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ACT! 31호 인터뷰] 오이완 람 - 홍콩 사회운동과 인터넷 대안 미디어

이전호(78호 이전) 아카이브/인터뷰

by acteditor 2016. 8. 16. 13:56

본문

 

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31호 / 2006년 5월 3일


인터뷰: 오이완 람 - 홍콩 사회운동과 인터넷 대안 미디어





조동원 (독립미디어 활동가, jonairship@gmail.com)






* 인터뷰 필자주: 지난 3월 31일과 4월 1일에 진행된 참세상의  국제포럼, "변혁의 세계화와 대안미디어 - 미디어, 민중의 꿈을 품다"에 참가한 홍콩의 진보적 인터넷 미디어 [인미디어] 활동가 오이완과의 이 인터뷰는 위키를 통해 영문으로 진행되었다. 영문은 이 위키에서 볼 수 있다: 인터뷰 원문 보기




1. 어쩌다가...

1.1. 오이완(Oiwan Lam)! 당신은 진보적 인터넷 미디어인 "홍콩 인-미디어"(in-media HK, 香港獨立媒體)에서 미디어 활동을 하고 있다. 어떻게 이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나? 그 전에는 무슨 일을 했나?
 

 2006년 4월 1일 참세상 국제포럼에 참여한 모습
* 오이완: 대학을 졸업하고 나는 3년동안 주류 미디어의 기자로 일했다. 그 일을 그만두고 ARENA라는 시민사회단체에서 또 3년을 일했고, 이후 대만으로 건너가 "인터-아시아 문화 연구"라는 저널 일을 2년간 했고, 북경의 청화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밟았다.
북경에서의 인터넷에 대한 통제는 아주 심각한 수준이었다. 인터넷을 통해 홍콩의 소식들을 접하기가 무척 어려웠고, 나의 모든 이메일은 검열(filter)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인터넷에서는 게시판(BBS)과 같이 공공영역의 기능을 하는 수많은 공간들이 등장하였다. 또한, 사회적 소프트웨어[공공적 소프트웨어, 자유소프트웨어 등]는 개인들 간의 연계망을 정보 공유 네트워크 혹은 네트워크 조직으로 확대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런 경험을 통해] 나는, 다시 홍콩으로 돌아오기 1년 전쯤에 홍콩에서 독립적 인터넷 미디어를 만들어야 겠다는 결심을 했다. 2004년, 7월 1일 민주화 시위가 있은 이듬해, 운동 조직들이 향후 홍콩 민주화 운동의 미래를 탐색하기 위한 평가 토론회를 열었고, 이 자리에서 몇 명의 활동가들이 구체적인 제안을 던졌다. 하나는 홍콩 민중 라디오 방송국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미디어(inmedia)를 위한 아이디어였다. 이를 수행할 작업팀이 꾸려졌고, 나도 그에 참여하여 일하면서 인미디어(inmedia)의 창립 회원이 되게 되었다.
대학시절부터 해서 인미디어(inmedia) 활동을 하기 직전까지 나는 대안적 출판 활동을 해왔다고 할 수 있다. 인미디어(inmedia)의 여러 편집 활동가들도 독립적인 출판 미디어 활동에 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1.2. 미디어 활동은 "홍콩 인-미디어"(in-media HK, 香港獨立媒體)만 하고 있는가? 그 외의 다양한 사회운동 현장에서 관심을 갖고 있거나 실제로 하고 있는 일은 없나?
* 오이완: 나는 특정한 사회운동 조직에서 활동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학생운동이나 지속적인 대안적 출판 활동을 해오면서 여러 다양한 조직들과 연대해왔다.
 
 

2. 홍콩WTO투쟁

 2.1. 2005년 12월, 자유무역의 도시 - 홍콩에서 WTO 각료회의, 그리고 그 반대투쟁이 있었다. WTO 사무국이나 홍콩 정부는 그런 의미에서 홍콩을 잘 선택한 듯 하다. 대부분의 홍콩 민중들이 자유무역으로 고통 받지는 않으므로... 물론, 홍콩이 그렇게 되기까지 엄청난 고통의 역사가 있겠지만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홍콩에 살지 않는 우리가 알아야 할 홍콩 민중의 역사는 어떤 것인가?* 오이완: 이 곳의 민중들도 신자유주의 세계화로부터 고통을 겪어왔다. 하지만 진보적 운동 진영은 이러한 민중의 고통을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유기적으로 연계시키는데 실패했다.홍콩은 이주민 사회다. 1950년대 이래 중국 본토의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기 위해 홍콩으로 넘어 왔다. 하지만 이주노동자들은 홍콩에서 자기 가족들을 먹여살릴 만큼 돈을 벌지 못했고,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을 다시 중국의 남부 농촌지역으로 이주시켜야만 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고령화와 경제적 구조조정을 맞으면서 홍콩 정부는 가족들을 재결합시키며 이주하도록 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 이주민 가족들의 남성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잃게 되었고, 그들 중 일부는 이주노동자들을 착취하기로 유명한 남부 농촌 지역의 작은 공장들에 평생 모은 돈을 투자하기도 했다. 중국 본토에서 이주 온 이 사람들은 60 - 70년대부터 홍콩 개발을 위해 가족들의 행복을 희생하였음에도, 홍콩 사회에서 차별을 받고 있다. 그들의 삶의 역사는 전지구적 노동분업의 결과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홍콩에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1990년대) 홍콩 정부는 홍콩의 자본가들과 결탁하여, 정부 자금을 투자해 주식시장을 살리면서 기업들의 파산을 막아주었다. 이후로 정부와 자본의 유착은 보다 노골화되었다. 공공 서비스는 사유화되기 시작했고, 정부는 사회복지 예산을 삭감하였으며, 교육과 의료에 대한 부분적인 사유화를 포함한 "개혁" 의제들을 추진하였다. 2004년, 어처구니 없게도 유산계급과 무산계급 간의 소득 격차가 극에 달하는 때에 상속세를 폐지해 버리기도 했다.
다시 앞의 얘기로 돌아오면, 진보적 운동 진영은 이러한 [홍콩 지역의] 상황을 신자유주의적 경제 정책과 연계시키지 못했다. [다만] 이 모든 책임이 퉁치화(tung chee hua) 행정장관에게 향했고, 결국 그는 사임하였다. 물론 근본적인 경제 정책은 변하지 않았다. 지난 12월의 WTO반대 투쟁은 우리에게 사회변화를 위한 경제 정책[의 대안]을 고민하는데 있어 우리 운동의 취약함을 반성하게 한 것이었다.
 
2.2. 홍콩, 혹은 아시아에서의 이와 같은 국제 공동 투쟁의 경험이 우리 모두에게 남긴 것은 무엇일까? WTO 투쟁 직전에 홍콩 민주화 운동이 있었다. 이는 당시 한국 언론에도 보도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아는데, 홍콩의 민주화 투쟁은 현재 어떤 국면에 있는가? 이주노동자운동을 비롯해 홍콩에서의 사회운동은 어떤 것들이 있고 어떤 상황인가? 무엇보다도, 이러한 홍콩의 사회운동이 2005년 말의 WTO 투쟁과 어떻게 연계 되었나? 즉, WTO 반대 투쟁 직전, 홍콩의 사회운동 진영은 지역적 투쟁과 전지구적 투쟁를 연계시키는 전략을 준비했을까? 특히 미디어-커뮤니케이션을 통한 전략에 대한 준비 과정이 있었는가? 그런데 실제는 어떻게 되었나?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는 홍콩의 민주화 시위, 2005년
보통선거권을 요구하는 홍콩의 민주화 시위, 2005년 
 
* 2005년 7월 1일 대중 시위에 대한 더 많은 사진들

 
* 오이완: 홍콩의 민주화 운동은 2003년 7월 1일에 절정을 이루었는데, 당시 5십만이 넘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기본법(홍콩의 현법적 기반)의 23조 - 국익을 위해서는 민중의 표현의 자유와 집회를 제한하는 법안에 맞서 싸웠다. 사람들은 또한 경제 위기에 따른 처참한 상황에서 고통을 당했기 때문에 그 분노를 정부에 향해 퍼부었고 퉁치화(tung chee hua) 행정장관의 사임을 요구했다. 7월 1일의 대규모 시위 결과, 23조는 유보되었다. 2004년, 다시 5십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거리로 나와 (기본법에서 약속한 대로) 2007년과 2008년 [선거에서의] 보통선거권 실행을 요구하였고, 퉁의 사임도 요구하였다. 결국, 그는 사임했지만 보통선거권은 거부되었다. 중국 본토의 인민대회에서 기본법은 보통선거권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고 해석해버렸기 때문이다.
중국 정부가 임명한 도날드 쨩(Donald tsang)은 새로운 홍콩 특별 행정구(SAR:Special Administrative Region) 정부의 수장이 되었고, 2005년에 "선거[제도] 개혁"을 내걸었지만, 보통선거권의 실현을 질질 끄는 것에 불과했다. 민주당과 시민사회는 이 개혁안을 거부했으나, 정부는 어떠한 거부도 민주적 개혁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민주당의 몇몇 입법 의원들은 그 개혁안에 반대표를 던지는 것에 선뜻 나서지 못했다. WTO각료회의가 끝나고 몇 일 뒤인 2005년 12월 21일은 정부 개혁안에 대한 투표가 있는 날이었다.
WTO 직전에, 몇몇 대중적 인사들은 두 가지 사안을 연계시키려 하였다: WTO가 블랙박스가 되면서[준비 과정이 전혀 공개되지 않으면서], 그들은 주류 신문사들의 칼럼 등을 통해 민주주의를 위해 WTO를 반대한다고 표명하였다. 하지만, 홍콩민중동맹(HKPA, 홍콩의 핵심 대중운동 전선체)은 전지구적 운동을 지역화하는데 실패했고 자신의 역할을 국제시위를 지원하는 지역 본부 같은 수준으로만 생각했다. 만약 해외의 시위대들이 제기한 이슈와 지역 사안 간의 더 많은 커뮤니케이션이 있었다면, 그리고 WTO반대 의제가 지역 의제와 통합적으로 사고되었다면, 우리는 아마도 5십만의 홍콩 사람들이 정부와 기업의 유착과 더불어 WTO에 대해 반대하는데 나서는 역사적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르겠다. 또한, 정당들은 (민주주의를 바란다고 했지만) 신자유주의 반대 운동에는 매우 보수적이었기 때문에 만약 그러한 대중 투쟁이 있었다면 홍콩의 민주화 운동은 자유주의적 엘리트계급이 주도하는 "제도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민중 민주주의"로 새로운 방향을 잡아나갈 수도 있었을 지 모른다.
12월 17일, 대규모의 시위대 체포가 있지 않았다면, 홍콩의 대중들이 조직되어 "WTO 박살내자! 정부 개혁안 박살내자!" "민주주의를 위해 WTO 반대한다" 등의 깃발을 들고 집회를 벌였을 것이다. 그리고 WTO 반대 투쟁은 자연스럽게 12월 21일(정부 개혁안에 대한 투표가 있는 날)로 이어져 정부 개혁에 대한 반대투쟁이라는 정치적 사건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17일의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한 후, 정부는 두 가지 사안(WTO반대와 정부개혁안 반대)에 대한 대중적 폭발을 연결시키려는 힘 역시 억압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은 역사적 순간을 창조해낼 수 있는 둘도 없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홍콩에서 WTO에 반대하는 주류적 담론은 (상대적으로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는) 옥스팜(OXFAM)과 같은 개발 NGO들이 주도되었다는 점이다. 그에 따라, 불공정한 무역이나 덤핑 같은 이슈들이 제기되었고, 그 언어는 매우 탈정치화되어 있었다. 그 결과,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지역의 이슈들이 아니라 개발 국가들에 대한 동정심 같은 것을 가지고 WTO 반대 투쟁을 지지한 것이었다. 내가 볼 때, 주류 미디어가 농민들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춘 이유도 홍콩에는 실제로 농민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과 연관되었던 것이다(이 말은 곧, WTO는 홍콩에서 아무런 이슈도 안 된다는 것이다).
 
2.3. 홍콩의 지배적 주류 미디어 상황은 어떠한가? 특히, WTO 반대 투쟁 기간을 거치면서 대중들이 주류 미디어 그리고 독립 미디어에 대한 태도랄까, 뭔가 변화 과정이 있다고 들었다. 구체적으로 어떠한 과정이었나?
* 오이완: 홍콩의 주류 미디어는 1990년대 초반부터 상업화되기 시작했다. 뉴스는 점점 더 사회적 가치를 나누는 수단이라기보다 하나의 소비 대상이 되어갔다. 더 악화된 상황을 볼 것 같으면, 정부와 기업들이 미디어와 아주 강력하게 결탁해 왔다는 점이다. 70%의 뉴스가 (정부 및 공공) 기관들을 그 출처로 하고 있고, 나머지들이 오락이나 그날 그날의 사건이고, 사회적 이슈나 비판에 대한 것은 아주 소수에 불과하다.
WTO 직전에, 주류 미디어는 보안/안전 문제에만 초점을 맞췄고, 대개의 경우 신문사들에 경찰청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는 보안/안전 전문 기자들이 있었다. 그에 따라, WTO 이전에 신문 지상에는 심심찮게 해외 시위대들의 위협적 요수들이 뉴스거리가 되었다. WTO가 다른 나라는 말할 것도 없고 홍콩과 중국에 미칠 영향에 대한 논의는 거의 볼 수 없었다. 12월 초가 되어서 그나마 정치부 기자나 지역 뉴스를 다루는 기자들이 취재에 나서기도 하였다.
11월 말부터 우리는 경찰과 결탁한 언론이 보안/안전 문제만 다루며 전체 사안을 축소 보도하는 것에 대해 비판하였다. 그러한 비판은 주류 미디어 내 기자들의 전문가주의에 대한 도전이었다. WTO 회의와 시위가 진행되는 동안, 주류 미디어 기자들이 폭력적인 장면을 과장하는 것에 대한 더 많은 비판이 있었다. 시위가 도시의 한가운데에서 벌어졌기 때문에 거리에는 수많은 목격자들이 있었고 그 모든 사람들은 시위대와 경찰의 대치는 단지 시위가 있는 곳에서만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거리에서 직접 시위를 목격한 사람들이 라디오 방송에 전화 연결되어 주류 미디어의 과장되고 왜곡된 보도를 비판하였고, 사람들은 시위가 평화적이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홍콩 주류 신문들의 폭력 시위 과장 보도한국 투쟁단의 15일 삼보일배 시위
홍콩 주류 신문들의 폭력 시위 과장 보도 / 한국 투쟁단의 15일 삼보일배 시위

점차 미디어는 그 어조를 달리하였고, 한국 시위대가 삼보일배 등의 시위를 벌인 15일의 경우에는 모든 주류 미디어가 다른 각도로 접근하였다. 시위 자체가 이전의 주류적 보도 흐름을 깨뜨렸던 것이다. 주류 미디어의 일관되지 않은 보도는 사람들에게 완차이에서의 "폭동"이라는 규정에 불신을 갖도록 했다. 그러는 한편, 대안적인 보도나 사람들 간의 직접적 소통(p to p messages)이 보다 신뢰를 갖게 되었다. WTO 이후 주류 미디어에 대한 비판이 지속되었고 주류와 독립 미디어 사이에 뚜렷한 경계가 그어졌다. 하지만, 인미디어(inmedia)와 같은 대안 미디어가 해외 시위대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주류 미디어의 대안적 뉴스 출처가 되기도 하였다. 대안적 미디어와 주류 미디어 노동자들 간의 협력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WTO 기간 동안, 일부 주류 미디어 노동자들은 매일 뉴스 꺼리를 찾아 우리의 웹사이트를 방문했다. 최근(한 달전)에는 주류 미디어 노동자들의 워크숍에서 그들의 윤리강령 같은 것에 대한 토론도 있었다. 뭔가 결론이 났던 것은 아니지만, 그들 사이에서 문제인식이 싹튼 것이다. 인미디어(inmedia)에 있는 우리는 주류 미디어에 대한 비판을 단순히 기자의 윤리의 문제를 넘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와 시장 체제에 대한 관점의 문제로 확대하였다. 향후 두 영역 간의 보다 많은 대화가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2.4. 홍콩의 미디어 활동가들의 직접행동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미디어를 통해 직접행동이라는 운동 전술을 스스로 어떻게 평가하고 있나? WTO 반대 투쟁을 전후해서 직접행동의 사례들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를 포함해 인미디어(inmedia)의 커뮤니케이션 전략은 무엇인가?
* 오이완: 사실 우리는 홍콩 인미디어(inmedia)를 만들기 전에는 직접 행동에 대한 경험을 많이 갖지 못했다. 우리는 12명 정도되는 편집 활동가들이 있고, 이메일 등을 통해 주로 소통한다. 이 편집활동가 집단은 핵심적으로 행동 계획을 세운다. 인터넷 언론이라는 플랫폼을 통해 우리는 또한 여러 필자들이나 독자들과 연결될 수 있다. 2005년 10월, 우리는 중국 남부 지역의 한 마을 선거에 대한 탄압에 대항해 48시간 동안 자발적 시위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러한 행동은 홍콩에서 중국 본토의 헌법적 권리 운동의 이슈를 제기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는 뉴스 보도, 서명 캠페인, 그리고 행동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그 모든 과정이 편집활동가 팀이 조직하고 나서고 우리의 웹사이트를 통해 진행되었다.
WTO 기간동안에도 비슷하게 움직였다. 우리는 우리의 뉴스 보도를 웹사이트에 올렸는데, 우리의 참여가 충분하지 않다고, 뉴스가 우리의 감성을 사로잡지 못한다고 느꼈다. 서명 캠페인 차원으로 [해외 투쟁단 등에 대한] 감사의 편지 초안이 만들어졌고 재빨리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3일만에 해외 시위대들한테 전달되었다(비디오보기: 한국투쟁단에 대한 감사의 편지 낭독). 그와 함께 우리는 선전팀을 조직하여 홍콩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하였다. 그러한 직접행동은 해외 시위대들과 홍콩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효과를 내기도 하였다.
최근(2006년 3월, 4월)에 우리는 또한 대학 캠퍼스에서 개발을 목적으로 나무를 베어버리는 것에 대항한 직접행동을 벌였다. 이 역시 우리 웹사이트를 통해 뉴스 보도가 나갔고, 24시간 만에 행동단이 구성되어 캠퍼스 내의 오래된 나무들 옆 보도블록 등에 이에 반대하는 캠페인 슬로건을 도배히였다. 이후 모임들이 이어지면서 일주일만에 교수, 직원, 학생, 졸업생들이 모여 협의체가 구성되고 대학 행정 당국에 압력을 가하였다. 한 달이 지난 후, 대학 당국은 애초의 개발 계획을 유보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학 당국은 지금까지의 의사결정구조를 재검토하고 개혁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 클릭: 대학 캠페스 개발 계획에 대한 반대 켐페인 사진들 

우리는 우리의 미디어 뉴스가 어떻게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는지 그 과정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현실을 재구성하는데 있어 미디어 활동과 직접 행동의 두 가지를 상호 대화적이고 성찰적이며 역동적인 과정으로 만들기 위한...

 
 
3. 한국의 사회운동과 국제연대에 대한 평가
 
3.1. 한국에 몇 번 온 것으로 안다. 어떤 일들로 왔었나? 이번에는 민중언론 참세상의 "변혁의 세계화와 대안 미디어" 국제포럼으 로 오게 되었는데, 이 국제포럼 참가는 너희들의 활동, 그리고 홍콩의 동지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국제포럼, 이러한 토론이 국제적으로 서로 어떻게 투쟁하고 있는지 알아가는 것; 하지만, 그 짧은 며칠 동안 단편적일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어쨌든 이러한 활동가들 간의 직접 방문을 통한 교류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 이번 포럼 참가에 대한 경험을 홍콩으로 돌아간 이후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공유했는가?
* 오이완: 한국에 온 건 이번이 세 번째이다. 첫 번째는 아시아의 젠더와 소녀 섹슈얼리티 이슈(특히, 여학생 성매매)에 대한 국제회의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하자센터를 방문하기도 했다. 두 번째는 작년에 국제여성대회와 오마이뉴스의 국제 시민기자 토론회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었고, 당시에 나는 참세상에 방문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참세상 국제포럼 참가. 이후 홍콩으로 돌아온 후, 나는 이 여행에 대한 몇 가지 글을 썼고 나의 동료들이나 한국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회람했다.
첫 번째 글(중국어)은 FTA 이슈와 관련해 주류 미디어를 비판하는 토론회에 참여한 것에 대해 쓴 것이다. 토론회는 한국어로만 이루어졌고 나는 토론의 구체적인 내용은 잘 알지 못했지만, 이 토론회 자체는 나에게 문화적 충격이었다. 홍콩에서 그러한 토론회가 있었다면 기자연합회 같은 곳에서 "언론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비난했을 것이다. 홍콩의 주류 언론은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가 만연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회적 가치는 어떻게 되든 그들의 자유를 보호하려고만 든다. 자유는 종종 정치경제적 시스템에 대한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비판이 부재한 채로 껍데기만 남게 된다. 짧은 글을 통해 이러한 나의 생각을 적었다.
두 번째 글(중국어)는 반세계화 국제주의에 대한 것이다. 이 글에서는, 진정한 연대를 위해 우리는 각 지역 투쟁에 대해 서로 많이 알아가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간략하게 민족주의적 정서가 짙어지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하였다.
세 번째 글(중국어)는 참세상의 국제포럼에 대한 것이고, 각 발제자 및 토론자들에 대한 나의 주관적 코멘트가 있다.
네 번째 글(중국어)는 평택을 방문한 것에 대해 썼다. 그 배경에 대한 설명과 이 사안의 중요성에 대해 썼다.
다섯 번째 글(중국어)은 한미FTA 저지를 위한 범국민운동본부의 발족 선언문과 함께 한국에서의 FTA반대 투쟁에 대한 설명이다.
여섯 번째 글(중국어)은 한국의 운동권 미디어에 대한 것이다: 참세상과 노동넷에 대해.
마지막 글(중국어)은 주류적 공간에 대한 것: 퍼블릭 액세스, RTV 그리고 미디어센터 등에 대해.
이러한 글들을 쓸 때 나는 우리의 상황과 비교하였다. 바로 오늘, 한 대학 교수가 나에게 한국 미디어운동에 대한 기사를 봤는데 특히 미디어 구조를 변화시켜낸 것들에 대해 아주 흥미로웠다고, 홍콩에서도 이에 대한 토론을 해보자고 하였다. 내 생각에 이러한 (한국 운동에 대한) 정보들은 우리 운동에도 매우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쓴 것들은 내가 가서 배운 것들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말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이 훨씬 많이 있고, 앞으로 어떻게든 풀어내야 할 것들이다.
 
 
4. 향후 계획
 
4.1. WTO 반대 투쟁의 경험, 이번 한국 사회운동에 대한 경험을 통해, 이후 각자, 그리고 당신이 속한 운동 공동체에는 어떠한 변화들이 있을 것 같나? 혹은 어떤 새로운 의제나 방향이 논의되고 있는가? 특히, 미디어를 통한 국제연대의 실천적 계획들은?
* 오이완: WTO투쟁 이후, 우리는 미디어 직접행동, 미디어 행동주의, 대안 미디어와 사회운동의 관계에 대해 보다 많은 토론을 했다. WTO와 서울에 다녀온 경험을 통해 나는 홍콩의 미디어 활동가들 혹은 시민 기자들 간의 통합적인 커뮤니티가 필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향후 홍콩의 대안 미디어의 발전을 위한 공간을 확대하기 위해 공동의 의제를 형성하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미디어를 새로운 사회운동의 현장이자 부문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WTO 투쟁 평가 회의에서, 우리는 홍콩의 사회운동 조직들과 소통하였고, 우리는 NGO 커뮤니티들과의 관계를 강화하면서 인미디어(inmedia)를 사회운동을 위한 상호 협력적이고 성찰적인 플랫폼으로 가져가려고 한다.
국제연대와 관련해서는, 우리는 현재 "interlocal.net"이라는 새로운 영문 웹사이트를 개발하고 있다. 언어의 장벽을 넘어 각 나라 각 지역의 여러 대안 미디어, 미디어 활동가들 간의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것이다. 보다 자세한 것은 http://ahoi.pbwiki.com ahoi.pbwiki.com]의 inter-local 섹션에 들어보면 알 수 있다.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