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106호 특별기획  박종필을 기억하며  2017.9.14]


    박종필의 카메라, 이것이 액티비즘이다!


    김동현(서울독립영화제 집행위원장)



      박종필 감독의 갑작스러운 투병 소식을 접하자마자 가까운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 너무 억울하고 속상하다고, 그동안 고인이 너무나 고된 현장에서 굵고 힘든 작업을 해왔다며, 개인을 너무 돌보지 못했기 때문이라 했다. 울먹이며 나에게 스트레스 받지 말고, 몸 돌보며 적당히 일하라고 당부했다. 마음의 빚을 진 며칠이 경황 없이 지나고, 장례식장에서 일손을 겨우 거들며 박종필 감독을 떠나보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것이 언제였던가 되짚어 본다. 지난 해 영화제가 한창 준비 중인 가운데 독립영화 시국선언 피켓을 만든다고 한 무리의 활동가들과 사무실을 찾았다. 야근 중에 회의실을 들락거리며 행사가 종료된 영화제 포스터를 콜라주하는 그에게 시답잖은 농담과 타박을 건넸다. 피켓을 참으로 정성껏 천천히 만들더라. 촛불집회가 절정이던 올해 초, 광화문 광장에서 카메라를 든 그를 우연히 만났다. 얼굴이 좋지 않아 보여, 건강 챙기라는 형식적인 안부를 남겼다. 영화를 통해 거의 20년의 세월을 지내왔건만, 정작 개인적 친분은 깊지 않다. 떠나보내고 나니, 그와 더 가깝게 지내지 못했던 것이 애석하다.


      90년대 후반 모두 젊고 열성적이었다. 한국영화의 지형도가 새롭게 재편되며, 다양한 문화적 열망이 분출되었다. 독립영화의 제작이 늘어났고, 여러 영화제가 생겨났다. 영화의 축제인 영화제에서 다큐멘터리는 독립영화의 시대정신을 대표했다. 바로 지금 우리가 껴안고 있는 모순이 현장을 누비는 활동가들의 카메라에 실려 왔다. 영화들이 세상에 나아가 울림을 만들었고 관객의 삶의 좌표가 되었다. 박종필의 카메라는 가장 소외받고 가난한 이들을 향했다. 작품이 영화제를 통해 상영되고 수상하며 감독의 인지도와 더불어, 카메라가 머물렀던 현장의 실상 또한 뜨겁게 되살아났다.


    ▲ <IMF 한국, 그 1년의 기록 ― 실직노숙자> 중 한 장면



      1998년 <IMF 한국, 그 1년의 기록 ― 실직노숙자>는 국가부도 위기에서 책임져야 할 자본과 권력 대신 거리로 쫓겨난 노숙자를 담았다. 당시 크게 늘어난 노숙자는 허약한 국가의 사회안전망 속에서 일할 권리를 빼앗긴 이들이었다. 서울역 옆 공원에서 노숙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박종필은 존엄한 인간으로서 그들을 바라보며 보편적 행복을 역설하고 있다. 그의 첫 데뷔작인 작품은, 빈곤에 대한 사회적 관점을 바꾸는 큰 계기가 되었다. 이 작품은 2007년 <거리에서>로 이어진다. 10년이 지났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노숙인들은 여전히 복지의 사각지대에서 죽어나가야 했다. 


      1999년 <끝없는 싸움 ― 에바다>는 1996년부터 시작된 에바다복지회 장애인시설 비리 문제를 집요하게 기록하였다. 어린 농아원의 학생들이 시작한 싸움은 뿌리 깊게 내려앉은 인권유린의 현장을 고발하였다. 이 작품은 외롭고 소외된 싸움에 연대의 힘을 불어 넣었다. 싸움의 주체였던 청각장애인들의 보금자리 ‘해아래집’은 2000년 한국독립단편영화제(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집행위원회 특별상(연대와 인권상)을 수상한다. 


    ▲ <끝없는 싸움 ― 에바다> 중 한 장면



      2002년 <장애인 이동권 투쟁 보고서 ― 버스를 타자!>와 2004년 <노들바람>은 2001년 오이도역 장애인 추락 참사를 계기로 본격화 된 이동권 투쟁의 기록이며, 투쟁을 이끌었던 ‘노들야학’ 학생과 교사들의 치열한 일상을 가감 없이 담고 있는 작품이다. 지하철 선로에서 눕고, 목에 쇠사슬을 매고, 농성현장에서 경찰에 매 맞는 중증장애인들 곁에서 박종필의 카메라는 놀랍도록 우직했다. 분노를 억누르는 것은 또 하나의 작가적 고민이었을 것이다. 카메라를 든 자의 본분을 잃지 않았던 그로 의해, 장애인들의 역사적 투쟁은 영원히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영화는 험한 세상에 흩어지지 않는 말이 되어 곳곳으로 전달되었다. 이 작품 이후에도 박종필은 할 수 있는 한 장애인 관련 작품은 계속 이어나간다. 빈곤과 장애는 그의 삶의 영원한 화두였다. 홈리스 배움터 교사로, 장애인인권영화제로 집행위원으로 더 일상적으로 혹은 더 영화적으로 그가 할 수 있는 것들을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이들에게 내어 주려 했다.


    ▲ <장애인 이동권 투쟁 보고서 ― 버스를 타자!> 중 한 장면.



      그의 마지막 불꽃은 촛불과 세월호와 함께 했다. 2015년부터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와 박근혜정권퇴진비상국민행동 미디어팀에서 활동하며, 수많은 영상으로 시민을 만났다. 더불어 <4·16 프로젝트 망각과 기억> 중 <인양>과 <잠수사>를 연출하였다. 동거차도에 머물며 세월호를 기다리는 유가족의 활동을 담은 <인양>, 희생자를 수습했던 고 김관홍 잠수사는 앞선 작품에서도 등장한다. 세월호 현장에서 의인이었지만, 그로 인해 몸과 마음이 황폐해졌고 개인의 삶 또한 무너졌다. 고인과 가까웠던 박종필은 김관홍씨의 죽음 이후 특별히 괴로워했다고 한다. 김관홍 잠수사에 대한 각계의 기억과 더불어, 반복되는 피해와 희생 앞에 무능한 국가권력을 폭로하는 <잠수사>는 그의 유작이 되었다. 목포 신항의 세월호 선체작업 기록이 그의 마지막 현장이자, 영상활동가로서의 작업이 되었다. 죽음의 기운을 실은, 숱한 원통을 지켜봐야 했던 거대한 배의 기록을 사명으로 안고, 아픈 몸을 잊은 채 카메라를 들었다. 


    <IMF 한국, 그 1년의 기록 ― 실직노숙자>에서 <잠수사>까지, 박종필은 일관되게 자신의 작품과 개인의 활동을 일치시켜 왔다. 그는 영화감독이자, 미디어활동가이며, 인권활동가였다. 독립영화의 시간이 쌓여가며, 환경이 남다르게 바뀌었다. 2000년대 중후반 이후 독립영화의 개봉이 잦아졌고, 다큐멘터리를 바라보는 기준 또한 달라졌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액티비즘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던 박종필에게 변화된 환경은 낯설고 어색했을 것 같다. 어쩌면, 그를 더 외롭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상영활동가로서 긴 시간을 살아왔고, 창작자들이 긍지를 가지고 작업을 할 수 있기를 바래왔다. 그의 죽음 앞에 부끄럽고 미안한 동료로서 내가 해 나가야 할 것은 무엇일까?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독립영화인들의 건강권, 복지권, 노동권이 앞으로의 과제가 되었다. 당분간 내 몫의 역할을 충실히 하면, 동료들과 풀어나갈 작정이다. 그의 영화를 통해 세상을 배워나갔다. 마지막으로 고마웠다는 인사를 전한다. 편히 쉬시라. 





    글쓴이 김동현



    영화제를 기반으로 활동하며 창작자, 관객과 소통하는 독립영화를 구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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