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피복단지 재단사 전태일이 분신했다. 그리고 2011년 9월 3일,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세상을 떠났다. 아들을 묻고 40년이 지나서다. 그 40년 동안 세상이 더 좋아졌는지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느 쪽으로 받아들이든, 아들의 소망을 지키기 위해 부단하게 살아온 이소선 여사의 생을 그 40년 안에서 더듬어 보자니 서글프고 애잔하다.
어느 곳에서나 마찬가지겠지만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는, 이런 언급이 송구스러울 만큼, 처참한 시련의 과정이었다. 1800년대부터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서양 제국주의에 편입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근대적 의미에서의 노동운동도 일제강점기인 1920년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자본가들의 착취와 수탈은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상황이 더해져 조선의 노동자들에게 야만스러운 수난을 감당하게 했다. 해방 후에는 미군정과 극우 세력에 의해 일제의 그것과 마찬가지인 강요를 받아야 했고, 박정희 정권은 조국근대화라는 지도이념 아래 자본가들에게는 울타리를 마련해주는 반면 민주화운동과 노동운동은 철저하게 탄압했다. 친일 재벌들과 극우 세력의 지원을 통해 만들어진 유일한 노동자 단체였던 대한노총은 간부들의 지위확보와 파벌 싸움으로 여념이 없었고, 노동자들의 생활은 점점 더 핍진해져 갔다. 그런 가운데 전태일의 분신은 노동운동의 분위기를 전환시킨 커다란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1997년과 2002년 두 차례의 대통령선거에서 권력을 잡은 민간정부는 일반 민주주의 부문을 확대하는 역할은 했으나 노동문제, 계급문제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자본의 입장을 옹호하였다. 그리고 현재 정권의 자본 친화적 성향은 극단적이기까지 하다. 전 지구적 경제상황과 맞물려 노동자-재벌이 아닌 모든 사람들의 삶은 점점 더 궁지에 몰리고 있지만, 무엇이든 나아질 것 같은 실마리는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것만 같다. 사는 게 험난한 때일수록 사람들은 위안의 품을 찾게 되는데, 노동운동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소선 여사가 그런 존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송경동 시인은 참세상에 기고한 추모 글에서 여사를 “동산”이라고 쓰는가 하면, 영화를 연출한 태준식 감독은 제작노트에서 “모든 이들이 어머니라고 부르는 인물에게 카메라를 핑계로 위로를 받고 싶어서였다”라고 밝힌다.
태준식 감독의 <어머니>가 이소선 여사의 노동운동 일대기가 아니라 그가 죽기 전 2년간의 이야기라는 사실은 포털사이트의 영화정보만 확인해 봐도 알 수 있다. 눈치 빠른 사람들은 제목과 포스터만 보고도 영화의 방향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을 것 같다.
영화를 보면 우리 주변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인정 많은 할머니 한 분이 계신다. 다시 말해서 태준식 감독의 <어머니>는 전태일의 어머니가 아니라 모든 이들의 어머니를 그린다. 자식들을 위해 고난의 세월을 몸으로 견뎌주신 우리들의 어머니를 그린다.
이소선 여사에게 위로받고 싶었다던 태준식 감독은 거꾸로 어머니만을 향하고, 어머니만을 돌보며, 어머니의 사소한 부분들까지 기억하기 위한, 순수하게 이소선 어머니만을 위한 영화를 만든다. 그러한 의도를 천연덕스럽게 드러내는 순간이 있다. 전태일 40주기 행사 후유증으로 며칠 동안 고생하셨다던 여사는 당신 때문에 자기 할 일 못하고 고생하는 사람이 많다며 씁쓸해하신다. 그러다가 손톱을 깎으려는데 힘이 없어서 손톱깎이를 누르지 못하신다. 촬영을 하고 있던 태준식 감독은 카메라를 내려놓고 여사를 돕는다. 그런데 카메라를 내려놓으면서도 레코딩을 멈추지 않는다. 화면 밖으로는 여사와 태준식 감독의 말소리가 들리고 화면 안에서는 문턱 너머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전태삼씨의 뒷모습이 보인다. 프레이밍 되지 않은 샷이다. 촬영 중에 종종 일어나는 일이지만, 이런 부분은 편집 때 걷어 내는 게 일반적이다. 그렇지만 <어머니>에서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샷으로 쓰이고 있다. 마치 이 영화는 영화로서의 영화가 아니라 어머니를 위하는 행위로서의 영화라고 공언하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도쿄대학교 와다 하루키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이소선 여사의 기억을 통해 듣는 전태일의 마지막 순간을 강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순간은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무겁고 가슴 아프다. <어머니>를 기억하게 하는 하나가 ‘내려놓은 카메라’라면 <어머니>를 기억하게 하는 또 다른 하나는 이소선 여사의 “하나가 되세요! 하나가 되세요!”라는 외침이다. “하나가 되세요!”는 노동운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의 바람이기도 하겠지만 여사의 아들인 전태일의 바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사의 40년이 어떤 것이었을지 감히 상상해 볼 수도 없다. ‘하나가 되자’는 외침은 사실 200년 전부터 있어왔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을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라는 말로 맺는다. 노동운동의 관건이 되는 일이 무엇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세월이 꽤 흘렀음에도 여전히 절실하게 같은 것을 바라야 하는 건 너무나 허망하다. 쓰라린 것이다.
끝으로 <어머니>는 나름의 미덕을 가진 영화이지만, 태준식 감독의 다른 몇몇 영화들처럼 영화를 이루는 요소들이 사적인 기호에 따라 병렬되어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이 점은 보는 사람에 따라 방해가 될 수도 있겠다.
[필자소개] 조민석 (다큐멘터리 단체 미디어숲 회원)
몇 편의 장편 작업에 참여했다.
참여작: <고양이가 있었다>, <동굴 밖으로>,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세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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