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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95호 특집] 나의 공동체, 그리고 공동체 라디오 (서울, 마포F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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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5. 10. 27.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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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95호 특집 2015.11.15]


공동체라디오 10주년 기념 기획 <내 삶의 라디오>

나의 공동체, 그리고 공동체 라디오


해영 (서울, 마포FM)



<공동체라디오 10주년 기념 기획 - 내 삶의 라디오>는 공동체라디오 운영 10주년을 맞아 각 공동체라디오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의 삶 속에 녹아 있는 공동체라디오의 역사와 의미를 되짚어보고자 기획되었다. 전국 7개 공동체라디오에서 방송을 제작하고 진행하며 라디오를 이끌어온 7개 방송국 8명의 인물이 쓴 에세이를 소개한다.



 2015년. 무한도전이 방영 된지 10년, 슈퍼주니어가 데뷔한지 10년, 던전앤파이터가 나온지 10년. 그리고 한국에 공동체라디오가 생긴지 10년이 되었다. 

 무한도전의 토토가, 식스맨, 영동고속도로가요제, 배달의 무도 특집, 슈퍼주니어의 10주년 팬미팅, 앨범발매, 던전엔파이터 10주년 이벤트를 보며 "나는 무엇을 해야 하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지?"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무엇을 했었지?"라는 의문이 들었다. 


 '공동체라디오 10주년 기념 기획, 내 삶의 라디오'를 주제로 액트에서 원고를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2008년 제58호에 실었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여전히 공동체라디오를 꿈꾸다'를 다시 읽어보았다. 공동체라디오를 안지 약 2년이 되던 해에 썼던 글. 그 때의 나는 이상을 꿈꾸는 사람이었다. 

 「지금 현실이 너무 슬플지도 모르나 나는 이런 사람들이 공동체 라디오에 관심을 두고 계속 함께 하는 한 변할 것이라 믿는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 떠나지 않는다면, '나만의 공동체 라디오'는 계속 꿈꿀 수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언젠가 꿈을 이룰 수도 있을 것 같다.」 마지막 문단에 있는 이 문장을 보면서 이제 이런 믿음이 있는지 나 자신에게 물어봤다. 이 물음의 답은, 이 글의 마지막에 쓰도록 하겠다. 





 너무 많이 이야기를 하고 다녀서 알 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아마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나를 모를테니 내가 어떻게 공동체라디오를 알게 됐는지, 왜 지금까지 하고 있는지 이야기 하겠다. 

 2007년 3월, 대학교 수업 중 하나인 「언론운동과 대안미디어」를 통해 공동체 라디오를 알게 되었다. 공동체 라디오의 역사, 현황 등을 이야기 하다가 서울에 있는 공동체라디오 중에 마포FM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서는 레즈비언 공동체가 모여서 ‘L양장점’이라는 방송을 한다고 했다. 그 때, 나는 소리와 라디오에 관심을 갖고 레즈비언 커뮤니티에서 인터넷 음악방송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 라디오, 레즈비언이라는 단어만 들어왔다. 나도 말할 수 있는 공간이 있겠다 싶었다. 


 운이 좋게도 그 때, 'L양장점' 방송을 제작하고 있는 '레주파'에서 신입 활동가를 모집하고 있었고 그 때, 지원을 해서 8년이 지난 지금까지 활동을 하고 있다. 레주파 활동가가 되고 이 공간을 알려준 선생님께 너무 고마워서 진심을 다해 고맙다는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올해, 다시 선생님께 메일을 보냈다. 


 "정말 아주 가끔. 그 때 선생님 수업을 안 들어갔다면. 이라는 생각을 하곤 해요. 그러면 공동체라디오도 몰랐고, 레주파도 몰랐고. 아무것도 모른 채로 살 수 있었을 텐데..."


 정말 이런 생각을 하곤 한다. 이 때 이 수업만 안 들어갔다면 지금의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있지 않을까? 성소수자 운동도 미디어 운동도 하지 않고, 그냥 좋아하는 연예인을 옆에서 보며 일하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만을 이루고, 그것에 만족하며 살지 않았을까. 나에게 이렇게 살라고 그 누구도 말 하지 않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일까. 


 그렇다. 나는 성소수자다. 요즘은 성정체성에 대해 많은 고민을 가지고 있지만, 그냥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 레즈비언이라고 하는 것이 서로 이해하기 편하기에 레즈비언이라고 하겠다. 


 2007년 4월부터 레주파 활동가이자 마포FM 방송활동가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7월에는 L양장점에서 레즈비언 미술가를 소개하다가 ‘보지’ 라는 단어의 사용하여 방송위원회(現,방송통신위원회)로부터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 26조 (품위유지)를 위반하였다는 통보를 받았다. 코너를 맡고 있는 활동가가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몸 교육용 'The Cunt Coloring Book'이라는 책을 설명하다가 작가의 의도를 설명하면서, 최대한 의미를 살리기 위해 이를 '보지 색칠공부 책'이라고 말했는데 이 것이 걸린 것이다.  

 심의에 걸린 뒤, 마포FM에서 사전심의를 하겠다고 했고, 여중·여고생들도 아닌데 왜 이랬냐고 여중·여고생이었으면 벌써 나가라고 했을 거라는 말도 들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정말로 그 때부터 공동체라디오를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1년을 휴학하고 관악FM에서 인턴PD를 할 만큼 분노했다. 그 분노 덕분에 지금까지 있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와 함께 L양장점 방송 활동가라는 신분으로 하고 마포FM 편성회의에 나가서 다른 프로그램 활동가들과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편성회의에 나가는 것 자체가 힘들었다. L양장점 방송활동가라고 소개하는 것이 "나는 레즈비언입니다"라고 하는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L양장점 방송활동가 우야입니다."라고 자기소개를 하면 노인 방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계신 어르신들이 "L양장점은 어떤 프로그램입니까?", "왜 이름을 말 안하고 별명을 써요? 이름이 뭐예요?"라고 물었다. 그 때 마다 "L양장점은 레즈비언 방송이에요.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들이 하는 방송이에요", "저희는 이름을 쓰면 아웃팅이 될까봐 별칭을 써요. 그런데 어르신들한테는 이야기해드릴 수 있어요. 제 이름은 해영입니다"라고 했다. 

 이렇게 답변을 했더니, "왜 자기소개를 하랬더니 취향을 이야기 하냐, 너의 취향에 대해 알고 싶지 않다", "왜 너네가 소수자냐? 너는 신체 멀쩡하고, 대학교도 다니고, 부모도 있는데 왜 소수자냐?" 등의 말을 들었다.


 편성회의를 다녀오고 나면 한없이 슬펐다. L양장점을 함께 만드는 레주파 친구들하고 있을 때는 즐거운데, 나의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어서 좋은데, 편성회의만 가면 이게 내가 살아가야 하는 현실의 세상이구나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은 사람, 착한 사람이 된다면 나를 좋아해주지 않을까? 성소수자인 나도 함께하는 사람으로 인정해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을 했다. 그래서 마포FM에 계신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노인미디어교육도 진행했고, 마포FM에서 하는 행사가 있으면 모두 가려고 노력했다. 공동체 라디오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싶어서 노력했다. 지금까지 활동하고 계시는 어르신들은 그런 일들을 다 잊은 것 같고, 지금은 나를 굉장히 좋아하시지만 또 다시 내가 지속적으로 나의 성정체성을 드러낸다면 나를 어떻게 대할 것인지 불안하다. 그런 마음과 함께 10년간 마포FM에 L양장점이 편성되어있다는 사실이 고맙다. 항상 이런 양가감정이 어렵다.  


 2013년 10월, 인천에서 마포구 연남동으로 이주했다. 3년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쉬고 있었다. 2014년 10월, 마포FM 상근자가 그만두게 되었다고 해서 8년간 나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고자, 그리고 공동체 라디오의 10주년을 잘 맞이하고자 마포FM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삶터도 일터도 모두 마포 연남이 되었다. 그 때, 나의 키워드는 '서울(마포)', '미디어'였다. 성소수자로 서울(마포)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와 미디어로 어떻게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날 것인가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변화될 나의 삶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 기대는 12월 서울인권헌장 제정이 무산되면서 산산이 무너졌다. 마을공동체종합지원센터와 마을미디어지원센터가 있는 서울에서 나는 무엇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마을에서 누구를 만나고 싶었던 것일까 혼란이 왔다. 아직까지 이 혼란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8년 전, 레즈비언 공동체를 만나서 8년 동안 레즈비언의 삶을 라디오로 이야기 하면서 수많은 성소수자를 실제로 만났다. 라디오를 통해 나의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고 그와 함께 다른 공동체와 만나는 노력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나의 목소리를 내고 그 목소리를 누군가에게 전하고 그로인해 만나고 관계를 지속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만들었기에 이런 경험을 더 많은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서 미디어 교육을 시작했다. 공동체라디오는 특정 누군가의 라디오가 아니라 모두의 라디오라고 배웠기에 모두의 라디오가 될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한 노력했는데 잘 모르겠다.


 10년 동안 공동체라디오는 정부 지원이 끊겨서 사람들이 꾸준히 일할 수 없는 구조가 되었고, 출력은 1W(와트)에서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마포FM은 마포에서 제일 높은 곳을 찾아서 송신장비를 설치했지만 마포 전역을 아우를 수가 없다. 

 「사람들이 공동체 라디오에 관심을 두고 계속 함께 하는 한 변할 것이라 믿는다.」고 했던 믿음, 이 믿음 몇 년 전의 믿음과 같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내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놀랍기도 하다. 사라진 사람들이 너무 많다. 





 성서FM에서 10년을 맞이하여 낸 책, <만만한 라디오>에서 정수경 대표님이 이런 말을 했다. 「박 박사가 성서공동체FM 10년이 정수경의 역사가 아니냐고 했는데 사실 이 말은 몹시 불편한 말이에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야. 방송국에 10년 동안 있었던 사람은 나니까. 제가 성서공동체FM의 '기억'의 역사지요. 그래서 반은 맞지요. 근데 이 기억도 한계가 많아요. 기억이란 재구성되기 마련이고 그리고 내 기억과 상대방의 기억이 다를 수 있으니. 나머지 반은 하나 마나 한 말이지만 저 혼자 어떻게 해요. 수백 명의 자원 활동가들의 역사지요. 사람이 다 다르니 성서FM의 역사도 수 백 개지요. 그 수 백 개가 모여 성서공동체FM의 역사를 만든 거지요.」 나는 이 말에 매우 공감한다. 


 지금 까지 썼던 글은 나의 기억이고, 그래서 공동체 라디오의 역사라고 할 수 있지만, 공동체 라디오는 나 이외에 수많은 사람들이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 것이 공동체 라디오의 전부라고 할 수 없다. 

 나의 20대는 모두 공동체 라디오와 함께 했다. 지금의 나도 공동체 라디오 덕분에 있다고 생각한다. 글을 마치는 것이 어렵다. 다시, 나는 공동체 라디오에서 무엇을 꿈 꿔야 하는 것일까. □


* 마포FM : http://mapof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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