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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학습소설] 10화. 꺼먼 안경 고이 쓰고 나빌레라 -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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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cteditor 2016. 10. 6.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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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CT! 학습소설 2016.10.14]


10화. 꺼먼 안경 고이 쓰고 나빌레라 -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주일 (창작자)



충효고시원(忠孝高示阮)


 지리산 이름 모를 깊은 계곡 아래, 왕에게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기 위해 높은 곳을 바라본다는 의미의 서원인 충효고시원(忠孝高示阮)이 안개 속에 어렴풋이 드러나 있다. 이곳에 합숙하고 있는 서생들은 주로 관직에 뜻을 품고 있는 양반집 자제들로서 어릴 적에 천자문을 뗀 이후부터 줄곧 이곳에 들어와 글공부를 하고 있었다. 일찍부터 평범한 일상생활을 등지고 책과 붓만 손에 잡고 살아왔지만, 대부분 한 번 이상 낙방의 고배를 맛보았고 적지 않은 수는 산 아래 사는 또래들과는 다르게 상투도 틀지 못한 채 장수생의 길을 가고 있었다. 이들이 산을 내려가는 건 딱 두 가지 경우뿐이었다. 집안 어르신이 돌아가실 때, 그리고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올라 갈 때. 


 아침 수업 시간을 알리는 종이 계곡 곳곳에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서생들이 옷매무새를 만지며 공부방으로 들어섰지만 수업은 시작되지 않았다. 서생들은 영문을 몰라 서로를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누가 장주를 불러오거라.”


 스승이 시선으로 가리킨 곳에서는 한 사내가 햇살이 내리쬐고 있는 바위 위에 대(大)자로 누워 있었다. 그것을 본 서생 하나가 재빨리 달려가 그를 깨웠다. 몸을 일으킨 장주는 한참을 그대로 서 있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손으로 몸 곳곳을 더듬으며 무언가 잃어버린 사람처럼 허둥거렸다. 


 “쯧쯧쯧. 하여간. 그렇게 잠을 좋아하니 주 너는 과거에 급제하기는 글렀구나. 이래서야 앞으로 석 달 동안 남은 진도를 나갈 수 있겠느냐.”


 장주는 스승의 책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서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다른 서생들은 스승의 말에 답하지 않은 장주가 무례하다고 느꼈지만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밖 나무에 앉은 새 한마리가 적막을 깨려는 듯 열심히 지저귀었다. 이윽고,


 “스승님, 제가 꿈을 꾸었습니다. 평소와 달리 너무도 생생하여 도중에 끊고 기침(起寢)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 엉뚱한 소리를 하는구나. 오늘도 공부할 마음이 들지 않느냐.”

 “그런 게 아닙니다. 오늘은 정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기이한 체험을 했습니다.”


 장주는 책꽂이로 다가가 손가락에 눈이 달린 듯 열심히 책을 골랐다. 한 권을 뽑아 스승이 앉아 있는 책상 앞으로 가져가 펼친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오늘 드디어 제가 장자가 말씀하셨던 만물제동(萬物齊同),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깨달았습니다.” 


 스승은 장주의 호들갑이 익숙한 일이라는 듯 표정을 찡그렸다. 


 “장자는 시험에 안 나온다 하지 않았느냐. 사물 구분이 무의미하고 사회 제도와 규범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상을 품는 자를 누가 관리로 등용해준단 말이더냐. 이제 그만 꿈에서 깨어나 학업에 전념하거라.”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일상과 무관한 이런 고리타분한 이야기, 훈고학 같은 백성들의 삶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글공부는 할 필요가 없습니다. 먼 훗날에는 이런 공부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젠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전념해야 합니다.”


 스승은 책을 덮었다. 날씨가 더워서인지 장주의 말대꾸에 성이 나서인지 옆에 두었던 부채를 들어 천천히 움직였다.


 “좋다. 어차피 네가 수업 분위기를 어질렀고 다들 더워서 공부하기도 싫어할 것 같은데, 네가 꾼 꿈 이야기나 들어보자꾸나.”

 “그래도 되겠습니까, 스승님?”


 장주는 스승 옆에 양반다리를 하고 털썩 앉아서는 시선의 반쯤은 스승을 향해 나머지 반은 동료들을 향한 채 밤새 돌아다닌 알 수 없는 세상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가상현실 국제박람회(假想現實 國際博覽會)


 시대는 모르겠지만 먼 미래 같았습니다. 전 ‘고양 킨텍스’라고 쓰여진 아주 커다란 시장을 걷고 있었습니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아마도 한양에 있는 시장을 모두 모아도 그곳의 절반을 채우지 못할 겁니다. 사람들의 차림새는 이곳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갓을 쓴 사람은 없었고, 아무도 상투를 틀지 않았으며, 의복은 도포자락 같은 거추장스러운 부분이 없이 몸에 착 달라붙는 형태를 띄었습니다. 야외가 아닌 실내였지만 대낮처럼 밝았습니다. 호롱불이나 등잔불은 없었지만 천장에 붙은 길다란 창문모양의 등에서 굉장히 밝은 빛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처음에 저는 당황스러워 가만히 걷기만 했습니다. 대부분 조선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단 한 마디도 알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브이알 체험하고 기념품 받아가세요.’, ‘포디 극장에서 롤러코스터 타고 가세요.’, ‘잠시 후 한 시부터 360도 카메라 영상 편집 시연회가 있습니다.’


 청나라 북경 시장에 가면 그런 분위기일까요. 사람들이 하는 말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겠지만 새로운 문물을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습니다. 사람들은 까만 투구 같은 걸 뒤집어쓰고 있고, ‘부스’라는 칸막이마다 작은 창을 하나씩 걸어두고 있는데, 창 너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인사를 했고, 하늘을 날았고, 물속을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신기해서 얇은 창틀 뒤로 돌아가 보면 아무 것도 없었죠. 정말 놀라웠습니다. 혹시 내가 죽어서 저승을 헤매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걷다가 익숙한 풍경을 목격하고는 그쪽으로 걸어갔습니다. 궁궐 그림이 잔뜩 걸려 있고 ’한양 도성, 경복궁 체험 : 문화체육관광부 지원사업’이라고 쓰여 있던 그곳은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저도 방명록에 먹물이 필요 없는 작은 붓으로 이름을 쓰고는 순서를 기다렸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차례가 되자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제게 투구를 씌워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앞이 깜깜하기만 해서 날 놀리려는 건가 시골에서 공부만 하던 촌놈이라고 도적질을 하려는 건가 의심스러웠지만, 곧 눈앞에 그림이 떠오르기 시작하면서부터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저는 마치 새가 된 듯 하늘에서 날아다니다가 한양 도성이 보이자 땅으로 내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숭례문이라고 쓰여 있는 문으로 들어가자 한양 시내 전경이 보였습니다. 요란하게 짖는 개들, 지게에 잔뜩 장작을 싣고 걷는 장정들,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걸어가는 아낙네들, 가마를 타고 어딘가로 바삐 달리고 있는 고관대작, 조금 더 들어가자 지나는 사람들을 검문하는 포졸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임금님이 계신 궁궐 방향이었던 것 같습니다. 전 가만히 있었지만 투구 속 그림은 계속 바뀌었습니다. 성내 곳곳을 가마에 탄 듯 바람이 된 듯 유유히 구경을 했는데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사전에 정해진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는데 혜화문이 종착지였습니다. 10리는 될 것 같은 길을 금세 달려오자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도 지치더군요. 투구를 벗고 일어서서 안내에 따라 다음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이번에는 경복궁 체험을 했습니다. 아까와 마찬가지로 그림이 나오는 투구를 쓰긴 했지만 조금 전과는 다르게 손에는 장갑을 끼고 어떤 발판 위에 올라섰습니다. 투구에서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가고 싶은 방향으로 걸어보세요. 자세히 보고 싶으시면 장갑으로 터치하세요.’ 그래서 저는 광화문 문을 열고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근정전, 수정전, 사정전, 경회루…. 그렇게 들어가고 싶던 궁궐이었는데 시험을 보지 않고도 들어갈 수 있다니. 또 임진년 전란 이후 불타서 모두 망가졌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직접 그 안을 걸어 보니 기분이 묘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감격스러웠죠. 게다가 저는 장갑만 끼고 있을 뿐인데 화면 속 손을 움직여 문고리를 잡고 미는 시늉만 하면 문이 열리고 창이 열렸습니다. 제가 발판 위에서 빠르게 걸으면 빨리 움직였고, 고개를 돌리면 주변 풍경도 볼 수 있었습니다. 실로 궁궐을 돌아다니는 듯 했습니다. 그러다가 산책 중이신 임금님을 알현했습니다. 투구의 목소리가 조선 4대 임금 ‘세종’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용안을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엎드려 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투구 밖에선 누군가 웃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고개를 들라’는 임금님의 목소리가 들려 고개를 들었습니다. 그러자 그곳에는 인자한 표정을 지은 임금님께서 저를 보고 웃고 계셨습니다. 너무도 황송하여 그 이후부터 무엇을 듣고 보았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궁궐 여행을 마치고 투구를 벗은 뒤 주변 사람들이 웃고 있는 것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촌놈 티는 많이 낸 듯 합니다. 




놀이(遊戱), 뉴스(朝報), 교육(敎育), 의료(醫療)


 여러 시전(市廛)을 두루 다녔는데 그중 기억나는 몇 가지만 더 말해보겠습니다.

 ‘포디’라고 부르는 요상한 마차에 올라탔습니다. 투구를 쓰자마자 마차가 저를 어딘가로 데려갔습니다. 아니, 마차는 제 자리에 서 있었으니 실제로 어딜 간 건 아니지만 마차에 타고 있던 저로서는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끄는 말도 없는 마차는 평지를 달리다가 높다란 다리를 올라가기도 하고 절벽 밑으로 곤두박질치기도 합니다. 등불을 향해 맴도는 나방처럼 나선을 그리며 달리기도 하고 물 속으로 불 속으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마차가 움직일 때마다 전 움찔거리며 앞에 있는 손잡이를 잡아봤지만 앉아 있는 마차도 투구 속 그림이 움직이는 대로 요동을 쳐서 전혀 안정감을 주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어디선가 바람도 불어오고 요란한 소리도 들려와서 현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킨텍스 시전 곳곳에 붙어있던 ‘가상현실’이란 말이 그런 의미였나 봅니다. 체험하지 않고도 현실처럼 체험할 수 있는 장치들. 그건 이 세상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스승님도 조보(朝報)를 본 적이 있으신 줄 압니다. 한양의 소식을 담은 책자인 조보 덕분에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그리 오래 지나지 않고도 궁궐과 나랏일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죠. 제가 가보았던 그곳에선 조보처럼 소식을 전하는 책자나 그림을 ‘뉴스’라고 불렀습니다. 어떤 시전에 앉아 투구를 쓰니 다른 나라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홍콩이라는 청나라 항구도시 사람들의 시위 모습을 보기도 했고, 한 번도 본 적 없는 피부가 새카만 종족 사람들이 모여 빈곤하게 살고 있는 피난민촌의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마치 제가 그곳에 가서 사람들 사이를 거니는 것처럼 이국(異國)의 사건·사고 현장을 돌아다닐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전에 경복궁을 다닌 것처럼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다니진 못했지만 책자나 그림으로만 소식을 접하던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실감나는 체험이 될 것만 같았습니다. 한편으로는 몹시 궁금했습니다. 우리가 늘상 보아오던 수묵화 그림과는 다르게 실감나는 그림은 어떻게 그리는 것인지, 정지된 그림이 아니라 움직이는 그림은 어떻게 담아내는 것인지. 특히 투구를 쓰고 사방팔방을 둘러보려면 동시에 모든 방향의 그림을 담아야 할 텐데 그건 어떤 장비를 이용하는 것인지. 그래서 시전 상인에게 물어보자 ‘삼백육십도 카메라’라는 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삼백육십도가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변 모든 풍경을 한 번에 촬영할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들이 어찌 그리 진보된 문물을 이용하게 되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인파에 떠밀려 다음 시전으로 이동해야 했습니다.


 다음에는 요상하게 생긴 서당으로 갔습니다. 아마도 의원(醫員)을 양성하는 전의감(典醫監)인 듯 했습니다. 그곳에는 서책은 없었고 사람의 팔을 닮은 막대기와 가상현실용 투구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습니다. 저도 가서 의자에 앉아보았습니다. 투구를 쓰니 환자의 몸이 보였고 그 위로 환자의 병명과 수술방법이 떠올랐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기계 팔을 움직여 수술을 해보라고 하더군요. 전 글공부만 한 터라 인체에 대해서는 조금도 아는 게 없었지만 신기하게도 투구 속 목소리가 일러주는 대로 손을 움직이자 환자의 몸을 개복하고 수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조선에서도 사람 몸을 칼로 짼 뒤 치료를 했다는 소식을 듣긴 했으나 제가 다녀온 그곳에선 살짝 째는 정도가 아니라 배를 열어 내장을 뒤적이며 치료를 하더군요. 비위가 상해서 오랫동안 체험하진 못했지만 의원을 꿈꾸는 서생이라면 매우 유용할 것 같았습니다. 실제로 사람 몸을 열어 공부를 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요. 갑자기 ‘나의 몸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훼손하지 않고 다치지 않는 것이 효도의 시작(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이라는 공자님이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후에도 몇몇 시전을 두루 다녔습니다. 말없는 마차를 모는 마부 자격증을 위한 가상체험 기계나 새처럼 날아다니는 날틀 조종사 체험 기계도 있었고, 절벽 같은 높은 곳이나 뒤주처럼 좁은 공간을 못 견디는 공포증 환자들을 위한 치료 기계도 있었고, 투구를 쓰고 조총을 쏘며 가상의 적과 전투를 벌이는 놀이 기계도 있었습니다. 제일 인상 깊던 것은 하늘, 높은 산, 바닷 속, 하늘 너머 까만 천구(天球)를 여행하는 체험장이었습니다. 매번 투구를 쓰고 무언가를 체험할 때마다 진짜 눈앞에 풍경이 펼쳐지는 것 같았고 가보지 않고도 보고 듣고 만지고 맡을 수 있다는 것이 너무도 놀라웠습니다. 만약 이런 장비가 널리 보급되고 누구나 이런 문화에 익숙해진다면 비용이나 시간적 제약 때문에 직접 여행을 가거나 신문물을 경험하기 힘든 많은 백성들이 좀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거고, 결국엔 조선이 부강하고 융성한 나라로 변모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만 가지고 돌아오면 얼마나 좋았을까….






현실(現實)과 가상현실(假想現實)


 꽤 오랜 시간이 지난 듯 햇빛이 그린 그림자는 아까와는 다른 사람 위로 드리워지고 있었다. 공부방은 조용했다. 긴 이야기가 끝났지만 아무도 말을 하지 않고 저마다 천장이나 창밖을 내보며 머릿 속으로 장주의 설명을 재현해보려 했다. 스승도 상상력을 발휘해 보지만 도무지 뚜렷한 심상을 찾을 수 없었다는 듯 수염을 쓰다듬으며 눈만 껌뻑였다.


 “꿈 한 번 기묘하구나. 그간 네가 꾼 꿈 중 가장 희한하고 믿기 어렵도다.”

  

 장주는 스승의 책상 옆에 있는 물병에서 물을 따라 한 잔 들이켰다.


 “이제 앉아서 공부를 하자꾸나. 다들 책을 펴거라.”

 “스승님! 질문이 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도 더 할 얘기가 남았느냐.”

  

 반쯤만 스승을 보고 있던 장주는 온전히 스승을 향해 몸을 돌렸다.

  

 “현실이란 게 무엇입니까.”

 “지금 우리가 존재하는 상황이나 상태지.”

 “지나간 과거나 오지 않은 미래, 혹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허구는 현실이 아닌 것이겠죠?”

 “그렇지.”

 “전 꿈을 꾸며 그곳이 현실이라고 느꼈습니다. 꿈속에 있는 동안은 진짜 일어나고 있는 일이고,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 제가 직접 겪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꿈 속 경험도 그랬고, 꿈속에서 투구를 쓰고 겪은 체험들도 그랬습니다. 당시엔 그 모두가 제겐 현실이었습니다.”

 “그렇겠지. 꿈속을 거니는 사람은 본디 자기가 꿈을 꾸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는 법이니까.”

 “스승님께서는 제가 말한 꿈 이야기가 진짜라고 느끼셨습니까? 동기 자네들은?”

  

 장주가 돌아보자 서생들은 한심한 소리를 한다는 듯 웃음 섞인 조롱을 했다.


 “이야기는 재미있었지만 그런 황당한 이야기를 믿을 사람이 어디 있나.”

 “형님 말솜씨가 워낙 좋아야 말이죠. 그런데 그래도 이번 이야기는 너무 하셨소. 어떤 그림인지 도무지 상상이 안 됐답니다. 사람이 새처럼 날아다니다니. 하하하!”


 한바탕 웃음이 공부방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 평소에 호랑이를 잡은 꿈이나 산적들과 십칠 대 일로 싸운 이야기는 잘 믿지 않았나?”

 “그건 우리도 어느 정도 겪어 본 일들이고, 상상만 하면 얼추 비슷한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 실감이 나서지요.”

 “그럼 내가 진짜를 말하든 가짜를 말하든 현실적인 이야기라면 실재한다고 믿는다는 말이겠네?”

  

 동료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장주는 스승 쪽으로 몸을 숙이며 진지한 말투로 말을 했다.


 “스승님, 저는 오늘에야 비로소 장자가 말씀하신 호접지몽의 교훈을 깨달았습니다. 꿈이 실감나기만 하다면, 가상으로 만들어진 현실이라도 현실과 구분이 안 될 정도로 정교하게 설명되고 묘사된다면 그건 곧 현실이라고. 그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어차피 내가 직접 겪고 느낀 현실 속 경험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이 희미해지고 꿈같이 느껴진다면 현실보다 더 실감나는 가상현실이 존재한다면 그조차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나. 결국 현실과 꿈, 현실과 가상현실의 구분을 이야기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간만에 영특한 모습을 보이는 제자에게 스승은 이날 처음으로 진지한 대꾸를 해주었다.


 “네 말대로 구분이 무의미할 정도로 현실을 충실하게 구현해줄 수만 있다면 그렇겠지. 하지만 한 번 저 창밖을 내다 보거라.”


 장주와 서생들은 모두 스승의 손길을 따라 공부방 한쪽 벽에 나 있는 세로로 긴 창문을 바라보았다.


 “저 창을 보면 꼭 길다란 족자를 보는 것 같지 않느냐. 아무리 천하제일의 그림쟁이가 자연을 흉내 낸 그림을 정교하게 그리고 담벼락만한 족자를 걸어 놓더라도 사시사철 생동감 넘치는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이 창밖 자연만큼 실감날 수 있을까.”


 장주를 제외한 서생들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우리 스승님이야. 하지만 장주는 굳은 표정으로 반론을 펼쳤다.


 “하지만 한 번도 현실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어떨지요. 여기에 있는 우리야 평생 두 눈에 현실 속 자연을 가득 담아왔고 그림이란 그릇이 현실을 담기엔 너무 조악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갓 태어난 아기나 동굴 속에서 평생 살아오느라 한 번도 바깥 세상을 구경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누군가 그럴듯한 그림을 내밀며 이게 현실이다 라고 하면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또 제가 꿈속에서 경험했던 다른 세계의 놀라운 그림 수준이라면 어떨까요. 예컨대 그림의 세밀한 묘사 정도는 앞으로 얼마든지 발전할 수 있을 것이고, 사람마다 각자가 사전에 겪은 현실의 체험 정도가 다르다면, 가상의 현실이라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겁니다. 신라시대 화가인 솔거가 황룡사에 그린 노송도(老松圖)가 너무 실감나서 새들이 날아와 앉으려 했다는 일화는 단지 솔거가 그림을 잘 그렸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이상 현실만이 현실이라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일깨우는 이야기라고 봅니다.”


 스승은 한참을 생각했다. 공부방에 앉아 있던 모든 사람들이 깊은 생각에 빠졌다. 평소 접하기 힘든 화두여서 그런지 열심히 사고실험을 하고 있었다.


 “생각을 해보니 네 말도 일리가 있구나. 어쩌면 우리가 현실이라 믿고 있던 세상 모든 만물은 그저 우리의 오감으로 겪은 지극히 작은 부분이거나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에 의해 왜곡되어 형성된 허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과거 시험에 나오진 않아도 올바른 생각을 하는 선비가 되려면 한 번쯤 고민해볼 화두라 생각한다.” 


 평소에 보기 힘든 스승의 겸손함에 감동하며 다들 그의 말을 열심히 공책에 받아 적었다.


 “그런데 주야.”


 진도를 나가기 위해 책을 펴던 스승은 갑자기 동작을 멈추고는 장주에게 물었다.


 “현실과 가상현실이 무의미하다면, 서로 혼재되어 버린다면 인간의 삶에 부작용은 없겠느냐. 가령 네가 꿈에서 다녀온 그 세상의 기술이라면, 누군가 밥만 먹여준다면 서당도 가지 않고 한량처럼 가상현실 속 유랑만 하고 살아도 괜찮을 것이고, 가상현실을 현실로 착각해서 무언가 실수를 저지를 것도 같은데.”


 장주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기억을 소환하는 것 같았다. 스승과 동료들은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시장에서 나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에 앉아 거대한 그림 족자를 보았습니다. 뉴스를 전해주는 족자였습니다. 거기서 본 소식 하나가 떠오릅니다. 미국이란 나라가 멀리 떨어진 이슬람 국가라고 불리는 나라와 전쟁을 했습니다. 신기한 건 전쟁을 치루면서도 미국은 병사를 한 명도 보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서생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친구가 소리쳤다.


 “아니, 형님! 어떻게 병사 하나 없이 전쟁을 치른단 말이오.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그만 하고 진도나 나갑시다.”

 “내 말 좀 들어보게나. 미국이란 나라는 새를 닮은 날틀을 날려서 수천 리 떨어진 적국을 공격한다네. 날틀이 국경을 넘어 적군이 모인 곳에 도착하면 하늘에서 화포를 쏘거나 화약을 투하하는데, 그럼 지상에 있던 적국 병사들은 누가 자기를 공격하는지도 모른 채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지.”

 “지금 조선군이 보유한 천자총통이나 신기전도 고작 일 이 리 날아간다는데 어떻게 공격할 화약을 실은 날틀이 수천 리를 날아갈 수가 있단 말이오? 게다가 연줄 당기듯 조종을 한다고? 거 꿈도 참 거하게 꾸셨소.”


 다시 한 번 공부방은 폭소가 터지며 아수라장이 됐다. 하지만 장주는 굴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뉴스 내용 중 이런 이야기나 나왔습니다. 미국에 앉아 날틀을 조종하던 조종사들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고.”

 “멀리 떨어져 있으니 공격을 받은 것도 아닐진대 조종사들이 왜 병에 걸린 것인가.”

 “그들은 제가 투구를 쓰고 하늘을 나는 체험을 하듯 얌전히 방에 앉아서 날틀을 조종합니다. 비행 중 목표물을 발견하면 적군을 공격하는데 현실과 그림 속 세상이 일치되지 않아서 많이 힘들어 한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전투 중에 상대를 살상할 때는 상대의 눈을 보고 비명을 듣고 피냄새를 맡기 때문에 상대가 느끼는 고통을 온전히 느끼는 반면, ‘드론’이란 이름의 날틀을 조종하는 병사들은 자기는 그저 책상 앞에 앉아 손가락만 움직였을 뿐인데 수십 수백 명이 죽는다는 사실에서 괴리감을 느낍니다. 현실 감각이 없는 것이지요. 그것은 단순히 죄책감이 아니고 현실과 가상현실이 일치되지 않아 벌어지는 정신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곳의 사람들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 부르더군요. 감수성이 무딘 병사들이야 족자 속 적군을 사람으로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잔인하게 학살을 하고도 멀쩡할 수 있겠지만, 평범하고 정상적인 병사들이라면 자기가 저지른 일의 무게감을 느끼겠지요. 만약 이 병이 치료되지 않는다면 이런 일도 벌어질 거라 생각합니다. 현실과 가상현실이 구분되지 않아 현실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살상을 하거나, 고작 손가락만 움직이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죽이는 자신을 책망하며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 하거나. 양쪽 모두 가상현실이 초래한 문제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앞의 사례는 현실과 가상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져서 발생하는 문제고, 뒤의 사례는 가상현실이 현실을 잠식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겠죠.”

  

 스승은 고개를 끄덕였다. 


 “현실과 꿈, 현실과 가상현실을 혼동하면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겠구나. 조선에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길 바라자꾸나.”


 스승은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장주에게 마지막으로 말을 건넸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투구만 써도 전세계를 날아다니고 임금도 하기 힘든 경험들을 하며 살 수 있다면 굳이 사람들을 만날 필요가 있을까, 혼자 집에 앉아 공부든 유희든 즐기며 외톨이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 너처럼 말이다. 꿈 좀 그만 꾸거라 이놈아. 자자, 다들 책을 펴거라.”

 “네.”


 충효고시원의 서생들은 평소처럼 학업에 매진하기 시작했고, 태양은 하늘 높이 떠올랐다.


‘어차피 현실에서도 보이는 것만 바라본다면 가상현실이 현실이 되지 못하는 이유가 있을까?’



가상현실 촬영(Virtual Cinematography)


 “조민돌 감독님, 체험해보니까 어떠세요?”

  

 민돌은 고글을 벗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생각보다 놀라운데요. 단순히 조선시대 학당에 들어가 수업을 체험하는 수준이 아니라 제가 하는 행동과 말에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인공지능이라니. 기존의 가상현실과는 차원이 달라 보입니다. 대성공하겠는데요.”

 개발팀 직원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팀장이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지금은 법적인 문제 때문에 실제 인물에 대한 설정값이 반영되지 않았는데 법무팀의 검토만 끝나면 본격적으로 위인들의 데이터를 주입할 예정입니다. 후손들의 얼굴을 스캔하고 초상화를 참고해 생김새를 만들고 각종 문헌에서 발언과 사고를 추출한 뒤 인공지능의 힘을 빌려 가상현실 속 인물들에게 입히면, 바로 과거로의 여행이 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의 획일적이고 단순 체험 위주의 시간여행이 아니라 직접 그 세계에 가서 사는 것처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 가상공간에서 촬영 중인 <호빗: 스마우그의 폐허> 제작진 (출처: 웨타디지털)


민돌은 옆에 놓인 3D카메라를 만지작거렸다. 팀장의 설명보다는 그쪽에 관심이 더 많은 듯 했다.

 “그럼 이 카메라를 들고 가상현실 속 공간을 찍으면 바로 영상을 만들 수 있는 거죠?”

 “그렇습니다. 이미 <호빗>이나 <아바타> 같은 3D영화가 그렇게 제작됐죠. 이미 모든 환경을 고해상도로 모델링 해놨으니 그 안에 들어가 카메라만 갖다 대면 현실을 찍듯 모든 것을 기록할 수 있는 거죠. 풍경, 사물, 인물, 움직임까지 실시간으로 렌더링되니 외부에서 보는 사람들은 일반 영화를 보는 듯 편하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기존의 영화는 이미 촬영이 끝난 하나의 결과물만 감상할 수밖에 없었는데 저희 서비스를 이용하면 관객의 취사선택에 따라 무한한 선택지를 갖고 자기만의 영화를 감상할 수 있게 되겠죠. 20세기말에 잠깐 붐이 일었다가 사그라든 인터랙티브 무비의 완성형이라고 할까요.”

 “그것도 단순히 둘러보는 수준이 아니라 자기가 직접 역사 속 인물과 대화하고 함께 생활하는 식으로요.”

 “그렇죠. 조감독님이 체험하신 것처럼요. 단순 체험을 넘어 시간여행 스타일의 사극도 찍을 수 있고, 자료만 충분하다면 전세계 모든 장소의 모든 인물들이 출연하는 영화를 찍을 수도 있습니다.”


 조민돌 감독은 유난히 들떠보였다.


 “꼭 제가 이 기술의 첫 번째 수혜자가 되고 싶네요. 역사 속 인물들과 대담을 하는 영상, 더 나아가 <미드나잇 인 파리>처럼 지적으로도 포만감이 느껴지는 영화를 만들고 싶거든요.”

 “그렇게만 된다면 저희도 영광이죠. 저희 기술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알고 싶거든요. 다들 기술에만 집착해서 시덥지도 않은 것만 만들자고 하는데 질렸습니다. 그런데 오늘 저희에게 알려주실 아이디어가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포켓몬고 이후로 우후죽순 쏟아지고 있는 AR기반 서비스들을 보며 생각한 건데요, 개발만 된다면 대박을 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오. 기대됩니다. 어떤 내용인가요.”

 “임시로 지은 이름은, 조상몬Go입니다.”



궁극의 증강현실 앱, 조상몬Go


 얼핏 보기엔 각종 몬스터를 잡으러 다니는 포켓몬Go의 유사품처럼 느껴지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조상몬Go는 조금 다릅니다. 포켓몬Go가 위치기반기술을 응용한 증강현실 게임이라고는 하지만 현실과 아무 상관이 없는 유희만을 위한 서비스라면, 조상몬Go는 단순하게는 게임이면서, 각 성씨별 조상들을 알아가고 우리나라의 역사를 탐구하는 교육 서비스이고, 궁극적으로는 우리 일상의 모든 것이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는 인문학적 상상력도 길러주는 궁극의 통섭 어플리케이션이 될 것입니다. 다들 눈을 감고 상상해봅시다. 앱을 실행하겠습니다. 필요한 기기는 스마트폰이 될 수도 있고, 구글 글래스나 마이크로소프트 홀로렌즈가 될 수도 있습니다. 현실과 그래픽 정보를 위치에 따라 중첩해서 제시해줄 수 있으면 그 어떤 기계도 상관없습니다.


 한 번 서울 남산 한옥마을로 가보겠습니다. 그곳에는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 해풍부원군 윤택영댁 재실, 오위장 김춘영 가옥, 도편수 이승업 가옥, 관훈동 민씨 가옥 등이 들어서 있습니다. 물론 모두 원래 그 집들이 있던 곳은 아니라 형태만 복원해놓은 허울뿐인 집들이지만 설명을 돕기 위해 예로 들었습니다. 어떤 집에 가면 그 집에 살던 조상들의 홀로그램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획득해야 할 일종의 게임 아이템이죠. 하지만 잡는 방법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조상 캐릭터가 내는 문제, 예를 들어 ‘순정효황후 윤씨는 어떤 왕의 부인인가’ 같은 간단한 문제부터 혜평 윤씨의 족보를 뒤지듯 찾아낸 많은 사람들과 관련된 문제를 내는 것이지요. 윤보선 대통령도 혜평 윤씨라고 하니 대한민국 현대사와도 연관을 지을 수 있겠네요. ‘누가 윤보선을 대통령직에서 끌어내렸는가’처럼 말이죠. 답을 맞히면 해당 캐릭터를 차지하게 됩니다. 아이템이니 당연히 많이 가질수록 좋겠죠. 갖고 있다가 다른 캐릭터를 갖고 있는 누군가를 만나면 싸워야 합니다. 물론 이때도 퀴즈를 통해 대결을 해야겠죠. 네? 포켓몬Go와 유사하다고요? 인정합니다. 처음 발상은 거기서부터 시작했거든요. 하지만 곧 달라집니다. 기다리세요.


 위치기반 가상현실 기술 중 지리정보 앱이나 부동산 앱이 유용하더라고요. 스마트폰을 들고 실제 위치에서 카메라를 갖다대면 그곳에 있는 집값 같은 정보가 뜨는 거죠. 실제 영상과 정보가 중첩되니 그곳에 가서 매물 사진 보고 정보 찾는 수고가 줄어들겠죠. 이 기술을 이용하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곳을 중첩해서 볼 수 있습니다. 호남평야에 가서 카메라를 비추면 거대한 논을 소유했던 조선 시대 대지주의 정보가 뜰 것이고, 우금치에 가서 카메라를 대면 동학농민운동의 전투장면이 홀로그램으로 뜨는 것이죠. 열악한 무기를 들고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지만 처참히 무너지는 모습을 현장에 가서 증강현실로 본다면 더욱 비참하지 않을까요? 전라도 해남에 가서 배를 타고 울돌목을 지나면서는 AR고글을 통해 명량해전의 한가운데로 들어가 볼 수도 있겠네요. 단순한 체험부터 조상몬을 수집하기 위한 정보 수집,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삶을 영위하고 있는 모든 곳이 과거와 연결된 역사의 현장이란 사실을 일상에서 체감하게 도와준다면 기술을 위한 기술이 아닌 ‘인원, 기구, 힘 등을 더 늘려서 강하게  한다’는 증강의 뜻 그대로 우리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줄 거라고 확신합니다. 아는 것이 힘이니까요.


 전세계로 범위를 넓혀보겠습니다. 시장에 가서 생선을 삽니다. 이름 모를 생선을 카메라로 찍으면 인공지능이 판독한 후 어떤 물고기인지 이름을 알려줍니다.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생산이력추적시스템 때문에 의무적으로 부착한 QR코드를 찍으면 그 물고기가 어떤 경로를 통해 이곳에 왔는지 알게 됩니다. 내가 먹고 입고 누리는 것들이 어디서 유래하는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면서 세상을 보는 시야가 확장되는 것이죠. 만약 누군가 샥스핀을 쇼핑중이면 조상몬Go 앱에서는 지느러미가 잘린 채 심해로 가라앉는 불쌍한 상어의 영상을 보여줄 겁니다. 아, 그런 걸 드시는 분들은 굳이 조상몬Go 앱을 통해 공부하려고 하지 않을 수도 있겠네요. 굳이 불편한 진실을 알기 싫은 분들은 설정에서 필터링 기능을 켜라고 하죠 뭐.


 조상몬Go의 한계는 없습니다. 활용하기에 달렸지만 제가 말씀드린 대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켜주고, 모든 사물·인물·공간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항시 보여준다면 단편적인 정보만 갖고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에게 폭넓은 시야와 선택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하이퍼 리얼리티(Hyper-Reality) 사회의 도래


 “조상몬Go, 어떤가요.”

 

 민돌의 열정적인 이야기가 끝나자 연구실 직원들은 일시에 긴장을 풀었다. 다들 표현은 자제했지만 놀라움과 황당함이 뒤섞인 묘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그중 한 직원이 손을 들고 말했다.


 “조상에게 몬, 그러니까 몬스터란 단어를 붙이는 건 좀 그렇지 않나요?“


 민돌은 무슨 말인지 안다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잠깐 짓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조상몬Go의 몬은 몬스터의 줄임말이 아닙니다. 몬의 우리말 뜻은 ‘남거나 빠진 것이 없이 모두’,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것’입니다. 일본어로는 출입하는 ‘문(門)’, 영어로는 ‘애도하다(mourn)’ 베트남어로는 ‘교과(môn)’, ‘항목(món)’ 등이 있습니다. 이밖에도 전세계 말을 뒤져보면 몬에 갖다 붙일 수 있는 좋은 의미는 수두룩할 테니 꼭 몬스터라는 생각은 떨쳐도 되지 않을까요?”

  

 의기양양한 민돌의 표정과는 다르게 다들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분위기를 감지한 듯 팀장이 앞으로 나가 민돌에게 악수를 청했다.


 “좋은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끼리 좀 더 회의를 해봐야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도 거대한 아이디어여서요.”


 민돌을 제외한 모두가 수긍하는 눈빛을 공유했다. 곧 연락주겠다는 약속을 듣고 민돌은 밝은 표정으로 연구실을 나갔다. 그와 동시에 모두가 내뱉는 한숨 섞인 감탄사. 하~!


 “리얼리티의 과잉, 현실을 뛰어넘는 현실, 하이퍼 리얼리티!”

 “정보가 많으면 좋은 거라는 전형적인 생각이네.”

 “우리 언제까지 이런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 들어줘야 돼요.”

 “어우, 벌써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맨눈으로 돌아다니며 보는 광고만으로도 피곤해 죽겠는데 거기에 증강현실 정보까지 덧입혀야겠어?”

  

 팀원들의 불평을 들은 팀장이 내뱉으려던 한숨을 들이키며 입을 열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돈이 없거든요. 뭐가 됐든 언론에 그럴싸한 아이템을 던져야 투자 받고 지원을 받아 실제 제품을 출시하는 거 다 아시잖아요. 이런 황당한 이야기라도 다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조금만 더 참아봅시다. 경진씨, 다음 손님은 누구예요?”


 서류를 뒤적이던 한 직원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김주현이라는 사람인데, 아이디어가... 얼굴인식기능을 이용해서 사람들 얼굴만 보면 애인이 있고 없고가 뜨는 AR 데이트앱이라네요. 만나기가 부담스러우면 가상공간에서 데이트를 할 수도 있다고.”


 연구실의 모두가 동시에 탄식을 내뱉었다. 그와 동시에 연구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똑똑똑.



* 함께 보면 좋을 자료

- Job多한 주일의 雜테크 4회 https://youtu.be/3po2XL0sofg

- 박물관이나 전시회 현장에 가지 않아도 둘러볼 수 있는 구글 아트&컬처(뮤지엄).

http://techneedle.com/archives/27537

https://www.youtube.com/watch?v=bp4oa7MHg88

- VR뉴스, 다큐멘터리 사례 

http://abcnews.go.com/US/fullpage/abc-news-vr-virtual-reality-news-stories-33768357 (영문)

http://hongkongunrest.com (영문)

- 의료용 VR(약물 대체 치료, 각종 공포증 치료)

http://techneedle.com/archives/27538?utm_source=dlvr.it&utm_medium=twitter

http://www.techrepublic.com/article/10-ways-virtual-reality-is-revolutionizing-medicine-and-healthcare/ (영문)

- 가상현실 촬영기법1 (영문)

https://www.youtube.com/watch?v=9qKtOD13s0U

http://www.capturelab.com/virtual-cinematography

- 가상현실 촬영기법2 (영문)

https://www.youtube.com/watch?v=O50KGjWC3dQ

http://www.artanim.ch/blog/2014/09/a-step-into-virtual-virtual-cinematography/

- 가상현실 촬영기술 (영문)

http://images.autodesk.com/apac_grtrchina_main/files/the_new_art_of_virtual_moviemaking_-_autodesk_whitepaper1.pdf

- VR과 AR의 차이 : http://www.ditoday.com/articles/articles_view.html?idno=19357

- VR 대표제품 : 오큘러스 리프트, HTC 바이브, 삼성 기어 VR

- AR 대표제품 : 구글 글래스, MS 홀로렌즈

- AR의 남용을 경고한 단편영화 <하이퍼 리얼리티> https://youtu.be/YJg02ivYzSs



[필자소개] 주일 (창작자)


해양학자-프로그래머-경찰-소설가를 거쳐 지금은 창작자라는 꿈을 10년 넘게 포기하지 않고 있다고 전해진다.영화를 비롯한 각종 영상제작을 하고 있으며 가끔 학교안팎에서 젊은 학생과 늙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습이 목격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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