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94호 우리곁의영화 2015.8.20]
알아도 써먹지 못하는 - 제작과정 (1)
: 매체로서의 영화
조민석(ACT!편집위원회)
▲ <중경삼림>(1994, 왕가위)
매체로서의 영화
영화는 이제 일상의 일부입니다. 기술의 발달로 누구나 매체에 관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좀처럼 손에서 떼어놓지 못하는 스마트폰은 영화를 보여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촬영 및 편집 등의 제작 도구까지 제공합니다. 촬영・편집한 영상은 인터넷 공간으로 손쉽게 업로드 할 수 있으며 그것을 자신이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습니다. 불과 10년 전과 비교해도 아주 다른 환경인 것입니다.
제작과 편집에서의 간편함이 불러온 여파도 적지 않지만, 무엇보다 배포의 수월함이 가져온 변화는 과거에는 미처 성찰의 대상이 되지 못하던 영역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라는 매체에 일종의 네트워크 효과가 가중되고 있다는 점을 자각하고 이는 영화의 본질과 매체, 도구에 대한 또 다른 사유의 계기로 작용할 것임을 예상할 수 있겠습니다.
또한 한 편의 영화에도 수많은 글과 반응이 만들어집니다. 그 영화에 대해 누구나 한 마디씩 덧붙일 수 있으며 일부 열정이 넘치는 사람들은 분량 있는 글을 써 보이기도 합니다. 공적 지면에는 기자나 평론가들뿐만 아니라 교수, 종교인, 사회운동가, 예술가, 정신과 의사 등 명망 있는 사람들이 각자의 취지 아래 온갖 종류의 말을 흘려보내곤 합니다. 분별과 무분별조차 구별하기 어려운 혼돈의 상태가 생겨나고 있으며, 이에 대한 가치판단은 간단하지 않아 보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영화를 어떻게 수용하고 있을까요? 이 물음에 답하기 위해 영화라는 매체-도구 또는 수단-에 담기는 내용을 먼저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그동안 우리가 봐왔던 수백수천 편의 영화들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전파하고 각인시켜왔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합법적으로 일본 영화를 볼 수 있게 된 지 10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북한이 제작한 영화는 지금도 불가합니다. 법적인, 정치적인 문제도 있지만 막상 그것을 볼 수 있다한들 우리가 거기에서 재미를 느낄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사상이나 세계관을 공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도덕기준에 의문을 품게 만드는 일탈, 반항, 퇴폐적이고 잔혹한 이미지를 아이들에게 노출시키지 않는 이유는 아이들이 그에 공감하여 동조할지 모른다는 우려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판단과 행위의 근거가 되는 사상 및 세계관이 사회전반, 우리의 의식 기저에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폭력성, 선정성의 정도에 따라 관람등급이 제도화되어 있는 이유도, 공인들에게 높은 수준의 도덕 기준을 요구하는 것도 이러한 사상적 염려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꽤 많은 분들이 아버지나 삼촌들로부터 ‘영화는 007이 최고'라는 둥, ‘영화는 자고로 때려 부숴야 제맛’라는 둥의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잘 생긴 얼굴, 근육질의 몸, 상대를 멋지게 제압하는데다가 영리하기까지 해서 어려운 일을 척척 해결하는 남성미 넘치는 블록버스터의 주인공을 보며 동경심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한 인물을 만들어내는 사상, 세계관에 무심결에 동조하고 공감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영화’를 꼽아봅시다. 거기에도 내가 동경하고 공감하는 세계관이 있습니다.
영화가 매체임을 강조한다는 것은, 영화에 담기는 내용, 즉 사상에 주목할 것을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영화는 텅빈 그릇에 불과합니다. ‘무엇’이 그 안에 들어가는가, 누가 그것을 담는가, 누구에게 그것을 보여줄 것인가 등을 결정하는 것은 영화 외부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영화는 매체다’라는 명제에는 이 모든 논의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영화의 뒤편에는 사람들이 있다
예술의 차원에서 영화를 의식하는 일, 그리고 매체의 차원에서 영화를 의식하는 일에 함축된 세세한 지점들은 비평가와 전문 연구자들에게 잠시 맡겨두기로 합시다. 영화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작동하며 어떤 모습을 띠고 있는지, 여기서는 그 정도만 검토해보기로 합시다. 이를 위해 심리적인 거리감을 조절하는 것부터 갖춰보면 좋겠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 앞에 놓인 보이지 않는 장벽에 많은 틈들이 생겨날 테니까요.
그렇다면 이러한 거리감 조절과 그에 따른 균열은 어떻게 해야 생겨날 수 있을까요? 제도적 차원에서 공부하고 심오한 연구를 해야만 가능한 것일까요? 일단은 이렇게 생각해봅시다. 왕가위 감독의 1994년 작품 <중경삼림>을 떠올려봅시다. 영화를 보지 않았더라도 제목을 보는 순간 곧바로 그 상징적인 이미지들이 떠올랐을 겁니다. 잔상이 묻어있는 <중경삼림>의 등장 인물들을 ‘부유하는 도시인의 모습’ 쯤으로 지칭해도 그리 모자라지 않습니다. 의미와 정서가 영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만큼은 묶여듭니다. 이를 기준으로 이 영화가 우리가 살아가는 실제 세계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작품 내적으로는 주제, 구조와 모티브, 영화적 묘사 등을 서술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작품 외적으로 제작 과정에서 있어서의 구체적인 면면들을 따라가볼 수도 있습니다. 영화는 사람이 만듭니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어떤 목적이 있습니다. 포르투갈의 감독 페드로 코스타의 비유처럼 대부분의 영화가 이러한 목적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제작됩니다. 영화를 보면서 자신이 저 현장에 있었다고 생각해봅시다. 장비를 나르고, 배우들을 뒷바라지하고, 구경하는 사람들 통제하고, 그러다가 불합리한 처우나 인격적인 모욕을 당했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영화가 어떻게 보일까요? 매혹되지도 않고 신비로워 보이지도 않을 겁니다. 이번에는 자신이 저 영화를 기획한 제작자라고 생각해봅시다. 바탕에 있는 목적이 가장 크게 의식될 것이고, 제작과정에서 생겨날 아주 현실적인 문제들을 따져보게 될 것입니다. 영화는 이렇게 복잡다기한 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독의 ‘예술혼’만 이야기하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의 손을 거칩니다. 이러한 것들이 영화의 뒷면에 놓인, 실제의 모습입니다. 현실입니다.
물론 감독은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럼 이번에는 저 영화를 연출한 감독이 자신의 절친한 친구라고 생각해봅시다. 이 친구는 내가 너무나 잘 아는 사람입니다. 이럴 경우에는 저 영화가 어떻게 보일까요? 이 친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러기 위해 어떤 전략을 세웠는지, 그리고 과연 그것이 효과적이었는지 ... 이런 점들이 눈에 밟힐 것입니다. 누가, 왜 그 영화를 만들었고, 거기서 어떤 방식을 취했는지가 보일 겁니다. 이런 지점들을 뚜렷이 알려면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필요합니다.
할리우드 영화를 알아야 한다
영화를 즐겨 보는데 한 번도 시나리오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면 이번 기회에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이 많이 읽는 책들 중에서 적당히 골라보셔도 됩니다만 영화 책을 처음 읽는 분들께는 데이비드 하워드의 『시나리오 가이드』를 권하겠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보셔도 좋고, 한 권 사두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1부 '시나리오 작가'가 너무 딱딱하다 싶으면 2부 '스토리텔링의 기초'부터 읽어보십시오. 그래도 서문은 건너뛰지 마십시오.
앞으로 이런저런 책들을 언급할 텐데 다른 건 읽지 않더라도 시나리오 책은 꼭 읽어보십시오. 저는 세 권 정도 읽어보시는 걸 권하겠습니다. 읽기 쉽습니다. 『시나리오 가이드』의 경우 전반부는 개념 설명, 후반부는 적용 분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독서에 능숙하신 분들이라면 전반부를 읽는데 한두 시간이면 충분할 것입니다. 책에서 예시가 되는 영화들도 봐두십시오. 훗날 뿌듯할 때가 있을 겁니다. 시나리오 책 대부분이 시나리오를 집필하려는 사람들, 즉 작가 지망생들을 위한 책이지만 그럴 뜻이 없더라도 개의치 말고 읽어보십시오.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영화가 서사영화입니다. 그 영화들은 할리우드식 메커니즘을 따릅니다. 전형적이냐, 덜 전형적이냐 정도의 차이일 뿐이지, 대다수의 독립영화, 예술영화도 이 메커니즘을 따릅니다. 이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영화를 보시면 당혹스럽거나 불쾌하실 겁니다. 시나리오 책 대부분이 할리우드식의 개념, 원리, 작법을 소개하는데 이는 할리우드 영화, 한국의 경우 충무로 영화, 그리고 텔레비전 드라마에만 적용되는 게 아닙니다. 다큐멘터리 교과서에서도, 영화 예술의 요소 전반을 다루는 영화 교과서에서도 시나리오 책에 있는 내용들이 중요하게 다뤄집니다. <런닝맨> 같은 쇼 프로그램도 할리우드식 기본 장치들을 철저하게 지킵니다. <쇼미더머니>의 ‘악마의 편집’ 논란은 제작진이 전형적 구축을 고수하는 데서 생겨난 문제입니다.
본격적인 설명은 각 부분들에 들어가서 하겠습니다. 영화는 관객들에게 특정한 효과를 미치도록 정교하게 구성된 조작의 산물입니다. 대다수의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있는 그 순간에는 이 조작의 과정을 알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영화에 얼마나 빠져드느냐에 따라 재미있다, 재미없다를 판가름하기도 하는데, 그것의 강도를 만들어내는 데에 시나리오의 비중이 제법 큽니다. 시청각적으로 중무장한 영화들이 극적으로 허술했을 때를 떠올려보십시오.
누군가 새로운 화법, 새로운 형식의 영화를 들고 나온다고 해도 그것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유는 보는 사람들에게도 관습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관습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든, 영화를 보고 한 마디 하는 사람이든 관습을 이루고 있는 규범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아고 있어야합니다. 활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에게 가닿을 수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제작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런 다음 영화의 각 부분들을 검토해봅시다.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진 알 수 없지만, 영화의 제작과정과 설계방식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졌다고 생각해봅시다. 댓글 하나를 쓰더다로 규모가 다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많아졌다고 생각해봅시다. 제작자들이 관객들, 시청자들을 함부로 하지 못 할 것입니다. 제가 굳이 이 익숙하고 뻔한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 알프레드 히치콕)
우리 곁의 영화는 아래와 같이 진행되며, 강의를 옮긴 글임을 밝혀둡니다.
개요
1 알아도 써먹지 못하는 - 제작과정
2 무엇이 우리를 영화 앞에 붙들어 놓는가 - 내러티브 장치
3 신비로움을 구축하는 전략 - 영상과 소리
4 영화의 최종 병기 -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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