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다큐멘터리, 좀 더 즐겁게, 좀 덜 외롭게 해보자구!”라는 모토로 모인 신진다큐모임(이하 ‘신다모’)은 지난해부터 ‘오!재미동’과 함께 월례상영회인 ‘재미다큐’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올해 중반부터는 재미다큐에서 상영되는 작품이 상영 뿐 아니라 누군가의 의미 있는 비평도 함께 받으면 좋겠다 싶어 재미다큐 리뷰사업으로 이어지고 있지요. 독립 다큐멘터리 신진 제작자들에 대한 평론가 분들의 애정과 공감이 없었다면 지속되기 어려웠을 재미다큐의 리뷰들을 이번 호부터 ACT!에서도 게재하게 되었습니다. 신다모 내에서만 돌려보기에는 너무 아까운 글들이기도 하고, 이 리뷰들을 시작으로 독립 다큐멘터리 신진 제작자들의 작품에 대해 보다 풍성한 이야기들이 오갈 수 있길 기대하는 바람도 담겨 있어요. 새로운 리뷰 코너의 첫 주자는 변성찬님의 <村, 금가이>(강세진, 2012) 비평입니다.
경상북도 영주시에, 금강마을이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금가이’라고 부른다. 400년 역사를 가진 인동 장씨 집성촌인 이 마을은, 영주댐 건설로 인해 수몰될 예정이다. 강세진 감독의 <村, 금가이>(강세진, 2012)는, 2010년 3월부터 2012년 12월까지 근 3년 동안, 이 사라질 운명에 놓인 마을의 모습을 담아 온 영화다.
마을을 소개하는 풍경 시퀀스와 마을에 대한 기본 정보를 제공하는 자막이 지나가고 나면, 곧 공사가 진행될 자신의 밭을 지켜보고 있는 ‘마음 어른’과의 인터뷰 장면이 등장한다. 롱숏에서 미디엄숏으로의 이 급격한 전환 속에는, 3년 동안 마을을 지켜보아온 <村, 금가이>의 카메라가 취하고 있는 태도가 숨김없이 드러나 있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결코 중립을 가장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매우 편파적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村, 금가이>의 카메라는 마을의 몇몇 할머니들을 제외하면, 마을의 남자들 중에서는 단 두 명에게만 단독 인터뷰를 허용한다. 앞서 얘기한 ‘마음 어른’이 그 하나이고, 서울에서 무역업을 하다가 홀어머니를 위해 귀농해서 홀로 외롭게 버티며 싸우고 있는 (영화 속에 드러나는) 마을의 유일한 청년 장진수가 다른 하나이다. (미루어 짐작컨대) 어쩌면 이 영화는 청년 장진수 때문에 시작된 영화일이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 카메라가 가 닿고 싶어 하는 곳은, ‘마음 어른’의 ‘마음’이다. 마을의 풍경을 잡은 롱숏으로 시작해서 ‘마음 어른’을 잡은 미디엄숏으로 급격히 전환한 카메라 시선은, 결국 영화 속 결정적인 두 순간, ‘마음 어른’의 얼굴을 향해 다가간다. 그 클로즈업이 결코 외설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그 움직임이 ‘다가가고 있다’라기보다는, 오히려 ‘끌려가고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村, 금가이>의 카메라는 결코 사건 현장에 가서 사건에 대한 객관적 정보를 제공하려하는(또는, 하는 척 해야 하는) TV 뉴스의 그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존의 논리’를 전달하기 위해서는 필요하거나 적합한 것일지는 몰라도, ‘삶의 진실’을 담아내기에는 무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이 ‘피해자를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생존의 논리를 전달하는 카메라는 결코 삶의 진실을 담아낼 수 없다. 생존의 논리란, 이미 지배적인 (자본의) ‘개발논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더 많은 보상을 위한) ‘협상의 논리’이다. ‘삶’은 언제나 그 ‘개발논리’ 바깥에서 끝까지 저항하는 것이다.
마을의 생존 문제가 토론되고 결정되는 ‘문중회의’를 객관적인 롱숏으로 잡고 있던 카메라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가닥이 잡혀가는 이야기의 흐름 속에서 일순 착잡해지는 한 어른의 표정(또는 침묵의 진술)을 담기 위해 끌려간다. 또는, 그 문중회의에서는 제대로 의견을 낼 수 없는 할머니들과만 단독 인터뷰를 한다. 또는 청년 장진수를 따라가며 마을의 마지막 외롭고 무기력한 투쟁을 기록해 나가던 카메라는, 자꾸 ‘마음 어른’을 따라 ‘샛길’로 빠져들곤 한다. 그 카메라의 이상한 동선은, 일찍이 김준호의 <길>에서 보았던 그것이고, 고은지의 <팔당사람들>에서 보게 될 그것이다. 말하자면, (물론, 단지 ‘푸른영상’만의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영락없이 ‘푸른영상’의 그것이다. 그것은 매우 익숙한 동선이지만, 언제나 새롭고, 언제나 아름다운 움직임이다. 반복해서 샛길로 빠져들곤 하는 그 카메라의 동선은, 생존을 위해서 오로지 ‘일직선’으로 나아가는(아니, 나아가야만 하는) 개발논리의 바깥에서 아직은 숨쉬기를 멈추지 않고 있는 삶의 결에 도달하고자 하는, 어쩔 수 없는 움직임이기도 하다.
<村, 금가이>가 ‘마음 어른’의 ‘마음’과 ‘눈물’을 통해서 던지고자 하는 것은, 결국 ‘마을에 대한 질문’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마을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마을인가, 라는 질문 말이다. 마을을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마을 어른들이, 400년 전통을 이어나가기 위한 방편으로 ‘집단 이주’ 계획을 세운다. 그 계획 실행을 위해 모인 문중회의에서, 미묘한 입장 차이가 드러난다. 표면적으로는 집단 이주의 장소가 ‘농경지’가 있는 곳이어야 하는가, 또는 그럴 수 없는가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현실적인 입장 차이로 보이지만, 심층적으로는 지키고 싶은 마을의 모습에 대한 정서의 차이이다. 회의를 통해 현실적으로 ‘금가이라는 테두리’를 지키기 위해 농경지가 없는 곳으로 집단 이주를 하는 것으로 결정을 하지만, ‘순수하게 금가이라는 이름 하나’를 지키고 싶었던 한 ‘마음 어른’은, 결국 집단 이주에 동참하지 못한다. ‘테두리’를 지키되 평생 해오던 ‘농사일’을 포기하고 새로운 생계 수단(가령, ‘토속음식개발’)을 찾을 것인가, 아니면 그 농사일을 계속 할 수 있는 곳으로 갈 것인가? 어쩌면 ‘마음 어른’에게는 ‘토속음식개발’을 해야 하는 마을은, 더 이상 ‘금가이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없는 마을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마을에는 더 이상 제비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곳은 더 이상 ‘마을’이 아닐 것이다. <村, 금가이>는 ‘마음 어른’의 그 갑작스러운 ‘눈물’ 속에 담겨 있는 그 질문을, 또는 그 질문 속에 담겨 있는 삶의 마지막 저항을, 온전하게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애쓰고 있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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