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 109호 우리 곁의 영화 2018.05.30.]
영화의 최종병기 - 편집(2)
: 몽타주에서 영화적 결정結晶으로
조민석(<The Secret Principle of Things>, <춤>)
몽타주montage를 이야기하는 편집 두 번째 시간입니다. monter의 명사형인 몽타주montage는 여러 요소들을 ‘하나의 상태’로 조직하는 작업을 가리킬 때 쓰이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본형인 monter는 오르다, 상승하다, 피어오르다 등 주로 ‘위를 향하는 움직임’을 가리킬 때 쓰이는 듯합니다. 이 의미들을 추상화시켜보면 총체적 귀결에 이르기 위해 그 귀결을 이루는 요소들을 체계화하는 것, 더 나아가 상위의 단계에 이른다는 의미로까지 몽타주라는 말 또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규정해볼 수 있겠습니다. 흔히 몽타주가 목격자들로부터 수집한 범인의 인상착의를 그린 그림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탓에 이 규정이 혼란스러울 수도 있겠으나 그러한 작업을 통해 그린 그림이 범죄자의 모습이 아니라 신의 모습이라고 가정한다면 이해가 수월할 듯합니다.
별개의 조각들을 조직하여 그 조각들이 본래 놓여있던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작업인 몽타주는, 영화에서는 편집과 동의어처럼 쓰이기도 합니다. 편집을 그렇게 생각하기도 하는 것처럼 몽타주 역시 쇼트와 쇼트의 연결 및 작용으로, 즉 쇼트가 최소 단위가 되는 작업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영화의 몽타주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자 몽타주 논의를 언어학의 차원으로까지 확장시킨 첫 번째 연구자, 그러나 몽타주에 대한 고정관념이 만들어질 때 가장 자주 사례로 활용되었을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도 한 쇼트 안에서 발생하는 몽타주의 요소, 범주들을 규명하는 등 쇼트보다 작은 단위들까지 검토했으며, 20세기 초 프랑스 인상주의 영화들에서 두드러지게 사용되었던 한 프레임 안에 두 개 이상의 이미지가 펼쳐지는 이중인화를 통한 몽타주, 오늘날에는 더 이상 꼬집어 이야기하지도 않는 이미지와 사운드 간의 몽타주 등 몽타주는 영화 곳곳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다소 경도되어있기는 하지만 에이젠슈테인은 이와 같이 몽타주가 발생하는 지점들을 낱낱이 찾아 범주화하고 그렇게 이루어진 몽타주가 어떤 효과를 이끌어내는지까지 논의하여 그것들을 자신의 영화를 통해 구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예술형식이 갖는 생동력의 근본 기조는 ‘충돌’(어긋남)에 있다는 일종의 철학적 관점이 그의 예술론·몽타주론의 출발점으로, 그는 영화가 구현하는 모든 지점을 형식화함으로써 충돌이 발생하는 지점, 즉 몽타주가 발생하는 지점들을 낱낱이 밝혀내려고 했습니다. 또한 그가 몽타주론을 발전시키는데 중국 표의문자의 원리, 일본의 하이쿠가 큰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물水과 눈目이 결합해 울다泪가 되듯이, 칼刀과 마음心이 결합해 근심忉이 되듯이 A와 B의 결합이 AB가 아닌 C가 되는 과정을, 다시 말해서 두 개체가 충돌해 그 개체들과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전혀 다른 질적인 것으로 도약하는 과정을 그는 몽타주의 원리로 파악했습니다. 이때 충돌과 도약이 관객에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적·관념적 작용인 ‘어트랙션attraction’이 몽타주의 주요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몽타주의 방법들>에서 선언처럼 제시한 다섯 가지의 몽타주 방법(길이의 몽타주, 리듬의 몽타주, 톤의 몽타주, 배음의 몽타주, 지적 몽타주)은 효과-자극을 중심으로 분류한 몽타주 조직의 기준들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에이젠슈테인은 자신의 영화들을 사례로 이 다섯 가지의 몽타주 방법을 설명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다섯 가지의 몽타주 방법을 따라가 보지는 않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에이젠슈테인의 몽타주론 같은 복합적이고 전문적인 몽타주 논의 이전에 이루어져야 할 몽타주 성립의 기본적인 방법과 예시들을 살펴볼 것입니다. 우선 쇼트와 쇼트의 관계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이미지-이미지 몽타주
데이비드 보드웰, 크리스틴 톰슨은 『영화예술』에서 쇼트와 쇼트의 관계 영역을 네 가지로 나누고 있습니다. 이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1 쇼트A와 쇼트B의 조형적 관계(graphic relations)
2 쇼트A와 쇼트B의 운율적 관계(rhythmic relations)
3 쇼트A와 쇼트B의 공간적 관계(spatial relations)
4 쇼트A와 쇼트B의 시간적 관계(temporal relations)
조형적 관계
어떤 쇼트든 “순전히 조형성의 관점에서 검토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명암, 선과 형태, 부피와 심도 그리고 움직임과 정지 상태 등의 유형을 살피는 것”입니다. 쇼트들 간의 조형적 관계는 이러한 조형성의 유사와 차이로 쇼트와 쇼트 사이에서 관계점들이 작용할 때 생겨납니다.
“어떤 것이건 두 개의 쇼트를 연결하는 편집은 그들 쇼트 간의 유사성이나 이질성을 통해 순전히 회화적인 특성들이 상호작용하는 것을 허락한다. 즉 장면화의 네 가지 특성(조명, 무대장치, 의상, 그리고 시공간을 통한 인물의 행위)과 대부분의 촬영기법적 특성(촬영, 화편화, 카메라 움직임)은 모두가 잠재적인 조형요소를 제공한다. 따라서 모든 쇼트는 순수한 조형적 편집의 가능성을 제공하고, 모든 커트는 두 쇼트 간의 일종의 조형적 관계를 형성한다.”
조형적 측면은 따로 떼어낸 한 장의 쇼트에서와 마찬가지로 쇼트들 간의 관계에서도 일차적으로 고려하게 되는 지점입니다. 쇼트들 간의 조형적 관계는 연속성을 만들어내기도, 단절과 충돌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조형재들은 유연한 연속성이나 급격한 대비를 이루기 위해 편집되기도 한다. 감독은 조형적 유사성에 의해 쇼트들을 연결해서 조형적 일치(graphic match)를 만들어 낸다. 쇼트 A의 형태, 색채, 총체적 구도, 또는 움직임이 쇼트 B의 구도로 연결될 수 있다.”
graphic match를 “조형적 일치”보다는 ‘조형적 상응’이라는 넓은 의미로 이해해봅시다. 지난 시간에 보았던 전형적 대화 장면 역시 조형적 상응에 기댄 것입니다. 에이젠슈테인도 장면을 구성할 때 대상을 도형처럼 파악하여 그것들의 역학관계까지 고려하는 등 조형적 상응을 세밀하게 분석했습니다.
『영화예술』에서 조형적 상응의 예 중 <에일리언>과 <7인의 사무라이>를 보겠습니다.
운율적 관계
쇼트는 또한 각각의 지속시간을 갖습니다. 지속시간의 길이를 조절함으로써 장면마다 일정한 리듬이 조성되기도 합니다. 쇼트들 간의 운율적 관계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감독은 쇼트의 지속시간을 조절함으로써 편집의 운율적인 잠재성을 조절한다. 전체로서 영화적 리듬은 편집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영화기법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다. 감독은 편집 리듬을 결정하는 데 있어 장면화, 촬영 위치, 카메라의 움직임, 음향의 리듬, 그리고 전반적인 맥락에 의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트들의 길이의 유형은 우리가 직관적으로 영화의 리듬이라고 인식하는 바에 상당한 공헌을 한다.”
에이젠슈테인의 다섯 가지 몽타주 방법 중 길이의 몽타주가 쇼트 길이의 동일함과 차이가 가져다주는 효과를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일반적으로 편집의 운율적 가능성은 여러 쇼트의 길이가 식별 가능한 유형을 이룰 때 나타난다. 안정적인 박자는 모든 쇼트의 길이를 거의 동일하게 함으로써 구축될 수 있다. 감독은 또한 역동적인 속도감을 창조할 수도 있다. 연속적으로 짧아지는 쇼트는 가속적인 리듬을 만들어낼 수 있는 반면, 일정하게 길어지는 쇼트는 점차적으로 느려지는 리듬을 만들어낼 수 있다.”
쇼트 길이를 점차적으로 줄여 속도감을 주는 방법은 가장 단순한 사용법 중 하나로 오늘날에는 자주 쓰이지 않습니다. 『영화예술』에서는 알프레드 히치콕의 <새>의 한 장면을 예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대개의 경우 “쇼트의 길이는 화면상의 대사나 움직임의 리듬에 종속”됩니다. 쇼트마다 내용뿐만이 아니라 리듬도 다른 것입니다. 쇼트와 쇼트의 결합에서 이 지점까지 고려하면 에이젠슈테인이 리듬의 몽타주에서 말한 것이 됩니다.
공간적 관계
공간적 관계와 시간적 관계에서는 앞서 설명한 개념의 몽타주가 성립합니다. 하나의 시공간 맥락이 두 개 이상의 쇼트들을 아우르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본 <새>의 장면 역시―멜라니의 시선에 의해 구축된―하나의 시공간 맥락이 실내(식당)와 실외(주유소)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이 장면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쇼트들 간의 공간적 관계와 시간적 관계는 연속편집의 체계 아래 있습니다.
“편집을 통해 이와 같이 공간을 운용하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예를 들어 뉴스 영화의 필름에서 발췌한 기록영화에서 한 쇼트는 대포의 발사를 보여주고, 다른 쇼트는 과녁에 명중하는 포탄을 보여준다면, 실제로는 두 개의 쇼트가 전혀 다른 전장에서 촬영한 것이었다 해도 우리는 대포가 포탄을 발사했다고 추정한다. 다른 예로는 연설가의 쇼트 다음에 즐거워하는 군중의 쇼트가 나온다면 우리는 공간적 공존을 가정한다.”
이와 같은 연속편집의 규칙, 즉 시공간의 체계적 구조화는 D. W. 그리피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리피스는 문, 클로즈업, 행위의 일치와 시선의 일치 등을 통해 시공간적 연속성을 구축해냅니다. 당시 프랑스와 소비에트 연방의 젊은 예술가들은 그리피스의 영화에서 몽타주의 가능성을 엿보게 되는데 그 중 한 사람인 레프 쿨레쇼프는 자신의 실험에서 놀라운 효과를 발견합니다.
“이러한 공간의 운용 가능성은 러시아의 영화감독 레프 쿨레쇼프에 의해 연구되었다. 그는 1920년대에 각기 다른 극적 요소가 담긴 쇼트를 모아서 비공식 실험을 실시했다. 이 실험 중 가장 유명한 것은 감정을 자제한 배우의 얼굴을 촬영한 화면과 (수프, 자연 경관, 죽은 여인, 아기 등을 다양하게 촬영한) 다른 쇼트들을 연결시키는 것이었다. 보고된 결과에 따르면 관객들은 즉각적으로 배우의 표정이 변화하고 있다고 느꼈을 뿐만 아니라 그 배우가 대상들과 동일한 공간 내에 있으면서 반응하고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었다.”
공간적 연속성에서 설명하고 있지만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던 리액션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이 실험은 쿨레쇼프 실험 또는 배우의 이름을 따 모주힌(이반 모주힌) 실험이라 불립니다. 또한 일련의 쇼트들이 “일부분만 보이는 공간을 기초로 공간 전체를 추론”케 하면 그것을 쿨레쇼프 효과라고 부릅니다. <최첨단 편집 - 영화편집의 마술>에서 이를 재연한 장면을 보겠습니다.
시간적 관계
공간적 연속성은 시간적 연속성과 맞물려 있습니다. 공간적 연속성이 구축되었다면 시간적 연속성도 구축된 것이므로 모주힌 실험에는 시간적 연속성까지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쇼트와 쇼트의 시간적 관계에서는 주로 연속편집 아래에서의 시간적 비약의 방법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플래시백flashback, 플래시포워드flash-forward 그리고 “생략편집”의 방법 중 컷어웨이cutaway 정도만 짚어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대부분 회상 장면(flashback)이라는 조절 방식에 익숙한데 회상 장면은 추정되는 스토리 순서에서 벗어난 하나 이상의 쇼트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히로시마 내사랑에서 알랭 레네는 여주인공의 기억을 이용하여 시간 순서의 침해를 동기화한다. 세 개의 쇼트는 여주인공의 현재 연인의 손의 위치가 몇 년 전 사망한 다른 애인의 죽음에 대한 회상을 유발한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제시한다.”
“스토리 사건을 재배열하는 훨씬 더 드문 선택으로는 미래화면(flash-forward)이 있다. 여기에서 편집은 현재에서 미래 사건으로 이동하고 그 다음 다시 현재로 돌아온다. 대부에서 작은 규모의 예를 볼 수 있다. 돈 비토 콜레오네가 다가올 소롯소와의 만남에 대해 자신의 아들 톰, 그리고 소니와 대화를 나눈다. 소롯소는 자신의 마약 운반에 자금을 대라고 요청을 하고 있다. 콜레오네 가족이 현재 시점에서 대화를 나눌 때, 그들의 쇼트는 미래 시점에서 그 모임에 오는 소롯소의 쇼트와 함께 사이사이에 배치된다. 편집은 갱 조직의 모임에서 마약 사업에 가족을 끌어들이지 않겠다는 돈의 선언으로 빠르게 이동하면서, 소롯소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기 위해 활용된다.”
“생략편집은 스토리로 행해질 때보다 스크린 상에서 적은 화면 시간을 소비하는 방식으로 사건을 제시한다. ... 마지막으로는 변시전환(cutaway)을 통해 시간의 생략을 표현할 수 있는데 즉 생략된 사건만큼 길게 지속되지 않는 다른 사건의 쇼트를 사용하는 것이다. ... 감독은 계단을 오르는 사내의 화면에서 아파트 안에 있는 여인의 화면으로 커트한다. 그런 다음 상당히 많이 올라온 사내의 모습으로 다시 커트할 수 있다.”
<대부>의 플래시포워드 장면은 컷어웨이처럼 쓰이기도 했습니다. 플래시포워드를 삽입함으로써 수십 분, 수 시간을 보내버릴 수도 있습니다. 시간의 경과, 대화의 과정을 생략해버리는 것입니다. 컷어웨이를 비롯한 “생략편집”의 방법들이 눈속임에 불과해보이기도 하지만 편집은 한편으로는 시간적 유희이므로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겠습니다.
이렇게 네 가지 측면에서 쇼트들 간의 관계를 살펴보았습니다. 각각을 살펴보면서 어느 정도 짐작하셨겠지만 사실 이 네 가지는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영화예술』에서도 설명하고 있는 <밤과 안개>의 유명한 몽타주는 조형적, 운율적, 공간적, 시간적 관계가 모두 작용하고 있습니다.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몽타주는 많이들 알고 계실 겁니다. 어떤 측면들이 작용하고 있는지 직접 헤아려봅시다.
이미지-사운드 몽타주
다음으로 몽타주임이 간과되곤 하는 이미지와 사운드의 몽타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가장 익숙한 이미지와 사운드의 몽타주는 <시베리아에서 온 편지>에서 본 것 같은 이미지와 음성 해설 간의 몽타주일 것입니다. 반면 가장 생소한 이미지와 사운드의 몽타주는 이미지와 외화면 사운드 간의 몽타주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이미지와 외화면 사운드 간의 몽타주를 살펴보도록 합시다. 그러려면 먼저 층위에 따라 나눈 영화의 영역 개념들부터 알아야합니다.
영화의 공간은 크게 스토리 세계의 공간과 스토리 세계 바깥의 공간, 둘로 나뉩니다. 이를 내재적(diegesis) 공간, 외재적(non-diegesis) 공간이라고 합니다. 내재적 공간, 즉 영화에서의 스토리 세계는 하나의 현실입니다. 실제 세계입니다. 다만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 우리가 살고 있는 실제 세계와는 다른 시공간 축에서 흘러가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 바깥, 현실 또는 실제 세계의 바깥 공간이 외재적 공간입니다. 그곳에는 음성해설, 음악, 자막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현실이 아닌 다른 차원에 있습니다.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이를테면 음성해설은 극중 인물이 말하는 것이라 해도 현실에, 실제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지금, 이곳이 아닌 다른 시공간에 있는 듯하면서도 때로는 지금, 이곳에 있기도 하며 때로는 시공간을 상정할 수 없는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음성해설을 하는 사람이 극중 인물이 아닐 경우,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을 때도 있고 심지어는 사람으로 보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실제’의 맥락에서는 가늠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내재적 공간과 외재적 공간을 나누는데 있어 ‘실제’가 기준이 된다는 점을 잘 알고 계시기 바랍니다. 실제성은 영화의 이론적 파악에 있어 핵심적인 기준입니다. 글쓰기의 칭격을 영화에 적용했을 때 복잡한 문제가 되는 까닭도 바로 이 실제성이 엉켜드는 지점에 있습니다. 실제성을 기준으로 둘의 내러티브 원리가 구분되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사운드만은 내재적 공간과 외재적 공간, 즉 실제와 그 너머라는 이 완고한 경계를 교묘하게 넘나들곤 하는데, 다음의 장면들을 보며 이 경계를 감지해보겠습니다.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입니다. 하지무(금성무)와 가발 여인(임청하)의 이야기가 끝나고 여기서부터 페이(왕페이)와 663경관(양조위)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캘리포니아 드리밍이 들려옵니다. 처음에는 외재적 공간에서 들려오는 듯하더니 663경관의 대사와 함께 내재적 공간에 있는 소리임이 드러납니다. 실제라는 경계 때문에 이러한 설정이 유희가 됩니다.
경계가 더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을 보겠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을 영화화한 <토니 타키타니>의 오프닝입니다. 음성해설과 함께 토니 타키타니를 소개하는 장면이 펼쳐집니다. 음성해설자가 누구인지는 불분명합니다. 다른 시공간에 있는 토니 타키타니인지, 제3자인지 알 수 없습니다. 음성해설자는, 장면들만 봐서는 알 수 없는 토니 타키타니의 가족관계, 성장과정, 성향 등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갑자기 토니 타키타니의 아버지 타키타니 쇼자부로가, 소년 토니 타키타니가 음성해설자의 말을 대신 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하는 것입니다. 관객인 우리는 흠칫 놀라게 됩니다. 경계를 넘어가버렸기 때문입니다.
내재적 공간과 외재적 공간은 원칙적으로는 넘나들 수 없는 경계입니다. 개념적으로는 우리도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운드가 그러한 개념을 깨뜨리면서 우리의 감각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놀란 것입니다. 사운드가 아무리 이 경계를 넘나들 수 있다 해도 그것이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대개의 경우에는 원래 처한 곳에 있습니다. 내재적 공간의 사운드를 디제틱 사운드diegetic sound, 외재적 공간의 사운드를 논디제틱 사운드non-diegetic sound라고 합니다. 사운드가 이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실제성의 맥락에 엉켜들지 않을 수 있어서, 다시 말해서 실체가 없기 때문에, 즉 물질적 한계를 갖지 않기 때문에, 따라서 시공간의 제약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재적 공간과 외재적 공간은 실제의 측면에서 보면 확연히 구분되지만 사운드의 범주 간 이월에 의해 하나의 연속체에 놓여있는 것이 됩니다.
내재적 공간과 외재적 공간이 개념화되었으니 이제 세 번째 경계와 외화면 사운드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내재적 공간과 외재적 공간 안에는 또 하나의 경계가 있습니다. 바로 화면의 경계인 프레임frame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프레임은 기본적으로 내재적 공간을 향합니다. 같은 내재적 공간일지라도 프레임에 의해 어느 곳은 보이고 어느 곳은 보이지 않게 됩니다. 프레임의 안과 밖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프레임 역시 형식적 경계로써 유희를 위한 설정이 되곤 합니다. 가장 흔한 사용법은 프레임을 확장해 근처를 보여주자 뜻밖의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 방식일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누군가의 문서를 훔쳐보고 있다가 낌새가 이상해 고개를 돌려보니 문서 주인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음을 알게 되는 식입니다. 이때 우리는 그 사람이 곤란해 하는 것을 봅니다. 상황이 심각해지는 것과 심각한 상황에 처한 이의 리액션을 봅니다. 프레임을 극적 장치의 일부로 활용한 것입니다.
프레임의 이러한 형식적 측면에서의 활용은 사운드와의 조합에서 훨씬 빈번하게 쓰입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외화면 사운드입니다. 내재적 공간의 사운드 역시 프레임을 기준으로 안쪽과 바깥쪽으로 나눌 수 있는데 프레임 바깥쪽의 사운드를 외화면 사운드라고 합니다. 프레임 안쪽의 사운드를 굳이 내화면 사운드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내재적 공간에서 화면 안쪽의 사운드와 바깥쪽의 사운드 그리고 외재적 공간의 사운드를 미셸 시옹은 인in 사운드, 비화면 영역 사운드, 오프off 사운드라고 부릅니다. 『오디오-비전』 의 해당 부분을 읽어보겠습니다.
“영화의 비화면 영역 사운드는 숏에서 보이는 것에 대해 상대적으로 아쿠스마틱한 소리로, 즉 주어진 순간에 음원이 일시적으로나 결정적으로 안 보이는 경우를 말한다. 반면, 이미지 안에 음원이 보이는 것을 ‘인in’ 사운드라고 하며, 이는 영상이 연상시키는 현실에 속한 소리다. 또한 우리는 특별히 음원이라 생각되는 것이 이미지 안에 없을 뿐만 아니라 비디제시스적인, 즉 이미지에서 직접적으로 제시하는 상황과 다른 장소, 다른 시간성에 위치한 소리를 ‘오프off’ 사운드라고 부를 것을 제안한다.”
외화면 사운드는 주로 프레임 바깥의 상황과 대상을 노출시킬 때 쓰입니다. 사운드 시간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시공간 정보를 줄 때(내러티브적 명명), 프레임 확장 또는 인물의 시선 및 카메라 이동의 동기로써 그리고 행위와 상황은 노출시키되 모습은 감춤으로써 극적 긴장을 배가시킬 때 쓰입니다. 특히 적극적으로 쓰이는 공포물의 상황, 스릴러물의 상황은 익숙하실 것입니다. 장면을 떠올려 봅시다. 중심인물들을 위협하는 공포의 대상이 그들의 은신처에 가까워집니다. 이때 프레임 안에는 중심인물들을, 프레임 밖에는 공포의 대상을 둡니다. 그가 가까워지는 것은 소리로만 제시됩니다.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화면에는 집안으로 대피한 인물들이 보이고, 외화면 사운드로 집 주위를 둘러싼 새떼들의 괴기스러운 울음소리와 날개짓 소리, 창에 부딪히는 소리들이 들립니다.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이 어긋나있다는 점을 눈여겨보시기 바랍니다. 몽타주입니다. 그리고 이때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리액션입니다.
사실 외화면 사운드는 리액션의 순간에 빈번하게 쓰입니다. 볼프강 가스트의 쇼트 사이즈 구별에서 주인공의 감정적 반응을 보여주는 쇼트들인 “클로즈 쇼트”와 “클로즈업 쇼트”에는 사실 외화면 사운드가 있는 것입니다. 모주힌 실험에서 본 것과 같습니다. 만약 모주힌 실험이 유성영화로 행해졌다면 통곡하는 여인을 보여주고 다시 모주힌의 얼굴을 보여줄 때 외화면 사운드로 여인의 울음소리가 배치되었을 것입니다. 이때 그의 감정 동요는 한층 더 예민하게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리액션 순간의 외화면 사운드를 이용한 쇼트 구성은 그가 소리의 대상을 인지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장면이자 그가 소리의 대상으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음을 나타내는 장면이 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의 내적 동요를 드러내는 장면인 것입니다. 다음의 작품들 속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해봅시다.
<세븐>의 오프닝 시퀀스입니다. 은퇴를 일주일 앞두고 있는 서머셋(모건 프리먼) 형사는 이 도시와 이곳의 사람들이 편치 않은 듯합니다. 반듯하고 건전한 사람인 그는 이 도시 어디에서도 평안을 얻지 못합니다. 침대에 누워있을 때마저 그렇습니다. 집밖으로부터 무법천지의 소리가 들려옵니다. 메트로놈에 의지해도 집밖의 소리는 잦아들지 않습니다. 애써 외면하며 잠을 청합니다.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세련된 연출입니다. 이 씬 전체를 오프닝 시퀀스에 대한 ‘결정적 리액션’으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
리액션의 순간, 타이트한 사이즈에 외화면 사운드를 배치하면 그의 심리를 향한 집중도는 한층 커집니다.
마이클 만 감독의 <히트>입니다. 이 씬의 주인공은 가석방 중인 브리단(데니스 헤이트버트)입니다. 브리단은 애인을 위해서라도 새 삶을 살고 싶습니다. 하지만 점장은 브리단에게 최소한의 예의도 보이지 않습니다.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브리단이 할 일과 불합리한 원칙들을 일러줄 뿐입니다. 이때 우리는 말하고 있는 점장이 아니라 브리단의 얼굴을 클로즈업 쇼트로 봅니다. 브리단의 의식과 감정에 대한 몰입도가 커졌습니다.
<우리들>의 오프닝 씬입니다. 집요할 정도로 선(최수인)이의 얼굴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외화면 사운드가 상황을 말해줍니다. 마지막까지 어느 편에도 뽑히지 못하는 상황부터 정당치 않게 밖으로 내몰리는 상황까지 선이를 계속해서 궁지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선이의 심리에 극도로 집중하게 됩니다. 교과서적인 상황설정을 바탕으로 외화면 사운드와 클로즈업 만으로 한 씬을 밀어붙이고 있습니다. 외화면 사운드와 클로즈업 조합의 완전한 사례라 할만합니다.
영화적 표현: 영화가 관객을 위해 남겨둔 자리와 영화적 결정結晶
앞서 본 모주힌 실험, 외화면 사운드는 리액션을 구축하는 몽타주입니다. 리액션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그의 의식과 감정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건 아닙니다. 여러 차례 이야기했다시피 영화는 인간의 의식과 감정 같은 무형의 것을 드러내거나 묘사할 수 없습니다. 영화는 현실 세계, 실제의 세계를 펼쳐 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 실제의 세계는 3차원의 물질세계입니다. 이 세계는 실체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의 의식과 감정은 실체가 없습니다.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으로 볼 수도, 귀로 들을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카메라로 촬영할 수도, 녹음기로 수음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영화 역시 인간의 의식과 감정을 드러내거나 묘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봅니다. 제시된 영화에서 펼쳐지는 것은 그의 외면이지만 기이하게도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그의 내면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가장 본질적인 것임에도 우리가 ‘영화’에 접근할 때 항상 놓치는 지점일지 모르겠습니다. 그의 의식과 감정은 우리에게, 즉 관객에게 와서야 그려집니다. 다시 말해서 몽타주는 관객의 인식에 와서야 완성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파악되는 것을 너머 그의 의식과 감정이 우리에게 전이되기까지 합니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예술이, 텍스트가 어떻게 작동하는지와 함께 영화의 속성 및 고유한 특징을 꼬집어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화 속 세계를 모종의 실제로 여깁니다. 영화에서 펼쳐지는 세계는 독자적 시공간을 갖는 3차원의 물질세계입니다. 닫혀있는 실제의 세계입니다. 그런 탓인지 우리가 영화의 세계를 마주할 때면 실제의 감각과 습성이 작동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실을,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이해합니다. 개별 사물들, 사태들 사이에 인과관계를 세우고 맥락을 만듭니다. 이를 통해 의미가 형성되고 세계가 구축됩니다. 이 과정이 없으면 세계는 눈앞에 있어도 눈앞에 있는 것이 아니게 됩니다. 어떤 사물이 내 앞에 놓여있어도 그것이 우리의 인식을 통해 의미를 부여받지 못하면 그곳에 있어도 있지 않은 게 됩니다. 마주하게 되었을 때에야, 의미를 부여받았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 앞에 ‘있는’ 것이 됩니다. 그제서야 세계의 일부가 되는 것입니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도 실체들, 사물들로 구성됩니다. 우리의 인식 안에서 맥락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그 실체들, 사물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스크린에 있는 또는 스크린 너머에 있는 구체적인 대상들이, 그로부터 빚어진 문제들이 우리와 상관있는 것이 되어야, 스크린으로부터 펼쳐지는 저 세계가 우리가 처한 세계가 될 수 있어야, 그제서야 ‘영화’는 작동하게 됩니다. 관객의 소극적·적극적 관여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관객의 관여, 다시 말해서 저편의 대상을 향해 일어나는 맥락화, 관객의 인식에서 발생하는 이야기는 영화의 기본 요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객의 관여를 이끌어내는 장치가 내러티브 장치와 몽타주입니다. ‘잘 짜여진 좋은 스토리의 기본 요건’을 떠올려 봅시다. 그중 네 번째가 “스토리는 최대한의 ‘정서적 임팩트(emotional impact)’와 ‘관객의 참여(audience participation)’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식으로 전개되어야 한다.”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서적 임팩트’와 에이젠슈테인이 몽타주에서 말하는 ‘어트랙션’은 겹쳐 보이는 구석이 있습니다. 기능과 목적의 측면에서 보면 내러티브 장치와 몽타주가 수행하는 역할은 겹치는 구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영화’의 기작에 있어 핵심축입니다.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의 도착>이 ‘최초의 영화’로 칭해지며 그 과장된 상영 일화가 신화처럼 떠도는 이유도 바로 이 지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내용-의미가 아니었습니다. 뤼미에르 형제는 영화라는 발명품, 즉 그 기계가 할 수 있는 일을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시오타 역에 도착한 기차는 그저 그 기계가 담아낼 수 있는 일상의 조각이었을 뿐입니다. 뤼미에르 형제는 이를 통해 무언가를 말하려고 했던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관객들에게는 그 이상의 상황이 생겼습니다. 관객들은 기차가 카페 안으로 들어오는 상황을 떠올리고 위험을 느꼈습니다. ‘영화’가 작동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김성태의 『‘영화’-존재의 이해를 위해여』를 따라가 봅시다.
“그것은 그저 일상을 우리의 눈앞에 가져다놓은 것에 불과했을 뿐이다. 여기서는 오로지 ‘영화’의 힘만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일상을 그렇게 다른 시간과 공간에서 실제처럼 재현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그때 벌어진 일을 상기해보자. 관객들은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기차에 혼비백산해 영사기를 엎어버릴 정도로 소동을 빚었다. ... 이 관객들의 놀람은 아주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영화’가 이야기를 발생시킨다는 점이다.”
‘정서적 임팩트’와 ‘관객의 관여’의 맹아적 단계라 할 수 있겠습니다. 이후에도 영화는 관객의 반응을 척도로 그 모습을 변모시켜 왔고 이는 흡사 진화의 과정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영화’-존재의 이해를 위해여』는 이 과정―존재와 대상→일상을 보여주는 ‘영화’→조작된 상황을 보여주는 ‘영화’→편집을 보여주는 ‘영화’→이야기를 보여주는 ‘영화’→영화적 이야기의 탄생→표현의 문제로―을 상세히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 때 ‘영화’는 일반적으로 서사가 수행하는 것과 같은 작업들을 한다. 그러나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 ‘영화’는 서사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관객들의 반응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영화가 성립됨에 있어 관객은 필연적 계기입니다. 영화가 작동하고 있다는 것은 제시된 것 이상의 맥락이 작동하고 있다는 뜻이며, 최종적으로 맥락을 부여하는 이는 관객이므로 관객의 관여가 일어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몽타주에서 쇼트들을 접합하는 이도 관객입니다. 데쿠파주에 따라 구성된 쇼트들은 물리적 상태에서만 보아도 각각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같은 피사체를 보여주고 있다 해도 ‘아메리칸 쇼트’, ‘클로즈 쇼트’는 따로 떨어져 있는 개별 쇼트들입니다. 관객이, 우리가 이것들을 마치 이어져 있는 것처럼 보는 것이며 실은 직접 이 쇼트들을 이어붙이고 있는 것입니다. 데쿠파주-몽타주에 의한 경계선들을 메꾸고 지워버리는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 관객의 관여를 유도하고 관객이 최종적으로 영화를 매듭짓게 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망각, 간과하곤하는 영화의 본질적 속성과 구조입니다.
알프레드 히치콕의 <이창>과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블로우 업>은 이러한 영화의 본질적 속성과 구조를 작품의 모티브로 삼고 그것을 형상화한 영화로도 유명합니다.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동일한 단계를 거칩니다. 카메라를 통해 대상 또는 사건을 마주하게 됩니다, 거기에 인과관계를 세우고 의미를 부여합니다, 그리고 내적 동요에 의해 사건에 관여하게 됩니다. 그들의 인식에서 데쿠파주와 몽타주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존재의 이해를 위해여』에서 <블로우 업> 부분을 읽어봅시다.
“먼저 그 사진사는 사진을 사건의 시간에 따라서 배열한다. 상황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재배치된 두 장의 사진만으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 그는 잠시 다른 데 관심을 두었다가, 다시 사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이 관심은 결국 추측이다. 그는 상황의 진정성을 전혀 알지 못하며,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사진을 두고 추정하는 일뿐이기 때문이다. 그는 남녀가 포옹하고 있는 부분을 확대/블로우 업함으로써 특이한 사실(특이점/특정한 순간/비범한 순간)을 발견하고자 한다. 마침내 그 확대에 의해 어떤 사실이 드러난다.
…
이때 안토니오니는 정말로 흥미로운 장면을 구성한다. 안토니오니는 원래의 사진과 그 일부를 확대한 사진 사이를 띄워놓는다.
…
안토니오니는 어느 순간에 그 사진의 뒤쪽에서 사진사를 잡는다. 앞서 말한 두 장의 사진은 서로 떨어져 있다. 하나는 원래 그대로의 사진이며, 다른 하나는 거기에서 일부를 확대한 사진이다. 이 부분이 어떤 이유에서 블로우 업되었는지를 상기하라. 관심이 먼저였고, 그 관심은 상황의 추이를 밝히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럴 때 그 두 사진들 사이의 추이, 말하자면 어딘가 다른 곳을 쳐다보는 여자의 행위가 지닌 의미를 추측하는 것은 바로 바라보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 바라보는 사람이 이 둘 사이의 인과를 추정하는 주체이다. 사진이 그것까지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디까지나 보는 이, 발견하고자 하는 이가 그것을 밝혀낸다.”
<이창>에서도 이와 같은 움직임이 일어납니다. <이창>에서는 쿨레쇼프의 모주힌 실험이 그대로 옮겨집니다. 창밖을 보는 제프를 보여주고, 제프가 보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그것을 보고 있는 또는 그것에 반응하는 제프를 보여줍니다. 이때 제프는 건너 집 부부 사이에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감지합니다. 어느날부터 아내가 보이지 않자 자신이 목격한 단편들 사이에서 인과관계를 맞춰보다가 남편의 살해를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잠자코 있을 수 없는 그는 자신의 의심을 확인하기에 나섭니다. 사건에 관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객관적으로 제시된 영상과 그 영상을 관람하고 있는 관객 사이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호작용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영화’라고 부릅니다. 사운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 영화는 결국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들이 교차, 결합되는 가운데 관념의 차원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서스펜스도, 시점도, 몽타주도 ‘정서적 임팩트’와 ‘관객의 관여’를 이끌어내기 위한 영화적 장치이자 계기입니다. 영화는 그렇게 관객의 자리를 열어놓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관객이 자리하면 관객의 관념에 영화적 결정結晶(crystallize)이 맺힙니다. 영화를 만든다는 건 관객의 자리를 마련하는 작업, 즉 영화적 결정이 맺힐 수 있는 관념적 지평을 구축하는 작업인 것입니다. 영화의 작동 원리는 기본적으로 물物과 상像이 맞물려 움직이는 데에 있으므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는 것들이 교차, 결합되는 가운데 저편에 떠오르는 것에 대한 시각적·개념적 ‘봄’(seeing)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영화다운 영화, 영화적인 영화가 가능한 것입니다. 몽타주의 원리가 일깨워주는 영화의 본질적 속성과 구조, 영화의 메커니즘입니다.
지난 시간부터 이번 시간까지 데쿠파주와 몽타주를 중심으로 영화의 편집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관련 내용을 더 알고 싶으신 분은 데이비드 보드웰, 크리스틴 톰슨의 『영화예술』(지필미디어) 6장,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케이북스) 4장, 캐런 펄먼의 『커팅 리듬, 영화 편집의 비밀』(커뮤니케이션북스) 9장 그리고 벵상 피넬의 『몽타주』(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를 보십시오.
이로써 <우리 곁의 영화>는 제작과정과 내러티브에 이어 영화의 실제적 구성요소인 쇼트와 편집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영화가 작동하는 방식, 영화의 내적 구조 및 원리를 이해하는데 작게나마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우리 곁의 영화> 마치겠습니다. □
▲<실비아의 도시에서>(2007, 호세 루이스 게린)
* 우리 곁의 영화는 아래와 같이 진행되었으며, 강의를 옮긴 글임을 밝혀둡니다.
개요
1. 알아도 써먹지 못하는 - 제작과정
2. 무엇이 우리를 영화 앞에 붙들어 놓는가 - 내러티브 장치
3. 신비로움을 구축하는 전략 - 영상과 소리
4. 영화의 최종 병기 - 편집
* 우리 곁의 영화 목록 보기
http://actmediact.tistory.com/category/%EC%9A%B0%EB%A6%AC%20%EA%B3%81%EC%9D%98%20%EC%98%81%ED%9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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