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93호 인터뷰 2015.06.13]
이주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許하라
- 이주 노동자 미디어 운동 단체, ‘지구인의 정류장’ 탐방기
인터뷰 : 김형준, 김보람(ACT! 편집위원회)
글 : 김형준(ACT! 편집위원회)
봄이라고 하기에는 여전히 쌀쌀했던 3월의 어느 일요일. 안산에 위치한 ‘지구인의 정류장’(이하 ‘정류장’)을 찾았다. 고만고만한 근거리만 오가던 나로서는 나름 꽤 장거리 이동인 셈인 데, 도착지가 가까워올수록 정말로(!) 한국 사람보다 이주민이 더 많은 듯한 생경한 풍경이 더해져 안산역에 도착했을 때는 왠지 약간 비몽사몽한 기분이었다. 안산역에서 다시 버스로 몇 정거장, 시간이 촉박해서 부랴부랴 찾은 ‘지구인의 정류장’은 아파트 단지 맞은편 조그만 이층 건물에 터를 잡고 있었다. 좁은 통로를 따라 올라가니, 채광 좋고 아기자기한 느낌의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휴일을 맞아 ‘정류장’에 모인 ‘지구인’들이 다행히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준다. “안녕하세요?”
‘지구인의 정류장’. 운동 단체치고는 꽤나 낭만적인 뉘앙스를 담은 이름을 가진 이 집단은 이주 노동자들의 미디어 운동 단체다. 이전에 다큐멘터리 작업을 했던 ‘정류장’의 김이찬 대표는 2007년부터 안산에서 거주하며 안산외국인근로자센터의 문화 파트를 담당하며 이주 노동자들의 비디오 교실을 기획, 비디오 교육을 했다. 비디오 교실의 결과물인 30여 편의 작품들이 지역 케이블티브이와 RTV에서 방영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해당 부서가 일년 반 만에 문을 닫으면서, 독자적으로 비디오 교실을 열었다. 비디오 교실 이름은 ‘이봐요, 나 지금 안산에 살아요’. ‘지구인의 정류장’의 전신인 셈이다. 역시 이주 노동자들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던 최종만 사무국장은 당시부터 미디어 교육과 촬영을 돕다가 2011년부터 ‘정류장’에 자리를 잡았다.
‘정류장’은 활동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크게 보면 이주 노동자들의 미디어 교육과 다큐멘터리 제작이 한 축을, 노동 상담이 또 다른 축을 이루고 있다. 또 최근까지 이주 노동자들의 쉼터를 운영했는데, 얼마 전 ‘크메르노동권협회’(‘정류장’의 활동을 바탕으로 구성된 이주 노동자들의 자치기구)의 소관으로 분리되었다. 안산의 공장노동자들뿐 아니라, 경기도 인근과 전국 각지에서 농축산업에 종사하는 이주 노동자들이 많다는 것도 ‘정류장’의 특징이다. (‘크메르노동권협회’는 농축산업에 종사하는 이주 노동자들 중 특히 캄보디아 출신이 많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간단히 말해, ‘지구인의 정류장’은 유사모델을 찾아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단체이다. 이주 노동자들에게 비디오 교육을 하던 자그마한 비디오 교실이 어떻게 지금의 모습을 가지게 됐을까. 이쯤 되면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주 노동자들의 ‘이야기’ 그리고 그들의 ‘삶’
“이주 노동자들이 몇 십만이나 한국에 와서 사는데, 그 사람들의 생각, 그 사람들이 살았던 세상에 대한 이야기는 볼 수가 없잖아요. 그리고 여기 한국에서 살고 있는데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없고.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내가 알고 싶은 그런 욕망도 있고. 그러니까 비디오교실을 하자 이렇게 생각을 했죠.” (김이찬 대표)
이미 1999년에 <데모크라시 예더봉>이라는 독립 다큐멘터리를 통해 한국에서 민주화 운동을 하고 있는 버마청년들의 이야기를 전한 바 있는 김이찬 대표는 이주 노동자들의 비디오 교실을 시작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수십 개의 나라에서 온,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여기저기 흩어져서 산업체에서 근무를 하는데도, 그들이 자기 이야기를 볼 수 있는 방법도, 자기 이야기를 형성하는 방법도 없을 뿐더러 서로 간의 접촉면도 없었고, 접촉을 안 하니 이야기가 생겨날 리 만무했다. 김 대표는 이주 노동자들이 자기 이야기를 직접 할 수 있는 공간이 어떤 식으로든 필요하다는 판단이 들었고,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일단 작은 비디오 교실을 열었다고 한다.
그런데 수 십 만의 이주 노동자들이 이미 한국에서 노동하고, 밥을 먹고 여가를 보내며, 때로는 결혼과 출산 같은 삶의 중요한 변화들을 겪는데도, ‘그 사람들의 생각, 그 사람들이 살았던 세상에 대한 이야기’, ‘그들이 한국에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볼 수 없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모든 ‘삶’에는 ‘이야기’가 따르지 않나?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활동들조차도 ― 사람들이 함께 밥과 술을 먹으며 얼마나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지를 생각해 보라 ―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또 가만히 생각해 보면, 거꾸로 ‘이야기’가 없으면 ‘삶’도 없다. 만일 누군가 나에게 ‘당신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내가 어떻게 살아왔고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것 외에 달리 나를 설명할 방법이 있을까. 말하자면, 그러한 이야기를 통하지 않는다면 나의 삶은 존재할 수 있을까? 거기 있기야 있겠지. 스스로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소통되지 않는 정체불명의 무엇, 의미가 상실된 개별 행위들의 덩어리로 말이다. 결국 ‘이야기가 부재하는 삶’이란 한국사회에서 이주 노동자들이 처한, ‘어떤’ 현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일 터이다.
지금의 고용허가제는 준비되고 교육이나 들일 비용이 필요 없는 성인 노동자를 데려다가 5년 동안 일만하고 돌아가게 하는 그런 정책이예요. 사람이 5년 동안 살면서 사람이 겪는 다른 삶의 요소에는 관심이 없는 거지. 그냥 노동력. 다 준비되어 있고 교육이 필요 없는 딱 쓰고 문제 일으키지 않고 돌아가는. … 어쨌거나 그래서 이야기가 남지가 않아요. 이주 노동자들로서는 여기가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내 나라는 아닌 거죠. 그러니까 이게 … 한번 생각을 해 보세요. 관객에 대한 감 없이 영상을 만들 수 있나요? 일기나 편지처럼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 혹은 사적으로 친밀한 사람들을 위한 미디어가 있고, 조금 더 넓게는 전화나 페이스북도 있죠. 그런데 뭔가를 기획해서 예컨대 기고를 한다거나 하는 것은, 다수의 대중들에게 뭔가를 알리고, 내가 발견하거나 생각하고 느꼈던 것을 알리고 그들로부터 반응을 이끌어내려는 행위잖아요. 그런데 만약에 독자가 없다면 혹은 그런 출구가 없다면 그런 욕망을 가질 수가 있을까요? 영상을 만드는 것도 비슷하죠. 단순히 영리활동이 아니라 작품을 만드는 거고. 그런데 작품을 왜 만드냐. 그걸 볼 사람이 있고 그 사람들에게 뭔가를 들려주고 싶고 영향을 미치고 싶고 그래서 만드는 거잖아요. 그거 없으면 만들 수 있을까요?” (김이찬 대표)
‘준비되어 있고 교육이 필요 없는 딱 쓰고 문제 일으키지 않고 돌아가는’ ‘노동력’.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 노동자들이 위치한 지점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면 정확히 이렇다. 그들은 같은 공간에서 함께 일하고 함께 존재하되, 함께 ‘사는 것은 아닌’ 사람들이며, ‘노동력’이라는 사실 외에 ‘사람이 겪는 다른 삶의 요소’에 대한 관심은 배제된 철저히 ‘소외’된 존재들이다. 그러한 소외된 위치에 놓여 있고, 또한 그것을 수용하는 이주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상호 소통하며, 영향을 주고받으려는 욕망은 터를 잡기 어려운 것이다. 그들에게 한국은 ‘앞으로 내가 살아갈 내 나라는 아닌’ 인생의 짧은 시간을 거쳐 가는 곳으로,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만들 만남도 도구도 없었지만, 무엇보다 이야기를 남길 만한 동기도 없다. ‘뭔가를 들려주고 싶고 영향을 미치고 싶은’ 대상, 즉 “독자가 없다면 혹은 그런 출구가 없다면 그런(뭔가를 들려주고 싶은: 글쓴이) 욕망을 가질 수가 있을까요?”라고 되묻는 김 대표의 말은, 영상을 만든다는 것이 무엇인지, 영상과 삶이 어떻게 불가피하게 연루될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물음이었다. 결국, 이주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은 소외를 넘어 ‘인간으로서의 삶’을 복권시키는 것과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지구인의 정류장’을 채색하고 있는 이러한 관점은 2011년 농축산업에 종사하는 일군의 노동자들과 조우하면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원래 안산의 공장노동자들이 중심이었던 비디오 교실에 강원도에서 농축산업에 종사하는 이주 노동자들이 찾아온 것이다.
2011년 무렵에 강원도 양구에서 한 10명 정도의 노동자들이 왔는데, 여성 노동자들이 다수 섞여 있었어요. 여성노동자들이 양구에서 도대체 무슨 일을? 그렇게 의문을 가졌죠. 나중에 농촌에 속해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래? 그럼 농촌에 살 수 있어? 밤에 어두컴컴하고 아무것도 없는데? 일하는 시간, 한 달에 이틀 쉰다고 하고 그런 것들을 확인하면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더라구요. (김이찬 대표)
김이찬 대표는 당시에 그들이 처했던 상황을 ‘인신매매’라고 표현한다. 고용허가제에 따라, 주로 제3세계에서 농축산업 노동을 위해 입국하는 노동자들은 고용자와 표준화된 근로계약을 한다. 그러나 실제 노동자들은 고용자의 농장에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관리체제에서 ‘배분’되고 있었다. 근로계약서는 유명무실하였고, 노동자들은 고용자들의 편의에 따라 ‘A회사에 고용됐는데 A회사의 여동생 집에 가서 일을 하거나 B회사에 고용됐는데 사장의 부모님 집에 가서 일을 하는’ 방식으로 마치 농기계처럼 배치되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들이 처한 노동조건은 매우 열악한 것이었다. 대다수가 저임금 장시간 노동을 강요당하고 있었고, 주거지는 농경지에 붙어 있는 비닐하우스로, 씻을 곳이나 화장실이 없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문제를 제기하면 고용주들의 폭력과 폭행, 혹은 ‘너희 나라로 돌려보내겠다’라는 협박으로 돌아왔다. ‘그냥 넘어갈 수는 없겠다’라는 생각은 실질적인 해결책의 모색으로 이어졌고, 최소한 2~3개월이 걸리는 문제해결 과정 동안 갈 곳 없는 이주 노동자들을 위한 쉼터도 마련되었다.
이주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갈 작은 ‘배양실’로 시작되었던 ‘정류장’은 미디어 교육뿐 아니라, 이주 노동자들의 노동 상담을 하고, 노동자들의 인권과 노동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현장과 경찰서와 이주 노동자 센터를 뛰어다니며, 심지어 쉼터까지 운영하게 된 것이다. 미디어운동도 아닌, 이주 노동자 사회운동도 아닌, 그들의 ‘이야기’를 복원하고 ‘삶’을 회복하려는 노력이 절묘하게 결합된 ‘정류장’의 현재의 모습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지구인의 정류장’의 김이찬 대표.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해주시는 중.
▲ 이주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비닐하우스. 2명의 월세로 78만원을 요구한다고 한다.
노동자들의 휴대전화, 그들의 ‘이야기’를 실어 나르며 저항의 무기가 되다
2012년 ‘이주 노동자 투쟁의 날’은 ‘지구인의 정류장’에 또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미 많은 이주 노동자들이 SNS를 통해 소통하고 있었고, 많아야 100명 정도 모일 것으로 예상했던 노동자들은 천 여 명에 가깝게 모인 것이다. ‘정류장’은 이를 기반으로 ‘크라우드 다큐 제작단’이라는 새로운 미디어 실험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매달 한 번씩 집회를 했는데, 그 자리에서 전단지를 뿌렸어요. 유투브를 통해서 본인이 농장, 공장에서 당한 부당한 사례나 친구들에게 하고픈 이야기를 유투브로 올려 우리에게 공유해 달라고 하는 내용이었어요. 어떻게 올리는지도 다양한 언어와 유투브 영상 강의로 설명해 주고요. ‘크라우드 다큐 제작단’은 SNS 플랫폼을 통해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찍어온 푸티지들을 유투브에 올리면 기존의 미디어 제작자들이 붙어서 가공하고 첨언을 붙여서 심층다큐를 제작하는 프로젝트예요. 8월 집회 이후로 12월까지 매달 하나씩 4편을 완성했어요. 이 작품들이 열린채널에서 방영되기도 하고 시청자 상도 받고 했죠. (최종만 사무국장)
말 그대로 이주 노동자들의 삶과 노동의 현장에서 날것으로 채취된 그들의 이야기가 모이고 가공을 거쳐 다큐멘터리로 완성되었고,(*주1) 이렇게 생산된 작품들은 퍼블릭엑세스 채널들에서 방영할 뿐 아니라 여러 이주민 영화제에 출품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는 국내 영화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네팔 카트만두 영화제’에 출품·상영했을 때, 초대형 극장에서 700여명 정도의 예비 이주 노동자가 한 시간짜리 영화를 보고 세 시간씩 토론을 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한다. 방글라데시 ETV에 엑세스하기도 하고, 본국으로 귀국해 한글학교를 운영하는 캄보디아 노동자들에게 보내 예비 이주 노동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도록 한다. 미디어 운동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도 할 수 있는 유통·배급의 문제에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저돌적인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었는데, 예비 이주 노동자들이 넘쳐나는 본국, 다른 이주민들과의 소통이 중요시된다는 점도 특징적이었다.
▲ 작품명: “밥없어, 집없어, 시끄러 나가” 최우수상 수상
다른 한편, ‘크라우드 다큐 제작단’을 기반으로 2013년 오프라인 단체인 ‘크메르 노동권 협회’가 구성되었다. 주로 농축산업에 종사하는 캄보디아 노동자 100여명이 모여 시작된 이 단체는 선거를 통해 대의원을 선출하고 각종 자치·문화 활동을 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노동권과 인권을 지키기 위한 집회를 하며 노동자들을 탄압하는 캄보디아의 훈센 독재정권에 대한 항거의 뜻을 펼치기도 한다.(*주2) 2년 만에 회원은 500여 명으로 늘어났고, 그동안 ‘정류장’과 결합되어 있던 쉼터의 운영은 올해 들어 ‘협회’로 이관되었다. SNS와 유튜브, 노동자들의 휴대폰 같은 미디어와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고, 그들의 삶의 안전망이 될 구체적이고 안정된 공간이 탄생한 셈이다.
뿐만 아니다. 미디어는 노동 상담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이주 노동자들에게는 노동현장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노동권과 인권 침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효과적인 항변을 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기록’이라는, 미디어의 가장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기능은 이들이 처한 불합리한 고용상황에 저항할 수 있는 효과적인 그리고 거의 유일한 무기가 된다.
노동자들이 자기 문제를 노동부에 진정하거나 경찰에 고발할 때 언어가 안 되기 때문에 항의의 정도가 엄청나게 약해져요. 간단히 예를 들면 사장한테 포장을 잘 못한다고 포장대 모서리에다가 머리채를 잡혀서 이마가 찢긴 노동자가 있었어요. 긴급하게 출동을 해서 봤는데, 저희가 도착하는 사이에 경찰서에서 이미 이 노동자는 자해 공갈단이 되어 있더라구요. 사장은 이 사람이 스스로 자해했다고 계속 얘기를 하고, 그러면 경찰서에서는 정말로 판단을 그렇게 하더라구요. 그래서 그 친구가 항변을 하기 위해서 그 전에 있었던 다른 노동 상담가랑 통화했던 녹음했던 내용, 사장과 중간에 옥신각신 하며 싸웠던 비디오, 이런 것들이 경찰서에서 굉장히 중요한 증거로 채택이 될 수가 있었거든요. 지금 여기 오는 노동자들도 대부분 자기 노동문제나 인권문제의 항변의 증거로서 미디어를 활용하는 경향성들이 있죠. (최종만 사무국장)
“폭행하고 있는데 찍으면 난리나지 않아요?”라는 우문에 “난리 나죠. 그래도 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거 외에는 방법이 없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같은 한국인이라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폭력과 배제야 다를 바가 없겠지만, 폭행의 피해자를 쉽사리 자해 공갈단으로 만들어 버리는 이주 노동자의 현실. 폭행의 고통과 공포를 맞대면하면서, 휴대폰의 카메라를 필사적으로 쥐고 있는 노동자의 절실함과 긴박함을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정작 이주 노동자들이 대면하고 있는 것은 폭행을 행사하는 농부사장이나 그들을 비호하는 경찰들을 넘어서는 것 같다. 이는 무엇보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세계에서 이주노동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사람들은 ‘지구인’의 반대말을 외계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지구인의 반대말은 ‘세계화’, ‘자본주의적인 세계화’라고 생각해요. 저개발 국가에 무차별적으로 자본이 침투하지만 그 나라에서 경제 자본주의가 좀 더 잘 정착된 나라로 이주하기엔 엄청난 제약조건들이 따라요. 이주 후에도 정체성이 큰 변화를 겪어서, 그 나라에선 엘리트인 대학생이었을지 모르지만, 여기 오면 3D 산업에서 일하면서 매일 나쁜 공기 마시고 하루에도 몇 번씩 폭언, 폭행을 당해가는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돼요. 그런 세계화의 가장 약한 고리 중에 하나가 이주노동이라고 생각해요. 세계화를 잘 보여줄 수 있는 게 이주노동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이주 노동자 친구들과 다큐멘터리를 만들면 세계화의 문제점들을 잘 짚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최종만 사무국장)
세계화가 가속화시킨 양극화된 자본주의 피라미드에서 가장 하단에 위치한 저개발국의 노동자들. 일자리를 찾아 ‘좀더 발전된 나라’로 이주해 온 이들은, 그 자체 세계화의 귀결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세계화의 가장 약한 고리’이기도 하다. 세계화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본국에서는 엘리트 대학생이었던 사람들을 한국에서 3D산업에 종사하는 준-노예 노동자로 바꾸어 놓는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역으로 그들의 삶과 이야기는 세계화를 관통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것은 세계화에 저항하는 또 다른 통로가 된다. 세계화의 흐름을 타고 움직이는 자본이나 정보와는 달리, 이주 노동자들이 삶과 이야기를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이 그들을 세계화의 희생양에 머물지 않고, 저항의 최전선에 서게 하는 셈이다.
▲ 최종만 사무국장. 인터뷰 내내 어떤 질문에도 완벽히 정리된 깔끔한 견해로 대답해 주었다.
이주 노동자의 눈, 한국의 농촌을 들여다보는 새로운 렌즈: ‘신전원일기 2015’
이주 노동자들의 노동현장인 한국의 농촌 역시 이미 자본과 세계화의 힘들이 각축하는 전쟁터다. 한국사회의 농촌은 어느 때보다 양극화되어 있으며, 우리가 농촌이라 했을 때 떠올리는 ‘정겨운 마음의 고향’은 아쉽지만 이제 그곳에 없다.
오늘날 한국농촌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오늘 한국 농촌의 낮과 밤은 누가 지키고 있는가? 농촌에 더 이상 한국국적을 가진 젊은 일손은 없다. 잇따른 FTA(자유무역협정)체결로, 전통적인 소농은 더 이상 산업으로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한 환경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압박 속에서 농업생산자들은 수지타산을 맞추기 위해서 저임금 외국인노동자들을 고용하여야만 유지가 가능하다. 2015년 1월 현재, 약 25,000 명의 이주 노동자가 한국의 농촌에서 일을 한다. 그중 30%는 여성노동자이다. 특히 경기도 지역의 농촌은 수도권 대도시의 많은 인구에 공급할 야채와 육류의 생산지로서, 13,000 명 이상의 남녀 이주 노동자가 그들의 부모세대 혹은 그보다 나이 많은 선주민 사용자들과 함께 비닐하우스 밭에 딸린 컨테이너 하우스에서 살면서 3~9년 동안 일을 하며 살아간다. (<신전원일기 2015>의 기획안의 서두)
우리가 먹는 많은 농축산물들이 이주 노동자들의 손에서 생산된다는 사실, ‘한국 농촌의 낮과 밤을 지키는’ 것이 더 이상 한국인들이 아니라 이주 노동자들이라는 사실은, 그들의 삶과 시선이 오늘날 급변하고 많은 부분 황폐화된 농촌의 현실을 조망하는 유의미한 통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크라우드 다큐 제작단’의 보다 발전된 버전인 ’신전원일기 2015‘는 이러한 가능성을 실험해 보고자 기획된 프로젝트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고, 휴일이 있다 해도 이동이 원활하지 못한 농축산 노동자들을 주요 대상으로 하는 이 기획은 이주 노동자들이 집약적으로 거주하는 각 지역에 일정 기간 ‘농촌 미디어 스테이션’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미디어 스테이션’에서는 이주 노동자들이 직접 제작한 다큐멘터리를 모국어로 상영하기도 하고,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를 통한 미디어교육을 하며, 스스로 취재한 풋티지들을 온라인 네트워킹 및 오프라인 아카이빙을 통해 공유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2015년 한국의 농촌 현실을 해석하는 옴니버스 영화를 제작할 예정이다.
이러한 기획에 이주 노동자들을 고용하고 있는 농장주들과의 충돌은 없을까? 물론 ‘집단 반발’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란다. 그런데 반전이 있다. “그리고 항상 적은 아니죠.”라는 흥미로운 전언이 이어진다.
예를 들어, 이천 야채밭 사업장의 경우는 오히려 이주한 농부들이 많아요. 농부들이 남양주에서 땅값이 올라서 이천에 몇십, 몇백 헥타르씩 사서 하우스를 400~600개 굴리는 대농부들이예요. 조그만 치킨집 있고 찻집 있는 노동자들의 아지트 같은 곳이 있는데, 여기 자영업자들은 다 이주 노동자 편이예요. ‘새로 들어온 아무개 사장, 하우스 500개. 또 다른 아무개 사장, 하우스 몇 백 개. 이 사람들 때문에 지역 농업이 다 망했다. 대규모로 이주 노동자 써서 싼값에 유통하니까 지역소농들이 다 상대가 안 된다.’ 이런 얘기들을 실제로 하세요. 지역에 있었던 소농들은 저희가 미디어 스테이션 하게 되면 엄청나게 환호할 거예요. 또 중간관리자. 그런 대규모 대농들에서 일하는 하우스에 분반을 관리하는 반장들이 있거든요. 그 중간관리자들도 엄청나게 불만들이 많더라구요. (최종만 사무국장)
소농과 자영업자, 대농의 중간 관리자들. 변화한 농촌 사회에서 새로이 탄생한 계급, 혹은 사회적 약자로 전락한 사람들과의 연대. 척박한 노동조건에 처한 손님노동자의 손끝에서 유지되고 있는 한국의 농촌이 이 연대에 힘입어 ‘살아보고픈 곳’이 될 수 있을까. 쉽지 않을, 그러나 매우 유의미할 그 연대의 과정과 결과가 무척 궁금하다.
안산의 이주민과 원주민, 서로의 삶을 가로지르기: ‘미디어 크로스 2015’
‘신전원일기 2015’ 프로젝트가 전국 각지에 퍼져 있는 농축산업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출장’ 기획이라면, 안산의 ‘정류장’ 공간에서는 지역 기반의 마을 공동체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기획의 제목은 ‘미디어 크로스 2015 - “이봐요! 우리 함께 안산에 살아요!”’
안산 공단지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 노인미디어교육 소모임, 크메르노동권협회 문화팀과 스리랑카 공동체(반월/시화공단 노동자들 자조모임)가 함께 모여, 초보적인 미디어 교육에서 시작해서 서로의 삶을 미디어로 기록하는 ‘크로스 미디어 제작’까지 함께 한다. 예컨대, 노인이 이주 노동자를 대상으로 카메라를 들고 그들의 삶을 관찰하고 기록하여 짧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한다거나 이주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을 기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각기 다른 영역에서 지역 사회를 구성하던 주민들이, 미디어라는 매체를 통해 서로의 입장을 적극적으로 이해하고 상호간의 활발한 네트워크를 구성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안산을 거점으로 이루어지는 상호이해와 연대의 모색인 셈이다.
다른 한편, ‘미디어 크로스 2015’는 미디어 제작단을 안착시키려는 기획이기도 하다. 2012년 ‘크라우드 다큐 제작단’ 이후, ‘정류장’은 미디어 제작단이 크라우드를 통해 만들어진 풋티지들을 노동자들과 자기나라 말로 소통하면서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는, 말하자면 이주 노동자들이 완전한 주체가 되는 미디어 공동체를 꿈꾸고 있다. 단기적인 미디어 교육과는 달리, 제작단은 매우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활동을 요하고, 이주 노동자들이 처한 녹록치 않은 노동현실은 제작단의 안정된 구성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을 터다. 그래서 주로 안산과 시흥 등 보다 가까이서 일하고 직장이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으며 주말 휴일이 보장되어 정규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공장노동자들이 위주로 진행되는 ‘미디어 크로스 2015’는 미디어 제작단의 안착에 중요한 시발점이기도 하다. 이주 노동자들이 스스로의 발언력으로 미디어를 제작할 수 있고, 오래된 이주 노동자가 새로운 이주 노동자들에게 스스로 노동 상담을 할 수 있게 되면 언제든 소멸할 수 있다는 ‘지구인의 정류장’. 그러면 ‘대표님은 캄보디아 가시고~’라는 최종만 사무국장의 농담이 현실이 될 날이 올까.
지구인의 정류장, 우리는 모두 이주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꽤 흘렀다. 인터뷰 중간에 최종만 사무국장은 미디어 교육을 진행하고, 김이찬 대표는 옆 학교 운동장에서 ― 이미 선약이 되어 있었던 ― 축구를 하고 부러 돌아왔다. 가뜩이나 바쁜 분들을 너무 길게 괴롭히는 것 같아 미안했지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구인의 정류장’이라는 저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이름을 어떻게 짓게 됐는지. 가벼운 질문에 돌아온 김이찬 대표의 대답이 무척 흥미로워 다소 길지만 옮겨본다.
그건 지금 현실 상황 그리고 어떤 꿈? 이런 것들을 잘 반영할 수 있는 이름을 생각하다 그렇게 된 것 같아요. 뭔가 적극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무엇이 아니다 이렇게 빼다 보니 이렇게 된 거죠.
예를 들어서 모인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국민이나 시민은 아니예요. 그럼 이주민? 이주민이라고 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누군 이주민, 누군 이주민이 아닌 건 뭐냐? 안산이란 도시를 보면 예컨대 나는 이주민이 아니예요. 저는 익산에서 살다가 여기 온지 그 때 3년 된 사람이었어요. 지금은 7년 됐죠. 전라도에 살고 서울에도 살았죠. 금호동에서도 살았고 신길동에서도 살았고 신림동에서도 살았고 광명에서도 살았고. 여러 군데 살았단 말이에요. 그럼 안산에 사는 사람 중에 이주민 아닌 사람이 있어? 이주민 아닌 사람 있대요. 안산 주민의 3% 정도. 태어나서 쭉 사신 분들. 그렇지만 그분들도 사실은 변해가는 안산에서 사는 거죠. 다 이주민이잖아! 사실 그러니까 안산이란 도시 자체가 이주민의 도시에요. 근데 서울은 안 그런가? … 그렇담 이주민이라는 말을 굳이 강조해서 쓸 필요가 없지. 사람들이 어차피 떠돌며 사는 것이 일반적일 수 있겠다
지구의 언어가 한 5천 개 이상 된대요. 민족은 2천 몇 백 개 되고. 그런데 (유엔에서 인정하는) 국적은 200개 남짓이래요. 그런데 버마만 해도 60개 민족이 돼요. 베트남에도 소수민족이 있고, 캄보디아도 무슬림이 있고. 네팔은 성이 곧 인종 특성을 나타내요 … 그럼 ‘지구인’이라고 하는 수밖에 없겠네! 우주인이 아니라는 취지에서. 다른 무언가 문화적인 상상력이 우리한테 없잖아요. 저한테 없죠.
그 다음에 ‘정류장’. 여기는 중국 사람들이 많아서 간판들 보면 ‘뭐뭐뭐~ 중심’이라는 간판이 단 곳이 있어요. 사실은 인력소개소인데 중국 분들이 센터를 중심이라고 써요. 우리가 모여서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이것이 센턴가? 소수의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고 알고 지내면서 미디어 만드는 것에 대해서 고민하고, 그것도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고 … 이것이 과연 센터라고 할 수 있나. 센터는 아니야. 그럼 구호소야? 구호소도 아니지. 뭔가 상담을 하지만 그걸 ‘보호소’ 아니면 한국에선 이주 노동자 지원단체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지원을 한다고? 지원이 아니잖아. 스스로 해야 되고 그런 거지 우리가 지원을 하는 건 아니니까. 그러니까 센터도 아니고 지원센터도 더더욱 아니고.
그 다음에 근데 모여서 뭔가를 한단 말이지. 뭔가 특별히 강령이나 목표 같은 것들이 분명한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모여서 모여 있다가, 쉬기도 하고 쉬면서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대화도 하고, 뭐 의기투합하면 새로운 걸 할 수도 있고 싫으면 떠나갈 수도 있고 웬만큼 회복되면 또 나갈 수도 있고. 이런 정도의 분위기라면 그게 걸맞는 이름이 뭘까. 그게 정류장? 쉬어가는 의미가 있는 정류장이면 좋겠다. 어떤 의미에선 문제를 당하고 전환 국면을 가진 사람이 오는 경우가 많거든요. 한국이란 새로운 나라에 돈을 벌러 왔는데, 어떤 문제에 봉착했어. 회사가 망했다거나, 뭔가 갈등이 있는데 내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거나 … 어쨌든 그 회사를 바꿔야 해. 삶을 여행이라고 본다면, 낯선 세계에 와서 낯선 곳으로 다시 여행을 떠나게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좀 있는 거죠. 잠시 쉬면서 원기를 회복하거나 불안감을 좀 달래볼 수도 있고 … 의외의 만남이 있으면 좋은 거고. 다시 또 길을 가게 될 정류장. 그래서 ‘지구인의 정류장’. (김이찬 대표)
우주인이 아니라는 점 외에는 별반 공통점도 없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지구. 우리는 그 곳의 사람들을 국적이나 민족, 인종과 언어로 구획하고 분류하는 데 익숙하다. 그리고 그러한 구별은 늘상 차별과 배제를 수반해 왔다. 그 경계를 무화시키는 ‘지구인’이라는 명명. 끊임없는 삶의 여행에서 노곤해진 지구인들이 잠시 쉬어가며 다른 여행을 준비할 수 있는 곳, ‘정류장’. 많은 걸 비워 냈기에 많은 것을 담고 있는, 여백의 미가 느껴진다. 역시 멋진 이름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니, 밖은 이미 어둑어둑하다. 끝까지 저녁식사를 하고 가라며 친절히 응대를 해주시는데, 갈 길이 멀고 너무 폐를 끼치는 것 같아 애써 거절하고 안산역까지만 차를 얻어타기로 했다. 낮의 풍경과는 딴판인 일요일 저녁의 안산역. 상점들이 활기를 띠고, 거리에는 생전 처음 보는 과일들도 팔고, 여기가 어딘지 모를 만큼 많은 외국말들로 된 간판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왠지 모르게 올 때와는 달리 정신도 말똥거리더니만, 한 간판에서 어떤 글자가 유독 눈에 띤다. ‘~~~ 中心’. 아, 저게 센터라고 했지. 정말 중심이네. 하핫! 안산의 저녁 풍경은 여전히 낯설었지만, 모든 것이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여기, 꽤 궁금해졌다. □
*각주
(*주1) 이 결과물들은 유튜브에서 ‘stop eps(고용허가제 폐지)’라는 키워드로 검색하면 볼 수 있다.
(*주2) “크메르 노동권 협회의 역사” 참조. https://www.youtube.com/watch?v=NWoQeWpDGU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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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김형준(ACT!편집위원회)
미디어와 무관한 생활을 영위하다가 갑작스레 미디어저널의 편집위원이 된 1인. 액트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 독립다큐멘터리 제작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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