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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30호 인터뷰] '전철원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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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6. 8. 16.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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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30호 / 2006년 4월 2일

'전철원 씨'
 
허경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 기획간사)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내가 처음 그를 만난 게 언제였는지. 
내가 그와 통화할 때 '전철원 동지'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의 첫 만남과 분명 연관이 있을 텐데 왜 그렇게 부르게 됐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동지'라는 말이 좋은 뜻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널리 통용되는 건 아니니 이 글에서는 우선 '전철원 씨'라 하기로 하고... 
몇 번의 시도 끝에 드디어 만나 얘기를 시작하기 전, 그것부터 물어볼 걸 그랬다.

"...학생운동 하다가... 학교 그만두고... 군대 갔다 와서... 일하다가...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고... 문화예술운동에 대한 세미나부터 했지요..."
'영상을 왜 시작하게 됐어요?'라는 내 첫 질문 - 지금은 다른 질문으로 대체되었으면 하고 생각하는 - 에 "운동하고 싶어서."라는 짧은 대답에 이어 전철원 씨가 답한 내용이다.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아' 문화예술운동을 고민하던 그는 노동자영상사업단 희망이라는 전문제작단체에서 1년을 보내게 된다. 수습기간이 시작된 바로 다음 날부터 거의 매일 노동현장, 그러니까 투쟁의 현장으로 카메라를 들고 나갔던 그는 영상촬영과 편집기술을 익혔다.


왼쪽에서 세 번째가 전철원 씨

"영상 관련된 거 말고 희망에 있으면서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었죠. 현장에서 노동자도 많이 만나고, 또 그 때 사무실을 꽃다지하고 같이 썼거든요.."
현장노동자와 문화활동가들과 함께 생활하며 영상제작기술을 습득한 후 다시 인천으로 돌아간 그는 인천노동문화제의 일을 했고, 당시 대우중공업 노래패 '노둣?리'의 10주년 기념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노둣?리에 대한 극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지역을 기반으로 본격적인 영상운동을 시작했던 계기가 된 이 작업은 '전철원의 결정적 작업'이었던 듯 했다.
"처음 내가 책임지고 했던 거라 겁도 났어요. 많이 배우기도 하고... 시나리오, 연출, 촬영, 편집 등은 거의 내가 했지만 노래패분들과의 공동작업이었어요. 배우도 직접하고 배우하던 사람이 마이크들고 녹음도 하고, 촬영도 함께 하고... 본인들의 이야기를 스스로 직접 만드니까 작업하면서도 너무 즐거워들 하더라구요. 상영할 때는 폭발적이었죠. 다들 너무 좋아하고... 자기들의 이야기는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죠."
첫 작품을 통해 전철원씨가 얻은 것은 흥행대박과 지역의 활동기반 뿐이 아니었다.
"노동자영상, 노동자영화는 노동자 스스로 만들가야 될 것 같아요.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당장 제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단은 노동자영상을 즐기는 사람, 그러니까 영상을 즐기는 노동자들이 많아져 할 것 같아요. 그런 풀들이 넓어지고, 직접 만들게 되고 그래야 진짜 작품성 있는 노동자영상들도 나올 수 있을 거고, 제작할 수 있는 조건들도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노동자의 문화로서 노동자영상(영화)이 필요하다는 노동자영상활동가의 신념까지 얻었으니 첫 작품은 완전대박. 
대세를 몰아 13회 인천노동문화제를 기록하는 공동작업(영상물 보기)을 통해 또 한번 대박을 터뜨린 후 다른 영상활동가들과 함께 노동자의 문화로서 노동자영상을 고민하는 틀인 '노동자영상패' 창립의 준비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공동작업실의 형태로 시작한 노동자영상패 '씨'(http://www.ilsee.net/)는 2001년 대우자동차구조조정저지투쟁 기간에 지역문화실천단 활동을 통해 지역주민을 만나면서 투쟁과정을 기록한 '돌아가리라!'(영상물 보기)라는 영상을 제작했으며 제1회 노동자영상교실 '카메라 한 대 달랑 들고'를 진행했다.
지역에 기반을 두고 노동자의 투쟁과 함께 하면서 영상을 직접 제작하고 노동자들을 상대로 제작교육까지 하면서 회원들을 확대해가는 노동자영상패 '씨'의 활동상을 듣고 이 정도면 노동자의 문화로서 노동자영상을 만들어가기 위한 훌륭한 활동이라 생각하고 있던 차에, "2003년 무렵에는 영상패의 존재목적에 대해 다시 고민했었다..."고 하시더니, "영상패에는 전문창작자만 모인 것이 아니니까... 영상미디어만, 제작하는 것만 강조 할 수는 없는 것 같아요. '패'라는 것으로 묶여서 함께 할 수 있는 것, 함께 할 수 있는 일상활동이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됐죠. 그래서 내부 소모임을 꾸려서 관심분야를 공부하고 내부 상영회도 하고 있어요. 노동영화정기상영회는 씨의 차원에서 따로 계속 하고 있고..."하시니, 문화패로서 영상패라는 것이 의미가 있는 만큼 쉽게 만들어갈 수 있는 활동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수 배운 김에 몰아서 조언을 구하자 싶어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의 전망'에 대해 물었다. "노동자 영상교육하면서 장비부족한 게 너무 아쉬웠었는데 미디어센터에 대한 얘기를 접하면서 정말 필요하겠구나 생각했어요. 그 과정에서 인천미디어센터도 고민하게 됐고요. 또 퍼블릭엑세스운동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제작할 수 있는 풀이 역시 부족한 게 문제였죠. 그래서 지역에서는 퍼블릭엑세스를 '공동체'라는 것으로 접근해야 할 것 같아요. 이런 공동체들을 상대로 교육도하고 스스로 공동체의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바탕으로 엑세스하고... 그런 공동체들이 많이 만들어지면 지역의 공동체방송국도 만들 수 있겠지요. 이런 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닐 거고 지역의 특성에 맞게, 지역운동의 조건에 맞게, 각 공동체의 특성에 맞게 차근차근 준비되어야 할 거고요..."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도 비슷한데... 전국성의 획득을 위해서는 지역의 구체성이 있어야 하고 그러한 것을 바탕으로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가 있을 수 있겠죠. 그리고 전국적인 차원에서 풀어야할 사안들을 풀어갈 수 있을 거고요. 
그렇다고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고, 현재는 지역을 중심으로 만들어져 온 과정이 아닌 거였으니까 지역주체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조건이라도 그 수준에서 동의할 수 있는 것들을 중심으로 해나갈 수 있을 것 같고, 지역주체의 성장, 지역활동의 성장을 함께 고민해나가야 겠죠. 또 그렇다고 지역주체가 자연적으로 형성되고 성장되기를 기다릴 순 없을 테니 지역을 어떻게 지원하고 성장시킬 수 있을 건지를 고민하는 것이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의 활동이어야 겠죠. 뭐 예를 들어 올해는 이 지역의 성장을 위해 집중지원한다.. 뭐 이런 식의 방식도 있을 거고요. 아직은 미디액트가 어느 정도 역할을 해야 하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미디액트에 과부하가 걸리는 것도 있고 장기적으로는 지역활동을 중심으로, 전국미디어운동네트워크만의 활동력이 생겨야 할거고요..." 
음... 묻길 잘했다, 묻길 정말 잘했다고 생각했다.

첫 질문이 그랬듯이 내 마지막 질문도 구태의연했으니,. 앞으로의 활동계획은요? --;
"인천미디어센터설립이 지금 보류 상태라서 영상패 씨 활동에 중심을 둬야 겠지요. 그래도 인천미디어센터설립추진위가 해산한 후에 인천미디어운동네트워크를 준비하고 있어요. 미디어센터에 대한 준비도 그 차원에서 고민하고 있고요. 또 노동문화예술운동과 미디어운동이 어떻게 만나고 같이 성장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어요. '인천지역 문화실천단'이라는 단위에서 미디어운동과 함께 노동자문화예술운동의 전략적 마인드를 만들어가자는 문제의식을 던져서 함께 고민하려고 하고 있고요"
오호~ 고민이 더 진행되면 좀 배워야 겠다 싶어서 내심 좋아하고 있었는데 "
“뭐, 노동자영상을 해야죠. 노동자영상이 뭔거 같아요?"
갑자기 물으셔서, 난 망설이고 있었고, 
"소통을 형성해 내는 것이 노동자영상인 것 같아요. 자본의 영상은 그냥 무조건 이거 사라, 소통 같은 건 없이 무조건 이거 사라고만 하잖아요... 그런 게 노동자영상인거 같아요."

인천의 주안산업단지 안에 있는 노동자영상패 씨의 사무실을 나와 휑한 길거리를 걸어 전철역으로 오면서 내가 '전철원 씨'를 '전철원 동지'라고 부르게 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고, 이미 그게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도 생각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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