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92호 리뷰 2015.03.23]
한국사의 뒤안길에서 들려오는 오르페우스의 노래
- <어느 사진가의 기억> 리뷰
홍지수 (중앙대학교 철학과)
1 물화(物化)된 세계
우리는 물화된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계는 자본주의의 산물로서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 삶 전체를 '돈'이 지배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윤을 추구하는 마음은 우리 삶 곳곳에 뿌리 깊게 침투해 비물질적인 것들까지 상품으로 만들어버립니다. 토지, 화폐, 인간은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 상품화시켜 시장에서 거래합니다. 인간과 세계를 설명하는 학자나 그것들을 재현하는 예술가들조차 돈 되는 것을 만들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자본가들의 성공 신화가 책으로 팔리기도 하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장군의 영웅담이 영화로 팔리기도 합니다. 이런 것을 만드는 이들은 자신들이 내놓은 것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에 대해서는 무감각한 듯 보입니다. 그저 내게 이익이 되면 그만입니다.
2 물화된 예술
예술이 '예술'로 불리게 된 역사를 떠올려 보면 이는 부끄러운 일입니다. 고대의 예술은, 플라톤에서는 "모방에 대한 모방"이라 하여 기술보다 하찮은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서는 시가 특정한 규칙에 따라 인간의 행위들을 재현한다고 하여 일종의 정신활동으로 여겨졌습니다. 17세기에 이르러서는 회화나 조각도 정신활동으로 여겨지면서 실용적인 목적에 따라 생산에 이용되는 기술들과 구별되었습니다. 예술이 정신적인 가치를 구현하는 활동으로 여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술이 돈 되는 일에 이용되는 건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예술의 정체성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일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예술의 경계가 모호해진 데에 있습니다. 예술이 이성적인 틀에서 밀려 나와 감성적인 인식 아래 놓여버렸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 전승되어 오던 특정한 규칙 같은 것들은 경멸하고 감상자의 단순한 동물적 감각을 자극하는 것들을 예술이라 부르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3 신화(神化)를 꿈꾸는 사람들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것들이 단번에 지금과 같은 지위를 갖게 된 것은 아닙니다. 누군가가 품었던 열정, 그에 따라 겪었던 수난들이 쌓이고 쌓여 역사가 되고, 그것이 또 다른 누군가로 인해 연결되어 지금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자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허리끈을 졸라맸던 부모님들이 없었다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회의 부품처럼 일하는 노동자들이 없었다면, 인간, 세계 그리고 우주의 미스터리를 설명해준 철학자들이 없었다면, 정신적 이념을 재현해서 보여준 예술가들이 없었다면 세계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상하면 아찔해집니다. 지금의 우리는 어떨까요? 모두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만 산다면 우리의 역사는 이어질 수 있을까요? 그러나 물화된 세계에서도 여전히 지고한 가치를 추구하는 이들이 있기에 역사는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희망적이고 고마운 이야기일지 몰라도, 이를 직접 겪는 이들은 냉혹하고 쓰라린 시련을 견뎌야 합니다. 지고함이란 실현 불가능한 순진한 꿈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들은 시련을 견디면서까지 계속 나아가는 걸까요? <어느 사진가의 기억>에 등장하는 김영수 사진가는 거대한 자본의 힘이 예술을 짓누르는 시대에 사진을 찍는 예술가입니다. 누구나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자기 이익을 좇는 일에만 관심을 두는 시대에 김영수 사진가는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작가적 완성을 향해 미련하고 고지식하게 자신의 사진 작업을 이어나갑니다. 죽기 전까지 손에서 카메라를 놓지 않습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감독은 영화를 통해 김영수 사진가를 재현하며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을까요?
▲ <어느 사진가의 기억>(2014, 이창민)
4 <어느 사진가의 기억>
<어느 사진가의 기억>은 김영수 사진가를 재현합니다. 김영수 사진가가 사진에 담으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 찾아 나서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김영수 사진가는 완성하고자 했던 작품들을 마무리하지 못한 채 죽습니다. 그런 김영수 사진가를 재현하는 <어느 사진가의 기억>은 사진가를 영화에 완전히 담아내지 못합니다. 김영수 사진가를 카메라에 담았다고 해서 사진가의 기억까지 완전히 드러나 보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이 부딪힌 한계가 예술로서의 그들의 작업을 좌절시켰을까요? 김영수 사진가는 의식이 흐려진 상태에서도 사진을 완성하겠다는 의지를 놓지 않았습니다. <어느 사진가의 기억>은 불완전한 기억의 조각들을 더듬어 김영수 사진가의 기억을 따라올라 갑니다. 어쩌면, <어느 사진가의 기억>을 보고 있는 우리는 김영수 사진가에게 쓸쓸함을 느끼는 것 이상의 어떤 영감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영화를 보는 우리도 영화 속 인물들과 함께 기억의 조각들을 따라 올라가 사진가 김영수를, 김영수의 의지를, 정신을 그리고 마침내 그의 이상이 닿아 있는 저 어딘가까지 도달할 수 있게 된다면 말입니다.
김영수 사진가는 사진가가 되기 전에는 평범한 삶을 살았습니다. 젊은 시절, 서구 문화를 동경하던 그는 당시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딱히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카페를 운영하면서 그곳에 모여 한국 사회의 현실을 고민하는 서울 문리대 학생들과 친해지게 됩니다. 이후 그는 그들의 독재 반대운동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되어 아무런 연고도 없는 대전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그곳에서 우연히 사진을 알게 되고 그때부터 사진가의 삶을 살게 됩니다.
김영수 사진가는 사람과 사물의 운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필연적인 운명 앞에 서 있는 사람과 사물의 삶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 투성이기에 서글픕니다. 김영수 사진가는 다 쓰인 뒤 버려진 물건들, 바다 한 가운데 고독하게 서 있는 섬들, 일터의 노동자들, 춤추고 노래하는 광대들을 사진에 담았습니다. 사진에 멈춰 있는 피사체들 너머에는 그들의 운명이 강하게 숨 쉬고 있는 듯합니다.
김영수 사진가도 자신이 사진에 담은 사람과 사물들처럼 주어진 운명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이런저런 일에 휩쓸려 어린 나이에 홀로 서울로 옵니다. 패거리 문화가 강한 한국 사회에서 김영수 사진가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었습니다. 좋은 사진을 찍어도 인정받기 어려웠습니다. 기성세력인 ‘한사협’(한국사진작가협회)에 반대해 ‘민사협’(민족사진작가협회)을 설립했지만 정부가 교체되면서 정부 지원이 끊겨 이마저도 지속하기 어려웠습니다. 말년에는 지병이 악화되어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안 그래도 고단한 그의 삶을 계속해서 모진 고생으로 몰아세운 것은 무엇보다 자신의 사진을 완성하고자 했던 그의 이상이었습니다. 한 발짝만 더 내딛으면 닿을 것 같던 이상은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구름처럼 다가가는 만큼 멀어졌습니다.
▲ <어느 사진가의 기억>(2014, 이창민)
5 기억-재현-역사
한국 사회가 학연, 지연, 혈연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르겠습니다. 대한민국은 광복 이후에도 주체적으로 체제를 성립해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김영수 사진가는 미성숙한 한국의 현대사를 삶으로 겪으며 고생스러운 세월을 살았지만, 그것이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했습니다. 김영수 사진가의 사진을 보고 있으면 자신의 사진을 완성하고자 했던 그의 강렬한 의지가 느껴지는 듯합니다. 김영수 사진가가 말한 “본질적이고 영구한 사진”이 그저 표면적으로 비춰지는 피사체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데 불과한 건 아닐 것입니다. 그가 자기 자신과 외롭게 싸우면서 작품으로 고양해낸 사진들은 사진 예술의 역사를 이어가는 또 하나의 역사가 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감독은 <어느 사진가의 기억>을 통해서 사진가가 기억해냈던 것들을 다시 한 번 기억하려 합니다. 김영수라는 사람은 죽었지만, 그것은 사진가 김영수의 사진을 통해서, <어느 사진가의 기억>을 통해서, 사진과 영화를 보고 이를 기억하는 오늘날의 우리를 통해서, 훗날 또 다른 무언가를 통해서 계속 살아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김영수 사진가가 말한 “영구한” 것, 감독이 말하는 “기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어느 사진가의 기억>(2014, 이창민)
[필자소개] 홍지수 (중앙대학교 철학과)
배우고 갖춰야 할 것이 많은 학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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