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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11호 리뷰] 산다는 것은 싸우는 것, 다큐멘터리 <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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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8. 10. 1. 1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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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11호 리뷰 2018.10.05.]


산다는 것은 싸우는 것, 다큐멘터리 <사수>


김유미(사회진보연대 활동가)



  “산다는 것은 싸우는 것이다.” 어느 여름밤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 앞 농성장에서 만난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그 문장을 체득한 사람들 같았다. 지금 하고 있는 투쟁이 승리하거나 패배하더라도 그것은 하나의 국면일 뿐, 회사의 생산 라인으로 돌아가도 매순간 싸움은 계속된다는 것을 그들은 뼛속 깊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산다는 것은 싸우는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고 해서, 각오하고 있다고 해서, 싸움이 힘들지 않다는 뜻은 아니리라. 다큐멘터리 영화 <사수>는 그 사실에 주목한다. 멀리서 보았을 때 단단하게만 보이는 유성기업 노동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들이 겪는 흔들림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한다.


  영화는 감독(들)이 처음으로 유성기업 노동자들을 만난 때로부터 시작한다. 그것은 2011년 여름 한진중공업 타워크레인을 향해 떠난, ‘깔깔깔 희망버스’라는 발랄한 이름의 집회였다. 당시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투쟁은 기존 노동자 투쟁이 취하는 다소 비장한 분위기와 달리 ‘즐겁게 웃으면서’ 싸우자는 기조를 내세웠다. 영화의 내레이션에 따르면, 그곳에서 유성기업 노동자들은 “웃지 않았”고 “그저 가만히 비를 맞고 서 있었”다. 이후 카메라는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곁에 가까이 다가가 2011년부터 2018년까지 이어진 투쟁을 기록한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싸움만큼이나 끈질기게, 그들에게 ‘정말 괜찮은지’ 묻는다. 



▲ <사수>(김설해, 정종민, 조영은, 2018)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긴 시간 맞서 싸워야 했던 대상은 바로 ‘노조 파괴’다. 갑작스런 해고나 임금삭감, 산업재해와 달리 노조 파괴는 노동조합을 가져본 적 없는 대다수 사람들이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일까. 2010년대에 대기업 핵심 부품사마다 줄줄이 노조 파괴 공작이 행해졌지만 그에 맞선 노동자들의 싸움은 유난히 힘들고 외로웠다.


  노조 파괴의 ‘공식’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회사는 창조컨설팅이라는 노조 파괴 전문 업체와 손을 잡고 노동조합을 무너뜨리기 위한 전략을 세운다. 통상적인 노동조합의 교섭·투쟁에 강경 대응을 하다 ‘직장폐쇄’라는 강수를 둔다. 공장에 노동자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용역깡패가 고용되어 폭력을 자행한다. 기존 노동조합 외에 회사의 사주를 받은 또 다른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관리자들은 각종 회유와 협박으로 노동자들을 괴롭혀 노동조합을 탈퇴하도록 만든다.


  발레오만도, 상신브레이크, KEC, 갑을오토텍, SJM 등 많은 사업장에서 비슷한 행태가 반복되었지만 정부는 그것을 묵인함으로써 조장했다. 자동차 엔진 부품을 만들어 현대자동차에 납품하는 유성기업에서도 2011년 5월부터 마찬가지의 일이 벌어졌다. 그해 가을, 유성기업의 노조 파괴 뒤에 원청인 현대자동차의 지시가 있었다는 명백한 불법의 증거가 드러났는데도 회사나 정부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이 이어지던 중, 노동조합의 대의원 중 한 명이던 한광호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16년 3월 17일의 일이다. 그는 회사로부터 두 차례의 징계와 다섯 차례의 고소·고발을 당한 뒤 정신질환을 얻어 상담 치료를 받고 있었다. 노동조합은 노조 파괴가 중단되고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한광호 열사의 장례를 미루고 다시 본격적인 투쟁을 시작한다.


  극도의 불안과 괴로움은 한광호 열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국가인권위원회의 실태조사에 따르면 유성기업 노동조합의 조합원 중 84명이 스트레스 고위험군으로 드러났다. 영화 <사수>는 투쟁의 전개를 따라가면서도, 남은 동료들의 삶과 말을 담는 데에 보다 집중한다. 이를 통해 노조 파괴가 ‘인간’을 왜, 어떻게 망가뜨리는가를 담담히 보여준다.


물리적인 폭력의 경험, 회사 안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분열, 현장에서 일하며 느끼는 매일의 긴장과 무력감은 노동자 개개인에게 켜켜이 쌓여 이상 증상을 낳는다. 카메라 앞에 선 노동자들은 자기 가족에 대한 폭력으로, 적들을 다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의 몰입으로, 모든 관계를 끊고 죽고 싶다는 자살 충동으로 그것을 경험했다고 고백한다. 그들은 자주 말을 멈추고 눈시울을 붉힌다.


▲ <사수>(김설해, 정종민, 조영은, 20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왜 노동조합을 포기하지 못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복잡한 말을 통해 드러나지 않는다. 힌트는 오히려 노동자들의 ‘웃음’ 속에 있다. 첫인상과 달리, 영화 속 유성기업 노동자들이 웃지 못하거나 웃을 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투쟁의 현장에서 강인하고 험악해 보이기도 하는 그들은, 조합원들끼리 서로 눈을 맞춰 대화하고 장난칠 때에는 이빨을 드러내며 순하고 맑은 웃음을 짓는다.


  그럴 때면, 조합원들이 노동조합을 지키는 것은 아주 단순하며 명쾌한 방향인 것처럼 보인다.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가 회사와 대등해지는 힘을 경험해보았기 때문에 그들은 지금 이 싸움에서 노조가 옳고 회사의 노조 파괴가 틀렸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안다. 죽을 만큼 괴로운데도 왜 노동조합을 포기하지 못하느냐고? 노동조합을 통해 동료들과 손잡고 부당한 현실에 맞서 싸우는 일은 그들에게 ‘살아가는 것’ 그 자체이다. 그들은 살기 위해 싸우고, 삶을 걸고 싸운다.


  2017년 2월 17일, 마침내 유성기업의 유시영 회장은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는다. 노조 파괴 행위를 부당노동행위로 인정해 사업주를 처벌한 최초의 사례였다. 유시영이 구속되고 얼마 후, 한광호 열사의 장례가 치러진다. 긴 투쟁에도 드디어 출구가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영화는 한광호 열사의 장례와 유시영의 구속-출소 후에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서울 농성장을 방문했다 돌아가는 어두운 고속도로 풍경 속에 마무리된다. 출소한 후에도 유시영 회장은 노동조합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거두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극적인 승리도 패배도 현실에선 드물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불안 속에서 싸움을 계속해나가는 것이야말로 유성기업 노동자들의 삶이고, 또 우리 모두의 삶이라고 말하는 듯이. 




글쓴이 - 김유미



사회진보연대에서 일하고 있다. 노동조합 활동가들을 인터뷰한 글과 만화를 모아 『너에겐 노조가 필요해』 라는 책을 내는 데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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