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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22호 돌고돌고돌고] 未濟 : 꼬리를 적신 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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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22호 / 2005년 6월 30일 

未濟 : 꼬리를 적신 여우
 
金 土 日 ( 22세기형 엔터테이너, www.449project.com )
 
돌이켜보면 레코드의 테크놀로지가 변할 때마다 우리의 음악 사회도 그에 조응하여 상당한 변화를 겪어 왔음을 깨닫게 된다. 기술의 변화에 조응하는 사회의 변화라는 것이 물론 음 악 사회만의 별난 특징은 전혀 아니다. 하버마스라고 하는 독일의 유명한 학자가 말하길, 효용성이나 생산성이 윤리적 가치를 배제하고 핵심적인 의사결정의 지침이 될 때 기술은 사회의 변화를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런 것을 일종의 기술결정론이라고 했던가. 기술결정론의 시각이 긍정적이었든 아니면 부정적이었든 간에 음악사회 변화의 정 말이지 많은 부분들은 기술적 변화 과정으로부터의 인과관계를 통해 해명될 수 있다. 심지 어는 텍스트 자체와 창작자의 머릿속 복잡한 생각들까지도 말이다.반면에 재미있는 것은 음악 테크놀로지 발전의 목표가 언제나 하나의 방향이었듯이, 즉 보 다 쉽게, 보다 편리하게, 보다 실감나게 음악을 듣기 위함이라는 불변의 목표가 있었듯이 그에 따르는 여러 가지 음악 사회적 변화들도 특정한 방향성을 띠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리고 그 변화의 흐름은 직선적인 방향과 나선적인 방향을 두루 표출해 왔다.
뮤지션의 사회적 지위에 관해 이야기하자면, 음반이나 방송과 같은 새로운 음악 미디어의 등장 덕택에 뮤지션의 사회적 처지는 크게 개선되었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전파력을 지닌 미디어들의 등장으로 뮤지션들은 더욱 많은 청중들을 손쉽게 상대할 수 있게 되었고 더욱 많은 팬을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스타가 되었으며 스타는 더 이상 ‘재주넘는 곰’ 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재주넘는 왕서방’에 가까운 존재로 변모하였다. 우리나 라의 경우에도 음반이 대중화 되어 나가면서 가수들이 스타가 되자 사람들은 오랜 세월 동 안 홀대해 왔던 ‘무대의 천한 계집’들을 비로소 ‘여류 명사’로서 대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현대에도 강화되고 있다.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도구의 발전으로 뮤지션과 청중들 사이의 소통 거리가 점점 더 좁아지는 추세가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라면 가수들의 처지가 지속적으로 상승하는 발전 방향 역시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존속하게 될 것이다.
Hi-Fi에 대한 청각적 기준도 거시적 차원에서의 상승을 거듭했다. 20세기 초반의 SP레코드 의 음질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1945년에 ‘환상의 해상도’로 세계를 놀라게 만들었던 데 카의 FFRR(Full Frequency Range Recording) 레코드 역시 기껏해야 12,000Hz 정도의 해상 도로 아주 저열한 카세트의 음질에도 이르지 못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이 정도의 해상도에도 ‘이 세상의 모든 소리(Full Frequency)’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니 당시의 그 누구라도 레코드를 들으면서 그걸 실제 라이브 음악의 질감과 비교를 하 려 했다면 그때는 아도르노와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역으로 천하의 아도르 노라 하더라도 요즘의 Hi-Fi 환경에서 레코드를 들었다면 아마 그때와는 다른 말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단순한 수치를 토대로 CD나 MP3의 44,100Hz라는 해상도가 15,000Hz 전후의 해상도를 지니고 있던 LP보다 무조건 좋은 음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러나 192,000Hz의 해상도를 예고하고 있는 차세대 오디오들에 이르면 LP와의 소모적인 음질 논쟁도 거의 마감될 것으로 보이며 Hi-Fi에 대한 청각적 기준 역시 또 한번의 커다란 상승을 이루어낼 것으로 여겨진다.
앞의 이야기들이 ‘비교적 직선적’인 변화 과정을 논하는 것이었다면 다음의 이야기들은 ‘비교적 나선적’인 변화 과정에 대한 것들이며 이 책에서 여태까지 중심적으로 다루었던 내용이기도 하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주장과 진보한다는 주장이 공존하는 것처럼, 오늘날의 음악적 환경을 둘러싼 많
은 논란들은 지난날의 경험을 반복하고 있으며 또한 지난날의 경험은 그 말미에 대중들의 권리가 향상되는 쪽을 향해 걸어간 발자취를 역사라는 이름으로 기록해 두고 있는 것이다.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대표적으로 라디오가 그렇다. 오늘날 등장하여 수많은 논란을 낳고 있는 ‘온라인’은 지난날 ‘온에어’에서 벌어졌던 논란이 나선형의 운동을 통해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지금 온라인에서 흘러 다니는 음악들을 두고 일부 사람들은 ‘불법’, ‘공짜’라는 딱지를 붙이기에 여념이 없지만 라디오와 TV의 음악에 대해서 이제는 아무도 불법과 공짜라는 비난을 퍼붓지 않는다. 지난날 오랜 논쟁과 다툼 끝에 공짜 음악을 허용한 결과 대중들이 음악적 풍요를 얻게 되었음은 물론 뮤직 비즈니스도 더 비약적인 성장을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카세트의 경우도 그랬다. 앞에서 살펴보았다시피 MP3의 이마에 찍혀 있는 ‘불법복제’라는 일방적인 낙인은 과거 카세트에게 찍혀 있던 바로 그 낙인의 ‘복제품’이다. 음악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소비자들의 자유로운 편집과 소규모 비상업적 유통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었고 업자들은 그러한 테크놀로지에 족쇄를 채우기 위해 다양한 린치를 가하고 근거 없는 비난을 퍼부었으며 ‘불법’복제라는 검붉은 낙인을 찍어댔다. 그러나 카세트의 덕택에 일국적 차원에서는 언더그라운드가, 지구적 차원에서는 비서구 세계의 음악이 성장할 수 있었다고 했다. 카세트에 대한 기억은 자유로운 복제가 결과적으로 다양한 음악의 생성과 발전을 통한 전 지구적 음악적 풍요를 가져다 준 것임을 말해 준다.
지난날을 잘 돌아보면 남다른 혜안을 지녔던 뮤지션들과 음악 업계 종사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대개 당시의 레코드 미디어 및 각종 음악 관련 테크놀로지들을 잘 이해하고 그 흐름과 훌륭한 조화를 이루어낸 이들이었다. 지금 우리에게는 어떤 혜안이 필요할까. 지난날 우리의 먼지 뽀얗게 쌓인 기억 속에 그 해답이 있다. 과거 라디오의 역사를 기억해내면 오늘날 온라인에 대한 현명한 해법이, 카세트의 역사를 생각하면 오늘날 MP3에 대한 현명한 해법이 무엇인지를 대강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거시적으로 볼 때 역사의 진보 혹은 대중들의 풍요로운 삶의 확장이라는 직선적인 흐름에 거스르지 않고 조화를 이루는 일에서부터 시작되는 것, 그것이 그 해법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터이다. 이러한 출발점의 선정은 돌고 도는 역사 덕택에 가능한 것이며 돌고 도는 역사는 우리의 시행착오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옆에서 계속 도와줄 것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항상 돌고 돌아감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늘 반복되어 왔다는 것을 모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은 일들이 망각 속에서 반복되곤 한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것마저도 돌고 도는 것이려나. (-_-;)
p.s> 레코드 산업과 미디어의 갈등을 둘러싼 이모저모를 살펴보았던 <돌고돌고돌고> 시리즈는 전체 내용을 주마간산 격으로 갈무리해 본 이번 편을 끝으로 마무리할까 합니다. 미디어 운동과의 호흡과 긴장을 지속할 수 있는 다른 글감이 얼른 떠올라서 <액트> 독자 여러분들과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 상향~ (_*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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