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94호 우리곁의영화 2015.8.20]
알아도 써먹지 못하는 - 제작과정 (1)
: 매체로서의 영화
조민석(ACT!편집위원회)
매체로서의 영화
영화는 이제 일상의 일부입니다. 심지어 기술의 발달로 누구나 매체에 관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좀처럼 손에서 떼어놓지 못하는 스마트폰은 영화를 보여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촬영 및 편집 등의 제작 도구까지 제공합니다. 또한 촬영・편집한 영상은 인터넷 공간으로 손쉽게 업로드 할 수 있으며 그것을 자신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습니다. 불과 10년 전과 비교해도 아주 다른 환경입니다.
촬영과 편집에서의 간편함이 불러온 여파도 적지 않지만, 무엇보다 배포의 수월함이 가져온 변화는 과거에는 미처 성찰의 대상이 되지 못하던 영역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라는 매체에 일종의 네트워크 효과가 가중되고 있다는 점을 자각하고 이를 영화의 본질 뿐만 아니라 매체로서의 영화에 관한 또 다른 사유의 계기로 의식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개봉하는 영화 작품들에는 수많은 반응물들이 만들어집니다. 개봉작에 한 마디씩 덧붙이기도 하고, 글쓰기 욕심이 있는 사람들은 블로그나 소셜 미디어에 분량 있는 글을 써 보이기도 합니다. 공적 지면에는 기자나 평론가들뿐만 아니라 교수, 종교인, 사회운동가, 예술가, 정신과 의사 등 명망 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취지 아래 온갖 종류의 말을 흘려보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영화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을까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대개는 영화라는 매체-도구 또는 수단-에 담기는 내용을 검토합니다. 우리도 우선은 일반적인 접근을 취해 봅시다.
그동안 우리가 봐왔던 수백수천 편의 영화들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전파하고 각인시켜왔을 것입니다. 일례로 우리가 세상의 모든 영화를 제한 없이 볼 수 있지 않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일본 영화를 볼 수 있게 된 지 이제 10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북한이 제작한 영화는 지금도 불가할 것입니다. 법적인, 정치적인 제한을 떠나 막상 그것을 볼 수 있다한들 우리가 거기에서 재미를 느낄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것의 사상이나 세계관에 공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봅시다. 사회보편적인 도덕 기준에서 빗겨나 있는 일탈, 반항, 퇴폐적이고 잔혹한 이미지를 어린 아이들에게 노출시키지 않는 이유는 아이들이 그에 공감하고 동화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판단과 행위의 근거가 되는 사상 및 세계관이 사회 전반, 우리의 의식 기저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폭력성, 선정성의 정도에 따라 관람 등급이 제도화되어 있는 이유도, 공인에게 높은 수준의 도덕 기준을 요구하는 것도 이러한 사상적 염려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저의 경우를 예를 들어 이야기해 볼까요? 저는 어릴 적에 아버지나 삼촌들로부터 ‘영화는 007이 최고'라는 둥, ‘영화는 자고로 때려 부숴야 제맛’라는 둥의 말을 듣고 지냈습니다. 잘생긴 얼굴, 근육질의 몸, 상대를 멋지게 제압하는데다가 영리하기까지 해서 어려운 일을 척척 해결하는 남성미 넘치는 블록버스터의 주인공을 보며 동경심을 갖곤 했습니다. 그러한 인물을 만들어내는 사상, 세계관에 무심결에 공감하고 동화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측면은 ‘내 인생의 영화’를 꼽을 때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도 내가 동경하고 공감하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영화가 매체임을 강조한다는 것은 이러한 지점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는 일입니다. 이때 내적 독해만큼이나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영화를 둘러싼 컨텍스트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영화는 텅 빈 그릇에 불과하며, ‘무엇’이 그 안에 들어가는가, 누가 그것을 담는가, 누구에게 그것을 보여줄 것인가 등을 결정하는 일은 영화 외부에서 일어나는데 이는 정치적인 성격을 때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 이러한 문제를 비평하는 이론 분과가 장르론입니다.
영화의 뒤편에는 사람들이 있다
예술의 차원에서 영화를 의식하는 일, 그리고 매체의 차원에서 영화를 의식하는 일에 함축된 세세한 지점들은 비평가와 전문 연구자들에게 잠시 맡겨두기로 합시다. 영화의 정체가 무엇인지, 우리의 사회에서 어떤 기능을 하며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지 … 오늘 우리는 그 정도만 검토해보기로 합시다. 이를 위해서는 영화와 나 사이의 심리적인 거리감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게 가능하면 영화에 접근할 때 부딪히는 보이지 않는 장벽들에서 틈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거리감 조절과 그에 따른 균열은 어떻게 마련할 수 있을까요? 제도권에서 공부하고 심오한 연구를 해야만 가능한 일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호사가들이 종교적 신비처럼 포장해 놓아서 그렇지, 영화적 현상이 우리가 객관적으로 접근하기 어려운 기기묘묘한 마법이 아닙니다. 실질적인 계기가 무엇이든 영화에 접근할 때 자신도 모르게 생겨나는 경직도를 낮추기 위해 일단은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왕가위王家衛 감독의 1994년 작 <중경삼림(重慶森林, Chungking Express)>을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도 제목을 듣는 순간 <중경삼림>에 관한 이미지들이 떠올랐을 겁니다. 대표적으로 잔상이 묻어있는 듯한 등장 인물들의 모습을 들 수 있겠습니다. 이들을 ‘부유하는 도시인’이라고 지칭해도 무리는 아닐 듯합니다. 의미와 정서가 영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만큼은 따라옵니다. 이를 초점으로 <중경삼림>이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 세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작품 내적으로는 주제, 구조와 모티브, 영화적 묘사 등을 서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내적 독해의 접근은 다들 익숙하실 겁니다.
한편 작품 외적으로 제작을 둘러싼 구체적인 맥락들을 따라가볼 수도 있습니다. 영화는 사람이 만듭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우리와는 아주 다른 남다르고 특별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 점을 늘 상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제작의 바탕에는 어떤 목적이 있습니다. 페드로 코스타(Pedro Costa)의 비유처럼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영화는 대부분 뚜렷한 목적과 계획 하에 일사불란하게 제작됩니다. 이때 제작 현장에는 우리와 다르지 않는 보통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면서 자신이 저 현장에 있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장비를 나르고, 배우들을 뒷바라지하고, 구경하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그러다가 불합리한 처우나 인격적인 모욕을 당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지금 보고 있는 저 영화가 어떻게 보일까요? 전혀 신비로워 보이지도 않을 겁니다. 매혹 작용이 일어나지 않겠지요.
다른 입장에도 서 봅시다. 이번에는 자신이 저 영화의 제작한 영화사의 대표이자 실무를 총괄한 프로듀서라고 생각해 봅시다. 제작비와 맞물려 있는 모든 것이 신경쓰일 겁니다. 또한 투자사, 스타 배우 등비즈니스 관계망과 관계된 지점들에도 애를 썼을 것입니다. 따라서 실적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문제들에 노심초사할 것입니다.
영화는 이렇게 복잡다단한 계기들로 얽혀있는 몸집이 커다란 인공적 산물입니다. 감독의 ‘예술혼’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얽혀 있고 그만큼 다면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적 독해의 차원에서 작품에 접근하더라도 영화가 실질적으로 어떻게 구축되는지 알아야 터무니 없는 읽기로 빠지지 않습니다. 앞으로 살펴 보게 되겠지만 고전적 서사의 플롯 체계를 모르면 특히 터무니 없는 읽기로 빠지기 십상입니다.
물론 감독도 아주 중요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영화를 감독의 작품이라고 여기는 의식으로부터 물러설 필요도 있습니다. 이번에는 저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 자신의 절친한 친구라고 생각해 봅시다. 이 친구는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경우라면 저 영화가 어떻게 보일까요? 이 친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러기 위해 어떤 구성 전략을 취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효과적이었는지 ... 이런 점들이 눈에 밟힐 것입니다. 즉 설계의 측면이 눈에 들어올 겁니다.
이렇게 다양한 입장에 서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영화로부터 심리적 거리감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장르론 공부는 이와 관련한 이론적인 바탕을 마련해 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전에 영화예술의 방법, 특히 고전적 방법에 관한 기초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우리는 영화예술의 고전적 방법을 집중적으로 공부할 것입니다.
할리우드 영화를 알아야 한다
영화를 즐겨 보는데 시나리오 작법서를 읽어본 적이 없다면 이번 기회에 꼭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이 많이 읽는 책들 중에서 적당히 골라보셔도 괜찮습니다만, 영화 책을 처음 읽는 분들께는 데이비드 하워드(David Howard)의 『시나리오 가이드(The Tools of Screenwriting)』를 권하겠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 보셔도 괜찮고, 한 권 사두시는 것도 좋습니다.
앞으로 이런저런 책들을 언급할 텐데 다른 건 못 읽더라도 시나리오 작법서는 꼭 읽어보십시오. 저는 세 권 정도 읽어보시는 걸 권하겠습니다. 읽기 어렵지 않을 겁니다. 『시나리오 가이드』의 경우 전반부는 개념 설명, 후반부는 작품 분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독서에 능숙하신 분이라면 전반부를 읽는데 한두 시간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혹시 1부 '시나리오 작가'가 잘 안 읽히면 2부 '스토리텔링의 기초'부터 읽어보십시오.
시나리오 작법서는 시나리오를 집필하려는 사람들, 즉 작가 지망생들을 위한 책이지만 그럴 뜻이 없더라도 개의치 말고 읽어보십시오. 영화를 킬링타임 오락물로만 소비하지 않는 사람에게 시나리오 작법서는 필독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절대다수의 영화는 서사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영화들은 할리우드의 방법을 따릅니다. 앞으로는 고전영화(classical cinema)의 방법을 따른다고 하겠습니다. 상업 영화, 오락 영화만 그런 게 아니라 이른바 ‘독립・예술영화’로 분류되는 작품들도 절대다수가 이 방법을 따릅니다. 이것으로부터 철저히 벗어난 영화를 보시면 오히려 당혹스럽거나 불쾌하실 겁니다.
시나리오 작법서 대부분이 고전적 플롯의 기초 개념 및 작술 규범을 소개하는데 이는 할리우드 영화, 한국의 경우 충무로 영화, 그리고 텔레비전 ‘드라마’, 즉 전형적인 극영화에만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다큐멘터리 교과서에서도 시나리오 작법서의 주요 내용들이 무게감 있게 다뤄집니다. <런닝맨> 같은 쇼 프로그램도 고전영화의 규범들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고전영화의 구체적인 방법에 관한 설명은 차차 하겠습니다. 영화는 관객에게 특정한 효과를 미치도록 정교하게 구성된 조작의 산물이며 고전영화의 방법은 이를 위해 요구되는 기초적인 규범입니다. 여러분도 다들 잘 아시다시피 영화를 감상하고 있는 순간에는 영화가 조작의 산물이라는 점이 드러나면 안 됩니다. 대다수의 관객들은 영화 감상의 매혹과 몰입이 깨지는 걸 언짢아 합니다. 영화에 얼마나 빠져들었는가에 따라 작품의 재미를 판가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매혹과 몰입을 만들어내는 데 있어 시나리오의 비중이 제법 큽니다. 시청각적으로 중무장한 영화들이 극적으로 허술했던 경우를 떠올려보십시오.
누군가 새로운 화법, 새로운 형식의 영화를 들고 나온다고 해도 그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영화를 관람하는 지평에서 관습이 작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관습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영화예술의 고전적 규범은 이러한 관습의 가장 밑바탕에 놓여있는 것임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런 까닭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든, 영화를 보고 한 마디 하는 사람이든 영화예술의 고전적 규범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있어야합니다. 그래야 영화를 뚜렷하게 볼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제작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고전영화의 방법들을 구체적으로 검토해 봅시다.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기왕에 자리가 마련되었으니 함께 열심히 공부해 봅시다. 이번 공부를 마칠 때 쯤에는 영화의 제작 과정과 설계 방식에 대한 이해도가 어쨌든 지금보다는 높아져 있을 겁니다. 그때는 댓글 하나를 쓰더다로 규모가 다르겠지요. 나아가 우리 사회에 그런 사람이 많아졌다고 생각해 봅시다. 제작자들이 관객들, 시청자들을 업수이 여기지 못 할 것입니다. 제가 기초적인 공부를 함께 해나가자고 말씀드리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곁의 영화는 아래와 같이 진행되며, 강의를 옮긴 글임을 밝혀둡니다.
개요
1 알아도 써먹지 못하는 - 제작과정
2 무엇이 우리를 영화 앞에 붙들어 놓는가 - 내러티브 장치
3 신비로움을 구축하는 전략 - 영상과 소리
4 영화의 최종 병기 -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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