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108호 리뷰 2018.03.14.]
체념 이후의 시간
- 다큐멘터리 <공동정범>
임종우(인디스페이스 관객기자단 '인디즈')
<공동정범>의 매혹은 영화 바깥에 있었다. 관객을 스크린 앞으로 이끌어오는 가장 강한 동인은 <공동정범>이 <두 개의 문>의 후속작이라는 사실이었다. <두 개의 문>의 후일담의 재구성물로서 <공동정범>은 기획되었고, 영화에는 <두 개의 문>의 태생적 실패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욕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용산 참사 당시 망루의 상황을 말할 수 있는 철거민의 증언을 확보할 수 없는 상황에서 전복적 접근을 시도한 것이 <두 개의 문>이라면 <공동정범>은 전작 제작 당시 부재했던 당사자들을 소환하는 프로젝트다. 다시 말해 <두 개의 문>은 현실적 불가능성을 새로운 가능성으로 전환한 경우고 <공동정범>은 앞서 말한 그 불가능성을 다시 겨냥한다. 국가 권력에 의해 거세된 당사자성과 진실을 회복하려는 시도였다.
그렇기에 지금 <공동정범>의 결과가 의문스럽다. <두 개의 문>은 개봉 당시 7만 명을 훌쩍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의 오늘』에서 이승민은 <두 개의 문>의 흥행과 성공을 “영화적 사건”이라고 부른다. 그만큼 2010년대에 <두 개의 문>이 가지는 사회, 문화적 파급력은 상당했다. 하지만 2018년 1월 25일에 개봉한 <공동정범>은 2월 25일을 기준으로 1만 명의 관객도 만나지 못했다. 당연한 질문 하나가 나올 수밖에 없다. <두 개의 문>을 본 6만여 명의 관객은 어디로 갔는가. 다시 질문하자면, <두 개의 문>을 본 관객들은 왜 <공동정범>은 보지 않았는가.
물론 <두 개의 문>이 개봉했을 때의 영화 문화 환경과 지금의 상영 조건은 아주 다르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이 끝나고 진보 정권이 들어선 지금의 정치적 상황을 고려하면 오히려 <공동정범>이 <두 개의 문>보다 흥행해야 하지 않았을까. 정치적 긴장도가 일정 부분 약화된 지금이야말로 과거의 문제를 검토하고 연대를 새롭게 시작하는 시기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두 개의 문>의 관람 경험이 그 필연적 연쇄물인 <공동정범>으로 이어지지 않은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혹시 <공동정범>에 관객이 마주하고 싶지 않은 어떤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 <공동정범> | 김일란, 이혁상 | 2018
<공동정범>에는 돌출부들이 있다. 이것들은 이질적이거나 결핍되어 있다. <두 개의 문>과 마찬가지로 <공동정범>은 기존 액티비즘 다큐멘터리들과 비교했을 때 기술적 완성도가 높으며 균질적인 이미지와 사운드의 안정적인 배열로 구성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불균질적인 돌출부는 더욱 부각된다. 주목해야 할 점은 그것이 영화의 기술적, 미학적 문제가 아니라 영화가 제기하는 근본적인 질문으로 진입하는 지점이며 따라서 다분히 의도적이라는 것이다. 이는 김창수의 말 한마디에서 시작된다. 천주석을 비롯한 연대자들이 용산 참사 생존자들 내부의 균열을 고백하면서 영화는 큰 방향의 전환을 겪는다. 그러다 대뜸 김창수는 진상 규명이 대체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이 질문은 영화가 구현하고 축적한 정치적 방향성을 무력화한다.
영화 속에서 이충연은 “저는 술 먹고 어영부영하는 건 싫어요,”라 말하며 분노하거나 생존자 중 자기보다 힘든 사람은 없을 것이라 토로한다. 이 장면은 돌발적이다. 왜냐하면, 연대자들과 달리, 해당 장면 이전에 있는 일련의 이충연 관련 시퀀스에는 사적 요소가 부재하기 때문이다. 일상적인 모습과 정련되지 않은 감정 고백이 축적된 연대자들과 달리 이충연 내면의 심리를 보충하는 서사는 영화 후반에 진입해서야 등장한다. 따라서 이충연은 영화의 구조 차원에서도 이질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는 앞서 언급한 김창수의 발언을 구체화하는 사람이다.
한편 생존자들이 모인 두 번째 좌담회 시퀀스와 엔딩 시퀀스는 불안정하다. 첫 번째 좌담회의 파행 후 영화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기억과 참사 기록 영상을 대조해보기로 한다. 하지만 그곳에서 연대와 회복을 중요시했던 천주석은 두통을 호소하며 돌연 현장을 떠난다. 거기서 바로 좌담회 시퀀스는 서두르듯 종료되고 엔딩 시퀀스가 시작된다. 그리고 엔딩 시퀀스 또한 봉합에 가깝다. 선행된 갈등은 무마되고 지속적인 연대와 진상 규명 요구가 필요하다는 메시지만을 제시하며 영화는 종료된다. 엔딩 시퀀스는 특히 희망적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영화감독의 희망일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희망의 이면에는 어떤 두려움이 있다. 그리고 그 두려움은 무언가를 마주하고 싶지 않은, <공동정범>의 핵심을 외면하고 싶은 사람들의 감정과 맞닿아있다.
앞에서 <공동정범>은 스스로 정치적 방향성을 수정한다고 하였다. <공동정범>은 진실의 복구라는 사회의 기대와 요구를 기각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다. 하나는 참사의 트라우마가 수감 철거민들의 정서를 완전히 뒤틀어버렸다는 점이다. 철거로 종결된 운동의 실패, 동료의 죽음, 범죄자라는 낙인으로 인해 회복할 수 없는 절망감에 그들은 빠져있다. 다른 하나는 본래 기억하기가 온전히 신뢰할 수 없는 기술이라는 점이다. 물리적으로 사라진 용산, 참사의 트라우마 그리고 불완전한 기억은 참사의 규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영화는 이 사실 혹은 불가능한 사태의 구조를 드러내는 것으로 작업의 정치성을 전환한다.
사람들이 트라우마를 말할 때 간과하거나, 애써 간과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은 절대 사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이다. 트라우마는 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진실은 생존자들에게서 찾을 수 없으며 그들에게 완전한 기억의 복구를 요청하는 것은 폭력이다. 어쩌면 참사를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을 떠난 여섯 명의 희생자가 유일할지도 모른다. 이 실패가 <공동정범>이 제기하는 문제의 중심에 있다. 다만 몹시 고통스러워 우회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 이충연은 이를 직시하고 있다. 그렇게 그는 체념한다. 체념은 절망과 닮아 있어 연대를 중단시키거나 운동을 단절시킨다. 그렇기에 외면과 회피의 대상이었으며 대의라는 이름 앞에 삭제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이 체념의 정서를 표면화하고 대의를 재설정한다. 덧붙여 말하건대 영화가 시도하는 대의의 수정은 제작 주체인 성적소수문화인권연대 연분홍치마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한다. 그들은 <공동정범>을 통해 체념 이후의 시간을 질문하고 있다. □
글쓴이 임종우
학교에서 영상기획을 전공했다. 서울독립영화제2016과 서울국제뉴미디어페스티벌2017에서 관객심사단으로 활동했고 이를 계기로 지금은 한국 독립 다큐멘터리를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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