이 유지돼야 한다는 거지. 그건 양대표가 방송 프로그램 안에서 스스로 실험을 해봐야 안다, 그래야만 소위 시민사회단체와의 적절한 거리, 적절한 연대가 가능해진다는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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