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89호 리뷰 2014.06.25]
노동자가 사는 세상
- <그림자들의 섬> 리뷰
권효(독립영화 감독)
몇 해 전 그러니까 2011년 김진숙 위원이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며 크레인에 올라 농성을 할 무렵 우리들은 그녀의 투쟁이 승리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희망버스를 타고 내려갔고 크레인에 올라간 김진숙에게 응원을 보냈다.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그녀의 크레인 농성은 강하게 남아 있다. 하지만 왜 그 곳에 올라가 어떻게 300일 넘게 버틸 수 있었는지에 대한 그녀의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나 역시 그랬다. 방송과 언론은 '오랜 시간'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들은 결론만을 주목한다. 그래서 어떻게 됐느냐고 물을 뿐이다. 언제부턴가 우리들은 이 패턴에 익숙해져 있다. 기사제목을 보고 스크롤을 내려 결론의 결론을 훑어 내려 읽기 바쁘다. 사실 우리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그림자들의 섬>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다. 왜 제목이 그림자들의 섬일까? 아마 그들이 일하고 있는 곳이 부산 영도 조선소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곳에서 유영하듯 자신들의 삶을 바쳤기 때문에 김정근 감독은 그런 제목을 지었던 것 같다. 어쩌면 한국에서 노동자란 그림자 같은 존재기에 이런 제목을 지었는지도 모른다.
한진중공업 노조원들의 인터뷰가 중심인 이 영화는 작업복을 입은 주인공들이 부산의 어느 사진관에 찾아와 환하게 웃으며 사진을 찍는 장면에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한진에 입사 하고나서 떨리고 흥분됐던 당시의 심경 그리고 회사에서의 지난하고 힘들었던 삶과 민주노조의 건립을 통해 쟁취하고 잃었던 것들의 역사가 차분하고 때로는 울분어린 목소리로 드러난다.
그런 면에서 <그림자들의 섬>은 감독의 우직한 태도가 엿보이는 다큐멘터리다. 김정근 감독은 (너무나 넣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을 거라고 생각되는)한국의 정치적 상황, 노조의 정파적 대립, 수많은 현장의 영상들을 안보여주거나 자제하며 관객들에게 인터뷰에 집중하기를 권한다. 그들의 표정을 보고 목소리의 떨림과 눈시울을 보기를 원한다. 그들의 말과 함께 같이 가기를 바란다. 이 영화의 미덕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수많은 거짓의 언어가 드리워진 이 세상에서 보석처럼 빛나는 말들을 담아낸 감독의 미학적 성취가 돋보인다.
하지만 우직함만으로는 아쉬운 부분들이 있다. 우직함 속에 영리함이 스며들어야 한다. 물론 쉽지 않다.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는 저절로 사라지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자들의 섬>에서 아쉬운 건 영리함이고 그것은 ‘선택과 집중’으로 요약된다.
대한조선공사에 입사를 했던 주인공들의 소회로부터 인터뷰가 시작되는 이 영화의 주인공들의 한마디 한마디에 담긴 진정어린 말들이 주는 울림은 그 어떤 편집기술과 촬영기술이 주지 못하는 다큐멘터리만의 강점이다.
하지만 그것이 매순간 똑같은 크기로 반복된다면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감정은 지쳐 갈 것이다. 입사 이후에 회사에서의 작업조건 그리고 민주노조의 건립, 투쟁, 죽음, 다시 투쟁의 연대기가 거의 비슷한 시간으로 나뉘어져 있는 영화의 구성은 기록으로서의 영화를 지향하는 감독의 태도와 연결된 것이라 할지라도 자칫 (많은 것들을 버렸음에도)촬영본을 버리지 못했거나 주인공들과 거리감을 확보하지 못한 영화로 비춰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인터뷰만으로 영화를 이끌어 가는 것의 문제가 아니라 인터뷰의 분량의 크기와 인물들의 등장이 균등하지 않게 다뤄졌다면 보다 집중할 수 있는 영화적 흐름을 만들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아쉬움은 아쉬움일 뿐이다. <그림자들의 섬>에는 이러한 아쉬움을 집어삼키는 영화적 힘이 존재한다. 그 힘의 원천은 주인공들의 인터뷰다. 이 영화를 봤던 많은 분들이 어느 부분에서 눈물을 훔쳤는지 예측 할 순 없지만 아마 열사로 기억되는 노동자들의 죽음을 마주하면서 일 것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동지를 떠올리는 남겨진 자들 즉, 주인공들의 목소리는 열사를 기억하는 것을 넘어 어떤 삶의 의지를 공유하게 해준다. 그것은 현장에서 경험하는 감정과는 결이 다른 영화적 경험으로 다가온다.
사실 이것만으로도 이 영화는 좋은 영화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를 함께 고민하게끔 하는 것. 지금 우리가 필요로 하는 예술로서의 영화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장면은 영화의 말미에 나오는 김진숙 위원의 인터뷰다. 어느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는 감독의 질문에 김진숙 위원은 고된 노동이 선사한 땀으로 가득 찬 장화를 벗고 햇볕에 양말을 말리던 때를 떠올린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김진숙 위원이 좋았고 이 부분을 자르지 않은 감독이 좋았다. 그리고 양말을 말리던 어느 노동자의 앳된 얼굴이 떠올랐다.
노동자란 단어와 노동조합이라는 단어의 뜻이 한국만큼 왜곡된 나라가 또 있을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근로자란 말을 쓰고 노동조합을 회사를 좀먹는 무뢰배쯤으로 생각한다. 이 왜곡의 역사를 등에 지고 오랜 시간 싸워온 사람들과 그들을 모른 척 멀리하며 자신 역시 노동자임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묘하게 공존하는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노동자들에게 <그림자들의 섬>은 진심어린 헌사와 차분한 충고가 담긴 영화로 기억될 것이다. □
[필자소개] 권효
독립영화를 만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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