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95호 우리 곁의 영화 2015.11.15]
알아도 써먹지 못하는 - 제작과정 (2)
: 상품으로서의 영화
조민석 (ACT!편집위원)
하나의 작업물이 만들어지는 과정
칸 영화제 포스터가 발주처의 요구를 반영하면서 디자인이 조악해지는 과정을 담은 온라인 밈이 있습니다. 발주처의 요구를 반영할수록 전문가의 손을 빌릴 필요가 없었을 정도로 디자인이 볼품없어집니다. 온라인 밈의 그것은 가상의 상황이지만 디자인뿐만 아니라 어느 분야든 외주 제작사에서는 한 번쯤 겪게 되는 일입니다.
이처럼 최종본이 만들어지기까지 관계자들의 의견을 반영하고, 작업적 시행착오도 생기면서 단계 별로 여러 개의 판본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중간 판본은 예의 밈에서 본 바와 같이 최종본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중간 판본들을 보지 못 합니다. 우리는 최종 판본만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예의 포스터를 작업한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누군가 최종본의 포스터만을 두고 자신의 역량을 판단한다면 그것이 불합리하게 여겨질 것입니다.
이런 일은 영화제작에서도 벌어집니다. 포스터 작업의 사례는 갑을관계에서 발생하는 부조리를 비평하기 위함이 아니라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 지점들을 환기하기 위한 화두로서 제시한 겁니다. 우리는 작품의 예술적 구성 뿐만 아니라 작업에 영향을 미치는, 작업을 둘러싼 직간접적인 맥락들까지 고려한 넓은 범위에서의 제작 과정을 의식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같은 맥락을 의식할 수 있다면 영화를 이해하는 방식도 이전과는 많이 달라지게 됩니다.
제작방식들
지난 시간에 지적한 바와 같이 저는 동영상 전반을 영화라고 부를 것입니다. 따라서 지하철 모니터에서 보는 예절 권장 영상도, 텔레비전 광고도, 휴대폰으로 촬영해 소셜미디어에 공개한 짧은 동영상 클립도 누군가 그걸 보고 있다면 모두 영화입니다.
그중에서도 우리가 일반적으로 “영화”라고 부르는 것는 극영화입니다. 텔레비전 용 드라마도 극영화입니다. 텔레비전용으로 제작되었다고 해서 영화가 아닌 건 아닙니다. 그밖에 영화로 취급되는 것으로 다큐멘터리를 들 수 있겠습니다. 텔레비전 용 드라마도 극영화인 것처럼 다큐멘터리도 다양한 형태를 가집니다. 이를테면 뉴스도, 홍보 영상도 다큐멘터리 범주 아래에 있는 것들 입니다. 또한 카메라를 거치지 않고 손수 필름에 자국을 내 상영한다거나 전시 형태로 관람하는 백남준 씨의 뉴미디어 아트와 같은 작품들을 실험영화라고 분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인과적으로 예상할 수 있다시피 어떤 접근을 취하느냐에 따라 영화의 제작 방식이 달라집니다.
간단히 말해서 극영화, 다큐멘터리, 실험영화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도 어떤 접근을 취하느냐에 따라 제작 방식을 나눌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장르적 분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물리적 규모에 따라 제작 방식을 나눌 수도 있습니다. 돈이나 인력 등을 단위로 두고 규모의 크고 작음을 분간하는 식입니다.
전체적인 윤곽을 그려볼 수 있도록 가장 큰 규모의 제작 방식과 가장 작은 규모의 제작 방식을 짚어 보겠습니다. 가장 큰 규모의 제작방식은 스튜디오 제작 방식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스튜디오는 1930-4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한 고전기 할리우드의 스튜디오를 가리킵니다. 전문가 분업이 특징이며 대규모의 제작비와 인력이 투입됩니다. 우리가 접하는 절대다수의 영화가 스튜디오 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꼭 대형 스튜디오 또는 제작사로부터 제작되어야 스튜디오 제작 방식인 것은 아닙니다. 스튜디오 제작 방식은 동일한 형태를 취해 소규모로 운영되기도 합니다.
가장 작은 규모의 제작 방식으로는 제작 과정의 모든 일을 감독 혼자서 하는 1인 제작 방식을 들 수 있습니다. 실험영화와 다큐멘터리의 경우 이렇게 1인 체제로 제작되는 경우가 꽤나 있습니다. 그 밖의 제작방식은 사실 가장 큰 규모의 제작방식보다 조금 작거나 가장 작은 규모의 제작방식보다 조금 큰 정도에 불과합니다.
스튜디오 제작방식
이처럼 영화는 예산, 제작자의 역량, 영화를 만드는 목적 등에 따라 다른 모습을 띱니다. 각각의 제작 방식은 기획 및 예산 마련부터 배급과 상영까지의 공정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중에서도 실험영화나 실험영화로 분류해도 무방할 정도의 급진적 성격의 다큐멘터리가 특히 다릅니다. 그런데 아직은 일반적 범주로 포괄하기 곤란한 이런 낯선 형태의 영화들을 예외로 두면 대다수의 작업이 제작 과정으로 거치는 단계는 대체로 비슷한 편입니다.
그에 따라 우리가 전형적 모델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스튜디오 방식의 제작 과정입니다. 스튜디오 방식은 보편적인 제작 방식이기 때문이며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소규모로도 운영됩니다. 소규모로 운영되는 경우가 있기는 해도 스튜디오 방식으로 제작되는 영화는 대부분 막대한 자본과 인력이 투입됩니다. 따라서 투자와 손실에 민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스튜디오 제작 방식은 경제적으로 최적화된 제작 방식이기도 합니다. 이는 고전기 할리우드 스튜디오가 자본의 누수와 손실을 막고 안전한 수익 구조를 마련하기 위해 영화 산업 전반을 아우르는 강력한 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것입니다.
스튜디오 방식의 제작 과정은 크게 사전 제작 단계(pre-production), 제작 단계(production), 후반 제작 단계(post-production) 세 단계로 나뉩니다.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프리-프로덕션은 시나리오를 스토리 보드로 옮기는 단계, 프로덕션은 스토리 보드에 따라 촬영하는 단계, 포스트-프로덕션은 촬영된 것을 편집하는 단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리-프로덕션 단계에서는 시나리오를 스토리 보드로 구성하는 일 전후로 시나리오 집필, 예산 마련, 배급 계약 그리고 촬영 장소 물색, 스태프 구성, 배우 섭외 등 실제 촬영에 들어가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 도모, 설계 등이 이루어집니다. 이때 예산 마련 및 배급 계약 단계에서 좌초되는 작업들도 종종 있으며 결국 좌초에 이르기까지 수 년을 보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포스트-프로덕션 단계에서는 촬영본 편집, 촬영본 편집이 끝나면 세세한 기술적 조정-색보정, CGI, 사운드 믹싱 등이 이루어집니다. 이 단계에서 제작자들은 영화의 구석구석을 여러 차례 확인하게 됩니다.
제작 과정은 일반적으로 이렇게 세 단계로 나눕니다. 그러나 프리-프로덕션을 설계 단계로 분류하고 프로덕션과 포스트-프로덕션을 하나로 묶어 실행 단계로 분류하면, 제작 과정을 두 단계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영화의 제작 과정을 상위의 맥락에서 재분류한 것입니다. 이때 설계 단계에는 가상의 영화가 있습니다. 스토리보드 작업을 마치면 이론적 차원에서 영화가 한 번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행 단계는 그것을 실제로 구현하는 작업에 불과하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촬영과 편집은 스토리보드로 구성된 가상의 영화를 실제의 차원에서 구현하는 작업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화의 제작 과정을 이야기하는데 있어서 간과하면 안 되는 요소가 투자와 배급입니다. 투자와 배급은 어떤 면에서는 제작 과정의 시작과 끝이기도 합니다. 반면 제작 과정을 이야기할 때 투자와 배급이 부수적인 일처럼 취급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리고 투자와 배급은 프로듀서가 총괄하는 업무입니다. 프로듀서야말로 투자와 배급 뿐만 아니라 제작 과정 전체를 총괄하는 사람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제작 과정을 이야기할 때 프로듀서보다 감독을 중심에 두곤 합니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보이기 위해 만들어집니다. 투자와 배급이 없다면 영화는 실존할 수 없습니다. 또한 관객들에게 보이지 않는다면 영화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완전한 의미에서의 영화가 될 수 없습니다.
막대한 자본과 인력을 투여해 제작된 영화를 관객들에게 보이지 못 하고 있다면 이는 그야말로 악몽 같은 상황일 것입니다. 특히 스튜디오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반드시 수익을 내야합니다. 이때 그 영화를 보는 관객 수가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수익은 늘어날 것이고,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알려질수록, 상영관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관객 확보가 유리해질 것입니다. 배급은 이러한 것들을 처리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흔히 ‘영화사’라고 부르는 할리우드의 대형 스튜디오들은 ‘투자배급사’라고도 부릅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경제적으로 최적화된 제작 방식은 할리우드 스튜디오와 함께 자리잡은 것입니다. 따라서 영화의 제작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할리우드 스튜디오에 대해서도 조금은 알아야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이 오늘날처럼 세계 영화 시장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전에는 프랑스의 파테Pathe사가 시장 점유 면에서 미국보다 우위에 있을 정도로 유럽의 비중이 컸습니다. 그러나 전쟁이 발발하자 유럽의 영화 제작이 위축되었고, 이 틈을 타 미국 영화가 세계 시장에 파고들게 됩니다.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 때쯤에는 미국 영화가 세계 영화 생산의 80% 이상을 차지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미국 내에서는 상영되는 영화의 거의 전부가 자국 영화였다고 합니다. 이로써 미국은 국내 상영만으로도 충분한 수익을 얻을 수 있게 되었고, 외국으로의 수출은 좀 더 많은 수익을 위한 일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유성 영화가 등장하기도 전인 1920년대 초부터 미국이 세계 영화 시장을 지배하는 구도가 자리 잡힌 것입니다.
미국이 영화 시장의 중심을 차지하면서 일어난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제작, 배급, 상영을 하나의 회사가 모두 관리하는 수직적 통합 체계의 등장입니다. 수직적 통합 체계는 스튜디오가 제작, 배급, 상영의 통합 관리라는 절대적인 통제권을 가짐으로써 영화 산업에서 안전한 수익 구조를 취하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독점인 이 구조는 1948년 ‘파라마운트 판결’에 의해 해체되긴 하지만 관행들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파라마운트, 폭스, 골드윈(이후 MGM)같은 회사는 1920년대부터 있었고, 할리우드 6대 회사들인 워너 브라더스, 파라마운트, 월트 디즈니/부에나 비스타, 소니/콜럼비아, 20세기 폭스, 유니버셜은 여전히 세계적인 메이저 배급사입니다.
이러한 배급사는 영화 산업에서 가장 힘이 센 권력자입니다. 시장으로 이어지는 유통망을 쥐고 있기 때문입니다. 스튜디오 제작 방식에서 만들어진 영화는 어떤 면에서는 철저히 상품입니다. 상품은 시장에 나와야 합니다. 시장에 나오지 못하면 상품이 아닙니다. 누군가 영화에 돈을 투자했다면, 수익을 기대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무리 질 좋은 상품이 만들어졌어도 그것이 제대로 유통되지 못하고,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고, 사람들이 손쉽게 구매할 수 없다면 수익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 국면에서 배급사는 자신이 가진 힘으로 상품 유통을 좌지우지하곤 합니다.
결국 수직적 통합 체계에서처럼 투자사이기도 한 배급사가 생산부터 유통까지 관할하고 있는 꼴입니다. 스튜디오 제작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영화는 막대한 자본과 인력을 투여하기 때문에, 수직적 통합 체계로써 갖춰진 안전하고 효율적인 경로를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이들의 관리 기준에 적합한 영화들만 생산되고 유통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쯤 되면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영화를 그 영화를 연출한 감독의 작품이라 할 수 있는지 의문스러워지기도 합니다.
스튜디오 제작방식 외 제작방식
스튜디오 바깥에서, 즉 수직적 통합 체계 바깥에서 제작된 영화를 ‘독립 영화’라고 부릅니다. 독립 영화의 독립은 일차적으로는 스튜디오로부터의 독립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관람하는 대부분의 독립 영화들이 스튜디오 제작 방식과 같은 방식으로 제작됩니다. 다만 주요 배급사의 투자 없이 제작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상품으로서의 성격이 약해지고 감독의 예술적인 권한을 우대할 뿐입니다. 저예산이라고는 해도 만만치 않은 제작비가 들고, 개봉을 목표로 제작되기 때문에 결국 투자사와 배급사를 찾게 됩니다. 최종 국면에서는 상품의 성격을 갖는 것입니다. 가장 큰 규모의 제작방식보다 조금 작은 규모의 제작방식이 이 방식입니다. 일반 영화관에서 개봉하기도 하고 독립‧예술영화 전용관에서 개봉하기도 합니다.
다음으로 가장 작은 규모의 제작 방식인 1인 제작 방식과 그보다 조금 큰 규모의 제작 방식이 있습니다. 1인 제작 방식보다 조금 큰 규모의 제작 방식은 감독 외 몇 사람 더 참여하는 정도로 대체로 10명 내외로 이루어 집니다. 실험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이 정도 규모를 갖는 편이며 간혹 극영화도 이렇게 제작될 때가 있습니다. 이 영화들은 주로 영화제에서 상영됩니다. 투자사와 배급사를 구하지 못한 저예산 스튜디오 제작 방식의 영화들이 영화제를 배급 출구로 삼기도 합니다. 아예 영화제 상영을 목표로 제작되는 영화들도 있습니다. 한편 영화제도 이런저런 이해 관계에 얽혀 있다는 점, 영화제가 예술적 가치만을 기준으로 영화를 소개하는 게 아니라는 점도 유념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나가며
영화를 둘러싼 사회·경제적인 요소들이 영화가 만들어지는 데 있어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그 구조적인 환경과 관련하여 지난 시간에는 매체의 차원에서, 이번 시간에는 상품의 차원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관련 내용을 좀더 알고 싶으시면 그래엄 터너의 《대중영화의 이해》(한나래) 1장과 6장, 볼프강 가스트 《영화》(문학과지성사) 1장 그리고 데이비드 보드웰, 크리스틴 톰슨 《영화예술》(지필미디어) 1장을 보십시오. 제작 과정의 구체적인 경로와 단계들은 《영화예술》 1장에 나와 있습니다.
지난시간에 영화는 ‘관객에게 특정한 효과를 미치도록 정교하게 구성된 조작의 산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영화가 ‘만들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잊습니다. 그래서 그 점, ‘만들어지는 것’임을 숨기는 영화의 조작적 메커니즘을 밝히고 비판하면서 자신의 영화이론을 세우려는 비평가들의 시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내놓은 미학적 분석을 이해하려면 영화를 이루는 구성요소인 이미지, 사운드, 편집, 영화가 이야기하는 방식 등의 기본 개념과 관습 또는 규범을 알아야합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영화의 기본요소를 하나하나 짚어가 보겠습니다.
* 우리 곁의 영화는 아래와 같이 진행되며, 강의를 옮긴 글임을 밝혀둡니다.
개요
1 알아도 써먹지 못하는 - 제작과정
2 무엇이 우리를 영화 앞에 붙들어 놓는가 - 내러티브 장치
3 신비로움을 구축하는 전략 - 영상과 소리
4 영화의 최종 병기 - 편집
[필자소개] 조민석 (ACT!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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