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107호 리뷰 2017.11.22.]
우리가 다시 함께하기 위한 질문들
- <누에치던 방>(이완민, 2016)
손시내(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원)
<누에치던 방>의 한 장면에서 어떤 영화의 포스터가 잠깐 스쳐지나간다. 미희가 익주의 일터를 둘러보던 중 어느 옛날 영화의 포스터를 보고는 “제목이 좋네요.”라고 하면, 익주는 그 말을 수긍하지만 자신도 그 영화를 보지는 못했노라 대답한다. 그 영화는 이만희 감독의 1974년 작 <태양 닮은 소녀>다. 이 짧은 장면은 그다지 크게 인상적이지도 않고 이 영화의 제목은 다시는 등장하지 않으며 심지어 해당 장면에서조차 누군가의 입을 통해 그 제목이 말해지는 것도 아니다. 당연히 우리는 영화에서 제시된 정보만으로는 <태양 닮은 소녀>라는 영화의 내용도 알기 힘들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장면이 자꾸 생각난다. <누에치던 방>의 감각이 어딘지 ‘태양 닮은 소녀’라는 표현을 닮아있다고 느끼기 때문일까.
<누에치던 방>은 내용을 정리하기 어렵고 종종 불친절하며 예민한 영화다. 시간과 공간의 정보를 정리해보려 애쓰거나 인물들의 교차점을 찾아 이어보려고 노력할 때마다 그러한 노력들은 미끄러지고, 영화의 인물들은 마치 그런 우리를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것 같다. 대신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이 영화는 머릿속에 정리된 내용이 아니라 몸 어딘가에 남아있는 감각으로 기억되고, 그건 겨울의 햇살을 바라보고 느낄 때의 감각과 비슷하다. 문득 추운 겨울에 따사롭게 내리쬐는 햇살을 떠올려본다. 그때의 공기는 낮고 느리며 고요하고 조용한데 어딘지 이상하게 분주하다. 그런 햇살 속에 있는 건 기분을 우울하게도 했다가 들뜨게도 하고, 그때의 느낌이란 따뜻한데 동시에 차갑기도 한 것이다. 처음 옥탑방에 도착한 미희가 물끄러미 바라보던 방에 무심히 떨어지던 햇살, 혹은 유영이 눈이 멀어버릴 것처럼 쏘아보던 그 햇살. 어쩌면 이들이 닮고 싶어 했는지 모를 그런 햇살. 너무나 풍부하지만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햇살. <누에치던 방>은 그런 기운을 닮아있다. 혹은 그런 모순되고 기이한 에너지가 이 영화를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 <누에치던 방>(이완민, 2016)의 한 장면
거칠게나마 영화의 순서를 따라가 보면 이렇다. 채미희(이상희 분)는 10년째 고시생으로 살고 있는데 어느 날 전철에서 마주친 여학생의 뒤를 따라 도착한 집에서 조성숙(홍승이 분)을 만나며, 다짜고짜 성숙을 오래전 헤어진 단짝친구라고 부른다. 성숙은 미희를 ‘모르는 여자’라고 여기면서도 미희가 주장한 관계를 받아들이는데, 여기에는 성숙이 오래전에 헤어진 단짝친구 유영(김새벽 분)의 문제가 얽혀있다. 이들 주변의 남자들 김익주(임형국 분)와 오두민(이선호 분)도 갑작스러우면서도 친밀한 방식으로 미희와 성숙을 만난다. 관계의 진전과 혼란 속에서 미희가 묻어두었던 ‘단짝친구’ 근경(정원 분)의 모습이 떠오르고 미희는 근경을 다시 찾기 시작한다. 영화는 이러한 관계와 기억의 정보들을 의도적으로 흩트리거나 의심을 심어두는 방식으로 보는 이들을 혼란스럽게 하지는 않지만, 점차 드러나는 과거나 의문스러운 대사들이 서로를 꼭 붙들어 정돈된 이해로 이끌지도 않는다.
이 이상한 경로를 설명할 수 있는 말들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수많은 의문들이 고개를 든다. 어디까지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며 또 무엇은 상상이거나 꿈인지, 이 인물과 저 인물은 과연 동일한 인물인지, 종종 끼어드는 모호한 대사들의 정체는 무엇인지 영화 안에서는 좀처럼 해명되지 않는다. 이런 의문들도 있다. 현재의 시간에 출몰하는, 유영과 같은 얼굴을 한 여학생은 누구이며 왜 성숙과 익주는 그녀를 보고도 당황하거나 놀라지 않는 걸까. 혹은 내내 누군가의 기억을 통해서만 등장하던 유영이 아버지에게 혼나는 장면에서 그 누구의 회상도 아닌 형태로 외롭고 쓸쓸하게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가 주인공이라 믿으며 따라가고 있는 인물들의 선택과 말들도 이해하기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이들은 왜 우리가 의아하게 생각하는 어떤 일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사소한 일들은 유독 견디지 못하는 걸까. 영화는 여기에 대답을 제시하는 대신 그 모든 의문과 답답함을 한 몸에 담아버리는 쪽을 택한다. <누에치던 방>은 동시에 떠오르는 인물들의 정서와 기억들을 끌어안고, 어디로 향할지 모를 위험을 무릅쓰고 그 위태로움을 동력삼아 지금의 자리와 모양에 이르러있다.
인물들의 곁에 더 가까이, 영화에 더 솔직히 접촉하기 위해 어떤 문을 두드려 봐야 할까. 영화의 주인공들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관계의 단절을 겪고 제자리를 맴도는 현재의 시간을 살고 있다. 점차 궁금해지는 것은 영화에서 명확히 제시되지 않는 사이의 시간이다. 익주가 속한 세미나, 성숙이 진행하는 토론, 미희가 가끔씩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 내용을 들어보건대, 이들은 모두 과거에 사회운동 혹은 학생운동이라 부를만한 활동의 가운데나 언저리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사이의 시간 속에, 흔적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운동의 역사는 뻣뻣한 말들로만 존재하고 집회의 경험(혹은 참여하지 않은 경험)을 의미화 하는 정리된 말들은 결코 미희의 마음이 놓일 자리를 마련해주지 못한다. 변화는 실망을 부르고 어떤 활동들은 그때 그 시절에 박제되어 버린 것만 같다. 그와 같은 활동들이 사실은 ‘함께’ 존재하기 위한 것, ‘우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기억한다면 어쩌면 이들은 두 번의 실패를 겪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갑작스레 단절된 관계 이후에도 공동의 경험을 안고 사는 일은 힘겹고 지난하다.
▲ <누에치던 방>(이완민, 2016)의 한 장면
그러나 끊임없이 대면해야 하는 슬프고 괴롭고 권태로운 현재의 시간 속에서, 이들은 ‘함께’를 포기하거나 ‘함께’가 실패한 시간에 유폐되지 않고 무언가 다시 시작해보려 한다. 돌발적인 말과 행동으로, 때로 잔인하고 이기적인 선택으로 결국 이제 와서 함께가 가능한지 모르겠다는 말에 부딪칠 때까지 용기를 내보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 반복되는 성숙의 제스처가 있다. 그녀는 종종 한 겹씩 옷을 벗는다. 얇은 티 한 장이 남을 때까지 두꺼운 겉옷을 벗는 그 행동은 종종 말을 대신하고, 누에치던 방이라는 영화의 제목을 떠올리게도 한다. 과도하게 상징화 되지는 않지만, 옷을 벗는 행동자체가 주는 조용한 활동성이 반복적으로 영화에 새겨진다.
이 모든 파동의 시작이 유영의 얼굴을 한 여학생의 등장으로 비롯되었음을 상기하고 싶다.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의 이름을 김유영이라고 밝힌 그녀는 운동장을 돌고 있는 버스로부터, 과거 유영의 죽음으로부터 시간적 공간적 거리를 당겨 현재에 당도한 불가해한 인물이다. 그녀를 보고 미희는 과거를 떠올리며 그로 인해 촉발된 행동이 성숙과 익주에게 유영의 자리를 묻는다. 이곳저곳에서 함께가 넘쳐나지만 그 함께의 버거움은 묻지 않는 시간. 그게 사실은 버겁지 않냐는 부끄럽고 솔직한 질문. 겨울의 태양을 쏘아보던 소녀 유영을 다시 불러내 그 질문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누에치던 방>은, 좀처럼 모아두기 어려운 여러 개의 마음들과 개인의 좌절과 무력함까지도 제대로 만져주고 포함할 수 있는 ‘함께’가 절실히 필요한 때에 우리 곁에 와있다. 이 영화의 예민하고 모순된 감각은 그 자체로 영화가 꿈꾸고 도달하고 싶은 ‘함께’를 향해있다. □
글쓴이 손시내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에서 활동하며 영화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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