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110호 리뷰 2018.07.31.]


    파도를 건너는 여성 연대, <파도 위의 여성들> 


    루론(퀴어 페미니스트)



      프랑스에는 플래닝 파밀리알(Planning familial) 이라는 섹슈얼리티 운동 단체가 있다. 얼마 전 참가한 퀴어 퍼레이드에 부스가 있기에 다가갔더니 활동가가 단체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관련해, 피임과 낙태에 관한 권리를 포함한 포괄적인 활동을 하는 단체라는 설명이었다. 낙태 문제에 관심이 많다고, 내 고향에서도 매우 첨예한 주제라고 말했다. 활동가가 출신국이 어디냐고 묻기에 남한이라고 대답하자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거기 상황 상당히 심각하더라, 하고 말했다. 정말 그렇지, 하고는 역시 씁쓸하게 웃었다. 웃을 일이 아닌데, 그가 말했다. 사실 그렇다. 하나도 웃기지 않다. 


    ▲<파도 위의 여성들(Women on waves)>(다이애나 휘튼, 2014)



      ‘파도 위의 여성들’은 네덜란드의 의사 레베카 곰퍼츠(Rebecca Gomperts)가 결성한 여성단체로, 낙태가 불법인 국가의 여성들이 안전한 임신지속중단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네덜란드에서 ‘파도 위의 여성들’은 일명 ‘낙태선’을 출항시킨다. 그야말로 파도(waves)를 타는 여성들인 셈이다. 7월 6일 서울 하자센터에서 상영한 이 단체와 동명인 제목의 영화 <파도 위의 여성들>에서는 아일랜드 등 낙태가 불법인 유럽 국가를 시작으로 전 세계를 누비며 임신중단 서비스와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이들의 여정을 담는다. 

      영화의 내용은 단순하다. 여자를 돕기 위해 바다로 나선 여성들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더 효과적인 방법을 고민하고 실행하는 내용의 반복이다. 포르투갈에서는 영해에 들어서는 걸 막는 정부의 군함과 마주치기도 하고, 폴란드에서는 “환영한다, 이 나치들아!”라고 외치는 한 무더기의 낙태 반대 운동론자들과 맞서기도 한다. 많은 나라에서 그들의 배에 오르는 여성의 사진을 찍어 신상을 유포하겠다는 협박이 쏟아진다. 그래서 레베카 곰퍼츠를 비롯한 활동가들은 TV쇼에 나서고, 성모 마리아 상에 올라가 긴급상담 전화번호 현수막을 내걸고, 유산유도제를 구입하는 요령을 지역 활동가들에게 훈련하기도 한다.


      영화 속 많은 이들이 왜 레베카 곰퍼츠가 ‘파도 위의 여성들’을 결성하고 각국에서 체포 위협과 반대 집회의 성난 얼굴들을 맞서면서까지 전 세계를 누비는지 궁금해하는 것이 놀라웠다. 그의 실행력과 용기를 흠모하고 존경하는 것과 별개로, 동기만 놓고 말하자면 나라도 주저 없이 해냈을 일이기 때문이다. 단체를 결성할 때까지 그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상상해보았다. 아마도 나는 그가 느꼈을 부당함에 대한 분노를 알고 있다. 고작 어디에서 태어났고 어디에 있느냐 따위로 당연히 누려야 할 권리를 잃는 여성들에 대한 피 끓는 마음을 알고 있다. 어떻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파도 위의 여성들(Women on waves)>(다이애나 휘튼, 2014)



      성적 활동이 왕성한 세대이다 보니 자연스레 원치 않는 임신을 한 친구들의 사연을 듣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지내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한국의 여성들이 처한 부조리에 대한 의문이 더 커졌다. 이유는 단순했다. 프랑스에서 낙태는 합법이고, 안전하고 저렴한(국가 건강보험을 가진 이들-외국인 포함-에게 무료에 가까운) 낙태 시술을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선 구글에 낙태라고 검색하면 정부가 운영하는 안내 사이트가 나온다. 한국에서는 여성의 불안을 이용해 돈을 벌려고 하는 유산 유도제 판매 브로커들의 사이트가 먼저 나온다. 그 단순하고 커다란 차이가 눈물 나게 화가 났다. 방법도 도구도 있다. 

      그런데도 왜 어떤 여성들은 생명의 위험을 무릅써야 한단 말인가? 아무도 여기에 합리적인 답을 줄 수는 없었다. 이 거대한 부조리 앞에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무력함에 잠도 오지 않았다. 그러니 어떻게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외국인 여성들에게 안전한 임신중단을 제공하기 위해 파도 위에 오른 의사를 이해하지 못 할 수 있겠는가? 프랑스가 약물 낙태에 대한 개발에 관해 공식적인 제안을 한 것이 1999년이었다. 그런데 나만 하더라도 아주 최근에 약물 낙태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조악한 프랑스어 실력을 총동원해 프랑스의 낙태 관련한 정보를 번역해 게시한 작은 행동도 레베카 곰퍼츠와 같은 동기에서였다. ‘희망을 품는 여성들이 늘어나는 것’을 막으려는 이들에게 대항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낙태를 어렵고 나쁘고 불확실하게 느끼는 여성들에게 다른 시각을 제공하는 데 보탬이 되고 싶었다. 우리가 누리는 현실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 여성의 공포를 통제하려는 이들이 만들어 놓은 시스템 때문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활동가들이 낙태를 결정하는 여성의 의지를 의심하지 않고 그들의 결정 능력을 믿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낙태 논쟁에 대한 답을 제공한다. 우리 사회에는 여성이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다는 믿음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생명과 자신의 건강에 대해 불안정한 의지와 판단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여성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몰아세운 결과가 낙태금지다. 레베카 곰퍼츠를 비롯한 활동가들은 계속해서 여성을 신뢰해야 함을 강조한다. 낙태에 관한 법률은 시스템이 여성의 판단력에 대해 보이는 최소한의 존중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파도를 타고 출항을 하기 시작해 인터넷으로 약물을 보내주고 원격상담을 하는 사이트를 개설할 때까지, 지난한 투쟁을 담고 있는 영화 <파도 위의 여성들>은 물론 답답한 운동 동기와 과정만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런 싸움을 이어갈 수 있는 희망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아니, 어쩌면 그것이 가장 주요한 메시지인지도 모르겠다. 탄자니아의 지역 활동가들은 약물로 낙태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잠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허무하게 죽어간 여성들을 떠올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운을 내 유산 유도제 구입과 관련한 정보 확산을 위한 트레이닝에 들어간다. 


    ▲ 2018.7.18. 하자센터. <파도 위의 여성들> 상영 후 레베카 곰퍼츠 강연

    ‘전 세계적 연대로 만드는 성/재생산건강과 권리’  



      상영회 이후에 이어진 곰퍼츠의 강연에서는 영화 이후의 ‘파도 위의 여성들’의 이어진 활동을 소개한다. 로봇이나 드론과 같은 최신 기술을 이용해 약물을 배포하고 위민온웹(womenonweb.org 낙태가 불법인 국가에 약물을 소포로 보내주는 레베카 곰퍼츠가 설립한 단체) 사이트의 활동 현황을 소개한다. 파도 위의 여성들의 싸움은 현재 진행형이고, 매 순간 여성의 몸에 대한 사회의 통제에 반격하는 여성들을 돕고 있다. 단적인 예로, 곰퍼츠의 강연에서는 위민온웹을 통해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한 프로라이프를 지지하던 여성 여성의 감사 메시지를 소개한다. 이들의 국제적인 연대 활동은 “다른 사람도 같은 일을 한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영화 중)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준다. 

      영화 <파도 위의 여성들>은 결국 우리가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고 줄곧 이야기한다. 한번 파도 위에 오른 여자들, 우리는 다시는 이 배에서 내리지 않을 것이다. 이길 때까지 이 물결은 멈추지 않는다. □




    글쓴이. 루론 



    프랑스에서 나태한 유학생활 중인 퀴어 페미니스트 여성이다. 동북아시아 출신 외국인 여성으로서의 위치성을 주로 고민하고 글로 옮기려 애쓰고 있다. 인권 문제 전반에 관심이 많지만 특히 여성과 소수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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