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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94호 학습소설] (5) 너도 찍고 나도 찍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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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5. 8. 8.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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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94호 학습소설 2015.8.20]



(5) 너도 찍고 나도 찍고

- 3D 프린터의 가능성

주일(창작자)



#1. 카페 아우라


 카페는 사람들로 넘쳐났다. 저마다 전화기로 사진을 찍고 어딘가로 올렸다. 한 자리가 비면 다른 사람들이 앉아 똑같은 일을 반복했다. 간혹 벽에 걸린 사진이나 선반 위에 놓인 귀여운 인형을 찍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상대방의 얼굴, 자신의 얼굴, 탁자 위 커피잔, 쟁반에 담긴 케익 등을 찍었다. 어느 시간에 누가 찍어도 비슷할 것 같은 사진들. 그 사이에서 액티가 열심히 원고를 쓰고 있었다.


 '수 천년의 역사 속에서 민중이 예술품을 소장한 역사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하다. 대부분의 예술품은 비싸니까. 그림이든 조각이든 전문가의 솜씨가 느껴질 정도로 멋진 작품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이 구입하기엔 값이 비쌌다. 참으로 다행인 점은 대다수의 민중은 소위 '작품'을 경험·체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것의 가치를 알지도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굳이 소장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민속화나 풍속화처럼 민중의 일상에 깊숙히 들어온 작품들이 점차 보급되기도 했지만...'


 탁자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이 울렸다. 협이였다.


- 오랜만이다. 잘 지내?

- 지금 어디야?

- 카페 아우라.

- 아, 알았어. 금방 갈게.

- 여긴 왜...


 오지 말라는 말을 하려 했지만, 협이의 동작이 조금 더 빨랐다. 그리고 5분 후,


- 혼자서 뭐해?


 협이는 액티의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 본 후 자리에 앉았다.


- 글 쓰는 게 재밌냐?

- 재미는 뭘. 써야 되니까 쓰는 거지. 쓰면서 공부도 하고.

- 그나저나 너 때문에 나 완전히 새됐다.

- 왜?


 협이는 주머니에서 못 보던 전화기를 꺼내서 액티에게 내밀었다. 


- 예전에 네가 엄청난 물건이라고 자랑하던 스마트폰 있잖아. 아마존에서 내놓은 파이어폰. 마침 내 전화기가 고장나서 새 기계 찾던 차에 20만원에 살 수 있다고 해서 미국에서 직구했거든. 그런데,


 액티는 파이어폰이란 말이 나오자마자 커피에 꽂힌 빨대를 입에 갖다 대고는 협이의 시선을 피했다.


- 그런데 이걸로 할 수 있는 게 없어. 한국에서 뭐 되는 게 있어야지. 안경 없이 작동하는 입체 화면이나 좀 신기할까, 나머지는 한국 폰보다 후졌어. 너는 이딴 제품을 엄청난 물건인 것처럼 떠들었냐. 책임져. 


 쉼 없이 빨대를 타고 올라가던 갈색 액체가 잠시 멈춘 뒤 수면으로 내려갔다. 액티가 큰 결심을 한 듯 자신의 신용카드를 꺼내 협이에게 건넸다. 


- 쏘리. 이걸로 아무 거나 마셔.

- 콜.



#2. 대량생산의 시대의 종말


 카페 아우라에서 가장 비싼 음료를 받아든 협이는 신나는 표정으로 자리에 돌아왔다.


- 그런데 아마존은 왜 이런 엉터리 전화기를 대량으로 만들고 뒤늦게 떨이로 내놓을까. 도무지 이해가 안돼. 처음부터 적당한 양만 만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것 아냐.

- 그냥 내가 미안해. 내가 죽을 죄를 지었어. 난들 이렇게 될 줄 알았나.

- 너에게 따지는 게 아니야. 정말로 궁금해서 그래. 예전에야 사람들이 규격화, 획일화된 제품을 사서 쓸 수밖에 없었지만 요즘 세상에는 자기 취향에 맞는 물건을 콕콕 집어서 쓰곤 하잖아. 그런데 왜 대기업들은 유연하게 생산하지 못하는 거지? 이렇게 재고를 많이 남겨서 자기들도 손해를 보고 소비자들에게도 괜히 필요없는 소비를 부추기냔 말야.

- 애플의 아이폰이나 삼성의 갤럭시처럼 대량으로 생산해도 팔리는 건 여전하니 꼭 네 말이 맞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매일 쏟아지는 인터넷 떨이 상품들을 보면 어느 정도 일리는 있어 보인다.

- 차라리 아무 거나 쓰면서 기다리다가 구글 아라폰을 사는 게 나았으려나.


 액티는 아무래도 원고를 계속 쓰는 건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지 랩탑의 화면을 덮었다. 협이는 액티의 반응이 반가웠는지 소파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냈다.


- 요즘 3D 프린터로 못 만드는 게 없다는데 전화기도 만들 수 있을까?

- 안될 거 없지. 지금도 악세서리는 나오고 있고 적어도 외장재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겠지.

- 3D 프린터 하나에 얼마나 하나? 

- 보통 100만원은 넘는데 싼 건 50만원에 살 수도 있고, 직접 조립하는 DIY제품은 20만원 대까지 내려왔더라. 작년에 일부 특허가 만료되어 저가 프린터가 우후죽순 쏟아지고 있나 봐. 얼마 지나지 않으면 지금의 레이저 프린터 가격은 될 것 같아. 아직 재료는 비싸서 실용성은 떨어지겠지만.

- 재료는 뭘 쓰는데?

- 출력 방식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철사처럼 감겨 있는 플라스틱을 녹이거나 석고 같은 가루들을 주로 사용하고 특수 목적 프린터에서는 음식물부터 콘크리트, 금속 등을 사용해. 가열해서 녹일 수 있거나 유연한 형태의 물질이면 무엇이든 사용할 수 있다고 봐야지.

- 비싸?

- 아직은. 휴대폰 케이스 열 개 정도 만들 만큼의 플라스틱 필라멘트가 2,3만원은 가니까 종이에 인쇄하는 프린터처럼 쉽게 쓰긴 어렵지. 특히 아직도 저가형 프린터를 쓸 때는 가끔 오류가 발생하거나 출력 대상의 원본 격인 모델링 파일의 문제 때문에 실패작을 만드는 일이 다반사거든. 몇 시간씩 기다렸는데 생각한 것과 다른 물건이 만들어지면 허무하지 않을까. 재료도 아깝고.

- 그래도 뉴스나 잡지만 봐도 3D 프린터가 세상을 바꿀 것처럼 말하던데. 음식도 만들고 인공 장기도 만들고 가족이나 연예인 피규어를 만들기도 하고. 아, 큰 프린터로 집을 만드는 영상도 뉴스에 나오더라.

- 가능성이야 무궁무진하지. 예전에는 신문이나 잡지, 책을 만든다는 건 인쇄·출판전문가들이나 가능한 일이었는데 이젠 누구나 집에서 출력해서 제본을 맡길 수 있게 되었잖아. 마찬가지로 3D 프린터가 좀 더 대중화되면 누구나 자기가 필요한 물건을 직접 출력할 수 있으니 지금까지의 경제 구조가 어느 정도는 무너질 가능성도 있어.

- 경제 구조? 자본주의? 지금의 시장경제가?

- 난 그럴 것 같은데.




코카콜라사의 재활용 브랜드 ‘EKOCYCLE’에서 내놓은 3D 프린터 



#3. 맞춤 생산의 시대


 액티도 소파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커피잔이 빈 지는 오래되었고 협이와 나누는 대화가 길어져서 목이 탈 만도 했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이야기를 이어갔다.


- 기업들은 규모의 경제를 이루려면 대량 생산을 해야 했어. 포드가 시작한 컨베이어 벨트처럼 끊임없이 돌아가는 공장을 가동해야 했고 <모던타임즈>의 찰리 채플린처럼 노동자가 부속품이 되어 쉼없이 움직여야 공급 물량을 맞출 수 있었지. 그래야 최소 비용으로 최대 이익을 낼 수 있으니까. 소비가 미덕으로 장려되고 개인보다는 사회 전체의 가치가 우선시되는 사회에선 그런 생산 시스템이 효과가 있었어. 하지만 소득 수준이 올라가고 개개인의 취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요즘에는 그런 방식만으로는 살아남기 힘들게 되었지.

- 그래서 기업들이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방향을 바꾼 거 아냐? 고객의 취향을 최대한 반영하여 다양한 상품을 생산하면서 시장의 변화에 재빨리 반응하는 방식으로. 

- 그렇지. 하지만 그렇게 만드는 제품의 수가 몇 개나 될까. 의류 회사에서 백 가지 디자인의 티셔츠를 만든다 하더라도 누군가의 취향에는 안 맞을 수 있잖아. 아무리 다양화해봤자 전 세계 인구만큼의 개인화(customized)는 불가능한 게 이 체제의 한계지.

- 결국 비용 문제 아닐까. 기성복보다 맞춤 양복이 비싼 이유. 요즘은 티셔츠에 들어가는 그림을 인터넷으로 자기가 골라서 주문할 수 있는 사이트도 있긴 한데 아무래도 기성복 사는 것보다는 비싸더라고.

- 맞아. 비싸긴 하지. 옷이야 그나마 개인 맞춤이 쉽지만 더 개인적인 제품들은 어떨까. 내 귀 모양에 쏙 맞는 이어폰이나 보청기, 혹은 치아나 안경은 어떨까. 정말 나만을 위한 제품을 만든다면 비용이 꽤 많이 들지 않겠어? 물론 비용을 더 지불해서라도 그걸 쓸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옷에 몸을 맞추는 심정으로 적당한 걸 골라서 쓰고 말겠지. 그런데 3D 프린터는 그 비용을 낮출 수 있어. 

- 어떻게?

- 생산 방식의 민주화. 그리고 기술의 발전과 오픈소스 모델링으로.


 협이는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액티를 바라봤다. 평소에도 제법 똘똘한 모습을 보인다고 생각했지만 오늘따라 액티의 모습이 너무 진지해서 특별히 장난을 치거나 시비를 걸 수 없었고, 그저 경청할 뿐이었다. 



#4. 생산 방식의 민주화


 액티의 연설은 계속 되었다.


- 민주주의란 게 한 명 한 명의 시민들이 국가나 사회의 주인이란 의식을 갖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말하는 것이라면 3D 프린터를 이용해서 나만을 위한 제품을 만드는 건 생산 방식의 민주화라고 해야 할 거야. 누구나 생산자가 되어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고 더이상 소수 기업의 독점적 공급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으니까.


 협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한 자 한 자 받아 적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 관련 기술이 발전하고 사용자가 늘면 당연히 프린터의 가격과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은 낮아질 거야. 그리고 컴퓨터를 쓸 줄 알던 사람보다 스마트폰 사용법을 아는 사람이 많아진 것처럼 3D 프린터의 진입 장벽도 낮아지겠지.


 액티가 덮었던 컴퓨터 화면을 열어 무언가를 검색했다. 액티가 내민 화면에는 여러 장의 3D 모델링 사진이 나와 있었다. 찻주전자, 게임 캐릭터, 건물 설계도, 휴대폰 그림...


- 3D 출력을 하려면 소스가 될 모델이 있어야 해. 그걸 만드는 작업을 모델링(modeling)이라고 부르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컴퓨터 그래픽을 배운 사람들만 할 수 있었어. 캐드(CAD)나 3D MAX 같은 모델링 프로그램을 이용해서 1mm까지 딱 맞도록 입체적인 그림을 그려야 했고, 2차원의 그림과는 다르게 전후 좌우 위아래 모두 빈틈없이 그려야 했지.


 다시 컴퓨터에서 뭔가 검색한 액티는 전망대에 설치된 망원경을 닮은 기계를 협이에게 보여주었다.


- 이건 3D 스캐너야. 프로그램으로 모델링을 하는 건 원하는 대로 그릴 수 있다는 장점은 있는데 너무 시간이 많이 걸려. 게다가 단순한 형태의 제품이면 몰라도 복잡한 모양을 띄고 있다던가 자연 속 물체를 모델링하는 건 거의 막노동에 가까웠지. 아무리 컴퓨터 그래픽이 발달해도 자연을 똑같이 모사하는 건 불가능하거든. 아무래도 어색하잖아. 그러던 중에 있는 그대로 스캔할 수 있는 스캐너가 나온 거야. 어떤 물체를 가운데에 놓고 이쪽 저쪽에서 스캔을 하면, 짠! 하고 모델링이 끝나는 거지. 예전에는 스캔 해상도가 낮아서 모델링한 개체에서 그래픽 티가 팍팍 났는데 요즘에는 거의 실사처럼 보일 정도로 정밀한 스캔이 가능해서 가능한 범위 내에선 대부분 3D 스캐너를 써.


 화면 속 사진에는 거의 실사를 방불케 할 정도로 정밀한 그림들이 나타났다. 특히 영화와 게임 캐릭터를 위한 모델링 사진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사와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그래픽 티가 나지 않았다.


- 이 정도면 컴퓨터 그래픽 하는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겠는걸? 그냥 아무 거나 갖다 놓고 스캐너 돌리면 끝나는 거잖아. 모델링을 마친 후 프린터로 출력. 끝. 그런데 스캐너는 얼마야?

- 3D 프린터랑 비슷해. 수십 만원 대에서부터 몇 억 대까지 다양해. 비쌀수록 정밀하게 스캔할 수 있지.

- 저렴하게 보급되려면 오래 걸리겠지?


 오늘의 강의를 통틀어 가장 흐뭇한 표정을 짓는 액티였다. 그런 질문이 나올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여유롭게 대답을 하는 액티.


- 이미 준비는 끝났어. 각자가 들고 있는 스마트폰을 이용하면 누구나 쉽게 3D 모델링을 할 수 있지. 




www.123dapp.com 사이트 갤러리에 올라온 3D 모델들



#5. 개방과 나눔의 시대


 액티는 인터넷 브라우저로 http://www.123dapp.com/catch란 사이트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들이 모델링되어 있는 사진들이 나와 있었다.


- 캐드로 유명한 오토데스크(Autodesk)사에서 몇 년전에 스마트폰 앱을 하나 출시했어. '123 캐치'란 앱인데 누구나 무료로 받을 수 있어. 앱을 설치한 뒤에 모델링하고 싶은 물체를 중심에 두고 다양한 각도와 높이에서 수 십장의 사진을 찍으면 잠시 후에 입체 모델이 완성돼. 사진을 많이 찍을수록, 촬영 지점이 다양할수록 정밀하고 완성도 높은 모델이 만들어지지. 


 3D 갤러리 화면에는 유명 관광지의 부조나 조각상, 반려 동물, 사람 얼굴, 화분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앱을 이용해서 만든 3D 모델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 이야. 이런 식이면 세상 모든 물건을 스캔 해 놓을 수도 있겠다. 사진이나 동영상 찍듯 앱으로 모델을 만든 뒤 나중에 3D 프린터로 출력하면 모양이 닮은 복제품을 남길 수 있는 거잖아.

- 응. 사진 찍어서 출력하는 거랑 전혀 다를 게 없어. 그리고 더 놀라운 건 이거야.


 액티는 다시 컴퓨터를 자기 앞으로 당긴 뒤에 무언가를 찾은 뒤에 협이에게 보여주었다. 실사 촬영이 아니라 그래픽 프로그램으로 그린 제품들의 사진이 보였다. 꽃병이나 휴대폰 케이스 같은 투박한 디자인부터 복잡한 기계의 부품으로 보이는 작고 정밀한 제품까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3D 모델들이 나타났다.


- 이게 다 뭐야?

- 전세계의 이용자들이 올린 3D 모델들이야. 방금 본 것처럼 주변 사물을 스캔하던가 컴퓨터 그래픽을 공부하면서 뽐내려고 만든 것도 있지만, 휴대폰 악세서리나 실내 장식품, 조각 같은 예술 작품, 심지어는 각종 기계나 장치들의 부품도 올라오고 있어.

- 아무 대가없이 올리는 거야?

- 응. 예전에 카피레프트 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좋은 건 누구나 함께 누리고 소유하자는 일종의 공유 경제 활동이지. 누군가 모델을 만들거나 스마트폰 스캔 앱으로 찍고, 누군가는 그걸 내려받아 프린터로 찍고. 과거에는 예술가들이 오랜 시간 동안 만들었고 기업들이 전문적인 설비를 이용해 만든 작업을 몇 시간만에 끝낼 수 있을 뿐더러 그 대상의 범위도 무제한에 가까울 정도로 넓어지고 있어.

- 그럼 내가 휴대폰 뒷뚜껑을 잃어버린 뒤 제조사에서 만든 부품을 사지 않더라도 누군가 만든 모델을 내려받아 3D 프린터로 찍으면 된다는 거지? 특허 같은 게 문제되지 않을까...

- 지금은 그럴 지로 몰라. 하지만 기업들이 전세계 사용자들이 자기들 제품의 치수를 재고 스캔해서 출력하는 걸 일일이 막는 게 가능할까? 불가능하지. 내가 아까 시장 경제가 무너진다고 과장을 하긴 했지만 틀린 말은 아닌 게 이미 기업들도 3D 프린터가 불러올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거든. 전통적인 생산자와 공급자로 남는 게 더이상 힘들 것 같다는 예감. 그래서인가 레고사는 3D 프린터와 함께 가는 길을 선택했더라.

- 조립식 장난감 레고 만드는 레고사?

- 맞아. 레고에서 나오는 제품이 엄청나게 많긴 하지만 기본은 손가락만한 조각이잖아. 누가 만들어도 별로 다를 것 같지 않은 부품이지. 어떤 사람이 기껏 다 만들었는데 부품 하나가 모자라서 완성이 안되면 어떻게 할까. 그냥 부품 하나만 출력하면 되는 거 아니겠어? 그런 사실을 깨달은 레고사는 개인이 프린터로 레고 블럭을 찍어도 간섭하지 않기로 했어. 대신 다른 분야에서 수익을 창출하기로 한 거지. 모바일 레고 조립 앱을 판매한다던가 프린터로 쉽게 찍을 수 없는 새로운 형태의 디자인을 개발하는 식으로. 어찌 됐건 레고의 영향권 내에 소비자가 머물 수만 있다면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라는 대인배스러운 태도를 갖기로 했더라고. 

- 현명하네. 만약 특허권을 내세우며 소비자들과 소송전을 벌인다면 이미지가 추락하는 것은 물론 그런 대응에 반발하는 이용자들이 냅스터와 소리바다를 통해 음악을 공유했듯이 레고 블럭 모델을 공유할 거 아냐.

- 그렇겠지. 뭐 레고야 디자인이 너무 단순해서 직접적인 피해가 있으니까 재빠르게 대처했겠지만, 다른 산업에서도 수수방관하고 있을 순 없을 거야. 다른 예로, 지금은 어떤 제품을 만들면 각 부품들을 의무적으로 보관해야 하는 기간이 있거든. 나중에 수리를 요청하는 고객들을 대비해서 창고에 쌓아두는 거지. 하지만 그 공간 운용과 관리에는 비용이 들 수밖에 없는데 3D 프린터를 이용해서 언제든 부품을 만들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어. 불필요한 유지관리비를 소모할 필요가 없는 거지. 게다가 그 부품들을 배송하는 물류비까지 생각하면, 기업들에게도 그리 큰 손해는 아닐 거야.

- 결국 기업들도 자신들의 소유권을 일부는 개방할 수밖에 없겠네. 그 역시 이윤 추구의 결과겠지만.   

- 개인들이 자신들이 올리는 3D 모델에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고 CCL처럼 공유를 전제로 배포한다면 지금과는 다른 생산구조를 바탕으로 한 경제 구조가 보편화 될 지도 몰라. 적어도 지금보다는 열려 있고 평등한.  


 열심히 대화하던 두 사람은 지쳤는지 다시 소파에 깊게 몸을 심고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 '123 catch'으로 찍은 뒤 출력까지 할 수 있다는 예제 영상 중 일부



#6. 이발소 그림


- 꼭 경제적 이득만 있을 것 같진 않아.

- 응? 무슨 말이야?


 협이의 말에 눈을 감고 졸고 있던 액티는 잠결에 대답을 했다.


- 3D 프린터가 보급되면 꼭 경제적 차원에서만 변화가 일어나는 건 아니라는 말이야. 예술이나 창작, 교육 분야에서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올 거야.

- 어떻게?


 액티는 여전히 피곤했는지 대답이 짧았다.


- 일단은 모방으로 시작하겠지. 지금 내가 백만원 짜리 핫토이 아이언맨 피규어를 갖고 싶어. 하지만 늘 그렇듯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지 않으면 살 수 없어. 그럼 어떻게 할까. 기존 제품을 스캔한 뒤 3D 프린터로 찍겠지. 좀 조잡하지만 몇 천원이면 만들 수 있으니 한동안은 대리만족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다가 아예 피규어 만드는 데 흥미를 갖게 되고 출력한 제품을 더 근사하게 만들기 위해 정교하게 세공을 하고 색칠을 하겠지. 나중에는 나만의 작품을 만들 수도 있을 거야. 핵심은 예전에는 미술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고 재주가 없다고 생각하던 사람도 모방을 시작으로 해서 쉽게 창작의 세계에 들어설 수 있다는 거야. 더 좋은 건 3D 프린터를 이용하면 한 번 만든 제품을 무제한으로 복제할 수 있다는 점이지. 발터 벤야민이 기술복제시대에는 예술작품의 고유한 아우라는 사라지더라도 그 과정에서 예술이 대중화되며 궁극적으로 예술의 민주주의를 가져온다고 한 것처럼, 누구나 쉽게 창조·생산·복제를 하면서 전문성이란 권위에 짓눌려 아무 것도 못하던 사람이 꼼지락할 여지가 생기는 거지.


 액티가 협이를 바라보는 눈은 그동안 볼 수 없던, 감탄과 존경심을 가득 담은 시선으로 바뀌었다.


- 예술 분야의 기득권층은 이발소 그림을 키치로 보거나 졸부 근성의 발현으로 보겠지만 누구나 집에 그림 하나씩을 걸어둘 정도로 예술에 대한 욕구를 갖고 직접 그리기고 만들기까지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이념과 일치하는 진보가 아니겠어?

- 너 어디 아파?


 협이는 액티의 말을 가볍게 무시하고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 보통은 ‘찍어낸 듯한’이란 표현은 판에 박힌, 대량생산의 의미로 폄하되는 표현이지만 3D 프린터를 통해 세상 곳곳에 예술품이 보급되고, 직접 창작하고 생산하는 분위기가 퍼진다면 그때는 그 의미도 달라지지 않을까? 어쩌면 판화처럼 미술 조소의 분야 중 하나로 입체 인쇄가 인정받을 지도 모르지. 아무튼 경제 구조나 예술 창작 분야 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에서 기존 권위를 타파한다는 의미로 3D 프린터가 상징하는 변화는 결코 작지 않다고 봐.


 액티는 슬쩍 컴퓨터 화면을 열어 협이가 오기 전까지 쓰고 있던 원고에 무언가를 기록했다.

 '벤야민, 복제, 아우라, 권위, 민주주의...'

 협이는 카페 직원에게 리필을 부탁하러 잔을 들고 일어났다.


- 액티야, 그런데 이 카페 이름은 왜 아우라일까?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던 액티는 협이를 바라보며 아주 진한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바보야, 농담이야?'



#7. 3D 사진관


 둘은 밤늦게까지 수다를 떨었다. 손님들은 모두 나갔고 알바생들도 슬슬 정리를 하는 분위기였다.


- 눈치 보이는데 우리도 일어날까?


 협이와 액티도 카페를 나와 조용한 길을 천천히 걸었다. 지나가는 차도 별로 없어 적막했다. 무언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


- 요즘 카페 너무 많지 않냐? 누가 보면 한국 사람들은 커피만 마시고 사는 줄 알 것 같아.

- 하긴. 예전에는 밥값만큼 비싼 커피를 마시는 걸 욕하는 분위기였는데 어느새인가 다들 밥먹고 커피 마시는 건 일상이 됐지.


 두 사람은 걷다가 한 사진관 앞에 멈춰섰다. 어두운 조명이 사진관 진열창 속 액자 몇 개에 빛을 비추며 나 아직 여기 있다고 목청 높여 떠들고 있었다.


- 아직도 사진관이 있구나. 예전엔 동네마다 사진관이 몇 개씩 있었는데 이젠 우체통만큼이나 찾기 어려워진 것 같아.

- 그러게. 인터넷으로 주문하거나 집에서 뽑으면 되니 굳이 사진관에 올 일이 없어졌잖아. 나도 여권 사진 찍을 때 말고 사진관에 와 본 적이 있나 싶다.  


 협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액티가 걸어가며 옆에서 뭐라고 떠들었지만 하나도 듣지 못할 정도로 깊게 빠져들었다. 그러다 우뚝 선 협이.


- 야, 동네마다 3D 사진관이 하나씩 생기면 어떨까.

- 응? 3D 사진관?

- 어. 아직까진 3D 프린터 가격이 싸지도 않지만 종이 프린터처럼 싸진다고 하더라도 재료값도 비쌀 거고 조작법이 쉽지는 않을 거 아냐. 또 하나 찍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린다며. 그럴 바엔 차라리 전문적인 출력소가 하나쯤 있어서 자기가 찍고 싶은 모델링 파일만 가져간 뒤에 전문가에게 출력을 맡기는 게 싸고 편하지 않겠어?

- 예전에 사진관에서 사진사들이 사진 찍어주듯이?

- 맞아. 결국에는 각 집마다 하나씩 들여 놓겠지만 지금처럼 과도기에는, 특히 아직 3D 프린터가 뭔지 모르는 사람도 많은 이 시점에는 보급을 위해서라도 교육시설을 겸한 3D 사진관이 있으면 좋겠지.

- 그런 게 있으면 좋겠다. 3D 그래픽도 가르치고, 스마트폰을 이용한 쉬운 스캔 방법도 알려주며, 궁극적으로는 출력까지 할 수 있어서 3D 출력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나 모여드는 공간... 괜찮은데? 네가 먼저 하나 열어보는 건 어때.

- 에이, 난 사업 같은 데엔 소질이 없어. 음...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미 거의 모든 기반을 보유하고 있는 조직이 있는데.

- 응? 어디?

- 미디어센터.

- 미디어센터? 

- 응. 미디어센터. 이미 라디오나 비디오와 같은 각종 미디어를 가르치고 있고 제작해서 결과물까지 만들게 도와주고 있잖아. 다루는 매체 중 하나에 3D 프린터만 추가하면 아주 간단히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차피 예술은 시대에 따라 변하고 추가되는 거니 미디어센터도 시대의 흐름에 발맞춘다는 의미도 있고, 다른 단체나 기업들이 이익을 노리고 달려들기 전에 미리 기반을 닦아 두는 게 필요할 것도 같아. 아무래도 공공적 성격의 단체니까 자리 잡기도 수월하지 않을까.

- 이미 몇몇 단체가 자격증 교육이나 출력을 위한 공간을 운영중이긴 한데 사진관 개념으로 일반인들에게 친근하게 접근한다면 차별성은 있을 것 같다. 너 오늘따라 놀라운 발언을 많이 내뱉는다? 정말 어디 아픈 거 아냐?

- 내가 너한테나 무시당하지 다른 데에선 다들 날 존중해준다고.

- 어디?


 티격태격, 사진관을 뒤로 하고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목소리만이 밤길에 울려 퍼졌다. □




 ▲이젠 거의 사라진 동네 사진관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장미사진관’)




[필자소개] 주일


전기로 돌아가는 것을 좋아하고 라면을 좋아하는 혼자 사는 남자




* 참고자료


-3D 프린터 건축 뉴스

http://www.yonhapnewstv.co.kr/MYH20150121014700038/


-Autodesk 123D Catch 를 이용한 건물 스캔 사례영상

https://youtu.be/Vtj4P9oqsoM


-레고사의  3D 프린터에 대한 입장

http://www.sciencetimes.co.kr/?news=소비자에게-3d프린터-레고-제작-허용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https://ko.wikipedia.org/wiki/기술복제시대의_예술작품


-브라질 예수상을 드론을 이용해서 3D 스캔

https://youtu.be/-ucLIckILT4


-3D프린터 전문점

https://www.youtube.com/watch?v=6G5AoL7ubEo


-3D복사기 다빈치(스캔+출력)

http://www.amazon.com/XYZprinting-Vinci-All—Printer-Print/dp/B00OCG91IK/ref=sr_1_11?ie=UTF8&qid=1435992155&sr=8-11&keywords=3d+printer


-한국에서 운영되고 있는 ‘3D사진관’ 기사

http://www.bloter.net/archives/224018




* 소설에 담지 못한 두 가지 이야기


-자원 재활용 : 코카콜라 3D프린터 EKOCYCLE CUBE

http://www.coca-colacompany.com/cokestyle/ekocycle-transforming-3d-printing-using-recycled-plastic-bottles


-예술작품, 문화재 복원에 활용되는 3D 프린터

http://www.kocca.kr/common/cmm/fms/FileDown.do?atchFileId=FILE_000000000211285&fileSn=1&bbs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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