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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68호 안녕!2009!] No Thanks. - 미디어법으로 음소거 되는 세상에 한 마디 하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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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6. 1. 21. 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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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68호 / 2009년 12월 30일




No Thanks. - 미디어법으로 음소거 되는 세상에 한 마디 하자면
 
김 윤 진 (ACT! 편집위원)

 

 

 

 

0. 새롭지도, 특별하지도 않은 글에 대한 변(辨)

 


당신에게 2009년의 미디어-사회 관련 5대 뉴스는 무엇입니까. [ACT!]가 발행된 이후, 최초로 실시한 설문조사였다. 특정 표본집단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이라면 할 말 없지만, 어쨌든 1위는 설문을 시작하기 전부터 예상 가능했다. 예상대로 [미디어법 개정(52표)]이 1위다. 또 이번 설문조사 결과 [KBS 사장 해임 및 방송장악(18표)]이 2위에 랭크됐다. 70여 명이 말한 350여 개 답 중 80개의 대답이 미디어법과 방송장악을 얘기한 것이다.

이 글은 그렇게 2009년 미디어계를 장식했던 ‘미디어법과 방송장악'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물론 상위 원고인 [불가능,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에서 김주영 편집위원이 말했듯, 이 글 안에는 새롭거나 특별한 얘기가 없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이유, 많은 사람들이 우선순위로 이 일을 기억하고 있듯 여전히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해두자. 지난 12월 18일, 미디어법 개정안 처리 과정과 관련해 야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김형오 국회의장을 상대로 헌재에 다시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했다. 미디어법 개정에 대해 “No Thanks."라고 말해야 하는 일은, 아직 진행형인 것이다.

 

 

1. [영웅]이 되고 싶은 자

 


잠시 어떤 영화의 이야기. ‘전국7웅'이 존재하던 춘추전국시대, 천하를 통일하여 황제가 되려던 진나라의 왕 영정(후에 진시황이 된다)은 이미 절반이 넘는 중국대륙을 평정하였지만, 나머지 여섯 국가의 가장 큰 암살 표적이 되어 있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한 명의 자객이 자신 앞에 섰다. 자객의 이름은 무명(無名). 진나라의 전쟁으로 어릴 때 부모님을 잃은 무명은 수십 년이 지나도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힘들어하는 백성들을 보며 영정의 목숨을 노리는 자객이 됐다. 그렇게 영정과 무명을 사이에 둔 채 영화는 ‘대의'를 얘기한다. 천하를 통일하는 것이 난국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며, 따라서 전쟁은 어쩔 수 없이 수행될 수밖에 없는 서글픈 현실이라는 것. 그에 따르는 안타까운 희생들도 더 큰 대의를 위해 인정해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영화는 영정을 통해 무명에게 말하는 것이다. ‘천하(天下)'를 위해, ‘하나'의 중국을 위해 그만 암살을 포기하고 스스로를 희생해주라고. 대의를 위한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줄 수 있겠느냐고. 장예모의 영화 [영웅(英雄)]의 이야기다.

 


하지만 어딘가 익숙하지 않은가. 이건 영화 [영웅]에서만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다. 미디어법의 재투표-대리투표 논란이 한창이던 지난 7월, 이명박 대통령은 라디오 연설에서 “국회가 합의를 했으면 좋았겠지만, (미디어법 처리는) 더 늦출 수 없는 현실”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처리에 대한 국민 ‘반대'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은 때였다. 또한 라디오 연설을 통해 언젠가 그는, 자신의 진심이 전달되지 않는다며 자신의 진정성에 대한 애달픈 마음을 토로하기도 했었다. 
 
 

 

영정의 ‘대의'를 향한 마음과 이 대통령의 진심이 어딘가 모르게 닮았다. 전쟁을 통한 천하통일이 결국 난세를 평화롭게 할 것이며, 그에 따르는 안타까운 희생들도 ‘대의'를 위해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그 마음. 중요한 사회적 의제임에도 불구하고 더 늦출 수 없는 ‘현실'이기에 합의는 안 돼도 어쩔 수 없다는 그 진심. 도대체 어떤 ‘대의'와 어떤 ‘현실'감각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래, 그게 당신들의 순수한 진심이고 믿음이라고 하자. 그런 두 개의 순수한 마음들을 오버랩 해보자니, 어쩌면 우리의 대통령은 ‘천하'를 위해 천하와 투쟁하는 ‘고독한 [영웅]'이 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정정한다. 그와 같은 마음을 품고 아수라처럼 미디어법을 통과시키던 이들과, 그런 그들을 지지하는 언론이 여럿 있었으니, 그가 ‘고독'하진 않겠다.) 
 


2. 당신들의 진심은 [괴물]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게 정녕 진심이고 믿음이라 할지라도 무조건 맞다면서 불도저처럼 밀어붙일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은 춘추전국시대가 아니다. 도대체 어떤 ‘현실'감각에서 오는 진심인지 모르겠지만, 누군가들의 진심만으로 너무나 중요한 ‘사회적 의제'를 ‘합의' 없이 법제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이 시대에 대한 오만이다.

 

 

게다가 그들의 진심은 스스로가 만들어낼지 모를 [괴물]을 보지 못한다.(혹은 관심 없다.) 예를 들면 4대강 사업이 그렇다. 4대강 사업으로 보를 쌓기 위해 물막이 공사가 진행 중인 낙동강과 남한강의 공사현장에서 얼마 전 많은 양의 흙탕물이 흘러나왔다는 보도가 있었다. 흙탕물을 거르기 위해 오탁방지막을 두 겹으로 쳤지만 그럼에도 절반 이상의 흙탕물이 빠져 나왔으며, 이는 식수원 오염과 수중 생태계 파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도 했다. 현재 국회에서 심의 중인 정부예산안이 통과되면 내년에는 15개의 보 준설이 추가로 진행된다. 지금 두 곳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내년에는 전국의 4대강 곳곳에서 일어날 것이라는 게 예상가능하다. 이 사업의 이름은, [4대강 살리기]다.

 

 

물론 ‘어떤 식으로든' 살려보겠다는 마음이 어쩌면(풋...) ‘진심'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진심으로 밀어붙인 사업은 현재 여론조사에서 60% 넘는 반대를 받고 있다. 이미 수없이 심각한 경고들이 있었고 여론조사에서도 현재의 4대강 사업에 대한 반대가 과반 이상이건만, 뻔히 예상할 수 있는 ‘괴물' 같은 결과들을 두고도 그들의 진심은 그 ‘괴물'을 보지 못한다, 혹은 보지 않는다. 국익과 대의라는 이름으로 그들의 진심이 만들어낸, 만들고 있는, 그 괴물을 말이다. 
 

 


3. 미디어 [괴물]의 탄생

 


 

[괴물]은 강에서만 출현하는 게 아니다. 잠깐 영화 [괴물]을 소환해보자. 미군부대가 배출한 포름알데히드에서 탄생한 괴물만이 박강두 가족이 맞선 괴물은 아니었다. 괴물이 태어나기까지 방기한 사회의 타락한 구조와 그 안에서 산재한 비극적 조건들, 그러니까 괴물을 품어 잉태하였던 우리 사회의 괴물 같은 어느 모습 또한 그 자체로 괴물이다. 철거민을 몰아내는 용역깡패만 괴물이 아니라, 여전히 70년대 난쏘공의 현실 그대로인 2009년의 어느 단면 또한 기형적인 괴물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괴수(怪獸)가 아니라, 괴물(怪物). 그 기괴하고 일그러진 형상 안에서 소외된 목소리들은 자꾸만 음소거가 되어간다. 

 
여기 우리의 미디어지형에서도 비슷한 괴물은 탄생하려 하고 있다. 작년부터 비판을 받아온 한나라당의 미디어법 개정안은 그 핵심이다. 미디어법 개정안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지난 3월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가 구성되어 개정안에 대해 논의되었지만, 예상대로 공허함만을 그 결과로 내놓았다.( ACT! 61호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 강행처리를 위한 명분쌓기용?] 참조 ) 여론수렴을 하겠다며 위원회를 구성했으면서도 굳이 국민여론조사는 부정하던( 대체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 희대의 희극인들 덕분에 헛웃음을 삼켜야 했던 100일이었다. 하긴 뒤이어 7월 22일 펼쳐진 국회에서의 미디어법 통과 과정에 비하면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의 100일이 선사한 웃음은 인트로에 불과했다. 지난 10월 미디어법 통과 과정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절차상 위법성이 있었다”고 말하면서도 해당 법안의 가결 선포를 무효로 해달라는 청구는 ‘기각'했다. 뒤늦게 헌재 측은 미디어법이 유효하다는 내용은 판결문 어디에도 없다고 밝혔지만, 이미 ‘절도는 범죄지만 절도한 물건의 소유권은 절도범에게 있다는 판결'이라는 비웃음을 산 뒤였다. 공은 다시 국회로 넘어갔지만 여당인 한나라당은 요지부동이며, 위에서 말했듯 야당 국회위원들은 다시 한 번 헌재에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한 상태다. 미디어법은 수백 일에 걸쳐 논란의 중심이 되고 있다.

 

 

그러는 중에 조선/동아/중앙일보는 방송을 준비하고 있다. 대통령의 언론특보 출신인 KBS의 김인규 신임 사장이 수신료 인상 움직임을 보이자 이들 신문들은 이에 대해 힘을 실어주고 있다. KBS가 시청률 경쟁에서 빠지고 수신료를 인상하는 대신 KBS2의 광고물량을 내줘야 이들 신문사가 겸영하는 종편채널이 초기 안정적인 시청률을 확보하고 KBS2 광고를 빼오는 데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KBS2의 연간 광고물량 5000억 원. 조선/동아/중앙일보로서는 괴물이 되기 위해 가장 탐해야 할 ‘포름알데히드'가 그것이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보다 하루 일찍 태어난 ‘하이브리드' 케이블 공룡 CJ그룹도 있다. 지난 12월 24일 CJ는 온미디어를 인수하면서 18개 케이블 채널을 확보해 유료방송시장 시청점유율 30%가 넘는 국내 최대 MPP가 되었다. CJ와 온미디어를 합한 방송매출은, SBS의 지상파방송과 SBS 계열 방송채널사업자를 포함한 매출액을 넘어선다. 이미 유력한 종편 후보군으로 지목되었던 CJ는 이제 괴물이 될 준비운동을 모두 마친 셈이다.

 


이렇게 미디어계의 [괴물]들은 잉태되고 있다. 하지만 재벌족벌언론들의 신방겸업과 대기업의 방송진출이라는 괴물만이 진정한 괴물은 아니다. 이들이 태반 안에서 웅크려 조용히 자신을 키워갈 때 소리 없이 죽어간 목소리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이렇다. 공동체라디오의 2009년은 최악이다. 방송통신위원회가 그동안 지급하던 월 5-600만원의 보조금이 올해부터 중단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1w의 가청취권 1~1.5km의 열악한 출력을 증강하기 위한 노력은 방송통신위원회에 없었다. 그러는 새 대통령은 일주일에 한 번씩 라디오에 나와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고, 한사코 없다던 전파를 어디선가 찾아와 만들어낸 영어FM은 24시간 돌아가게 됐다. 
 
 

공익채널 축소 또한 소리 없이 죽어간 목소리의 예가 될 것이다. 케이블에서 SO의 의무 재전송 공익채널 수는 6개에서 3개로 줄어들었다. 종편 채널과 보도전문 채널에 2~3개의 자리를 더 내줘야 하는 상황에서 공익채널의 수를 줄이는 것으로 여유채널을 확보하게 만든 것이다.( ACT! 66호 [공익채널 또 절반 축소 - 이번에는 종편 자리내주기?] 참조 ) 사회적 약자를 위해 존재하는 공익채널의 축소와 사장된 목소리들. 미디어 [괴물]의 탄생에는 그러한 배경들이 존재한다.

 


앞서 말했듯, 거대공룡 같은 대기업의 방송진출과 보수언론의 신방겸업 그 자체만이 괴물인 것은 아니다. 그렇게 괴물이 탄생하기까지 우리 사회에 쏟아지는 포름알데히드와, 그에 대한 침묵과 묵인, 그리고 음소거 된 작은 목소리들과 계속해서 음소거 될 더 작은 목소리들을 기억해보자. 다시 말하지만, 괴물이 태어나기까지 방기한 사회의 타락한 구조와 그 안에서 산재한 비극적 조건들, 그러니까 괴물을 품어 잉태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 괴물 같은 어느 모습 또한 그 자체로 [괴물]이다. 
 


4. 2009년 로스트 메모리즈

 


어쩌면 먼 훗날, 누군가 이 모든 역사가 엉망이라며 2009년으로 돌아와 역사를 바꾸려고 할지도 모른다. 2009년 로스트 메모리즈. 미디어법이라는 미디어 [괴물]의 탄생이 시작된 해로서 2009년.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어쩌면 예상할 수도 있다. 사실 미래에 대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이탈리아의 지금에서도 볼 수 있다.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이탈리아 총리는 지난 해 세 번째로 총리직에 올랐다. 그에 관한 숱한 문제들이 지적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정치적으로 강력하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지난 11월 30일자에서 ‘실비오의 소녀들'이라는 기사를 통해 베를루스코니가 어리고 예쁜 여자들을 이용해 자국의 정치 문화를 ‘연예문화'로 변모시킨 과정을 다뤘다. 이미 그는 그가 소유한 미디어셋과 그가 통제할 수 있는 국영TV RAI를 통해 이탈리아 텔레비전 시장의 90%를 장악하고 있다. 그는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한 프로그램들을 미디어셋 소속 TV 방송국들에 지속적으로 등장시키면서 이탈리아의 TV문화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최근 이탈리아의 설문조사에서 많은 젊은 여성들이 ‘벨리나'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벨리나'는 이탈리아어로 ‘쇼걸'을 뜻하며, 베를루스코니식 TV프로그램에 등장하는 대상화된 여성들을 지칭한다. 이러한 TV문화가 궁극적으로 베를루스코니의 정치력을 계속해서 유효하게 만든다고 타임은 지적한다. 게다가 이탈리아의 뉴스는 80%가 TV를 통해 유통된다는 점에서 베를루스코니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다.

 


이탈리아의 현실에 대한 타임의 지적까지 갈 것도 없다. 실은 ACT!에서 이미 예상가능한 미래에 대해 시나리오를 소개한 적이 있었다. 2009년의 미디어법 통과에서 시작된 미디어지형 변화가 어떤 미래를 가져올 것인가. 바로 ACT! 67호에 실린 완군의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 얼간이들의 세상을 위한 안내서]다.

 


가뜩이나 겉만 들쑤시는 보도를 할 수 밖에 없던 TV 뉴스는 이제 거의 도태된 상황이다. 생각해보면 그들의 전략은 TV 자체를 저열한 매체로 만들어 단물만 빼먹고, 오피니언 사이에서 신문의 지배력을 거꾸로 강화시키는 전략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인터넷에는 연예 뉴스들만 넘쳐나니 역설적이게도 종이신문의 사회적 위력은 강화되고 말았다. 미디어가 무슨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힘찬 연어 새끼도 아니고 이 역행을 뭐라 불러야 하는 것인지...

 

 

결국, 그래서 세상은 종편이 없던 때로부터 한 발자국도 진전하지 못했다. 얼마 전 여론조사에 따르면 정부의 예산을 국회에서 심의한다는 사실 자체를 모른다는 응답이 50%를 넘었다. 종편이 추진되던 시점쯤 추진되었던 4대강 정비 사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물이 썩어가 수돗물을 수입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10대들의 경우 한국의 강이란 원래 그런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그렇지 않다는 의견보다 조금 더 높은 지경이다.

 

 

그렇게 우리는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 얼간이들의 세상을 살고 있다.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00원짜리 삼겹살에 앞다리 살이 쓰였다고 분개하고, TV에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 닮은 여대생이 나왔다고 욕을 하고...

 

- 완군,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 얼간이들의 세상을 위한 안내서] 중에서 
 
 

 

거대종편의 등장, 공룡 같은 대기업의 방송과 보수언론의 담론을 재생산하는 TV. 거기에서 사라져버린, 들리지 않는, 작은 사람들의 목소리들. 그래서 사소한 것만 들을 수 있고 사소한 것에만 분노하는 얼간이들의 세상. 왕궁의 음탕 대신에 TV 속에 나온 여대생을 예쁘다 혹은 못생겼다 평가하는,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는 미래.

 

 

물론 최악의 시나리오지만 염두에 둬야 할 미래이며, 지금 지구 어느 곳에 실제로 있는 어떤 모습이기도 하다. 예상가능한 미래. 2009년에 시작된 미디어 [괴물]의 탄생은, 어쩌면 로스트 메모리즈의 신호탄일지 모른다. 
 


5. [영웅]의 진심에 가린, 이름 없는 자들

 


 

[영웅]에서 진나라의 왕 영정 앞에 나타난 자객의 이름은 무명(無名)이었다. ‘이름이 없다'는 이름. 모든 이름 없는 자들을 대신해 그는 영정 앞에 섰던 것이다. 자신에게 칼을 겨눈 자에게 영정은 자신의 천하를 향한 대의와 진심을 이야기한다. 그의 진심을 듣게 된 ‘이름 없는 자'는 칼을 떨어트리며 영정에게 말한다. 자신과, 다른 죽어간 모두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그리고는 궁을 나온 무명은 1만여 명의 왕실 호위무사들이 쏘아올린 수많은 화살을 온 몸으로 담담히 맞은 채 죽는다.

 

 

이건 코미디다. 전쟁이 평화의 근거가 되고, 낮은 자들의 희생이 대의의 밑받침이 된다는 건 그야말로 코미디다. 전쟁 자체가 평화와 모순이며, 낮은 자들의 사소하고 기본적인 권리 없이 대의는 존재할 수 없다. 무엇보다 그런 평화와 대의에 순응하여 비판의 칼을 놓아버린 ‘무명'을 또 다른 비장하고 고독한 (하지만 역시나 이름 없는, 기억하지 않을)영웅으로 묘사하는 것 자체가 더 없는 코미디다. 암(癌) 주고 아스피린 한 알 주는데 비장한 음악이 흘러나온다고 장엄한 서사가 되는 건 아니다. 그저 잔인한 코미디일 뿐. 그리하여 영화 [영웅]에 등장하는 ‘무명(無名)'에겐, 그리고 그런 ‘무명'을 만들어낸 감독 장예모에게는, ‘이름 없는 자'들을 대신할 자격이 없다. ‘대의'란 그렇게 아무렇게나 갖다 붙여 글자 그대로 읽기만 한다고 ‘대의'가 되는 게 아니다. 그건 합의하기 힘든 ‘현실' 때문에 사회적 합의는 무시할 수 있는 것만큼이나 우스운 일인 것이다.

 


그 모든 게 진심이고 믿음이라고 치자. 영정의 진심과 믿음만큼, 미디어법 통과를 향한 그들의 진심과 믿음이 높은 순도를 자랑한다고 하자. 하지만 아무리 순도 높은 진심이라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그것으로 인해 다양한 목소리들이 음소거 되는 거라면, 더더욱 그렇다. 자신들의 진심만 믿고서 높은 곳의 독야청청한 ‘영웅'이 될 생각을 하지 마라. 낮은 곳의 이름 없는 자들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 오히려 반갑다. 영웅을 향한 진심이 사실은 높은 곳을 향한 본심임을 의심하고, 그 진심이 괴물을 잉태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니 미디어법과 방송장악, 설령 그게 백 번 양보해서 당신들의 순수한 진심이고 믿음이라 치더라도, 한 마디로 No Thanks, 고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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