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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00호 특집-리뷰] 지워진 가능성의 역사를 돌아보며 - 『영화운동의 역사』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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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6. 10. 6.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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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100호 특집-리뷰 2016.10.14]


지워진 가능성의 역사를 돌아보며

- 『영화운동의 역사』(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센터 프리즘, 2002) 리뷰


이세린 (구로FM)



 이 책은 지워진 가능성에 대한 책이다. 사회는 변화하고 시대는 달라지지만, 그 변화의 기록 속에서 민중의 이야기는 흔히 지워진다. 영화와 같은 미디어는 그런 역사 속에서 첨단의 기술이자 결코 따라잡을 수 없는 자본의 세련된 계략으로 남아있다. 미디어라는 이름에서 우리가 느끼곤 하는 새로운 가능성은 그래서 민중과는 전혀 관계없는 것으로만 느껴진다. 지금도 그렇게 느껴지니, 과거에도 미디어는 그런 것이었으리라 생각하게 된다. 바로 지금 민중의 편에 서서 미디어를 사용해보려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과거에 이미 그런 미디어가 존재했고 그것이 어떤 변화를 불러왔다는 것은 자꾸만 잊게 되곤 한다. 그 지워진 가능성, 민중과 미디어가 만났을 때 가능했던 것들로부터 지금 우리의 고장난 상상력을 복원하는 책이 바로 <영화운동의 역사>이다.


 2002년, 지금은 사라진 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센터 프리즘이 14개의 글을 묶어 출간한 이 책은 벌써 14년 전의 책이나 여전히 새로운 내용으로 다가온다. 수록된 글들은 영화라는 미디어가 1920년대에서부터 2000년대에 이르는 시간동안 다양한 국가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사회 변혁에 기여해 온 역사를 발굴하여 다루고 있다. 영화라는 단일한 미디어를 다루고 있지만 그 미디어는 공간과 시간에 따라 전혀 다른 것으로 드러나고, 그건 퍽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이 글들은 영화에 대한 것이지만 영화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책을 읽는 과정은 미디어 운동에 대한 고민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많은 정보를 전하고 있는 책에서 그런 부분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어떤 활동에 참여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만들고 알리는 일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거기에서 그치는 일은 아니었다. 당장은 어떤 숫자적인 성과를 내야하고 하나의 결과물을 만드는데 집중해야 하더라도, 결국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 것인지에 대한 중심이 있어야 지속할 수 있다. 운동이라면 더욱이 그것이 왜 필요한 일인지를 만나는 주민에게, 미디어 자체가 낯선 이들에게, 주변의 진보적인 동료들에게 설명해낼 수 있어야 한다. 분명 쉬운 일이 아닌데, 역사는 이런 어려운 면에서 분명 도움이 되는 것 같다.



미디어를 둘러싼 사람들을 바라보기


 이 책의 글들은 다루고 있는 저항적인 영화들의 내용이나 형식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지만, 그 영화가 속해있는 사회, 그 영화를 사람들이 영화를 관람하기까지 필요한 제작, 상영, 배급의 기반에 더욱 집중하여 이야기한다. 영화의 상영환경은 어떠했는지, 극장이나 극장 바깥의 상영 공간은 충분히 존재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한 작품에만 집중하다 보면 쉽게 놓치게 되는 관점이다. 다른 미디어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의 고평가된 영화들도 이런 차원에서 평가하자면 새로운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조건들을 이야기해야만 그 미디어가 관객으로서 만나는 ‘사람들’을 그려낼 수 있는 것 같다.

 사회의 변화는 스스로 완결된 어떤 작품이 아니라 그 미디어를 둘러싼 사람들이 만들어낸다. 때문에 사회 변화를 추동하고자 하는 작품의 성패는 바로 그 사람들을, 그 사람들에게 나타난 변화를 보았을 때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책은 ‘영화운동의 10월’이라는 1920년대의 소비에트 영화를 다루는 글로부터 시작하는데, 현실 사회주의 국가라는 지금의 자본주의 사회와 전혀 ‘다른 세상’에서 영화는 어떤 ‘다른 이유’로 중요했는지, 그리고 그를 둘러싸고 당시 어떤 논쟁이 있었는지를 다루고 있다. 이런 논쟁들 또한 앞서 말한 조건들을 통해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왜 미디어의 변혁적 가능성을 분석해야 하나


 ‘미국 무성영화시기, 노동계급의 함성’은 1920년대 당시의 영화가 무성영화였다는 것을 강조한다. 무성영화라는, 지금의 기준에서 덜 발전한 기술이 꼭 그것을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무성영화가 문맹이 많았던 이주민, 하층 노동자에게 효과적인 미디어였고 그래서 노동운동에 기여할 수 있었다는 것은 오늘날의 우리가 놓치기 쉬운 일이다. 물론 어떤 시대에 기술적으로 비슷한 수준으로 발전한 미디어만이 존재하지는 않고, 카메라가 휴대하기 가벼워진 것이 그러했듯 기술적 발전 또한 다른 가능성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그렇기에 오히려 이 글들이 묻는 것은 과연 우리가 지금 존재하는 미디어와 그 가능성을 분석하고 있는지의 여부 자체가 아닌가 싶다.


 미디어의 변혁적 가능성을 놓쳤을 때, 미디어는 자본과 체제의 편에 복무하는 도구로서만 남아있게 된다. 그러한 일들은 노골적으로 벌어지기도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서는 더욱 은연중에 그런 과정이 진행되기 때문에 애초에 그런 도구인지조차 잊어버리기 쉽기에 더욱 위험하다. 그런데 미디어를 쥐고 있는 자본과 국가에 맞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영화와 같은 미디어 자체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거나, 단지 지배세력을 바꾸어 미디어를 강력히 통제하는 방식을 주장할 수 있다. 우리는 이에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좌파적 영화운동을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1920년대, 30년대의 독일 좌파들의 영화에 대한 태도와 당시 독일의 상황으로 이런 고민의 실마리를 준다. 



퍼블릭 엑세스, 어떤 방식의 정당화가 필요한가

 

 ‘비디오를 통한 대안 또는 대항의 역사’와 ‘TV를 민중의 손으로!: 퍼블릭 엑세스를 향한 역사적 실천’은 68혁명 전후의 미국과 캐나다의 영화를 들여다본다. 이 당시 존재했던 비디오 액티비즘과 퍼블릭 엑세스는 기동성 있는 촬영이 가능한 한편 TV와도 호환성을 가지게 된 비디오와 당시의 사회상이 만나면서 가능한 것이었다.

 글은 캐나다의 ‘변화를 위한 도전’이 진행한 포고 섬 프로젝트와 같은 사례들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며, 미디어를 만드는 새로운 주체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변화를 주목한다. 그러나 그것이 성공적이기만 했다고 평가하지는 않는다. 특히 퍼블릭 엑세스에 대한 정당화가 기술지상주의, 자유주의적 다원주의에 기대는 이상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지금의 미디어운동에 있어서도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사회의 변혁은 기술이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며, 우리는 기술의 변화를 수동적으로 따라가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특히 미디어가 사회 변혁에 있어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렇기에 그를 뒷받침하는 운동이 중요하며, 운동 없이 그 가능성은 실현되지 못할 것이고 마치 없는 것처럼 지워질 것이다. 또한 퍼블릭 엑세스에 있어 그저 다양한 개인이 다양한 내용을 전한다는 것이 그 자체로 진보를 보장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미국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전제이다. 우파적인 세력이나 종교집단 등 사회 변혁과는 관계없는 이들의 퍼블릭 엑세스에 자리를 요구할 때, 우리는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다양성을 위해 그들에게 자리를 내어주었을 때, 우리는 사람들 사이의 권력차를 무시하게 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한 자리는 그만큼 줄어들게 된다. 때문에 우리는 ‘기성 미디어에 의해 목소리를 빼앗긴 이들’을 위한 자리로서 퍼블릭 엑세스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글쓴이는 말한다.



투쟁에 복무하는 영화 만들기


▲ 노리아키 스치모토 감독이 만든 <미나마타> 다큐멘터리 연작의 스틸컷


 구조적인 차원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했는데 ‘1970년대 일본의 다큐멘터리 운동: 스치모토 감독과 <미나마타> 시리즈’는 그런 구조 속의 개인의 태도에 조금 더 집중하는 글이다. 글을 통해 시대적으로 또 지역적으로 멀지 않은 1970년대 일본의 노리아키 스치모토 감독과 우리를 비교해볼 수 있다. 그는 20년이 넘는 긴 시간을 중금속이 함유된 폐수를 무분별하게 방류하며 생긴 미나마타병과 그로 인해 벌어진 미나마타 지역의 투쟁과 함께하며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지역 공동체에 기여하고, 세계적 차원으로 미나마타 투쟁을 알려냈다. 막연히 카메라를 들고 미나마타병 환자를 만난다고 해서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투쟁을 둘러싼 정세도 중요했고, 환자와 주민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 취했던 방법들도 중요했다. 영화의 제작에 있어 다른 것들보다 당사자들이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을 우선으로 했고, 촬영 대상자들을 대상으로 사전 시사회를 진행하여 작품의 가능성과 의미를 설득한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는 교육의 도구로서 투쟁의 발판이 되었다. 감독이 투쟁의 일부일 때, 투쟁에 복무하는 작품의 제작을 목표로 할 때 가능한 구체적 시도들을 생각해보게 한다.



다시 지금 이 곳으로 돌아와서


 처음으로 한국에서의 영화운동을 논하는 글은 책의 마지막에 실린 ‘1980년대 이후 진보적 영화운동의 전개과정’이다. 세계 곳곳에서 거대한 규모의 이야기를 듣다가 20년 남짓한, 아직도 시작 단계에 가까워 보이는 한국의 상황을 접하니 조금 맥이 빠진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구체적으로 전망을 그려나가지 못한다면 앞서 생각했던 것들은 낭만이나 공상이 되고 말 것이다.

 87년 노동자 대투쟁, 97년의 총파업 투쟁에서 기능했던 영화 운동을 살펴보면, 비록 노동운동 자체가 위기를 맞는 시기이기는 하나 정세를 읽고 그에 결합하는 것이 미디어 운동의 필요를 증명하는 것이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주요한 이슈는 무엇인지, 미디어 운동은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

 출간 이후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시간 동안에 상황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제도화된 영역은 어떻게 증가했고, 보다 현장성 있는 시도들은 어떻게 계속되고 있나? 더욱 강화된 신자유주의에 영향을 받거나 그에 기여하고 있지는 않은가? 인터넷을 기반으로 영화를 넘어 미디어 운동의 영역이 확장되었다면, 이를 활용한 시도들과 여전히 실현되지 못한 가능성은 무엇인가? 지금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미디어를 만든다는 건 결국 이런 질문들과 맞부딪혀가는 과정일 것이다. 책이 제시하고 있는 역사는 아주 일부분이지만, 그 일부분이라도 있으면 지금의 충돌을 덜 부유하는 것으로 정리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필자 소개] 이세린 (구로FM)


2014년부터 구로공동체라디오 구로FM에서 활동하고 있다. 성공회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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