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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81호 리뷰] 고통의 디테일과 디테일의 고통 - 교수대의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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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3. 4. 12.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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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81호 리뷰 2012.11.13]

 

고통의 디테일과 디테일의 고통 - [교수대의 비망록]

 

박혜진(민음사 에디터)


죽음은 북향. 뜨는 해도 지는 해도 보이지 않는 곳, 동쪽 벽 철창에 그림자가 새겨지는 잠깐 동안만 태양이 허락되는 곳. 267 감방은 북쪽 방향이어서 볕과 빛이 잘 들지 않았고, 금방 지나가 버릴 태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이들의 모습은 그곳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쓸쓸한 광경이었다. 율리우스 푸치크가 1942년 판크란츠 감옥에서 겪은 이 풍경을 나는 『교수대의 비망록』을 읽으며 알았다. 죽음은 또한 고요. 물이라고는 변기 안에 있는 것이 전부였던 어느 밤, 목이 마른 푸치크는 여섯 걸음 떨어진 변기까지 조용히 기어갔다. 어둠 같은 조용함을 그는 이렇게 직유한다. “죽음의 모든 영광이 아무도 깨우지 않는 데 달려 있다는 듯했다.”

옥중 수기라면 많은 책이 있고 시대와 나라에 따라 원하는 책을 선택할 수도 있지만, 그중에서도 나는 푸치크를 읽는다. 이 책의 목소리는 낮고 작다. 감방에 해가 들거나 들지 않거나 하는 일, 그날 밤 기어간 거리가 여섯 걸음인지 일곱 걸음인지 하는 것들은 오해 마시라, 이 책의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정확하고 자세해서 어느새 나는 체험한 적 없는 일을 잊지 말자고 마음먹는다. 제목이 이끄는 대로 ‘비망’하고 싶어진다. 그것이 무슨 망명 다짐이나 되는 것처럼 결연하게, 내 눈앞에 교수대라도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낮고 작은 목소리 때문이다. 그것을 디테일의 표현 방식이라 부르면 어떨까. 『교수대의 비망록』은 고통의 디테일에 대한 책이고 그것은 우리에게 디테일의 고통을 제공한다. 지금 우리에게 없는, 그래서 쓸모 있는.

 

이 책은 체코 공산당 중앙위원회 일원이었던 율리우스 푸치크가 1942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신문받고 고문당하는 동안 담배종이에 쓴 글들을 모아서 만들었다. 인간 마음이 강하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고 안도와 감동이 교차하는 순간을 느끼게 해 주며 사회 ․ 정치적으로 안이하게 살아가는 생의 일면을 반성하게도 해 준다. 하지만 푸치크의 옥중 수기가 다른 모든 그것을 압도하는 이유는 디테일에 있다. 푸치크가 담배 종위 위에 쓴 글들은 커다란 시대에 대한 묘사도 아니고 자기 내면에 대한 깊은 관찰도 아니다. 아니어서 의미 있다. 그가 죽음 앞에서 기록한 것은 사람. 용기 있는 사람, 배신하는 사람, 싸우는 사람, 포기하는 사람, 계속하는 사람, 도와주는 사람. 말하자면 옐리네크, 뢰슬러, 코클라르, 스메톤츠 같은 사람들이다. 한 명 한 명 호명하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되새기는 그의 진술에는 애정마저 담겨 있어 독서하는 우리는 그의 의도대로 그 사람 하나하나의 이름을 기억하고 싶어진다. 기억 욕망이 망각 관성에 앞선다. 망각의 관성에 역행한 결과 디테일의 고통이 따르지만, 이걸 두고 고통이라니, 역사는 어디까지나 고유명사로만 존재한다.

 

“시대 전체에 관한 증언이라기보다는 사람에 관한 증언이 될 것이다. 그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을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혁명을 만져본 적 없는 내가 무슨 수로 그 시대의 기억을 장악한단 말인가. 기억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면 있거나 없거나 하는 사람들의 이름이 전부일 것이다. 역사를 잊어버린다는 것은 그러므로 사람들의 이름을 잊어버리는 것. 우리는 지금 얼마나 많은 사람을 잊어버리고 있는지. 하다못해 기억하려는 행동마저 얼마나 치졸하게 방해하고 있으며 그 방해를 또 얼마나 잔인하고 안전하게 구경하고 있는지. 잊지 말아야 할 이름을 부르겠다는 어떤 사전이 보급조차 이뤄지지 못하는 이야기나 옛날 얘기 지겹다며 유신의 잔재에 환호하는 풍경은 부끄럽다. 우리 모두 “나무 인형” 같다.

 

『교수대의 비망록』을 읽고 나니 기억의 목적어를 찾은 기분이다. “혹시 누군가에게 전하고 싶은 것은 없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쓰고 싶은 것은? 물론 현재를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 당신이 어떻게 해서 여기에 들어오게 되었는지, 누가 당신을 배신했는지, 사람들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당신이 알고 있는 것이 당신과 함께 사라져 버리지 않도록.” 갇혀 버린 푸치크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던 간수 콜린스키, “기대에 어긋나는 짓은 절대로 하지 않겠다”던 용감한 여자 리다……. 책이란 결국 기억 활성을 위한 촉매제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의 예전 이름이 ‘교수대로부터의 리포트’라고 들었다. 내가 편집했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 같다. 이것은 1942년 북쪽을 향하고 있던 차가운 감옥에서 보내온,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한 미세하고도 간절한 편지, 교수대로부터의 비망록이다.

 
 
 

 

  [필자소개] 박혜진

   민음사 한국문학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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